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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중국은 내가 처음으로 접했던 1980, 1990년대의 중국이 아닙니다. 과거 중국이 지니고 있던 얼굴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韜光養晦’(도광양회)라는 덩샤오핑의 유훈을 따라 숨죽이며 힘을 갈고 닦던 중국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과거의 중국과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中國崛起’(중국굴기), ‘中國夢’(중국몽) 등을 주창하고 ‘一臺一路’(일대일로)와 같은 세계전략을 추구하면서 세계 패권국을 향한 야망을 키우고 있습니다. 중국이 세계 패권국이 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중국과 미국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중국은 변함없이 공산 사회주의 이념을 추구하면서 자유, 민주, 국민주권, 인권을 포함하는 국민 기본권 등 인류 보편 가치는 도외시하고 있는 탓입니다. 중국은 그간 홍콩과 마카오를 반환받은 후 그들을 모두 공산화했고 하나의 중국을 주창하며 대만의 흡수통일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한편 중국은 자신의 경제력 등을 무기로 세계 여러 나라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를 포함하는 일부 국가의 선거 부정에 개입하고 있다는 커다란 의혹이 제기되는 상황입니다.
30년 전인 1995년만 하더라도 중국은 우리와 동등한 입장에서 비교적 겸손한 자세를 보이면서 우리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국빈 방문한 장쩌민(江澤民) 중국 주석과 양국 정부 간 협력을 통하여 직업훈련 분야의 원조를 제공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중국의 대규모 연수단이 한국을 방문하여 우리나라의 새마을 사업에 대한 경험을 배워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고속 성장을 지속하고 2000년대에 들어서며 중진국의 수준에 도달할 즈음 서서히 변화되면서 그들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2002년에 시작한 중국의 ‘東北工程’(동북공정)이 우리나라와 관련된 가장 직접적이고도 대표적인 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동북공정은 우리나라의 국경과 인접한 길림성(吉林省), 흑룡강성(黑龍江省), 요녕성(遼寧省) 등 중국의 동북부 만주 지역의 역사를 중국 중심의 만들기 위하여 중국 중앙정부가 그 지역 3개 성과 연합하여 추진한 국가사업입니다. 고구려, 발해 등 한반도와 관련된 역사를 중국 중심의 시각으로 기정사실화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중국 쪽 우리의 백두산을 찾았던 2007년, 그 이전의 중국 여행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수상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2016년 베이징과 호남성(湖南省)의 중국 제1호 국가산림공원이 있는 지역을 관광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07년 여름 중국의 백두산(白頭山)*을 찾아 백두산의 서편 정상에 올랐을 때 백두산이라는 말이 들어간 플래카드를 들고서는 기념촬영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중국 공안으로 보이는 관광 안내원이 우리의 백두산 등정의 모든 과정에 동행하며 우리의 행동을 예의 주시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러한 제한은 전혀 없었습니다.
* 중국은 백두산을 장백산/창바이산(長白山, Changbaishan)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중국 쪽 백두산 서편 지역의 금강대협곡(金剛大峽谷) 역시 장백산대협곡(長白大峽谷)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소추되고 윤 대통령이 체포 구금되어 재판이 진행되는 등의 이른바 ‘탄핵 정국’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한편 이 정국의 배후에는 이른바 종북 좌파와 친중 인사 등으로 분류되는 자유대한민국의 반국가 반체제 세력이 존재하며 중국이 이들과 합세하여 우리나라의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특히 우리의 선거 시스템과 선거 부정에 개입하고 있다는 커다란 의혹이 제기되는 상황입니다.
우리의 영산 백두산을 찾아 중국의 길림성을 여행했던 2007년 7월, 우리 일행은 백두산 등정을 마친 뒤 간도(間島)의 조선인들이 거주했던 연길, 용정과 도문 지역을 찾았습니다. 백두산 인근의 이도백하(二道白河)라는 곳에서 출발한 우리는 연길을 거쳐 먼저 용정(龍井)의 시인 윤동주 생가와 역사기념관을 방문한 뒤 두만강 강변의 도문(圖們) 지역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날 밤늦은 시간 심양으로 되돌아와 인천을 향하는 비행기 속에서 그날의 여행기록을 나의 여행 노트에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행 노트의 기록을 여기에 옮겨봅니다. 많은 사람이 우려하고 있는 중국의 새로운 모습은 중국을 여행했던 2007년에 이미 느꼈던 것이라는 생각이 되살아난 탓입니다. 중요한 기록은 아니지만, 그런 관찰의 기록을 나름 남겨보고 싶은 생각도 했습니다. (2025.2.22)
중국 여행 넷째 날(2007.7.4.):
길림성 용정, 도문, 연길 지역 여행
오늘의 여정은 그제 백두산 등정을 위해서 연길로부터 거슬려 내려왔던 이도백하를 출발, 그 길을 되올라가 우리의 정서가 깊게 배어있는 용정을 찾은 뒤 국경 도시 도문(圖們)이 있는 곳까지를 돌아본 뒤 늦은 저녁 시간 귀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연길을 거쳐 심양으로 되돌아오는 여정이다. 이도백하도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속하지만, 조선족의 숫자가 많지 않은 곳이다. 이곳에는 중국식 풍물이 더 보편적이고 간판도 중국식, 한족이 더 많이 사는 곳이다. 이른 아침 시간 버스에 짐을 싣고 차에 오르는 동안 물건을 사라고 재촉하는 방물장수들의 채근이 여간 아니다. 작은 장뇌삼 한 뿌리가 1,000원, 1,000원씩 하던 종이 수건, 지도값이 500원으로 내려간다.
이도백하를 벗어나자 아귀의 연변에 시원하게 줄기를 뻗은 소나무 숲이 있다. 이름하여 미인송림(美人松林), 아주 곧게 뻗어 올랐다. 수피(樹皮)는 우리의 적송 금강송과 흡사하게 붉다. 얼마 가지 않아 꿀을 파는 곳에서 잠시 차가 멈춘다. 설탕값이 꿀값보다 더 비싸기에 가짜 꿀을 만들 수 없는 곳이 이곳이라고는 하지만, 짧은 기간 동안 꽃을 피우는 이 지역에 이토록 많은 토종꿀을 생산해낼 수 있을까? 도로변에서 자라고 있는 풀들을 살펴보니 할미꽃, 개망초, 개미취 따위의 풀이 눈에 뜨인다.
송강(松江), 동청(東淸), 신곡(新谷)이라는 이름의 작은 읍내를 지나 도착한 곳은 북한에서 운영하고 있다는 묘향산전시관(妙香山展示館), 색동저고리 차림의 여성 도우미와 함께 이창수라는 이름의 관장이 손 자수 작품과 우황청심환, 안궁우황환 따위의 전통 의약품을 설명한다. 사향노루가 발정기에 향을 발산하는 향낭을 재료로 해서 만든 것이기에 중풍, 뇌졸중, 고혈압 등에 특효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태랑평안복무소(太郞平安服務所)에서 다시 잠깐 휴식, 이곳에서는 말린 목이버섯과 산도라지 몇 봉지를 샀다. 목이버섯 한 봉지에 4,000원, 산도라지 한 봉지에 3,000원이다.
북흥(北興)이라는 마을을 지나면서는 소나무가 있는 산을 만나게 된다. 안도현읍(安圖縣邑)을 못미처서는 제법 큰 인공호수 명월호(明月湖)를 지난다. 1950년대에 순전히 인력으로 만든 댐이라고 한다. 안도현읍 지역의 용수를 공급하는 시설이다. 안도현읍을 지난 시각은 11시 반, 출발한 지 4시간쯤이다. 안도현읍을 지나서부터는 2차선 포장도로를 달리지만, 장춘(長春), 길림(吉林)으로부터는 기찻길과 엇갈려 달리기도 하고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 하며 길을 간다. 연길 51Km라는 표지판이 있는 곳의 노변에는 달맞이꽃, 쑥 따위의 낯익은 풀이 보인다.
오호령투도(五虎嶺透道), 터널을 투도라고 말하는 모양이다. 터널이 없으면 한참을 돌아 오를 길을 단숨에 통과해 나아간다. 실로 오랜만에 우리의 산하와도 같은 산야를 지나친다. 산세의 모습뿐만 아니라 소나무가 함께 자라는 숲의 모습도 더욱 친숙하게 느껴진다. 오호령터널을 빠져나와 경사진 길을 내려오고부터는 다시 평지가 이어진다. 촌락이 자주 나타나고 주로 논농사를 많이 짓는다.
역시 인적이 뜸하다 싶은데 긴 여행 중의 그 어디에서도 농약을 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소로 밭을 갈거나 괭이로 밭을 매는 모습이 간혹 눈에 뜨이기는 했지만, 농약 통을 등에 메거나 무엇인가를 이용해서 약제를 뿌리는 광경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또 어느 곳에서도 비닐하우스를 보지 못했다. 화학 비료를 뿌리지도 않는 듯싶다. 비룟값을 고려하면 별 득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아직도 보통은 재래적 방식의 자연 유기농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용정(룽징):
조선 유랑민의 한과 정서가 서린 곳
버스는 연길 시내로 들어가지 않고 시내 남측의 근교를 통과하여 이로부터 10Km쯤 아랫녘의 용정(龍井 룽징)을 향한다. 용정에 이르는 연도의 모습도 큰 변화는 없다. 부드럽게 흘러내린 능선의 언덕엔 옥수수, 콩 따위의 작물이 심겨있고 이따금 벼농사를 짓는 평지가 나타난다. 이도백하보다는 물이 풍부해 보인다. 사과나 배와 같은 과수가 자라는 과수원을 지나치기도 했다.
점심을 먹었던 이화식당에 도착한 시간은 12시 반쯤, 그곳의 메뉴는 이도백하의 고려음식점에서 들었던 것과 비슷한 용정식 토속 음식이다. 닭백숙에 콩나물무침, 김치와 깍두기, 맨 두부, 목이버섯 볶음과 호박나물, 고사리나물, 오이무침... 된장국 맛이 그만이다. 인공조미료를 넣지 않았다는 고추장 맛도 좋다.
연길 쪽에서 용정 시내로 들어서면서 철로를 건너고 곧바로 해란강(海蘭江)을 건넌다. 2Km를 더 가자 앞쪽에 그리 높지 않은 능선을 이룬 산이 나타난다. 이 산의 8부 능선쯤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송정(一松亭)이 있다고 한다. 정자의 모습을 한 한 그루의 큰 소나무, 우리 한민족의 정서와 애환을 담고 있는 이 소나무는 그간 갖가지 연유로 많은 수난을 겪었다고 한다. 누군가에 의해 몇 차례인가 베어지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리 오래지 않은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고 한다.
점심 후의 척 여정은 용정 시내 중심 지역에 있는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 옛터, 요정은 19세기 조선 말기에 국경을 넘었던 우리 한민족의 한이 서린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나라를 잃은 민족이 재기를 꿈꾸며 함께 모여 일하며 배웠던 곳, 만주 독립군과 독립투사들의 정신적인 정처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그때 지어진 2층의 석조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지금은 용정중학교 부속 시설의 하나로 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전시관에는 만주 독립군의 활동상, 시인 윤동주의 체취가 담긴 자료 등이 전시되고 있다. 기념관 건물 앞에는 윤동주의 잘 알려진 시, 「序詩」(서시)가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있다.
전시관을 돌아본 뒤에는 두만강을 연한 북한과의 국경 지대에 자리한 도문 행. 용정으로부터 도문까지는 북동쪽으로 50여 Km의 거리. 완만한 능선을 이루는 넓은 들판, 논농사보다는 밭농사를 주로 한다. 마을은 주로 도로로부터 얼마만큼 떨어진 데에 촌락을 구성하고 있다. 길가에 연해 있는 농가들은 거의 모두가 일률적인 모습이다. 벽돌 위에 붉은 기와를 얹었다. 판재나 목책으로 야트막한 담장이 둘러있고 사립문을 달고 있다. 허술하지만 작은 텃밭을 끼고 있는 집안을 아늑하게 감싸준다. 집안 텃밭에는 온갖 채소들이 자라고 있다. 나뭇가지 지주목이 삼각 형태로 세워져 있고, 집 한 견에는 장작을 재어 놓았다.
그리고 굴뚝. 어느 집에서나 굴뚝을 볼 수 있다. 우리의 풍경 속에서는 사라져버린 굴뚝, 이들은 아궁이에 불을 때서 겨울을 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퇴락하고 남루한 느낌의 모습이지만, 담장과 사립짝이 있고 작지만 소담한 한 채의 집과 불을 때면 연기를 내는 굴뚝, 작은 뜰이 있다. 욕심내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의 소박한 정취가 느껴진다. 서둘지 않고 욕심내지 않으며 주어진 여건 그대로를 조용하게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도문(투먼): 북간도 북단의 우리 민족 거류지
두만강(豆滿江)의 물줄기가 보이는 것은 목적지인 도문(圖們 투먼)이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강 건너 멀리 바라보이는 북한의 모습은 가지런히 정리되어있는 모습이다. 두만강 저편의 강을 따라 우뚝한 산록이 이어 달리는 데 산기슭과 산봉우리에는 단 한 그루의 나무도 자라지 않는 듯하다. 땔감으로 쓰기 위해서 베어낸 것일까? 여행안내원은 숲을 통해 월경을 기도하는 북한 주민을 통제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는 설명을 곁들인다. 나무를 베어낸 탓인지 곳곳에 산사태의 흔적이 눈에 뜨인다. 경사가 심한 곳, 아주 높은 위쪽의 산비탈까지도 화전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모습이 보인다. 산허리를 길게 가로질러 큼직하게 세워진 간판이 보인다. 강 너머 이 먼 곳에서 그 간판의 글씨를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21세기민족의태양김정일주석만세’. 하나씩의 글씨가 써진 간판의 크기가 아마도 사방 4~5m쯤이 되지 않을까 싶다.
용정 출발 1시간 반쯤의 시간을 달려 도문에 이르렀다. 시내가 가까워지면서는 두만강을 연해 있는 도로를 달린다. 두만강 물줄기 한군데를 선으로 그어 저쪽은 북한, 이쪽은 중국이란다. 도문의 어귀에서 두만강을 가로질러 북한의 삼양시(三陽市)로 이어지는 철교의 중간 저편은 북한, 이편은 중국이란다. 그 다리의 양쪽 색깔도 차이가 난다. 철교 교각의 반쯤은 중국 쪽 색깔은 검은 회색, 북한 쪽은 밝은 회색이다.
조금 더 달려 두만강의 어느 나루터에 다다랐다. 100m가 채 안 되어 보이는 폭의 강물이 북쪽으로 거슬러 흐른다. 강변엔 수양버들이 늘어져 있고 나루터에는 대나무로 만든 나룻배가 몇 조각 떠 있다. 관광객을 태우고 두만강을 유람한다. 100여m의 위아래를 오가며 사람들은 주로 사진을 찍는다. 나루터의 간이 상점에서는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 김정구 선생의 「눈물젖은 두만강」노래가 연이어 흘러나온다. 누구나 이곳에 오면 옥수수 막걸리 한 잔씩을 든다고 한다. 대나무로 만든 의자에 앉아 달큰한 맛의 막걸리 한 잔을 마셨다. 술맛을 아는 몇 분은 기대한 술맛이 아니라며 고량주 한 병을 주문했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나루터 건너편의 북한 강변. 다갈색 군복에 총을 멘 병사 두 명이 허리까지 자란 수초를 헤져나가며 순찰을 돌고 있다. 일상이 되어버린 이쪽 중국의 풍경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도 같다. 그들의 총부리가 확연하게 보일 정도이니 그들도 이쪽 사람들이 들어 올리는 술잔, 그들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이쪽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이역만리 머나먼 길을 돌아와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산하. 약 40분쯤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낸 뒤 우리는 국도가 아닌 고속도로를 달려 연길까지 되돌아오는 데는 약 절반쯤의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연길(옌지):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의 중심
연길(延吉 옌지)은 조선족이 자치를 허용받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도이다. 60여만 명의 사람들이 산다. 연길에서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중국의 재래시장을 구경할 수 있었다. 장이라기보다는 시내 변두리의 좌판 노변 시장이다. 과거 우리의 시골 장과 다를 바가 없다. 모든 시장이 그렇듯이 사람들의 냄새가 물씬하다. 과일전, 채소전, 그리고 대파, 가지, 오이만을 파는 좌판도 있다. 된장, 고추장, 한족장을 파는 장사꾼도 있다. 세숫대야에 하나 가득 붕어를 파는 여인도 있는가 하면 전을 부쳐 즉석 먹거리를 파는 부부도 있다. 깨어나기 직전의 약병아리를 불판에 구워 파는 진기한 모습도 볼 수 있다. 차림으로 보아 조선족과 한족 사람이 반반쯤이다. 길에는 사람들과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 인력거가 뒤섞여 함께 오간다. 조선족 할머니 한 분이 낯선 우리의 모습을 보고 우리말로 “참관을 나오셨구만이라”라고 말했다. ‘참관’이란 북한 투의 어휘를 구사한다.
짧은 시간 서둘러 시장을 둘러본 뒤 마지막 코스로 반달곰사육장을 찾았다. 반달곰을 번식시켜 백두산 야생의 상태에서 키운 뒤 이들로부터 담즙을 내서 곰쓸개 웅담 건강 약품을 제조하여 판매하는 곳이다. 2,600여 마리의 곰이 사육되고 있다고 한다. 동물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는 하지만, 철망으로 된 좁다란 우리 속에서 쓸개를 드러내서 담즙을 빼는 모습이 끔찍해 보였다. 별실에 들어가 20여 분 동안 약품 판매를 권고하는 설명을 듣고 나오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저녁 식사는 북한 측에서 운영하는 북한식 토속음식점에서 들었다. 돼지고기볶음, 닭고기찜, 목이버섯, 된장국 대신 미역국, 한식 요리점에서 빠지지 않는 인절미, 김치와 깍두기의 밑반찬이 나왔다. 옛맛을 느낄 수 있는 저녁이었다.
내일 인천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연길에서 출발하는 심양 행 비행기에 자정쯤의 시간에 올라야 한다. 비행기를 타기까지는 약 2시간쯤의 여유가 있다.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특별서비스로 발 경락 마사지를 받았다. 새로운 문화? 체험의 하나였다.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발 곳곳은 물론 정강이와 허벅지, 팔과 어깨, 등을 차례로 마사지 받았다. 전신 마사지를 받는데 족히 1시간의 시간이 걸렸다. 개운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마사지를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편치 못한 느낌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심양의 호텔로 돌아온 시각은 1시가 넘은 한밤중, 이른 아침 인천행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서는 두세 시간만이라도 눈을 붙여야 했다. 두 시 반쯤이 되어서야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의 잠자리에 들었다.
중국 동북 3성 여행 단상:
중국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여행 마지막 날인 7월 5일(2007년), 우리는 9시에 심양공항을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6시 반쯤 호텔을 출발했다. 공항까지는 30분쯤의 거리, 공항은 도심을 통과한 어딘가에 있었다. 거대한 스타디움과 잔디가 뒤덮인 지붕이 있는 과학관, 마천루와도 같은 고층빌딩,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 인구 570만 명, 중국 5대 도시의 하나라는 실감이 났다.
중국은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그와 비슷한 속도의 도시화도 함께 겪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본의 위력을 서서히 실감하기 시작했고, 현대 문명은 편리하고도 근사한 것이란 걸 깨닫기 시작했다. 발 빠른 이들은 건물을 짓고 장사를 키우고 돈을 굴리기 시작했다. 도시는 하루가 다르게 치장을 하면서 팽창해 나갔다. 만만디(漫漫的)의 중국인들은 잰 발걸음을 재촉하며 뛰고도 모자라 날아갈 채비를 하는 듯 보였다. 조바심을 내는 흔적이 역력하다. 실리라는 개념을 생활 속에 깊이 뿌리내린 그들은 그들의 삶을 빠른 속도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식당에서는 유리컵을 쓰지 않는다. 물컵으로 종이컵을 쓴다. 한 번 쓰고 버리면 그만이다. 그저 편리할 따름이다. 호텔의 실내화는 마분지로 만든 듯한 일회용이다. 겨우 달아나지 않을 만큼 발등에 걸칠 수 있다. 그 슬리퍼를 신으면 허공을 밟고 다니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것들은 급속히 변화되고 있는 도시의 모습일 뿐, 도시를 벗어난 풍경은 사뭇 다르다. 거대한 중국의 대부분은 아직도 옛 농촌의 모습 그대로인 듯하다. 80%에 달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농촌에서 농사로 생계를 이어간다고 한다. 13억 명의 인구 중에서 10억 명 이상이 농민이라는 계산이다.
도시 밖의 모습은 가득한 자연 속의 평화로운 풍경이다. 시계를 과거의 시간으로 한참 되돌려놓은 느낌이다. 세상에 아무것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것만 같은 고요와 정적이 흐른다. 사람들은 무얼 하는지 모두 어디론가 숨어버린 듯하다. 빨랫줄에 걸린 옷가지의 모습도, 학교 운동장에 뛰어노는 어린이들의 모습도 좀체 눈에 뜨이지 않는다. 사람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사람들은 어디로 간 걸까?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조급함도 없는 고요의 나라를 찾은 느낌이다. 도시와 농촌, 중국에는 이 둘이 서로 완전히 다른 세계가 공존하고 있다.
편리와 즉흥의 문화, 관용의 종언
세상의 중심에 있는 나라 중국, 中國이라는 나라의 이름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남한의 100배쯤이 되는 국토면적, 세계의 5분지 1쯤의 인구. 중국은 오랜 역사와 더불어 격랑과 부침, 거듭된 흥망성쇠의 시대를 살아오면서 지금에야말로 최대의 통일국가를 이루고 있다. 조차지로 내주었던 홍콩과 마카오 반환받고, 아직 대만과의 통일을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중국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중앙집권의 통일국가를 만든 셈이다.
반복되는 역사를 통해 중국인들은 중국의 통일이 영원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을 테지만, 그들은 역사가 어디까지나 그들의 편으로 되돌아올 것이란 낙천적인 사고를 각인시켰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매사를 서두르지 않고 여유 있게 바라보며 조급해하지 않는다. 실리에는 도통한 이들이 중국인들은 크게 보면서 작은 문제에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들은 적당히 타협하는 융통성을 지니고 있다. 느긋하게 참고 기다리는 인내심을 지니고 있다. 차부뚜어(差不多) 와 만만디(漫漫的)라는 두 마디 말이 그들의 문화이며 그들의 사고방식이다.
한편 그들은 수많은 이민족을 자신의 품에 끌어안기 위해 대국적인 관용을 베푼다. 소수민족의 자치를 허용하고 이들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자녀의 출산을 하나로 제한하는 이른바 ‘One Child Policy’의 예외를 인정한다. 심지어 그들의 언어를 공부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그런데 여유를 가지고 관용을 베풀던 중국이 변하기 시작한 것 같다. 여유와 관용을 베풀기에는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일까? 편리한 것에 익숙해지기고 즉흥적인 문화에 쉽게 물들기 시작했다.
문자의 예를 보더라도 그렇다. 중국인들은 한자를 간략하게 쓴 간자(簡字), 간체자(簡體字)를 쓴다. 말하자면 ‘줄인 말’ 일종의 약자(略字)를 쓰는 것이다. 상점이나 지명의 간판을 보면 도통 그 글자를 읽을 수 없다. 縣은 县으로, 龍의 龙, 書는 书, 興은 兴, 動은 동动, 陽은 阳, 發은 穷로 간추려 쓴다.
길림성의 조선족자치주의 자치권에 대한 제약이 가해지기 시작하고 있다고 한다. 장백산관리소의 운영권이 조선족자치주로부터 길림성으로 이관되고 자치주 정부의 공무원 임명에 있어서 중앙정부의 입김이 커지고 있다고 한다. 역사유물에서 고구려라는 표기는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동북공정의 일환일 것이다. 중국이 자신을 잃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앞으로 닥치게 될지도 모르는 민주화, 소수민족 독립운동의 요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것일까? 중국에 관용의 종말이 도래하고 있다.(2007.7 작성)
첫댓글 김정일조차 생전에 김정은에게 중국을 믿지말라고 했습니다. 우크라이나를 제쳐놓고 트럼프와 푸틴이 사우디에서 종전협상을 벌이고 있습니다. 현금의 탄핵정국을 이용하여 미북간 접촉이 심심찮게 들려옵니다. 오로지 정권에만 올인하겠다는 정치인들의 줏대없는 정체성에 호시탐탐 주변국의 먹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포위되고 있다는 느낌. 평범한 국민이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데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그중에 제일 반기는 쪽이 중국과 북한이 아닐까요. 대만 다음엔 한반도라는 사실. 세세손손 가르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