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토기의 보화는 무엇입니까?(土器의 寶貨는 何也?)
고린도후서 4:7
동대문, 이태원교회 (東大門, 梨院 1929.1.27)
此言土器易爲破損之物也, 而甚無價置故人皆賤視之, 此指人之肉身也. 此言寶貨, 至貴無上與天下不換者, 此指人之靈魂也. 上帝造人時與神肖像而神造此靈魂, 不置之貴重之器, 卽置之無價之土器中, 譬如棄於泥土中藏珠於田地中也. 不知者卽尋常過之, 知之者卽買所有, 而買之其貴可知也. 吾人懷此重寶, 勿過慮易毁之肉塊, 當寶藏至貴之靈物也. 今保羅說明其所寶者, 如在有圍匝而不壓者, 壓者有兩種, 肉體壓, 精神壓也. 主嘗曰勿畏殺肉者, 當畏投靈于地獄者也, 太十章二十八節. 此曾爲獨逸國民之標語, 獨逸以此興國, 吾敎會亦以此語當興起也. 地上帝王將軍聯盟以腕力能殺一義士之肉而不能殺義士之魂. 鄭圃隱雖被殺于善竹橋而其精神尙不滅于朝鮮白衣人之心內也. 今信徒之信心反不若初代敎友當大院君之壓迫也. 信男善女皆就戮而不服, 今之信徒一見時勢不利背信如棄弊屣, 或前日爲牧師而今日飮酒行悖者, 不知寶貨之故也. 此等人之所寶者, 卽勢利也, 名譽也. 不知靈魂爲寶, 彼黑人紅人何故稱蠻也? 不貴其靈魂, 不欲進步, 自甘退縮故也. 若靈魂不退則勿論何時必有更起之日. 若靈肉俱退者, 永切浸淪更無希望也. 故吾等當畏靈壓, 勿畏肉壓也. ◇有沓沓而不落心者, 約瑟(요셉)入埃獄而不懼, 但以理投獅窟而不惑者何也? 我之靈與上帝交通, 我之靈肉非我所有. 主曰我報汝, 로十二章十九節. 以此受慰故永眠時不如世人之落心, 데살前四章十三節. 沓沓肉也非靈也. 丁若鏞在海上讀書, 讀書聲不絶者, 身雖在謫而心不在謫也. 渴者欲飮水爲之寶, 飢者欲食食爲之寶, 在悶沓者有不落心者, 則豈不爲寶乎? 楚人無以爲寶, 以親仁爲寶, 仁能蘇國故爲寶也. 敎人何以爲寶也? 當以信爲寶也. ◇有逼而不見棄者, 蕩子悔改父不棄之 눅十六章. 世人逼我, 父不逼我, 昔有一孝子有季母甚逼, 其不離側侍之, 父甚怒逐出, 不得在家, 父又逐之, 子乃不已席于門外, 朝夕入侍, 父母感而使子入居. 摩西見逐于米田(미디안?)有不落心, 乃牧羊于西乃山, 大圍見逐于掃羅(사울)有不落心, 得至王位, 落心之後有地獄. 人在萬物相之下, 仰望峭峰, 乃退步不登, 則不能見金剛之全景矣. 然不落心而勇往登陟, 則心身快活不可形言也. ◇有顚倒而不亡者, 諸君不見不倒翁乎? 百抑于地而翁乃兀坐者, 其中有鉛爲重心故倒而不倒, 百折不屈也. 吾信徒當如此, 有百折不屈之志, 則世人盡爲排耳我不關焉, 隣里排之, 家族排之, 皆不關心. 無逼而能成大功者未之有也. 三顚九倒而 能上毘盧峰者, 有欲上之心, 有欲上之氣, 有心斯有力, 天國有力者能奪之 太十一章十二節. 是眞理也. 吾等有不倒之氣乎? 不倒能如누터之氣乎? 飢而不變, 寒而不改, 壓而不從何者? 能屈누터之志乎? 保羅曰誰能絶愛乎, 患難乎, 困苦乎, 逼迫乎, 饑饉乎, 赤身乎, 危險乎, 刀劍乎 롬八章三十五節. 此皆不足畏也. 何者能倒保羅之志乎? 其經歷足可驗其大慨也. ◇有死而不死者, 天下之寶誰過於此乎? 天下之事惟生爲大, 生之外有何大者乎? 自古及今, 人生皆死, 一未有回甦者. 秦皇漢武亦死矣. 然聖書中有死而不死之約, 耶蘇入墓, 羅兵以石封固, 又派兵守之, 主惟復活, 主曰時至則在墓之人聞其聲而更生云 요한五章二十八節. 人生千古皆死而惟信者再生于天國, 永生不死矣. 惟信者得之, 不信者無此約, 佛有四願不老不病不死不生也. 吾信者亦有此願, 今조션之人言必稱將死, 惟心死則必死, 心不死則必不死也. 有將死之心則必死乃已, 有不死之心則必更生矣. 古有死之試驗者, 醫云血盡則死, 使病者臥床, 醫將試血他, 有水漏聲使病者聞之水漏漏不已, 病者乃昏倒氣盡, 而醫曰 所漏者乃水也, 非汝血, 汝血自在無傷也云, 病者更生云, 此病者之心死故氣亦將死, 此死生關於何也? 卽關醫師之言也. 病者信醫師之言, 不死云則不死, 必死云則必死, 其信關係甚大矣. 僉位信耶蘇之言則必死而不死之矣. 今朝鮮人之死活問題, 在信仰與否, 有必死之自信乎? 必死乃已, 有不死之自信乎? 必不死矣. 以上諸問題는 皆信者之寶, 如此貴重之寶, 盛在土器中, 非人所能者, 卽神之大能所賦者則吾人當守而勿失, 使作入天國之票. 入博覽會時無票不能入, 入天國之時, 持此高貴之票, 當膽大而入矣. 土器雖破所寶自若矣. 僉位愼之焉.
여기서 말하는 질그릇은 쉽게 파손되는 물건입니다. 그리고 별 가치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천하게 봅니다. 질그릇은 사람의 육신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보배는 매우 귀중한 것으로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것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사람의 영혼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영과 모양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드신 영혼을 귀한 그릇에 담지 않고, 별 가치가 없는 질그릇 가운데 넣었으니, 이는 진흙 속에 버린 것과 같고, 진주를 밭이나 토지에 묻어 놓는 것과 같이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것의 중요함을 모르는 자는 그냥 평범하게 지나쳐 버리게 되고, 그 중요성을 아는 자는 그 땅을 사서 자기 소유로 만듭니다. 그것을 사 들여야 그 소중함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중요한 보배를 품고 있습니다. 쉽게 파손되고 깨어지는 육체를 지니고 있는 것을 염려하지 마십시오. 육체는 그 속에 귀중한 것을 감추어 두는 데 알맞은 도구입니다. 지금 바울은 보배로운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보배는 사방으로 불의의 세력이 둘러싸여 있지만 그것으로부터 압력을 받지 않습니다. 압력을 받는 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의 압력이고, 다음은 정신의 압력입니다. 주님이 일찍이 ‘육체를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을 지옥에 던지는 것을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10:28).
이 말은 일찍이 독일 국민의 표어로 사용되었습니다. 독일 국민은 이 표어로 나라를 일으켰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이 말로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지상에 있는 제왕이나 장군이 완력으로 한 의사(義士)를 죽일 수는 있어도, 그 영혼은 죽일 수가 없습니다. 포은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피살되었어도, 그 정신만은 조선 백의민족의 가슴속에 아직까지 없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신도들의 신앙심은 대원군에게 압박을 받던 초대 교우들만 못합니다. 당시 신앙을 가진 남자와 여자들은 죽임을 당하면서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신도들은 시세가 불리한 것을 한 번만 보고도, 믿음 버리기를 마치 헌신짝처럼 하고 있습니다. 지난날 목사 노릇하던 사람이 지금은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보배가 어디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권세와 이익과 명예를 보배로 여기고 있습니다. 영혼이 보배인 줄을 모릅니다.
흑인이나 홍인(紅人)을 어째서 야만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그들은 영혼을 귀중히 여기지 않으며. 또 진보하려고도 하지 않고, 퇴보하여 위축되는 것을 달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퇴보하지 않으면 어느 때고 다시 일어나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영혼과 육체가 함께 퇴보하게 되면 영원히 진흙탕에 빠져들어 다시 더 희망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영혼의 압박을 두려워하고 육체의 압박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 아무리 답답하고 어려운 데 처하더라도 낙심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감옥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다니엘은 사자 굴속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 영혼이 하나님과 교통했기 때문입니다. 곧 영혼과 육체는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주께서 ‘내가 네 원수를 갚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로마서 12:19). 이 말씀으로 위로를 받기 때문에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도 세상 사람들처럼 낙심하지 않게 됩니다.(데살로니가 전서 4:13).
답답하고 민망한 것은 육체이지 영혼이 아닙니다. 정약용(丁若鏞)이 귀양살이를 할 때도 독서하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던 것은 몸은 비록 유배지에 있었지만, 마음은 그곳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마른 자에게는 마실 물이 보배이고, 굶주린 자에게는 먹고 싶은 밥이 보배입니다. 안타깝고 답답한 사람에게 낙심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보배가 아니겠습니까? <초서楚書>에는‘초나라 사람에게는 보배 될 만한 것이 없고 인(仁)과 친 하는 일이 보배라’고 하였습니다. 인(仁)이 나라를 소생 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보배인 것입니다. 교인은 무엇으로 보배를 삼아야 하겠습니까? 마땅히 믿음으로 보배를 삼아야 합니다.
◇ 핍박 중에도 버림을 당하지 않은 자가 있습니다. 방탕한 자식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아비는 그를 버리지 않습니다.(누가복음 16장). 세상 사람이 나를 핍박하여도 아버지는 나를 핍박하지 않습니다.
옛날에 효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계모가 그를 핍박했습니다. 그렇지만, 효자는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고 모셨더니, 그 아버지도 매우 화가 나서 아들을 내쫓았습니다. 그 아들은 집에 있을 수가 없어서 문밖에 자리를 깔고 자면서 조석으로 들어와 부모를 모셨더니 부모가 감동이 되어 아들을 불러들였다고 합니다.
모세는 미디안으로 쫓겨났으나 낙심하지 않아서 마침내 시내 산에서 양떼를 쳤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났지만 낙심하지 않아서 마침내 왕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낙심을 하면 지옥이 있습니다. 사람이 만물상(萬物相) 아래서 높은 봉우리만 쳐다만 보다가 올라가 보지 않고 내려간다면 금강산 전경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낙심하지 않고 용감하게 올라가면 마음과 몸의 쾌활함은 이루다 형언 할 수 없습니다.
◇ 오뚝이[부도옹不倒翁]는 넘어지고 자빠져도 망하지 않습니다. 백번 눌러서 넘어지게 하여도 오뚝이는 오뚝하게 도로 앉습니다. 그 까닭은 그 한가운데 납덩이를 넣어서 아래 중심을 무겁게 하여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백번을 꺾어도 굴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마땅히 이와 같이 백절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이 배척하더라도 관심을 쓰지 않게 됩니다. 이웃이 배척하고 가족이 배척하여도 관계치 않게 됩니다.
핍박이 없이 큰 공을 이룬 자는 없습니다. 세 번 자빠지고 아홉 번 넘어져야만 비로봉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있고 올라갈 수 있는 힘이 있으면 됩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힘이 있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을 수 있습니다.(마태복음 11:12). 이것이 진리입니다. 여러분에게 넘어지지 않는 기운이 있습니까? 넘어지지 않은 루터와 같은 기운이 있습니까? 굶주려도 변치 않고, 추워도 변개치 않으며, 압박을 받아도 따르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루터의 뜻을 굽힐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고통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헐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리오?(로마서 8:35)라고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두려울 게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바울을 거꾸러뜨릴 수 있겠습니까?
◇ 죽어도 죽지 않은 것이 있으니 천하의 보배 중에서 무엇이 이보다 나은 것이 있겠습니까? 천하의 일 중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 가장 큰 일입니다. 사는 일보다 더 큰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로부터 지금까지 인생은 다 죽었습니다. 단 한 사람도 다시 살아난 사람이 없습니다. 진시황과 한 무제도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성서> 에는 죽지만 죽지 않는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시고, 로마 병사가 돌로 그 묘를 단단히 막고, 파수꾼이 무덤을 지켰지만,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때가 이르면 무덤 속에 있는 사람이 그의 소리를 듣고 깨어난다.’고 하였습니다.(요한복음 5:28).
만고에 인생은 모두가 다 죽습니다. 그렇지만, 믿는 자는 천국에 다시 태어나서 영생불사하게 됩니다. 이것은 믿는 자만이 얻게 되고, 불신자에게는 이 약속이 없습니다.
불교에는 네 가지 소원[사원四願]이 있습니다. 늙지 않고[불로不老], 병들지 않고[불병不病]. 죽지 않고[불사不死], 나지 않는[불생不生] 것입니다. 우리 신자도 이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조선 사람은 말끝 마다 죽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죽으면 죽게 되지만 마음이 죽지 않으면 반드시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죽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죽고 맙니다. 죽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반드시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옛날에 죽음을 시험해 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의원이 이르기를 ‘피가 다 빠져나가면 죽는다.’고 말하고, 병자를 침상에 누인 뒤에 의원은 그에게 피로써 시험해 보았습니다. 그에게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병자에게 듣게 하고, 핏방울이 떨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더니 병자가 그만 기운을 잃고 혼절했습니다. 그러자 의원이 이번에는 병자에게 ‘지금, 이 소리는 피가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고,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라’고 하였더니 병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병자의 마음이 죽었기 때문에 기운도 죽은 것입니다.
여기서 죽고 사는 것은 무엇에 관계가 있습니까? 의원의 말에 관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병자는 의원의 말을 믿고 죽지 않았다고 하면, 죽지 않고 꼭 죽는다고 하면 죽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면, 죽을 경우라 하더라도 죽지 않게 됩니다. 오늘날 조선 사람의 사활문제는 신앙의 여부에 달렸습니다. 여러분, 죽는다고 믿습니까? 그러면, 반드시 죽게 될 것입니다. 죽지 않는다는 자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반드시 죽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상 여러 가지 문제는 다 신자의 보배입니다. 이와 같이 귀중한 보배를 토기인 질그릇 속에 담은 것은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곧 하나님으로 부터 부여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것을 마땅히 잘 지켜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신앙을 천국에 들어가는 표로 삼아야 합니다. 박람회장에 들어갈 때 표가 없으면 들어 갈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천국에 들어갈 때도 이 고귀한 표를 가지고 있어야 만 당당하게 들어가게 됩니다. 담고 있는 질그릇은 비록 깨지더라도 거기에 담긴 보배는 변동이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 일을 신중히 생각해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