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창세기 21장 14-21절
이스마엘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리라
지난 시간 갈라디아서 4장의 말씀을 통해 창세기 21장 8절 이하 13절의 내용을 살폈는데, 이스마엘은 약속을 따라 난 자가 아닙니다. 그는 자유 있는 여자가 아닌 여종에게서 난 자입니다. 성령을 따라 난 것이 아니라 육체를 따라 난 자입니다. 때문에 이스마엘의 경우 외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씨가 분명하지만,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할례조차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참된 교회로서 아브라함과 함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물론 창세기 21장에서는 하갈과 함께 이스마엘이 쫓겨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삭이 젖을 떼던 날 큰 잔치가 있었는데, 이때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는 어떻게 표현하느냐? 박해한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라의 입을 통해 그들이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창21:10,12). 한 마디로 더 이상 이삭과 함께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내쫓으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생각하시고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시는데, 바로 이스마엘을 통하여 한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창21:13). 저들은 분명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저들을 생각하실 수가 있는가?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저들을 생각하셨다고 해서 참된 교회를 향한 그런 마음으로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해를 선인과 악인에게,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시는 것처럼 그런 정도에서 한 민족을 말씀하신 것이지 그것보다 더한 마음을 가지고서 말씀하신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스마엘로 하여금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을 말씀하실 때, 그것이 곧 이삭과 같은 영원한 복락과 관련된 내용은 분명 아닙니다. 로마서 표현으로 하자면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과 같습니다.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라 불리는 것과 같습니다.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롬9:7-8).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서 받을 수 있는 유업은 하나도 받지 못하는 자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라는 말씀은(창21:13) 맨 처음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말씀과는(창12:2) 분명 구별되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한 민족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표현도 하십니다. 표현 자체는 동일합니다. 그러나 동일한 표현일지라도 이스마엘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것과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약속에는 분명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를 염두 해 두고 오늘 본문을 대해야 하는데, 우선 14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린 사건으로 말미암아 사라는 그들을 내쫓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종의 아들은 이삭, 곧 약속을 따라 난 자와는 함께 기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사라의 욕심이 아니라 사라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였습니다. 12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요구대로 할 것을 말씀하셨고, 바로 오늘 본문은 그 말씀에 따라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다는 것은 여전히 11절의 자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삭을 낳기 전까지 비록 종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에게는 독자로 있었습니다. 창세기 17장에 보면 아브라함 나이 99세 때 하나님께서 나타나 다시금 약속의 자녀에 대해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창17:18). 그만큼 이스마엘에 대한 마음이 깊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스마엘을 사라가 내쫓으라고 말했을 때 그는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창세기 21장 11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곧바로 말씀하신 바가 있어서 순종하기는 하지만, 그 마음은 그렇게 편치 않은 것입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다는 것은 바로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잠자리에 누웠더니 곧바로 깊은 잠에 빠졌던 것이 아니라, 누웠지만 잠을 청할 수 없다가 일찍이 일어나 그들을 위하여 무엇이라도 준비하고자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보면 많은 것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떡과 물 한 가죽부대만을 준비한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통 사랑하는 자녀가 집을 떠나게 될 때 부모는 할 수 있는 한 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재물을 주면서 그들이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떠나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부모는 자식에게 더 많은 것을 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 준비한 것은 오로지 떡과 물 한 가죽부대뿐입니다. 하루 정도를 버틸 수 있을까 말까한 정도만을 준비하여 그들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근심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어떤 해석에 보면 아브라함이 일부로 하갈로 하여금 자기 집에서 멀리 가지 못하게 하려고 식량을 그렇게 제한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 아브라함의 철저한 순종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무엇입니까? 사라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지만 종의 아들이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때 기업은 지난 시간 말씀드린 것처럼 근원적인 차원에서는 분명 영적인 기업이요, 영적인 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은 그것을 어디에 담아 표현하느냐? 육적인 것에 담아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때문에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할 때, 그리고 그 사실을 하나님께서 친히 사라의 뜻대로 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실 때 이스마엘에게 돌아갈 기업은 전혀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을 이런 모습으로 보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스마엘과 관련하여 어떻게 말씀하셨느냐? 13절에서 그로 하여금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에 대하여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의심했다면 어떻게 하루 정도 살아갈 수 있는 양만 보낼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저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철저히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되 독자인 이삭을 번제로 드릴 것을 요구하실 때 아브라함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순종하게 됩니다. 히브리서는 이때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하여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히11:19)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이런 믿음이 22장에 앞서 21장에서도 비춰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라의 입을 통해 이스마엘이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다면 그 말씀 그대로를 성취하도록 내보내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마엘로 하여금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면 그렇게 되도록 책임지실 것이라는 믿음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적으로 볼 때 분명 아들이지만,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갈과 이스마엘 편에서는 이삭을 놀린 결과가 바로 이러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표현대로 하자면 이삭을 박해한 결과가 바로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일시적입니다. 13절 말씀을 통해 알리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조차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그것도 오늘 본문 18절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처럼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일시적인 심판의 형태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핍박하고 박해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바로 이런 결과를 통해 두려워해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에서는 외적인 복을 통해 영적인 복을 알리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진정한 기업은 외적인 것에 있지 않다고 알리십니다. 하나님 자신만이 기업이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복만이 너희의 기업이라고 알리십니다. 오늘 본문은 그 반대적인 측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외적인 복을 통해 영적인 복을 알리신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외적인 복조차 일시적으로 거두심으로 그들이 이삭과 함께 기업을 받지 못하는 자임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이 곧 그들이 최종적인 자리임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찾는가? 오늘 본문 전체적으로 볼 때 찾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생각하시고 그들에게 먼저 말씀하시는 것으로 있습니다. 여러분, 창세기 16장에 나오는 내용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라의 잘못된 판단으로 여종인 하갈을 남편에게 주고 하갈은 임신을 하게 됩니다. 하갈이 임신하자 주인인 사라를 멸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라로부터 학대를 받게 됩니다. 하갈은 그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하게 됩니다. 이때 누가 찾아오시느냐? 여호와의 사자가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 그리고 하갈은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바로 그런 경험이 있다면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 그리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살피시는 하나님을 찾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어려움이 있다면 더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심지어 그 이전부터 아브라함과 함께 거하는 자로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역사들을 보았습니다. 소위 은혜언약의 표징이라 할 수 있는 할례조차 이스마엘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찾는가?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께서 저들을 모른다고 하시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하갈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도 그가 자유 있는 여자는 아닙니다. 당연히 그의 아들도 약속을 따라 난 자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이 있지만 그런 흔적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로마서 표현처럼 핑계할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확증해 주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1:21)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
이처럼 한편으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음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하갈과 이스마엘은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나가 브엘세바라는 광야에서 방황하게 되었는데, 15절 이하를 보시면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창21:15-18)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방금도 말씀을 드렸지만 지금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향한 박해의 결과가 무엇인지 일시적으로나마 심판하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느냐?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지고, 그래서 더 이상 살 소망이 없는 것처럼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갈 입장에서는 자신과 아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통곡하게 되는데, 아들 앞에서는 울지 못하고 화살 한 바탕의 거리를 두고 소리 내어 통곡하게 됩니다. 이때 이스마엘도 울었던 것 같습니다. 이때 이스마엘의 나이가 대략 15세를 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이 어떤 상황 속에 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스마엘의 소리라고 할 때 이런 징계로 말미암아 회개하게 된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보자면 그렇다고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방금 말한 것처럼 울었다, 혹은 울면서 원망 불평의 소리를 발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정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물론 이때 들으셨다는 것은 그들의 소리에 근거한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바를 기억하셔서 그들을 돌보시고자 그렇게 하신 것일 뿐입니다. 칼빈의 주석을 조금 읽어드리면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는 말은 그가 믿음으로 기도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하신 약속을 생각하시고 그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셨다고 본다. 왜냐하면 모세는 그들이 하늘을 향하여 서원하고 탄식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당하는 그 비참한 상황을 슬퍼하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지 않았을 것으로 믿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들을 도와주신 하나님은 그들이 그분에게 ‘간청해서’가 아니라 다만 이스마엘에 관하여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에 근거하여 관심을 갖게 되신 것이다.”
특별히 여기 보면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렀다고 되어 있는데, 이렇게 그들을 부르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 편에서는 저들을 향하여 호의를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호의 앞에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지만 성경은 전혀 그런 내용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저들의 핑계할 수 없는 성격이 있는 것이고, 여기에 배은망덕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갈을 부르시면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내용인데, 한 마디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죽을 위기에 놓여 있지만 죽지 않을 것이라는 것,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처럼 너희를 통해서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이의 손을 붙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저들에게 낙심이 아닌 용기를 더하여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서두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이런 내용을 영적인 자손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분명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큰 민족은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아브라함의 씨라고 해서 다 그의 자녀가 아닌 것입니다.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라 불리게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 하갈에게 하신 말씀, 그리고 이스마엘로 하여금 이루고자 하시는 민족은 단지 육적인 의미만을 지닐 뿐입니다.
창세기 25장으로 가시면 아브라함의 죽음을 기록하고 난 뒤 이스마엘의 후손과 관련하여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12절 이하 18절의 내용인데, 16절에 의하면 그로부터 열 두 지도자가 나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의 경우 137세를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디에서 살았는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거주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로 하여금 자손의 복을 주셨고, 그들이 거주할 수 있도록 땅도 주셨습니다. 외적인 복을 그렇게 받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영적인 복을 누리는 자로 있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의 낙심은 어디 있는가? 저들의 번성에 있습니다. 외적으로 볼 때 복을 받는다는 데 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박해한다면 저들이 잘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시적인 심판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들에게 심판이 임하고 결국 영원한 심판까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만 역사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역사하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약속을 따라 난 자들에게는 외적인 복을 덜 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육체를 따라 난 자들에게는 외적인 복을 더 많이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외적인 복을 받은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를 괴롭힙니다. 어렵게 만들고 힘들게 만듭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답답함으로 있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저들이 아무리 외적인 복을 많이 받는다 할지라도 영적인 복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땅을 소유할지라도 하늘에 있는 도성의 한 부분도 얻지 못하는 자로 있으며, 저들이 아무리 오래 산다 할지라도 영생을 누리는 자로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땅을 주시고 오랜 세월을 살게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호의를 받고 있지만 그런 호의에 대하여 감사함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그 모든 것을 취한 줄 압니다. 바로 이것부터가 그들에게는 형벌의 내용으로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열 명의 나병환자가 다 나음을 받았지만 오직 한 사람만 감사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온 사건이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다 나음을 받았습니다. 외적으로는 동일한 복을 받은 것처럼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만 구원이 주어졌는가? 주 앞에 나아와 감사한 이방인 한 사람에게만 주어졌습니다. 이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감사한 것 때문에 구원을 말하는 논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이란 무엇인가? 주께로부터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란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열 명 중 아홉은 그런 감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자기 길을 가버렸습니다. 외적으로 나았다는 것으로 만족하였습니다. 하갈이 그런 자요, 이스마엘이 그런 자요, 이스마엘로부터 나온 자가 바로 그런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렇지 않은 자로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를 아는 자들로서 감사함이 있는 것입니다. 외적인 것을 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주께서 우리에게 비교할 수 없는, 외적인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적인 복을 주셨다는 것으로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호의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는 무엇입니까? 자기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주셨다는 데 있습니다. 아들을 주셨을 뿐 아니라 아들과 함께 그가 이루신 모든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데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데 있습니다. 창세기 15장 1절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처럼 최고 상급이신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데 있습니다. 최고 상급이신 하나님 자신을 주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어진 어떤 것도 주신 자보다 클 수 없다, 때문에 외적인 복이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 한 분만을 소유하고 있다면 남부러울 것이 없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로 그것을 아는 자로 있는 것입니다. 물질이 없어도, 건강이 없어도, 자녀가 없어도, 땅이 없어도 하나님 한 분 때문에 감사할 수 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많은 부분 어려워하고 시험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우리에게 큰 민족을 약속하셨는데 오히려 저들이 더 큰 민족을 이룬다는 거기에 있습니다. 왜 악인이 잘됩니까? 왜 악인이 의인보다 나은 삶을 삽니까? 그러나 저들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분명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은 결코 육적인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구약의 경우 영적인 것을 육적인 것에 담았을 뿐입니다. 육적인 것을 통하여 영적인 것으로 내다보게 하신 것이지, 육적인 것을 말씀하셨다고 해서 육적인 것을 바라보도록 하신 일은 결코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더 나은 본향, 바로 하늘에 있는 도성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겁니다. 아브라함만입니까? 이삭도,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소망하고 바라야 할 것들은 이 땅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보면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마6:11). 그러나 곧이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 분명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를 따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도록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염려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불신앙의 내용으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주된 것이 되어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조차 내려놓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계속해서 19절 이하 21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그가 바란 광야에 거주할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애굽 땅에서 아내를 얻어 주었더라”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바가 있기 때문에 죽을 위기 속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는데, 목마름을 채울 수 있도록 물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후 하나님께서 그 아이와 함께 계신 것으로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시고 보호하셨다는 겁니다. 그 결과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면서 활 쏘는 자가 되었습니다.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또한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역사가 있기 때문에 그도 하나님의 백성인가 착각할 수 있지만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로마서 9장 2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즉 그들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시는지를 보여주는 대상으로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오래 참으시고 관용하시지만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호의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산 결과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리는 대상으로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지금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느냐? 로마서 9장 23절입니다.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한 마디로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리시고자 우리를 부르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겁니다. 저들의 결국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이지만, 우리의 결국은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으로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저들도 지키시고 우리도 지키시지만 그 목적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저들의 외적인 복에 대하여 전혀 부러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실에 대하여 전혀 이상히 여길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도 호의를 베푸시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베푸는 그런 은혜가 아니라, 핑계하지 못할 목적으로 그렇게 하실 뿐입니다. 다시 말해 호의를 베푸시지만 그 호의를 저들은 받지 않습니다. 아니 받아 누리지만 받아 누리는 것을 모릅니다. 자기 힘으로 이룬 것인 줄 압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삽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삽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인가? 멸망이요, 하나님의 진노요, 심판인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통해 우리를 훈련하시는데, 비록 저들이 우리를 괴롭게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더욱 의뢰하도록 할 목적으로 그들을 우리 곁에 붙여두시기도 하십니다. 혹은 힘들고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하신 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가도록 하실 목적으로 그들을 두시기도 하시는 겁니다. 혹은 저들의 외적인 번성 앞에서도 우리는 최고 상급이신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도록 할 목적으로 저들에 대하여 오래 참고 내버려두기도 하시는, 오히려 저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기까지 하시는 일도 있는 겁니다. 정리하자면 저들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고, 나아가 교회를 위해서도 그들이 존재하는 겁니다. 비록 저들이 교회를 핍박하고 박해하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바로 그 일를 통하여 교회가 유익함을 얻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저들의 외적인 번성함 때문에 우리가 받은 영적인 복이 아무 것도 아닌 양 그렇게 반응하지 않도록 주의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복은 이 세상의 복과 비교할 수 없는 복입니다. 거지 나사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나사로의 삶을 부러워하겠습니까?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으로 살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상급으로 받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로 하여금 거지 나사로와 같은 삶을 살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가난한 자가 있다면 부한 자도 있게 하십니다. 연약한 자가 있다면 강한 자도 있게 하십니다. 아픈 자가 있다면 건강한 자도 있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조차 비교가 되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시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고 상급이신 하나님을 받았다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이런 비교들이 아무런 가치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란 바로 그런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있는 자로 하여금 없는 자를 돌아보게 하셨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는 삶이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런 방식으로 전달하게 하시고 또한 우리의 연약함을 그런 방식으로 채우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웃 사랑의 정신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단지 “저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번성하게 되구나!”, “하나님에 의해 큰 민족을 이루게 되구나!”, “하나님에 의해 오래 살게 되구나!”, “외적인 복을 받게 되구나!”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왜 그들이 그렇게 존재하는가?” 아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어떻게 다른가를 분명히 아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자인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복을 주실 수 있는가?” 따져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복은 그것보다 더한 복을 주셨기 때문에 그 복으로 인하여 감사하고, 그 복으로 인하여 만족하고, 그 복으로 인하여 더더욱 하늘에 대한 소망만을 품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삶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