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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18일 부활 후 둘째 주일 메시지
부활 후 둘째 주일 메시지
제목: 자유와 번영으로 인도하는 이야기
요한복음 12:20~33
설교 목적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생각하다가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거슬러 올라왔다. 즉, 기독교 신앙이 인간과 세상,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할 때 그 이야기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설명이 달라진다. 나는 이 설교를 통해서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이 성경을 통하여 어떤 이야기를 읽어내고 간직하고 있는지 반성해 보고자 한다. 나는 이번 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톰 라이트의 강연을 몇 개 집중적으로 들었다. 그 강연을 들으면서 나는 그 동안 내가 읽고 정리한 신앙에 대한 종합적인 정리가 되는 느낌을 받았다. 여기에 그 내용을 설교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 메시지가 우리들에게 성경이 들려주는 인간과 땅, 그리고 역사에 대하여 바른 그림을 보여주기를 희망한다. 그 결과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자유와 번영으로 안내하는 지도가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구도자들의 간절한 소망이 아닐까!
설교 개요
1. 인간과 땅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
2. 신앙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본질
3. 성경을 해석하는 두 가지 관점
4. 십자가와 부활이 들려주는 새로운 세상 이야기
1. 인간과 땅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
경상북도포항에는호미곶이라는지명을가진동네가있습니다. 호미(虎尾)곶은그땅의모습이호랑이꼬리처럼생겼기때문에붙여진이름입니다. 호미곶이라는이름은조선시대명종때남사고(南師古)라는지리학자가붙인이름입니다. 남사고는산수비경(山水秘境)이라는책에서우리나라땅의모습이마치호랑이처럼생겼다고처음으로말한학자입니다. 그런데300년이지난1903년에일본정부가보낸지질학자고토분지로(小藤文次郞)는우리나라전역을돌아보고지도를만들었는데, 그는조선땅의모습이마치토끼처럼생겼다고발표했습니다.
일본 학자의 토끼 주장에 반대하는 글을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라는 19세 청년이 ‘소년’이라는 정기간행물에 발표했습니다(1908년). 육당(六堂)은 우리나라 지형이 대륙을 향하여 달려드는 모습을 한 용맹한 호랑이와 같다고 주장했습니다. 육당은 아마 300년 전에 살았던 조선의 학자 남사고의 글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땅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 지도입니다. 지도는 정확하게 그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땅이 어떻게 생겼다는 것은 보는 사람의 생각이 담긴 말입니다. 우리나라 땅이 토끼처럼 생겼다고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 있고, 반대로 우리나라 땅이 호랑이처럼 생겼다고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 있습니다.
사람은 땅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그 땅에 살아가는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침탈했을 때 그들은 조선인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자신들의 관점과 생각을 주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식민교육이라고 합니다. 일본의 학자가 조선의 땅은 그 모습이 토끼를 닮았다고 말한 것은 의도가 담긴 것이라 하겠습니다.
일본인들이 조선의 역사를 왜곡하여 조선인들이 역사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지 못하게 애를 쓴 것도 사실입니다.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서 우리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고치라는 창씨개명을 강요했습니다. 우리나라 유명한 산마다 민족정기를 끊어 놓기 위해 땅에 쇠말뚝을 박은 것을 보면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각에 열등감을 심어 주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기 땅과 그 땅에 살아가는 자신, 그리고 역사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겠습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것은 먹는 것 외에 가치 있는 것을 찾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국회의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자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배부른 돼지보다는 덜먹은 인간이 되는 것이 낫고,
혼자만 좋은 것을 즐기는 바보보다는
불편함을 감수하는 소크라테스로 사는 것이 낫다.
만약 그 바보나, 그 돼지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자기 편에서만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출처: →Goodreaders
저는 이 사실을 최근에 부동산값 폭등에 대한 민심을 보면서 생각해 봅니다.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 것이 좋은 일입니까, 아니면 나쁜 일입니까? 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자기 동네의 집값이 오르면 좋은 일입니까, 아니면 나쁜 일입니까? 언론은 부동산 가격을 잡지 못하는 정부와 여당을 비판합니다. LH공사 사태와 관련하여 내부정보를 이용하여 미리 개발지역의 땅을 사둔 공직자들에 대하여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언론인이 말하기를 이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심리에는 ‘나도 저렇게 돈을 벌고 싶은데 할 수 없으므로 화가 난다’는 마음이 있다고 꿰뚫어보았습니다. 사실 누구라도 어느 지역에 대한 확실한 개발 정보를 안다면 은행 대출을 받아서라도 그 지역에 땅을 사 두고 싶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정의와 공정을 원하지만 나의 이익이 개입되면 다른 기준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의 행복과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함께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즉, 나 자신과 우리 공동체, 그리 고 우리가 사는 세상과 역사에 대하여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짐승들처럼 약육강식의 정글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에게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는 세상과 역사에 대하여 올바른 가르침을 줄 수 있을까요?
2. 신앙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본질
우리에게 인생과 세상과 역사의 의미를 가르쳐주는 것은 종교입니다. 종교(宗敎)는 한자로 풀어보자면 으뜸되는 가르침 또는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종교는 이야기를 통해 이 세상의 기원과 인간의 존재 목적, 그리고 역사에 대하여 들려줍니다. 종교에는 고등종교와 원시종교가 있습니다. 원시종교를 가진 사회에서 인간은 자기 조상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동물이나 큰 바위 같은 것을 섬깁니다. 또는 신령한 세계와 현실을 연결해 주는 무당의 지시를 신의 명령으로 따릅니다. 그러나 종교가 발전할수록 인간은 경전을 통해 체계적으로 세상과 인간, 그리고 역사에 대한 신의 가르침을 배웁니다.
그러므로 종교마다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존재 의미를 들려줍니다. 불교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세상은 끊임없이 돌고 도는 곳이며 그 속에서 인간도 윤회의 수레바퀴 가운데 있다고 이 세상과 시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죽으면 조상들에게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조상들은 자손들의 생사화복에 영향을 주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가난한 가정도 조상에 대한 제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정성껏 지냈습니다. 그것이 조상숭배 신앙입니다.
유럽 사람들은 중세시대에 연옥(煉獄, purgatory)을 믿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극소수의 성인들만이 천국에 들어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옥에 들어가서 이 땅에서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으면서 정화되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가르침이 연옥사상입니다. 그리고 그 정화의 기간이 끝나면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은 조상들의 영혼을 위해 헌금을 바치거나 교회당을 지어드리는 정성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서양의 모든 백성들이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던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종교가 가르치는 것은 이 세상은 어떤 곳이며, 인간 자신은 어떤 존재이며,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렇게 사람은 세상과 자신과 역사에 대하여 이해하고 해석한대로 이런 저런 모양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종교가 병들면 세상도 병들고, 종교가 건강하면 그 신앙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세상도 밝아질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세상과 인간, 그리고 역사에 대하여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인생과 역사에 대하여 다른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중세시대에 서양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연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단번에 드린 영원한 제사와 같아서 믿는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했다고 종교개혁자들은 가르쳤습니다. 더 이상의 형벌이 없습니다.
그렇게 보면 기독교 신앙인들이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은 시대마다 조금씩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 시대는 단지 이전 시대의 것을 배우는 데서 그치지 말고 다시 초대교회로 돌아가 신약성경을 기록한 시대의 성도들이 어떻게 믿고 가르쳤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자기 시대를 새롭게 할 때마다 기독교 신앙은 늘 새롭게 개선되고 발전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세상과 인간과 역사에 대하여 어떤 해석을 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자는 질문입니다.
3. 성경을 해석하는 두 가지 관점
저는 오랜 연구를 통해 특별히 그리스도인 학자들의 성경연구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우리 시대에 성경을 해석하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관점은 서로 달라서 세상과 인생과 역사에 대하여 전혀 다른 그림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그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해설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매우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제가 어려서부터 듣고 배운 성경 이야기입니다. 그 간단한 핵심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에덴동산을 지으신 후에 사람을 거기 두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어기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라 죄에 대한 형벌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죄의 삯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게 하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천국에서 살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린이들에게도 가르칠 수 있도록 ‘글없는 책’으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는 천국을 가리키는 황금색과 죄를 가리키는 검은색,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키는 붉은색, 그리고 용서를 의미하는 하얀색, 그리고 성장을 뜻하는 초록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인들을 위해서는 사영리라는 소책자로 성경 이야기의 핵심을 정리했습니다. 사영리는 인간이 행복하게 살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도달하는 것이 최고의 행복임을 가르칩니다.
이 이야기에 의하면 세상과 인간, 그리고 역사는 어떻게 설명됩니까? 세상은 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며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 최고의 가치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며, 그렇게 하는데 죄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 인간은 늘 자신을 돌아보고 또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잠시 잠깐 인생을 살다가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진짜 행복은 거기에서 시작되며 우리의 목적은 바로 그곳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배우며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은 세상과 자신과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겠습니까? 세상은 장차 불에 타서 없어질 것이며 영혼이 들어갈 천국이 영원한 세상이라면 누가 이 세상에 대한 책임 있는 관리자 역할을 하겠습니까? 정치나 경제, 환경이나 사회문제가 어떻게 돌아가든지 결국 멸망할 세상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잠시 머물다 떠날 나그네의 여관과 같은 곳이라면 뭐 하러 정성껏 돌보고 가꾸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겠습니까? 신자는 영적인 문제와 신앙의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이면 되지 무슨 정치나 사회나 국가나 세계의 문제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신앙이야기가 성경에 기초한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진지하게 읽고 초기교회 신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무엇을 믿고 가르쳤는지 살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새로운 이야기를 성경을 통해 읽어냈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낡은 이야기를 고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종교개혁자들이 교회는 언제나 개혁되어야 한다는 말을 했을 때, 그것은 초대교회가 가르치는 근본으로(ad fontes) 돌아가자는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만드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거하시면서 그 일을 함께 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리인이자 동역자인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땅이 혼돈 가운데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다시 자기 백성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거하시면서 세상을 복되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인간 가운데 거하실 집이 바로 성막이며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은 아담처럼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아닌 것을 섬길 때마다 사람은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는 대신에 악한 자의 종이 되어 세상을 망가뜨렸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새롭게 고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좌절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인간을 배반하게 한 모든 죄와 악한 세력을 십자가에서 무찌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더 이상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지 않고 다시 하나님의 자녀와 대리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를 통해서 그에게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토록 그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끝날에 주님이 다시 오셔서 마침내 온 세상을 새롭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즉, 새로운 세상입니다. 그 때 우리는 모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왕노릇할 것입니다.
이 두 번째 이야기에 따르면, 창세기의 하나님은 더 이상 인간을 테스트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자신의 동반자와 동역자로 삼으시며 세상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여기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성품을 세상에 나타냅니다. 그것은 피조세계를 관리하고 돌보며 섬기는 왕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피조세계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찬양을 모아서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제사장의 모습입니다.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피조물의 경배를 아름다운 노래로 만들어 하나님을 경배하던 선배들은 제사장의 소임을 탁월하게 수행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이 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이며,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이 돌보시는 나라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사람들을 불러내어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불러내셔서 자신의 대리인으로 세우신 후에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 대리인들은 세상으로 가서 어그러지고 어두워가는 세상을 새롭게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사람들을 데리고 천상의 세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와 이 땅 모든 곳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됩니다. 그때 만물은 완전히 새롭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됩니다. 성경은 그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이야기입니다.
4. 십자가와 부활이 들려주는 새로운 세상 이야기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매우 소란합니다. 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하늘을 찌르듯이 높아갑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그 한을 풀지 못해서 목숨을 끊고, 부당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가 하늘을 찌릅니다. 정치지도자들을 국민들이 세우기도 하고 버리기도 합니다. 정치인들은 국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때로는 호소도 하고 때로는 쇼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국민들을 설득할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북한의 공산주의보다 자유롭게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자본주의가 훨씬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만 부익부 빈익빈의 기울어진 운동장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의문입니다. 우리는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고 여기는 민주주의가 독재자의 나라보다 낫다고 확신하지만 국민들이 만약에 무지하여 욕심에 이끌리며 정치인들은 국민들의 표를 얻기 위해 정치과학적 기술에 의존하여 이벤트를 기획하는 정치꾼들이 될 때 우리는 민주주의 제도의 한계 앞에서 좌절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볼 때 자본주의나 민주주의는 비교적 늦게 생겨난 제도입니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까지도 왕을 나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람과 세상과 역사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래서 왕들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과 세상에서도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길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가 민주화되는 시절에도 성경을 통해서 우리의 나아갈 길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성경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오직 자본주의 제도만이 최고라는 생각을 버려야 하겠습니다. 비록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제도를 가진 나라들보다 더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민주주의 정치제도나 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따라 나라를 운영한다고 해서 절로 우리나라가 천국과 같은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지도자들을 탓하고 나와 생각이 다른 국민들을 비난하면서 갈 길을 잃고 이러 저리 방황하는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불의를 바로잡아야 할 정치인들에 대하여 실망하고, 법조인들에게 실망하고, 경찰과 같은 공권력에 실망한 사람들은 영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 할리우드에서는 그렇게 끊임없이 영웅들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띄우며 사람들을 달래는지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 TV드라마에도 악한 사람들을 직접 징벌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안방에 보여줍니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얼마나 시원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지금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갈망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 가운데 텔레비전이나 영화에 나오는 영웅들처럼 힘도 세고 싸움도 잘하고 머리도 좋아서 악한 이들을 보기 좋게 제압해나가는 그런 영웅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아마 어려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영화나 드라마 제작자들은 사회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임을 믿고 의지하며 그 본보기와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문제 앞에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는지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2장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마지막 시간에 일어난 일을 들려줍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셔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고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들도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예수님을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 헬라인 몇 사람이 빌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전갈(傳喝)을 보냈습니다. 이 헬라인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는 유대인뿐 아니라 이제 이방인들도 나를 알아보고 만나고자 하는구나 하며 은밀하게 그들과 접촉하시지 않고 제자들 앞에서 어떤 선언을 하십니다.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0~24
예수께서는 헬라인들의 방문을 받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시고 한 알의 밀이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곧 예루살렘에서 죽임을 당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어떤 의미인가를 지금 제자들에게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영광을 얻는 것이며,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한 희생이며, 그리고 승리였습니다.
25.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
26.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27.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요한복음 12:31~33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이 세상의 임금을 쫓아내는 일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로 이끌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4~15). 모세가 장대에 뱀의 모양을 만들어 높이 올려서 사람들을 고치고 하나님 앞에 다시 설 수 있게 한 것처럼 예수님도 흉한 모습으로 나무에 달림으로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바라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 임금을 내쫓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TV나 영화의 영웅들이 악당들을 하나씩 제압해 가는 통쾌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의 악당을 이기시고 제압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골로새서 2:15).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세상 임금을 무력화하며 구경거리로 삼아 내쫓아버리는 극적인 승리라고 바울 사도는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왜 영광을 얻는 것이며, 십자가는 왜 세상 임금에 대한 승리입니까? 그리고 그 승리는 어떤 승리입니까? 저는 앞에서 성경을 보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관점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그 관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도 서로 다르게 해석합니다. 하나의 관점은 영혼이 천국에 올라간다는 이야기로 성경을 해석하며, 다른 하나의 관점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는 일에 동참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관점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해석하면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지옥불에서 건져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한 위대한 사건이므로 십자가는 승리가 됩니다. 우리가 받을 형벌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사건이며 사탄 마귀는 더 이상 인간에게 죄의 값을 요구할 수 없으므로 십자가 앞에서 패배한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서 구원은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 관점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해석하면 어떤 이야기가 됩니까?
먼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있어서 구원은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나타내고 세상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찬양을 모아 하나님을 경배하는 제사장적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계획하신 참 인간의 형상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세상은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 전에 이스라엘은 파라오의 압제 아래서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 가운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7장을 읽어보면 바울은 아무리 애를 써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비참한 삶을 살았노라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죄의 권세 아래서 신음하는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 아래 사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로마서 8장 초두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1~2).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오면 죄의 굴레로 인한 억압과 혼돈에서 벗어난다는 말입니다. 이제 죄에서 해방을 얻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하셨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8:3~4).
유대인인 바울이 고통스러워 한 것은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따를 수 없는 자신의 연약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요구에 맞출 수 없는 인간에게 율법이 내리는 모든 저주를 자기 아들의 육신 안에 모아 그 육신 안에 있는 죄를 심판하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의하면,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고 되어 있는데, 그것은 ‘육신 안에 있는 죄를 정죄하셨다’(condemned sin in the flesh)는 말입니다. 즉, 죄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입니다. 그것은 혼돈의 괴물을 죽이는 것이며, 그것은 파라오의 저주를 끊어내는 유월절의 구원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좇아 살면 더 이상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해방이며 참 인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세상에 나타내고 세상의 찬양을 모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제 새롭게 창조되었으며, 그는 이제 참 이스라엘 백성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세상 임금의 통치 아래서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혼돈과 공허 그리고 흑암 중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의와 공정을 원하는 자신도 때로는 자기 유익을 위해 정의를 저버리는 모순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헬라인들의 방문을 받으시고 자신의 십자가로 이 세상 임금을 쫓아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누리며 참 인간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세상을 새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는 대리인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피조세계를 다시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와 해방을 누린 사람들은 새로운 인생을 살아갑니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라고 함으로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었음을 감사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유와 해방을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새 피조물로 거듭나 새 사람이 된 자신을 확신합니다.
저도 고등학교 시절에 예배당에서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 이후로 제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치 않고 저를 새롭게 이끌어주었습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에 학교 정원에서 성경 로마서를 읽고 있을 때,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선물처럼 저에게 임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쁨이 충만하여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총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졌는지 모르고 그 은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깨닫고 그것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마치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방법을 몰라도 그것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음식을 만드는 법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한 사건이며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신 일이라고 소개합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로 새롭게 지음 받은 백성들은 창조의 아담처럼 하나님의 세계에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줌으로 다스릴 것입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이스라엘처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상에 빛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할리우드의 영웅들처럼 절대권력으로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름으로 실행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본과 가르침은 산상수훈에 있듯이 온유하고 애통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정의를 행하는 삶입니다. 핍박을 받더라도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곧 하나님의 대리인적 소임이며 그 속에서 주님이 자신을 통해 일하고 계심을 확신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승리요 그 부활은 새로운 창조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새로운 대리인으로 태어나 하나님의 새 창조에 동참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모든 곳에서 정치도 경제도 교육도 문화도 사람을 살리는 제도로 자리잡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리인들은 마침내 이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일을 완성하시려고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확신하며 기다립니다. 이런 믿음과 확신과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은 우리의 시대를 자유와 번영으로 인도하는 이야기를 마음 속에 분명하게 붙들고 사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음 속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까? 온 세상에 들려줄 기쁜 소식을 성경을 통해서 재발견할 수 있도록 주님이 우리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