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한-익산 韓 (今 益山) 2
當年枉信漢亡人
麥秀殷墟又一春
可笑蒼黃浮海日
船頭猶載善花嬪
当年에 그릇 漢亡人을 믿었으니
麦이 秀한 殷墟에 또한 봄이로다.
可히 우습다 蒼茫히 海에 浮하던 日에
船頭에 오히려 善花镇을 실었더라.
当年은 衛滿이 来附하던 時라 枉信은 그렇게 믿었다 함이다. 漢亡人은 衛満을 가르쳤다. 麦秀는 箕子가 東来後에 白馬를 타고 周에 朝할새 옛 殷墟에 지나다가 麦秀離離하였음을 보고 詩를 作하여 曰 麦秀漸漸 수여 禾泰離離로다 하였다. 이에 殷墟에 지나다 麦秀의 歌를 부름같이 箕準王도 感想이 있다.
註 이때 韓王은 富強하여 나라를 統治하고 亡国의 恨을 느낄만한 일이 없건만 詩人은 아무쪼록 箕準을 箕子의 子孫으로 만드는 誣称이다.
箕準이 北方 千余里 外에서 衛満에게 쫓겨 蒼茫히 海에 浮하여 南下하였다 하고 또 金馬郡에 와서 王이 되었다 하니 王은 곧 오라하라 各代表들이 推戴하는 것은 北方 千余里에서 온 通客을 어찌 그 地方代表들이 推戴할 수 있을까. 이것은 詩人의 妄筆이 分明하다.
箕準은 근본 馬韓에 사는 한 偉人이다 左右 宮人을 거느리고 金馬에 居하여 武康王이라 称하고 그 夫人 善花로 더불어 竜華山에 遊하였다.
舆地勝覧에 竜華山은 金馬郡 八里에 있으니 武康王이 人心을 得하아 善花로 더불어 遊하였다고 하니 善花는 王의 夫人이오 至今 竜華山에 雙陵이 있다. 五金寺 西頓 百歩에 있으니 武康王과 그 妃의 陵이라 称하였다.
- 한글
그때에 잘못 한망인을 믿었더니
밀이 무성한 은허에도 또한 봄이로구나.
어리석다, 넓고 푸른 바다에 떠돌던 때에
배 머리에 오히려 선화진을 실었었네.
당년은 위만이 와서 붙어있던 때라 그렇게 믿었다는 말이다. 한망인은 위만을 가리킨다. 밀이 무성하다는 것은 기자가 동쪽에서 온 뒤 백마를 타고 주나라에 조회하러 갈 때 옛 은허를 지나다 밀이 무성함을 보고 시를 지어 "밀이 점점 자라나며 곡식도 무성하구나" 라고 했다. 이에 은허를 지나며 밀이 무성한 것을 읊은 것처럼 기준왕도 감상이 있었다는 말이다.
주석: 이때 한왕은 부강하여 나라를 통치하고 망국의 한을 느낄 만한 일이 없었건만 시인은 어쨌든 기준을 기자의 자손으로 만드는 허칭이다.
기준이 북방 천여리 밖에서 위만에게 쫓겨 넓고 푸른 바다에 떠돌다 남쪽으로 내려왔다 하고, 또 금마군에 와서 왕이 되었다고 하니, 왕은 곧 그들이다. 각 대표들이 천여리 밖에서 온 통객을 어떻게 그 지방 대표들이 추대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시인의 망령된 필치가 분명하다.
기준은 본래 마한에 사는 한 위인이었다. 좌우 궁인들을 거느리고 금마에 거주하며 무강왕이라 칭하고 그 부인 선화와 더불어 용화산에서 놀았다.
여지승람에 용화산은 금마군 8리에 있으니 무강왕이 인심을 얻어 선화와 더불어 놀았다고 하니, 선화는 왕의 부인이며 지금도 용화산에 쌍릉이 있어 백보 서북쪽에 있으며 무강왕과 그 비의 능이라고 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