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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음성의 데시벨 높이기>의 줄거리:
애인이 사랑에 겨워 귀엣말을 속삭이는데 하필 바로 그 때 지하철 전동차가 승강장으로 들어오면 한 마디도 알아 들을 수가 없게 됩니다. 애인의 속삭임은 20dB인데 반해 전동차의 소리는 100dB이나 되기 때문이지요. 데시벨은 청각 뿐 아니라 마음에도 문제가 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모든 것이 우리 마음에 대고 뭔가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안 들리십니까? 침묵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서 그 음성의 데시벨이 낮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음성의 데시벨 높이기
(열왕기상 19:9~14)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음성의 데시벨 높이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 음성의 데시벨 높이기’
데시벨(decibel dB)은 소리의 상대적 크기를 나타나는 단위입니다. 보통 건강한 20대 남성이 조용한 방에서 들을 수 있는 최소한의 소리는 0데시벨입니다. 아주 작은 물방울 하나가 1m 높이에서 마룻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1데시벨이고, 연인이 귓속말로 속삭이는 소리는 2데시벨, 보통 대화 소리는 45~60데시벨,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자기기 중에 가장 시끄러운 진공청소기가 81.3데시벨입니다. 더 나아가서 기차 소리는 100데시벨이고, 제트 엔진의 소음은 150데시벨, 총을 바로 귀에 대고 쏘면 160데시벨까지 나온다고 합니다. 80데시벨 이상의 소음을 오랫동안 듣다보면 청각에 장애가 생기고 120~140데시벨의 소음은 사람이 고통을 느끼기 시작한답니다. 저는 이러한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제가 살고 있는 강릉에 전투비행대가 있는데 빨간 마후라 파일럿의 본고장이라고 합니다. 전투비행대가 아파트에서 직선거리 3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전투기들이 이륙하거나 예열을 할 때에 제트엔진의 소리가 문을 열면 전화 통화도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또한 야간 비행을 할 때도 있는데 8시나 9시에 뉴스를 보고 있으면 전투기 소음 때문에 아무 소리도 안 들립니다. 이 전투기 소리가 150데시벨인데 뉴스 소리는 60데시벨이니 들릴 리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청각이 아닌 마음이 듣는 소리의 데시벨입니다. 비유적으로 어떤 사건의 상대적인 소리가 150데시벨이라면 별의별 사건들이 다 벌어져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있어도 마음에는 그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데 마음에 들리는 음성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청각뿐만이 아니라 눈으로 보는 것들도 마음에 소리를 전달합니다.
강릉에 내려오는 분들이 도심을 떠나 동해 바다를 바라 볼 때에 동해 바다가 말해주는 것이 있는데 아! 시원하다는 마음입니다. 마음에서는 마치 보면서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듣는 상대적인 데시벨이 있습니다.
이러한 선 이해를 가지고 본문을 봅니다. 엘리야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이스르엘로부터 남 왕국 유다의 브엘세바 남쪽 경계까지 이세벨을 두려워하여 도망갔는데 그 거리가 142km 정도 됩니다. 그 지점으로부터 다시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나는 호렙산까지 이동을 하는데 약 350km 정도로 거의 500km 정도의 엄청난 거리를 도망한 것입니다.
사람이 하루에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가 32km 정도로 십일 쯤 걸리는데 사십 주 사십 야가 걸렸다고 하는데 하루에 보통 9km 정도 걸어서 도달한 것입니다.
제가 산책을 할 때에 2시간에 9km를 걷습니다. 그러니 엘리야의 심신이 얼마나 지쳐있었는가를 알 수 있고, 이 도망은 엘리야가 온전한 신앙 상태에서 행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호렙산에 도착한 엘리야를 향하신 하나님의 첫 마디는 9절에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하십니다. 10절에 엘리야가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여호와께 열심히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몰라서 질문하신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엘리야의 대답이 우리의 주목을 끄는데, 언뜻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에 근거한 올바른 내용의 답변 같습니다마는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는 동안에 갈멜산의 승리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언약을 배반한 것은 똑같았고, 아합과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다 잡아 죽이고, 가뭄을 예언했던 자기도 잡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갈멜산에서 위대한 승리를 이끌 때에나 이세벨에게 위협을 느껴 호렙까지 도망하는 동안에나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지금 하나님께서 물으신 질문의 의도를 올바르게 간파하지 못했고, 자신의 도망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었던 것입니다. 엘리야의 대답 속에 묘사하는 상황은 갈멜산 승리 이전부터 지속되어 왔던 일이기 때문에 지금 그것으로 인해 도망갔다는 것은 말이 되질 않습니다. 문제는 엘리야의 믿음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갈멜산의 삶을 살 수도 있지만 마음속으로 내가 이렇게 꼴꼴 나게 살고 불안에 떨고 형편없이 사는 현재의 모습이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돈 때문이라는 상황 탓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지금의 엘리야와 똑같고 무엇인가를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상황 때문에 갈멜산의 승리의 삶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가 왜 도망을 가야 했는지에 대한 엘리야도 모르는 도망의 이유를 하나님께서는 들춰내기 위해서 질문을 하시는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1~12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강한 바람이나 불이나 지진 같은 강력한 외적 현상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세미한 음성을 들을 때에 가능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시끄러운 시장을 떠나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이나 한적한 곳을 찾으셔서 기도하신 장면, 새벽미명에 이슬을 맞으시며 혼자 기도드리시던 장면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장소가 고요한 것과 하나님의 음성이 세미하다는 것은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을 좀 이렇게 해석해보겠습니다. 엘리야는 500km나 도망가는 마음을 가졌지만 7절에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라고 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도망하려고 마음을 먹었던 엘리야의 발길을 호렙산으로 이끄셨던 것입니다.
이 호렙산에서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이 일어났고, 오늘 엘리야도 그것을 언급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을 깨뜨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언약이 체결된 장소가 호렙이므로 엘리야를 호렙으로 오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삼는 언약이 체결되고 지켜지려면 상대방과 우선 만나야만 하므로 그것을 위해 하나님이 임재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시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며 나타난 부수적인 현상들의 묘사가 있었습니다.
출19:16~19절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기슭에 서 있는데 /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라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세미한 음성 가운데 임재하신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시기 위해서 첫 번째로 선민들에게 강림하셔서 만남을 이루실 때에는 ‘우렛소리가 나고 나팔 부는 사람도 없는데 백성들이 무서워 떨 정도로 큰 나팔 소리가 들렸고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지진이 난 것처럼 산이 크게 진동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대답하셨다’고 하는데 세미한 음성 가운데 임재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약에서는 호렙산에서와 같은 사건이 오순절 사건입니다. 호렙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던 것과 같이 오순절 사건을 통해서 주님의 교회가 성립되었습니다.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들과 새로운 선민들이 결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행2:1~4절에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라고 합니다.
또한 계4:5절에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우렛소리가 나고…”라고 합니다. 보좌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우렛소리와 같다고 하시므로 세미한 음성 가운데 임재하시는 분이 절대 아니십니다. 이렇듯 오늘 본문의 세미한 음성을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데, 하나님을 만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만나지는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500년 전의 호렙산에서의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만남을 돌이켜보면 우레와 번개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 있었습니다. ‘구름’은 하늘과 땅을 가릅니다. 우렛소리가 나고 번개가 치면 땅을 보고 살던 모든 사람들이 구름 위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렇게 하늘을 향하는 것이 하나님을 만날 때의 첫 번째 마음가짐입니다.
또한 ‘나팔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밭에서 일을 하거나 집안에 있을 때에라도 나팔 소리가 들리면 모든 일을 다 멈추고 한 자리에 모여서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나팔은 왜적이 침입했다거나 큰 사태나 사고가 일어나는 비상시국을 알림으로서 이 땅의 모든 일을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즉 하늘을 쳐다보고 이 땅의 모든 일을 멈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옹기 가마 연기 같다’는 것은 가장 강한 금속성 재료들이 옹기 가마 속에서 녹아서 물이 되어버립니다. 이러한 불이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날 때에 내 앞에 하나님 외의 다른 존재들은 불살라 없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산이 진동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이 세상의 아무리 견고한 것일지라도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권력이 견고한 것 같고 바벨론과 앗수르가 견고한 것 같았지만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지금의 미국과 중국이나 일본이 견고해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견고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마음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마음에 미국을 붙이고 우리나라의 일들을 생각하고 있다면 아직 하나님을 못 만난 사람입니다. 정치적으로 무조건 미국을 반대할 필요도 없고, 무조건 끌어들이려는 사대주의적 근성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서 미군의 주둔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볼 때에는 하나님보다 미국을 더 든든하게 여기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산을 진동시키시는 하나님은 만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라고 하는 것은 엘리야가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체감하는 정도를 등급별로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라는 이 말은 이세벨의 위협이 지진처럼 느껴져서 하나님의 음성은 세미한 소리의 상태가 된 것이고 이세벨의 위협이 강한 바람처럼 몰아쳤기 때문에 갈멜산에서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10데시벨로 작아졌기에 전투기 같은 이세벨의 위협의 소리가 들릴 때에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날 때에 세미한 소리 가운데 듣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갈멜산에서는 이와 반대였습니다. 아합 왕과 이세벨의 죽이겠다는 소리와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이 자기들의 신을 부르는 소리들이 엘리야에게는 전투기에 묻혀버리는 TV의 음성처럼 작게 들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전투기 이륙소리 같은 150데시벨로 들리면 TV의 60데시벨에 불과한 바알 선지자들의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 장쾌한 승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승리가 주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 음성의 데시벨이 높아지면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150데시벨씩 되어야 하는데 세미한 음성으로 낮춰져 버리고, 세상의 건강문제, 돈 문제, 자녀문제 등의 소리가 150데시벨로 치고 올라오므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법은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다른 것들의 데시벨을 높임으로서 하나님의 음성을 세미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좋은 예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오순절 이후에 산헤드린 공회에 잡혔습니다. 회원들이 이들을 묶어놓고 때리며 예수에 대해 증거 하지 말라고 했더니 베드로와 요한은 행4:19절에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십자가의 예수를 전하라는 소리가 150데시벨의 전투기 소리처럼 들리는 가운데, 산헤드린공회의 사람들이 자기들을 매로 치며 하는 소리는 TV소리 같았습니다. 그들의 소리가 귀에는 들렸겠지만 마음에는 들려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소리가 200데시벨까지 가면 귀의 고막이 파열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이 들을 때에는 오히려 절대 평강의 상태가 됩니다. 이 세상의 소리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소리만 들립니다. 그것이 바로 변화산에서의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의 경험입니다.
세상 소리는 내가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하나님의 음성을 200데시벨로 들을 때에 주변에서 바알 선지자들이 난리를 치더라도 상관하지 않았는데 그들의 난리치는 음성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소리에서 큰 소리까지 다 들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듣고 반응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가 이렇게 도망친 것은 사람들이 엘리야를 새삼스럽게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이세벨의 소리보다 세미한 음성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갈멜산에서 승리의 V자를 그리며 갈멜산의 승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어야만 했는데, 마음이 땅에 머물렀기에 땅의 소리를 크게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행장의 전투기 이륙 소리가 아무리 크더라도 10km를 떨어지면 아득하게 들립니다. 갈멜산 승리가 마음에 붙어서 하나님께로 가야할 마음이 땅에 머물다보니 땅에 있는 이세벨의 소리가 크게 들릴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음성은 세미한 음성이 되어 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아합 왕의 마차를 앞지르며 달리던 사람이 십여 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사십 주 사십 야를 걸어서 갔습니다. 마음이 땅에 붙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고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았고 제 힘으로 하려니 이렇게 힘이 들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음성의 데시벨을 높일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기가 막히는 길을 주셨는데 주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 마음이 땅에 대해 죽고 하늘로 가야 합니다. 이 죽음을 계속하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은 하늘로 자꾸만 향하고 가까워져서 하나님의 음성의 데시벨이 전투기의 이륙소리처럼 커지게 될 것입니다. 눈앞에 나타나는 세상의 소리들은 작아지고 작아져서 세미한 소리가 되었을 때에 갈멜산과 같은 승리의 현장은 끊임없이 이루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V자를 그려야 합니다. 승리의 V자 뾰족한 한 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마음을 하나님께 다시 드려서, 그 승리조차도 십자가에서 죽고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나님께로 드리며, 죽음을 지속하는 동안에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음성의 데시벨이 땅에 살고 있는 나의 마음에서 한없이 커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데시벨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압도하는 상황이 바로 샬롬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땅에 대해 죽고 하늘에 대해서만 살게 하시므로 하나님의 데시벨이 전투기 이륙소리보다 커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