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구주의 표적(救主의 票蹟)
누가복음 1:1-20
홍제동교회. 공덕리교회
1932. 12. 25.
人皆有票蹟, 流臭萬年, 惡之票也. 流芳百世賢人之票也. 貧人有窮貧之票, 富人有富豪之票也. 以空無之理觀之則天地亦無迹也, 以實有之理觀之, 一言一物皆不磨滅也. 故人當以芳香之迹遺後, 而其所行之事爲迹也. 今救主降世之初亦有票蹟, 主本以上帝之子, 當乘雲赫赫而至, 使世人敬恐仰視, 而其生也至賤, 在馬槽之上, 在傍之人, 不欲願視, 一人不知, 但知得者, 牧者數人而已也. 何其異也? 今言救主之票迹, 而使吾等知眞理之一般矣. 票迹何也? 一襁褓, 二馬槽, 襁褓云者何也? 救主之身邊, 只百結襤褸之강보而已也. 無所裸着如赤身也. 此指世人之羞恥也. 無衣則身露羞恥大矣. 日人炎夏脫衣, 其羞愧甚矣, 而日人反不知者何也? 本無禮故也. 印度乾提只赤身演說者, 指印度人無自作之物也. 只依外國之物, 其羞亦甚大矣. 故今救主無所着者, 指世人之羞恥矣. 無禮亦無衣也, 經曰不着禮服者, 逐外云. 今日朝鮮人之無禮, 不可言不可言, 男女交際, 老少交際, 內外交際, 亦皆無禮. 經曰爾買白衣而着之, 免其赤身之羞也. 敎會之內亦然, 信主之後, 男女交通而反有弊害也. 上下平等而反有不平也, 職員會集之場, 只諧謔而已, 甚可歎也. 常以白衣換着云者, 白衣精潔之票, 敎人皆以精潔如主着禮服可矣. 無愛亦無衣. 經曰愛如着衣云, 創世之初, 萬物皆着上帝之愛衣而一自犯罪而後, 脫去愛衣, 掛無花果樹葉而爲衣, 欲掩其羞身, 然上帝呼之, 不覺恐懼, 今日吾人欲以己之善行爲衣, 而皆不足信耶蘇愛, 其愛衣掩諸罪然後, 可免羞矣. 馬槽者何也? 指住居, 主曰狐有窟鳥有巢, 而人子無枕頭處, 此主之生涯也. 馬槽暗指世人之無定處, 無立足者矣. 如狂人之處墓中, 有尸臭而不知. 世人之生活鄙陋, 犯罪而不知其陋, 孟子曰 仁人之安宅, 義人之正路, 曠安宅而不居, 捨正路而不由, 哀哉. 世人如空中之鳥, 無恒産無恒心, 今朝鮮人之南北離散, 此指無恒心之票也. 人之生活恒心爲大也. 無恒心者, 졈졈破滅, 如盛水而挺之. 世人皆走荒唐之路, 主曰爾欲見美服者乎? 在大國也, 其末路不免流乞, 示主在馬槽之上矣. 主生此馬槽者, 欲救此等之人, 故主先降此鄙陋之處所矣.
사람에게는 다 표적이 있습니다. 만년을 흘러내리는 나쁜 냄새는 악의 표적이고, 향기는 백 세대를 끼쳐주는데 이는 어진 사람의 표적입니다. 가난한 이에게는 빈궁의 표적이 있고, 부자에게는 부자의 표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텅 빈 공(空)이고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이치로 보면 천지도 역시 아무 자취가 없고, 실체와 유형의 이치로 볼 것 같으면 말 한 마디, 물건 하나도 다 없어지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땅히 향기로운 자취를 훗날에 남겨주어야 합니다. 그가 행한 일이 그 자취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구주께서 세상에 강림하신 초기에 그 표적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로써 마땅히 구름을 타고 화려한 모습으로 강림하심으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과 공경하는 마음으로 우러러 보게 해야 하는데, 주의 출생이 매우 미천한 말구유 위에서 태어났으므로 주변에 있는 사람까지 보지를 못했습니다. 이렇게 단 한 사람도 아는 이가 없이 그를 알아주는 자는 목자두어 사람뿐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특이합니까?
지금 구주의 표적을 말할 것 같으면 우리로 하여금 진리의 일반적인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 표적은 무엇입니까? 첫째가 강보[襁褓](포대기)요, 둘째가 말구유입니다. 강보가 무엇입니까? 구주의 신변에는 백 조각으로 찢어진 남루한 포대기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걸치지 못한 벌거숭이 같은 것으로 이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수치로 여기는 것입니다. 옷이 없으면 몸이 드러나서 수치스러움이 크게 됩니다.
일본 사람들은 더운 여름에 옷을 벗어버리는데 그 수치스러움이 큽니다. 그러면서도 일본 사람들은 도리어 수치를 모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들은 본래 예절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간디[乾提]가 다만 벌거숭이 몸으로 연설한 것은 인도 사람들이 스스로 만든 물건이 없고 모두 외국에서 들어오는 물건 만을 의존하기 때문에 그 수치스러움이 매우 큽니다. 그러므로 지금 구주께서 입을 옷이 없는 것은 세상 사람의 수치가 예절도 없고 옷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밖으로 내어 쫓으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조선 사람의 무례함은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남녀가 교제하는 일, 노소가 교제하는 일, 내외가 교제하는 일이 모두 무례합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너는 흰옷을 사서 입으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의 벌거숭이의 수치를 면하도록 한 것입니다. 교회 내에도 이와 같으니 주님을 믿은 이후에 남녀가 교제하게 되므로 도리어 폐해가 있게 되었습니다. 상하가 평등하게 되어 도로 불평등함이 있습니다. 직원들이 모인 장소에서는 다만 우스개와 익살뿐이니 매우 한탄스럽습니다.
늘 흰옷으로 갈아입으라고 한 것은 흰옷은 정결의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은 다 이로써 정결하여 주께서 예복을 입은 듯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옷도 없습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사랑을 옷 입듯 하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이 생기던 창세기 초에는 만물이 다 하나님의 사랑 옷을 입었는데 범죄한 후로 사랑의 옷을 벗어버리고 무화과 잎으로 옷을 만들어 걸침으로써 그 수치스러운 몸을 가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러도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자기의 선행으로 옷을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다 예수의 사랑을 믿는 데는 부족합니다. 그 사랑의 옷으로 모든 죄를 가린 뒤에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습니다.
말구유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사는 주거를 가리킵니다. 주께서‘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없느니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주님의 생애였습니다. 말구유는 세상 사람이 살 일정한 장소가 없고 발을 붙일 곳이 없음을 넌지시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치 더러운 냄새가 나는 미치광이가 무덤 가운데 들어가면 시체의 악취를 모르는 것처럼 세상 사람의 생활이 비루하면 범죄를 하고도 그것이 비루한 줄을 모릅니다. 맹자가 ‘어진 일[仁]은 사람이 편히 살 수 있는 집이라도, 옳은 일[義]은 사람이 가야할 바른 길인데, 편한 집은 비워두고 살지 않으며, 바른 길을 버리고 가지 않으니 슬픈 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 사람은 공중에 나는 새와 같아서 항상 먹을 산업도 없고, 일정한 목포를 가진 마음도 없습니다. 지금 조선 사람은 남북으로 흩어져 있으니 이는 일정한 마음[항심恒心]을 가진 목표가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이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일정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없으면 점점 파멸되어 갑니다. 마치 담아놓은 물이 흘러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황당한 길을 달려갑니다. 주께서 ‘너는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보려고 하느냐’라고 하였습니다. 큰 나라에 살고 있어도 그 말로는 떠돌아다니는 거지노릇을 면하지 못합니다. 주님이 말구유에서 있었던 일을 보십시오. 주님이 이 말구유 위에서 태어났어도 이러한 사람들을 구하려고 하였으므로 주님은 먼저 이렇게 비루한 장소에 내려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