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즈마리, 변하다
전창수 지음
1.
시해는 집에 들어오는 벌레를 쫓는 방법은 없을까를 고민해 보았다. 약을 뿌리는 건, 일시적인 방편이니, 지속적으로 벌레가 근처에 안 오게 하는 방법이 필요했다. 어느 날, 상구네 집에 갔는데, 식물이 하나 있었다.
“이게 뭐야?”
“로즈마리.”
“어, 이걸 왜 키워?”
“벌레들이 싫어하거든”
“그래, 나도 키워야겠다.”
“그래, 그럼 하나 골라봐.”
“진짜?”
“어, 난 많거든. 가지치기 하면 여러 개 키울 수 있어.”
“그렇구나.”
벌례 때문에 고민이었던 시해는 상구가 고마웠다. 상구의 집에서 로즈마리를 골라 보는데, 희한한 모양의 로즈마리가 하나 있었다. 위와 중간이 넓은데, 위와 중간의 사이는 좁고, 아래 쪽 역시 좁게 풀들이 나 있는 로즈마리였다.
“이건 왜 이래? 다른 건 반듯한데?”
“나도 모르겠어. 아무리 똑바로 자라게 하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해도 늘 저래. 희한한 건, 그래도 죽지는 않는다는 거야. 어때, 맘에 들어?”
“음… 난 오히려 이런 게 좋은 거 같은데?”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역시, 그건 내꺼가 아니었다니까.”
“왜?”
“왠지 저 로즈마리는 나를 싫어하는 거 같거든.”
“그런 느낌도 들어?”
“응, 그래서 나도 그 녀석을 언젠가 떠나보내려고 마음먹고 있었지.”
“아, 그래? 고맙다. 내가 질 키워볼게.”
‘내가 고맙다. 히히.“
시해는 로즈마리를 가지고 집에 왔다. 그것을 보면, 왠지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로즈마리가 벌레를 쫓아준다는 말이 좋았다. 그래, 이젠 벌레에서 해방되는 거야!
2.
시해는 로즈마리를 데리고 와서 지극적성으로 돌보았다. 너무 지나치게 물을 많이 줘도 안 된다는 말에, 물을 언제 주는 것이 적당할까를 고민하면서 물을 주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로즈마리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그 덕분인지, 더 이상 시해의 집에 벌레가 접근하지 않았다. 시해는 살 것 같았다. 이 로즈마리가 아니었다면, 여전히 벌레들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거라는 안도감이 시해의 마음에 자리잡았다. 시해는 더욱 더 로즈마리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시해는 꿈을 꾸었다. 로즈마리가 사람으로 변하는 꿈이었다. 그것도 여자다. 사람으로 변한 로즈마리는 시해에게 몹시도 불친절했다.
”아, 씨X!“
사람으로 변한 로즈마리가 욕부터 해댔다.
”아니, 누, 누구세요?“
”너 때문에 망쳤다.“
”망쳤다니요?“
”내가 사람되는 거. 너 나를 왜 이렇게 예뻐해? 앙!“
아름다운 그 여인은 오히려 시해를 나무랐다. 시해는 정신을 못 차렸다.
”나를 미워해야 내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왜 나를 이리로 데려와 가지고, 끔찍이 아껴주는 거야?“
”그야, 식물이니까요.“
”난 식물이 아니라고!“
”좀 전까진 식물이었잖아요. 로즈마리.“
”그래, 그랬지.“
”어떻게 된 거예요?“
”마법에 걸렸어. 악.“
”왜요?“
”난 다시 식물으로 변한다. 아아 억울해. 아직 할 말도 다 못…“
시해는 그녀가 식물로 다시 변하는 것을 보았다. 꿈에서 깨니, 로즈마리는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저 식물이 정말로 사람으로 변할까? 그럴 리는 없을 거 같은데. 로즈마리를 바라보는 시해의 표정에 두려움이 일었다. 여태껏 자신이 열심히 돌봐왔던 로즈마리에게서 배신감도 느꼈다. 사랑의 대가(代價)가 이런 것인가. 시해는 로즈마리를 정말로 미워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즈마리가 정말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들었다. 한편으로는 로즈마리가 정말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도 생겼다. 꿈에서 본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시해는 이 알 수 없는 양가감정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시해를 지탱해주는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 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시해는 밤새도록 로즈마리를 기다렸다. 로즈마리는 변하지 않았다. 아침이 오고 뜬금없이 상구한테 전화가 왔다. 상구가 시해네 집에 있는 로즈마리를 보고 싶다고 했다. 시해는 상구에게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물었다. 상구가 자기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 로즈마리가 너무 보고 싶어서 밤에 잠을 못 잤다고 했다. 시해는 상구에게 집으로 오라고 했다. 상구가 집까지 오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왔기 때문이다.
시해는 상구에게 밤에 꾸었던 꿈 이야기를 했다. 상구도 비슷한 꿈을 꾸었다고 했다. 지금은 꾸지 않지만, 그 로즈마리를 갖고 있을 때는 자주 그런 꿈을 꾸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 로즈마리를 미워했고, 그래서 시해에게 준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미안하다고 했다. 껄끄러우면, 자기가 다시 가져가겠다고도 했다. 시해는 싫었다. 이 로즈마리를 미워하기가. 시해가 상구에게 말했다.
”너는 미워하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 로즈마리를 미워하지 않을 거야. 그냥 꿈일 뿐이잖아.“
”그런데, 이상한 꿈이지.“
”너는 이 로즈마리를 버려놓고 다시 보고 싶어 이렇게 온 거잖아.“
상구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이 로즈마리는 내가 잘 키워볼게. 보고 싶으면 언제든 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상구의 마음이 틀어진 것은. 상구는 한참동안 아무 말이 없더니, 잘 있어, 라는 말 한마디 남기고 휭하니 가버렸다. 시해는 상구의 태도가 조금 이상했지만,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해는 상구를 보내고 로즈마리를 쳐다보았다.
”로즈마리, 오늘부터 너에게 너의 이름을 지어줄게. 영순이. 어때? 마음에 들어? 넌 오늘부터 나의 여자친구다.“
시해는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로즈마리에게 왜 여자친구라고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었다.
상구가 자주 꿨다는 그 꿈을, 시해도 자주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자주 나타나 시해에게 투덜댔다.
”이러면, 내가 사람이 못 되잖아! 제발 날 사랑하지 말라구.“
”왜, 왜 사람이 못 되는데요?“
”그걸 말로 설명할 수가 없…아, 씨X. 또 변하네…“
듣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늘 설명을 들을 수 없었다. 꿈 속의 영순이는 언제나 투덜대기만 하다가 로즈마리로 돌아갔다. 꿈속의 영순은 늘 알몸이었지만,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옷을 왜 안 입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저 식물로 살아가느라 옷이 없겠거니 짐작만 할 뿐이었다. 더더군다나, 그건 꿈일 뿐이잖아, 라며 시해는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어떤 성적인 욕망도 허용되지 않는 꿈일 뿐이었다.
가끔, 꿈에서 깨고 나면 몽정을 할 때도 있었다. 알몸의 영순이가 너무나도 탐이 나서 그녀에게 성관계를 요구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러고자 시도하려고 하면 꿈에서 깨었다. 시해는 로즈마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자꾸 그의 꿈 속에 나타나서 이렇게 성적 욕망을 부추기는지. 시해는 로즈마리를 계속 돌봐주는 게 맞는지, 계속 사랑해야 하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시해는 그래서 결정을 내렸다. 한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가지치기를 해보기로. 만약, 이 로즈마리가 진짜 사람이라면 잎을 자를 때 조금은 아플 거다. 그래서 다시는 내 꿈에 나타나지 않을 거다. 라는 위험한 생각도 함께 했다.
3.
꿈은 이어졌다. 아주 조금 잎의 귀퉁이를 살짝 잘라 내었을 뿐이라서 그런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해는 로즈마리 잎의 반을 잘라내기로 했다. 가위를 들고 그 앞에 섰다.
”네가 사람으로 변하면 안 자른다!“
시해는 잎을 잘라내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꿈일 뿐인 건가. 시해는 문득, 자신이 이 로즈마리를 미워하고 있다는 생각에 미쳤다. 시해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시해는 이 로즈마리 영순을 지극정성으로 돌봐주기로 마음먹었고 사랑하기로 마음먹었었다. 지금의 그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러지.“
시해는 다시 로즈마리를 지극정성으로 돌봐주기로 마음먹었다.
“미안하다. 앞으로는 너를 더욱 지극정성으로 돌보아 줄게”
꿈은 점점 더 심해졌다. 어느 날은 사람으로 변한 영순이가 시해를 죽이려고 칼을 든 것을 보기도 했다. 로즈마리 영순을 사랑하면 할수록, 꿈은 점점 더 악몽으로 변해갔다. 시해는 자꾸 왜 그런 꿈을 꾸게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너를 돌봐주는데, 그 대가가 겨우 이거냐, 며 푸념을 하는 순간이 늘어만 갔다. 한편으로는 꿈일 뿐이잖아, 라며 위안을 삼기도 했다. 그렇지만, 꿈이 자꾸 신경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시해는 상구에게 전화를 해서, 지금 꾸고 있는 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상구가 미안하다고 했다. 자기도 그런 꿈을 자꾸 꾸었다고 했다. 이 식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시해가 가져가겠다고 해서 반가웠다고 했다. 아무래도 버리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상구가 말했다. 아직도 그 식물이 보고 싶냐고 상구에게 물었다. 지금은 벗어났다고 했다. 어떻게 벗어났냐고 물었더니, 시해가 지극정성으로 돌봐주겠다는 말을 듣고 나서는 더 이상 그리워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상구가 물었다.
“아직도 그 마음 변함 없는 거야?”
“나도 잘 모르겠어. 어느 날은 미운데, 그러다가도 이럼 안 되는데 하는 생각도 들고. 그냥, 식물일 뿐이잖아. 그리고 꿈은 꿈일 뿐이고. 왜 분리가 안 되는 거지?”
“버리고 싶지 않으면, 다른 사람한테 줘봐. 대신, 그 상황을 솔직히 얘기하고.”
상구는 다른 누군가가 또 같은 피해를 입으면 안 된다면서, 시해에게 솔직히 얘기하라고 했다. 시해는 그 식물을 받아 줄 사람이 있을까, 하고 상구에게 물었다.
“그거야, 잘 모르지. 동기들 집에 초대해서 파티 한번 벌이는 건 어때? 네 생일이 언제지?”
“아직 멀었지.”
“뭔가 축하할 만한 일 없어?”
“이번에 면허 땄어.”
“아, 그걸 이제야 얘기하냐. 축하파티 연다고 해. 내가 도와줄게.”
상구는 시해와 파티의 자세한 상황에 대해서 얘기하고, 이 식물이 누구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건가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파티에서 시해가 겪은 이야기를 모두 이야기할 거라고 하면서.
4.
시해와 상구의 친구들이 면허를 땄기 때문에 축하파티를 연다는 말에 다소 의아해했지만, 파티에 오면 깐풍기를 시켜주겠다고 하니, 흔쾌히 오겠다고 했다. 다른 것보다 깐풍기는 무척 먹고 싶었나 보다. 여섯명이 오기로 했다. 상구와 시해는 로즈마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작전을 짰다. 시해가 꾸는 지나친 악몽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악몽을 꿀 수도 있다는 정도만 얘기하기로 했다. 시해는 그래도 되냐고, 상구에게 물었더니, 만약 불편을 느낀다면, 버려도 된다고 얘기해주면 된다고 했다. 시해는 맞는 말인 거 같다며 동의했다.
파티날이 되었다. 토요일이었다. 시해는 친구들에게 12시쯤 오라고 했다. 10시쯤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친구들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시해는 문자를 보냈다. 몇 시쯤 와? 여섯 명 모두 전화를 받지 않았고, 10분 후 답문이 오기 시작했다.
“미안. 급한 일이 생겼네. 갑자기 부모님이 오신대”
“미안, 오늘 여자친구가 만나자고 떼를 써서. 거기 간다고 했더니, 오늘 자기 안 만나면 헤어지는 걸로 알래.”
“미안. 동생이 갑자기 아파서.”
“미안. 갑자기 해외출장이 잡혔네. 오늘 아침에 연락왔어.”
“미안. 나 갑자기 아파서 병원에 와 있어. 링거 맞고 있어.”
“미안. 오늘 집이 이사하는 걸 깜빡했네. 와이프가 그걸 잊어버리면 어떡하냐고 벼르고 있어서.”
여섯 명 모두 오지 않았다. 시해는 상구한테 전화를 걸었다. 상구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문자를 보냈다.
‘모두 못 온다는데 어떡하지?“
10분 후 상구한테 전화가 왔다.
“시해야. 미안하다. 이제 나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네. 네가 알아서 해야겠다.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버리던가 해야 할 거 같아.”
시해는 로즈마리를 놓고 한참을 고민했다. 이걸 버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러다가 또 잠이 들었다.
“넌 내가 사랑의 대상이 아니고, 성욕의 대상이지? 네 알량한 성욕을 채우려는 욕심으로 나를 택한 거야. 가증스런 자식!”
시해는 꿈에서 깨었다. 로즈마리는 여전히 로즈마리였다.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건, 허무맹랑한 생각인 걸 시해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5.
아침부터 시해는 분주했다. 신제품 볼펜광고의 프리젠테이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 광고를 못 따내면, 시해는 팀장 싸움에서 밀릴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카피라이터 인생을 마감해야 할 지도 몰랐다. 사활을 걸어야만 했다. 볼펜에서 영순의 얼굴이 겹쳤다. 볼펜광고에 영순의 알몸이미지를 덧입히고 싶었다. 성인광고의 이미지를 이용하면서도, 성인광고 같지 않게 덧입히는 방법을 시해는 고민했다. 로즈마리를 처음 봤을 떄가 떠올랐다. 로즈마리의 이미지와 볼펜의 내구성을 잘 결합하면? 뭔가 나올 것 같았다.
대박을 쳤다. 광고주가 시해가 만든 광고에 흡족해했고, 볼펜은 대히트를 쳤다. 시해는 광고의 성공 덕분에, 3팀의 팀장을 맡게 되었다. 팀장 자리는 프리젠티이션 능력도 좋아야 하지만, 팀원들이 좋은 카피를 쓸 수 있도록 지원도 해 주어야 한다. 지원이야 팀장의 몫은 아닐 수도 있지만, 시해는 그것이 팀장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팀원의 사기가 높아지고, 훌륭한 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악몽은 계속되었다. 로즈마리 덕분에 시해는 점점 더 성공의 길을 달리고 있었지만, 꿈 속의 영순은 시해를 점점 더 괴롭혔다.
“나를 여자로만 보는 개자식!”
“왜, 나 강간이라도 하지 그러니?”
“내가 아직도 여자로 보이니?”
영순는 비아냥거렸고, 시해는 너무 두려웠다. 언제든 저 로즈마리가 사람으로 변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이젠 정말 로즈마리를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로즈마리를 버리려고 결심하면, 이번엔 영순이 꿈에 나타나 시해에게 명령했다.
“나 버리지 말아!”
“나 버리면 죽을 줄 알아!”
“나 때문에 잘된 거잖아. 은혜도 모르고!”
시해는 영순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해는 악몽과 함께 몇 년을 보냈다.
시해는 영순이 실존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시해가 로즈마리 영순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본 건, 신입사원 면접 자리에서였다. 신입사원 영순은 꿈에서의 영순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시해는 면접관이었다. 눈앞이 아득했다. 저 사람을 뽑지 않으면 시해는 뭔가 큰일날 것만 같았다. 시해는 다른 면접관에게 우리 팀으로 넣을 테니, 신입사원 영순을 뽑자고 했다. 영순의 이름은 영아였다. 시해는 영아를 뽑았다. 신입 카피라이터. 시해는 영아가 좋으면서도 미웠다. 한편으로는 잘 해 줬지만, 실수할 때는 따끔하게 혼을 냈다. 영아는 그런 시해를 잘도 버텨냈다.
6.
어느 날 영아가 시해에게 말했다.
“팀장님, 저한테 왜 이렇게 잘 해주세요?”
뜨끔했다. 시해는 자기가 뭘 잘해 줬는지 생각해 봤지만, 딱히 잘해 줬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너한테 잘해 줬다고?”
“네. 왜 이렇게 잘 해주세요?”
“글쎄.”
영아는 한동안 심각한 표정으로 시해를 보더니 말했다.
“저희 집에 가요”
“응?”
“집에 가요.”
시해는 잠깐 놀랐으나, 오래 망설이지는 않았다.
자꾸만 로즈마리 영순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로즈마리 영순이 있는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정말 그래도 될까?”
“그래요, 가요. 까짓 거.”
시해는 영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으니, 영아의 집에 같이 가기로 했다.
시해의 다소 들뜬 마음이 하늘에 부딪혔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과 드디어, 나도, 라는 생각이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과 맞부딪혔다.
영아는 전혀 긴장된 표정이 아니었다. 가는 도중 영아가 물었다.
“팀장님, 저 그럼 내일부터는 팀장님께서 밥을 사 주시는 거죠?”
“그, 그러지, 그렇게 하자.”
시해는 영아의 거침없는 대쉬에 당황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영아의 집은 조금 멀었지만, 깔끔한 동네였다. 시해는 드디어 영아의 집에 도착했다는 기쁨에, 영아에게 물었다.
“나, 정말 영아 집에 가도 돼?”
7.
영아는 대답하지 않고, 말없이 영아네 현관문을 열었다. 시해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영아의 집이 꽤 넓다는 건 알겠는데, 왜 가구가 하나도 없는 걸까. 침대도, 책상도, 의자도, 심지어 이불도 보이지 않았다.
“영아씨, 왜 가구가 하나도 없어?”
영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해를 집안으로 끌어당겼다. 영아의 웃음소리가 저 멀리 울려퍼졌다. 시해의 눈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영아의 벗은 몸조차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니, 시해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집 안으로 들어오는 찬란한 햇빛, 그리고 여기저기서 흘려들어오는 물소리만이 시해의 귓가에 들려오고 있었다. 시해는 그 자리에 서서 얼어붙었다.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의 모습, 시해의 눈에는 이제 사람이 된 영아가 문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고, 시해는 따라갈 수 없었다. 시해에게 들리는 물소리는 점점 더 거칠고 세졌다. 햇빛도 점점 따가워졌다. 시해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그리고 시해는 점점 더 시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