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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개아(個我)
2. 마음(心)
인간의 내면세계(內面世界)에서 마음(心)은 무엇이고 또 생각(念)은 무엇이며 그것들은 어디서 생겨나고 어떤 작용을 하며 어디에 존재하는가? 마음의 학문인 심리학에서도 마음이나 영혼 혹은 의식은 과학적으로 정의되지 않는다고 한다. 마음은 내 안에 있는 내 것이면서도 왠지 자신과도 소통이 되지 않아 가슴이 답답해질 때도 있고, 또 곰곰이 생각할수록 자신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게 마음이다. 그와 같은 마음 그 안에 나의 모든 과거가 담겨있고, 나의 현재가 그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또 나의 미래에 관한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잉태된다.
마음에 관한 유명한 일화로 원효대사(元曉大師,617-686)가 해골 바가지 속의 물에 의해 깨달었다고 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에 대한 일화를 꼽는데, 불교의 경전인 화엄경(華嚴經) 보살설게품(菩薩說偈品)에 다음과 같은 사구(四句)의 게송(偈頌)이 있다.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약인욕료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위의 사구를 해의하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마땅히 법계의 본성(本性)을 관(觀)해서 오직 마음이 온갖 사물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라는 뜻이다. 즉, 마음이 극락을 만들면 그것이 극락인 것이고, 마음이 지옥을 만들면 그것이 지옥이며, 마음이 행복을 만들면 행복이 이루어지고, 마음이 불행을 자초하면 불행이 온다는 것이다.
또 다른 마음에 관한 일화로 중국의 남화사(南華寺)에 등신불(等身佛)로 모셔져
있는 선종(禪宗)의 육조(六祖)인 혜능(慧能)스님(638~713)의‘풍번문답(風幡問答)’이 있다. 어느 절에서 스님들이 바람이 불어 깃발이 펄럭이고 있는 것을 보고는 한 스님이 “바람이 움직인다”고 하자 다른 스님은 “그렇지 않다 깃발이 움직인다”고 하면서 논쟁을 벌리고 있었다. 혜능스님이 지나가다 이를 보고 말했다. 不是風動(불시풍동) 不是幡動(불시번동) 仁者心動(인자심동), 즉
“그것은 바람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인 것도 아니며 바로 그대들 마음이 움직인
것 일세”라고 말했고 한다.
마음(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논의된 것은, 중국의 철학사(哲學史)에서는 송대(宋代) 이후로, 주자(朱子)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입장에서 마음을 성(性: 天理)과 정(情: 人欲)의 둘로 구별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육상산(陸象山)은 이에 반대하여 마음은 이(理: 天理), 즉 우주의 법칙과 같은 것이라는 심즉이설(心卽理說)을 주창하였고 이런 생각은 그의 제자인 양자호(楊慈湖)에 의해 더욱 강조되어 일체의 이(理)는 마음속의 현상이라고 하는 일종의 선천적 유심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불교의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는 마음이 곧 부처이며 마음이 부처가 되는 것(是心是佛 是心作佛)이라 했고, 기독교의 잠언 4장23절에는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음을 생명의 근원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자화론(自化論)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원계(元計)가 체화(體化)한 육체에 내재(內在)한 “조화원(造化元) 그 자체(自體)”라 정의한다.
정신활동으로 지칭되는 좁은 뜻의 마음(Mind)은 어떻게 발심(發心)되는가? 발심은 마음의 본바탕인 심지(心地)에서 생각하고, 그 생각을 기억으로 저장하고, 저장된 기억을 인출하여 재생하는 시스템(system)이라 할 수 있다. ‘마음’과 동의어로 사용되는‘생각’이란 정신이 깨어 있는 각성 상태에서 어떤 정보나 자극이 감각기관을 통하여 뇌에 입력되면 PC의 RAM과 같은 기능을 하는 심지(心地)에서 그것을 인지하고 지(知). 정(情). 의(意)가 움직여 마음이 파동을 일으키고 마음속에 저장되어 있던 동류의 기억들을 Data로 삼아 비교 분석하고 연상과 유추를 거처 판단에 이르고 결론을 내리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렇게 이루어 지는 일련의 작용 및 과정을 “생각(Think)한다 또는 사유(思惟)한다, 사고(思考)한다,” 라고 말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과정을 거처 도출된 결과를 “생각(Thought)”이라 일컫게 되며 그 생각이 의지(意志)로서 사람의 말과 행동, 그리고 육체를 통제하게 된다. 생각의 특징은 우리의 몸 속 어딘가 한곳에 항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 대상이 있을 때 생겨나는 의식(意識)이다. 다시 말해 생각은 대상이 있을 때만 존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살아서 정신작용을 하는 모든 존재는 항상 어떤 인식의 대상을 취하기 때문에 생각 또한 그 대상을 인식하며 끊어짐 없이 발생하게 된다. 그 생각들은 바로 마음속에 기명(記銘)되는데 지난날의 것이면 억념(憶念)으로, 현재의 것이면 사념(思念)으로, 미래에 관한 것이면 상념(想念)으로 기억된다. ‘마음’과 ‘생각’이란 용어는 사용자의 관점이나 경우에 따라서 구분 없이 같은 의미로 혼용(混用)되고 있으며 생각은 주로 관심. 관념. 의지. 판단. 의견. 상상. 기억. 고려. 깨달음. 각오 등의 동적(動的)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고, 마음은 정신. 기분이나 감정. 성격. 사려. 정성. 도량. 인정. 의향. 등의 정적(靜的)인 의미로 흔히 사용된다.
본디 내용에 제약도 없고 범위에 한계도 없는 우주 속에 유일의 무한자유(無限自由)인 인간의 마음은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인간이 태어날 때의 마음은 하얀 화선지(畵宣紙)와 같다. 서예가가 화선지에 기필(起筆), 행필(行筆), 수필(收筆)의 운필(運筆)로 신중하게 정성들여 한 획 한 획 써 내려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듯, 자신의 인생이 하나하나 기억으로 저장되는 곳이 마음이다. 그 마음은 가슴에 존재하는가, 머리에 존재하는가? 동양에서의 마음은 심장에 가깝다. 한국인들은 자기의 마음을 설명할 때 심장이 있는 가슴 쪽을 손바닥으로 가리킨다. 서양인들에게는 마음이 뇌에 가깝다고 한다. 그들이 마음을 설명할 때는 머리를 가리킨다. 영혼의 거처로서 뇌를 주장한 플라톤적 전통보다 심장을 중요시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이 압도적이다. 마음을 뜻하는 한자의 심(心)자는 심장을 상형(象形)하여 만들어진 글자지만, 그러나 심장으로 대표되는 가슴은 마음을 관장하지 않는다. 마음은 생리적으로는 뇌에서 비롯되고 뇌의 해부학적 부위에 따라 그 역할이 다르다. 전두엽에서는 판단력, 집중력,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기능을 담당하고 두정엽에서는 감각, 계산, 공간적인 사고를 담당하고 후두엽에서는 주로 시각을 담당하며 측두엽에서는 청각, 언어, 기억과 감정을 담당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뇌의 각 부분 그리고 육체의 각 부분은 그 고유의 역할이 따로 있지만 “마음”은 어느 한 기관의 독립적 작용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신체 각 기관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마음은 육체의 어느 한 곳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눈을 감고 조용히 심안(心眼)으로 내 마음을 찾아보라. 사람마다 느낌이 다를 수 있겠으나 조화원(造化元)이 무한의 우주에 편만(遍滿)한 것과 같이 내 마음은 내 몸 어느 한곳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몸에 가득하며 무한의 우주와 연결되어 있음이 보일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사건. 사고로 인하여 나쁜 감정이 생기게 되고 그것들이 쌓이게 되므로 순수성에 따라 정심(正心). 평심(平心). 예심(穢心)으로 구분할 수 있고 또 심상의 진위에 따라 진심(眞心)과 사심(邪心)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마음은 조화원 그 자체이므로 본성이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심예에 오염되면 마음의 작용이 왜곡된다. 심지(心地)는 조화원의 본성과 같은 마음의 본바탕을 말하며 정심(正心)은 심지에 쌓인 심예(心穢)를 세심(洗心)하여 거칠 것이 없는 맑고 시원스런 공변된 상태의 마음을 말하고, 평심(平心)은 마음속에 심예가 잠재해 있지만 차분하게 가라앉아 무해무득(無害無得)한 평상시 상태의 마음을 말하며, 예심(穢心)은 심지에 심예가 가득하여 침울하고, 악의(惡意)를 품어 심사가 사나운 상태의 마음을 말한다.
마음은 생각한 것을 실행하게 하는 근본 바탕이며 또한 실행하는 힘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육체에 내재한 조화원이지만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면에서 조화계의 조화원과는 크나큰 차이가 있어 육체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인간이 존재하고 행동하는 원동력은 마음이므로 모든 생각과 언행과 육체의 생리현상 그리고 삶 속에 따르는 운(運)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심력(心力)에 의하여 조종되고 지배된다. 마음에 따라 육체의 기능이 조종되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예로 운동선수들 중 많은 사람이 큰 효과를 보았다고 말하는 이미지 트레이닝(Image training)이 있다. 이미지 트레이닝이란 마음속에서 생각만으로 어떤 운동을 연습하면 실제 육체적으로 운동을 한 것과 같은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하드트레이닝(Hard training)을 하지 않았음에도 근육의 강화효과가 발생하고, 마음속으로 상상하고 그려서 연습한 내용이 실제로 훈련장에서 그와 같은 여러 가지 방법을 연구하여 연습한 것과 유사한 기술적 향상효과가 체득(體得)으로 승화됨으로써 그 기술이 실전에서 발휘되어 경기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는 경험을 증언하는 선수가 흔히 있다.
인간의 마음은 표층의 마음인 의식과 심층의 어렴풋한 의식의 세계인 잠재의식, 그리고 그 외 전혀 의식되지 않은 무의식으로 구분되고 있다. 무의식은 전쟁. 천재지변. 사고. 끔찍한 범죄. 성폭행. 학대 등의 충격적인 현장을 목격하였거나 경험한 후에 발생하는 심적 외상(心的外傷)인 트라우마(Trauma)와 어렸을 적 주변의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에서 다친 감정이 해소되지 않고 한이 되어 무의식화한 핵심감정(核心感情), 그리고 의식에서 아주 강하게 억압하여 추방된 죄의식. 수치스러운 일. 자존심상 용인할 수 없는 욕구. 반사회적 충동. 참을 수 없는 울분 등 무의식에 갇혀 있는 억압된 감정이 그들이다. 이들은 무의식속에 갇혀 있어 전혀 의식되지 않는 것으로 본인도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전혀 알지 못하지만 수시로 정신신경과적 병증을 일으킨다.
인간의 마음은 조화원 그 자체이므로 그 작용은 완전무결할 것으로 기대하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다. 오감(五感)이나 의지에 의한 정상적인 발심과정(發心過程)을 거쳐 발현된 생각이 아니라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불현듯 떠오른 영적인 것이 있다. 또한 정상적인 과정과 작용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간혹 사실과 다른 오류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중 중요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영감(靈感 Inspiration)
예술창작의 구체적 동인(動因)이나 생산되는 예술형상. 발명이나 발견과정. 기타 문제해결이 막혀버린 상태에서 돌연히 해결책이 떠오르는 통찰의 비약적 전개를 말하는 것으로 그것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자신의 체험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고 그 사람에게 있어 가치가 높을수록 영감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이 같은 뛰어난 착상이나 완성된 형상. 해결책 등이 본인에게는 체험적으로 지각되지 않은 심적 과정에 의거해서 생산되기 때문에 예술가나 미학자들에게는 신비적인 해석이나 철학적인 해석이 가능해지고 심리학자는 상상작용이나 환각. 이상심리에 있어서의 도취 등으로부터 유추하는 견해도 있으나 영감적 사실의 설명으로는 불충분하다. 현대의 과학적 방법을 채용한 완벽한 규명은 아직 이루어 지지 않고 있으나 인간의 본성에서 그 연원(淵源)을 찾아야 할 것이다. 사람의 맑고 올바른 마음인 정심(正心)에서 어떤 일에 대하여 집념을 가지고 몰두하는 과정 중 그 간절한 소망에 응답이라도 하듯 홀연히 그 방향이나 해결책이 머리에 떠오르게 되는데 이는 원능(元能)의 감응에 의한 감득(感得)이다. 이루고자 하는 의욕도, 사전준비도, 피나는 노력과 고민도 없는 사람에게 하늘에서 떨어지듯 기상천외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제6감(第六感. Sixth sense)
제6이라는 서수(序數)로 이름한 것은 오감관(五感官)의 시(視). 청(聽). 미(味). 후(嗅). 촉(觸)의 직접적 소여감각(所與感覺)이 아닌 별도의 감각이기 때문이며 인체의 감각기관에 의하여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닌 특수한 인지기능이다. 일반적으로 인지가 외계의 사정을 합리적이고 복합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이치나 경험에 의한 종합판단인 것에 반하여 육감은 판단이나 추리 등의 사유작용에 의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전체적인 상태에서 파악, 즉 감각적으로 포착하는 직관적 방법으로 인지가 행하여 지는데 특징이 있다. 육감이 진실과 합치하는지의 확실성에 관하여는 육감도 결국은 마음작용의 결과이며 평소의 수업. 연구. 경험의 축적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직관자의 직관의 배경이 되는 그 사상(事象)에 관한 경험. 지식. 또는 직관능력에 관한 소질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육감력의 발휘를 기대하고 어떤 사상에 대하여 그것만을 골똘히 생각한다고 해서 육감이 오는 것이 아니고 평온하고 여유 있는 마음상태와 한가로운 장소에서 육감을 불러일으키기가 쉽다는 것이다. 육감을 천래(天來)의 감지력(感知力)으로 믿고 절대적인 신빙성을 부여할 수는 없으나 무시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므로 잠재능력의 부분적 발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착각(錯覺 Illusion)
착각이란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실제와 다르게 지각하거나 생각하는 것을 말하며 지각(知覺)은 외계의 자극만으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자극을 선택 또는 해석하는 내면적 조건에 따라서도 성립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극이 나타나는 경우에 따라서 외적 자극과 지각과는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모든 지각은 외적 자극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지각상(知覺像)은 사실과 다른 것이나 일반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정도가 현저한 경우에만 착각이라고 한다. 착각이 생기는 원인으로는 감각기관의 특성, 각 기관에 생긴 신경흥분의 상호작용, 지각하는 사람의 태도, 그 사람이 가지는 요구, 그 사람의 과거 경험 등을 생각할 수 있다.
- 착시(錯視)는 시각의 착각으로 여러 가지 기하학적 도형에서 생기는 크기나 모양의 착시, 원근의 착시, 밝기나 색의 대비(對比), 두 개의 빛의 점이 적당한 시간차로 번갈아 점멸(點滅)할 때 그 두 점 사이에 왕복운동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가현운동(假現運動) 등을 들 수 있다.
- 감각기관의 특성에 의한 착각의 예로는 몸이 얼었을 때는 목욕탕 물이 특히 뜨겁게 껴지는 경우 등을 들 수 있다. 또 빨간빛과 녹색을 적당한 비례로 혼합한 빛이 노란색으로 보이는 사실 등도 이러한 종류의 착각의 예로 생각할 수 있다.
- 요구나 경험의 효과에 의한 착각의 예로는 지위가 높은 사람의 신체나 값비싼 물건의 크기가 커 보인다든지, 지진을 무서워하고 있으면 건물이 실제로는 흔들리지 않는데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을 들 수 있다.
- 개개의 감각에 각각 고유의 착각이 있을 뿐 아니라 감각 사이의 상호연관에 의하여 생기는 착각도 있다. 같은 1 kg의 무게라도 솜과 같이 부피가 큰 것은 쇳덩어리와 같이 작은 것보다 가볍게 느껴진다. 또한 객관적인 실온(室溫)이 같다고 하여도 붉은 계통으로 배색(配色)된 방 쪽이 푸른 계통으로 배색된 방보다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도 감각 사이의 상호연관에 의하여생기는착각의예이다.
○암시(暗示, Suggestion)
암시란 타인의 비판과 통합능력을 빼앗아 그에 따른 어떤 행동을 일으키도록 하기 위하여 사 용하는 자극, 또는 이치나 명령을 포함하지 않은 언어나 기타 자극으로 타인의 관념. 결심. 행동 등을 유발하는 일로 정의된다. 암시는 최면상태에서도 행해지고 각성상태에서도 행해지며, 의지와 계획의 작용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의 작용으로 일어난다. 피암시자는 암시자의 말이나 행위를 옳고 그름. 가능 또는 불가능. 진실이나 거짓 등을 이성에 따라 비교. 검토한 후 판단함이 없이 수동적.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이며 그것이 타인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마치 자신이 생각해낸 것처럼 거의 자동적. 일방적으로 어떤 태도를 취하거나 판단을 해버린다는 데에 문제가 있어 자신에게는 마(魔)가 된다. 암시를 받아들인 결과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의견 또는 태도를 변경하는 성향을 피암시성(被暗示性)이라 하며 이는 자아의 축소성과 이에 따르는 비판능력의 상실에 기인하므로 지능이나 교양의 정도가 높은 사람보다는 낮은 사람이 피암시성이 크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피암시성은 암시자와의 관계. 자극의 성질이나 내용. 환경상황 등 여러 조건에 의하여 영향을 받게 된다. 암시는 특정 개인이 행할 때도 있지만 어떤 집단이 암시를 주는 경위도 있으며 자기자신이 암시자가 되어 자신이 가지는 표상(表象)만으로 맹목적으로 그 대상의 현실성을 믿어버리는 의식이 일어나는 수도 있다. 이를 자기암시라고 하며 어떤 사소한 신체 징후에 마치 중병에라도 걸린 것으로 단정하고 자리에 누워 그 병을 앓게 되는 것이 그 한 예이다. 암시를 세뇌나 군중심리조작에 기술적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고 임상심리학자들은 임상요법으로도 사용한다.
○데자뷰(déjà vu)
데자뷰란 ‘이미 보았다’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처음 가본 곳인데 전에 이미 와본 적이 있다고 느껴지는, 즉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들거나 처음 하는 일인데도 전에 똑같은 일을 해본 경험이 있는 것같이 느껴지는 것을 말한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그와 똑같은 사건을 미리 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사람들은 혹 이것이 예지(豫知), 또는 초능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기도 한다. 또는 자기 기억으로는 전혀 가본 곳이 아닌데도 아주 낯익고 친근하고 마음이 편하여 오래 살던 고향 같은 포근함을 느끼게 되므로 혹시 전생에서 내가 살던 곳은 아닌가, 그곳에서 살던 전생기억(前生記憶)이 내 머리 속에 남아있어 금생(今生)에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사람의 뇌는 엄청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 스치듯이 한번 본 것도 차곡차곡 뇌세포 속에 하나의 기억으로 저장되는데 이와 같은 정보들이 모두 재생되는 것은 아니고 자주 보고 접하거나 자기에게 의미 있는 것이거나 또는 자극적인 것들을 꺼내 보게 된다고 한다. 오감을 통하여 경험한 감각기억이나 단기기억들 중 재생에서 아득히 멀어진 것들이 무수히 많은데 그 중에서 우리가 무의식 중에 했던 일을 다시 하거나, 별 의미 없이 갔었던 곳 또는 마음속에 그려보던 곳을 방문하였을 경우 처음인데도 아련히 똑같은 일을 했던 것처럼 느껴지게 되고 와본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또한 사람의 두 눈의 시각적, 시간적 오류에 의하여 발생한다는 사실도 실험을 통하여 확인한바 있어 데자뷰현상은 예지나 전생기억이 아니라 어떤 계기로 기억흔적의 재생이나 시각적 오류. 또는 과거 경험이 유사기억으로 재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꿈(夢)
꿈에 대하여는 아직도 명확한 해석은 없다. 학자에 따라 그 해석이 다르고 주장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그때의 의식상태와 그것에 대한 무의식 상태와의 상호작용으로 나타나며 그 기능으로 의식의 일면을 무의식
즉 꿈이 보상한다는 보상작용으로 설명하는가 하면 억압된 소망의 충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꿈은 무의식에서
보내오는 메시지며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자기자신 즉 내계(內界)에
잠재하고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관점에서 무의식이 그려내는 내면(內面)의 소통언어가 꿈이다 라고 말한다. 꿈에는 미래 발생할 것에 대한
예지몽(豫知夢)이나 경고몽(警告夢),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일반적인 꿈, 무의식세계의 어떤
강렬한 요소가 발현한 신화적 모티브를 지닌 꿈 등 여러 가지가 있으며 그 내용에 따라 길몽이냐 흉몽이냐를 구분하게 되고 꿈의 가치를 평가하게 된다. 그러나 꿈은 마음속에 억압을 담당하는 검열(檢閱)이란 마음작용이 있어 잠재내용이 왜곡되어 전혀 다른 이상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에 ‘꿈은 반대다’ 라고 말하기도 한다.
꿈은 밖으로부터 어떤 신비한 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용이 어떻든 간에 내 마음속 무의식에 있던 것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계시나 암시 쪽으로 인식할 대상은 못 된다. 꿈보다 해몽이란 말이 있듯이 꿈 자체에 의미를 부여할 것은
못되고 단지 해몽에 따라 하루 하루를 살아감에 있어 경계나 희망, 반성의 길잡이로 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꿈의 재료는 체험과 기억이며 수면 중에 받는 자극도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일본의 한 완구회사는 꿈을 꾸는 급속안구운동 수면시간(REM)에
이미지, 스토리, 냄새, 소리
등으로 집중적인 자극을 가해 원하는 꿈을 꾸도록 유도하는 ‘꿈 제조기계’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약50%의 성공률을 자랑한다고 한다. 따라서 꿈은 어떤 신비한 힘의 작용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