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투석 없으면 요독증에 먹힌다>의 줄거리:
신장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으로 소변으로 배출되어야 할 노폐물(요독)이 배설되지 못하고, 체내 여러 장기에 축적되므로 각 신체기관의 기능에 장애를 일으키는 증상을 요독증이라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인공신장을 통하여 투석을 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지요. 타락 이후 유전되는 죄의 체질로 인해 모든 인간에게는 요독증이 나타나게 됩니다. 노폐물 배설을 천성적으로 싫어하는 마음을 매일 투석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요독증이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마음투석 없으면 요독증에 먹힌다
(시편 28:1~9)
1.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2.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3. 악인과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 그들은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들의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
4. 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들의 손이 지은 대로 그들에게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으소서
5. 그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괴하고 건설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마음투석 없으면 요독증에 먹힌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마음투석 없으면 요독증에 먹힌다’
신장(腎臟)의 역할에는 크게 세 가지 정도가 있다고 합니다. 그중에 한 가지는 체내의 신진대사 과정에서 발생한 노폐물을 소변으로 배설하는 기능을 합니다. 하루에 180리터의 피가 신장을 통과하면서 신체에 독이 될 만한 물질들이 걸러집니다. 소변으로 1~2리터가 나오게 되는데 노폐물의 엑기스입니다. 콩팥에 문제가 생겨서 신부전증이 생기면 혈액속의 노폐물을 제거하지 못하면서 신체에 독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소위 말하는 오줌독이 신경계통, 피부, 심장과 혈관, 위와 소화기계통, 혈액, 내분비계통 등 신체의 모든 기관에 이상을 초래하게 됩니다. 신부전증 말기 환자들은 투석을 받아야만 합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몇 시간씩 누워서 인공신장기로 투석을 합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이 신장에 이상이 생겨서 얼굴이 풍선처럼 부어오르고 괴로워하시는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비유적으로 영적인 상황에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7~9절을 보면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긴다는 표현이 딱 요독증의 증상 같습니다.
그동안 마음이 담고 있었던 것들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침 흘리며 가지고 싶어 하는 것들을, 유익이 된다고 여겨서 내 손에 쥐고 자랑하며 붙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알고 나자 그것들이 독임을 알게 되고 빨리 배출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배설되어야 할 것들이 마음에 남아있으면 요독증으로 삶은 피폐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타락하여 원죄가 유전되었습니다. 이 원죄가 유전되어 실질적으로 삶에서 나타날 때에, 마음은 육체로 만나는 것을 계속해서 담게 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담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을 붙잡고 배설을 하지 않기 때문에 몸에 요독증이 생깁니다.
예를 들면 돈으로 인해서 웃기도 하지만 싸우고 시기하고 사기도 칩니다. 이것들이 모두 요독증입니다. 이러한 마음에는 기쁨이나 감사나 평강이 없습니다. 마음에서 독이 배출된 온전한 상태가 되면 반드시 항상 기쁨이 있고 쉬지 않는 기도로 하나님과의 영적 교류가 있고 범사에 감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마음이 요독증에 걸린 상태에서는 기쁨도 없고 기도도 없고 감사도 없습니다.
십자가는 마음 신장의 투석기입니다. 하나님이 선민에게 허락하신 십자가 투석기의 예표가 바로 구약의 성전이었습니다. 성전과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것은 원죄의 체질 때문에 요독증에 걸릴 수밖에 없는 마음을 끊임없이 투석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투석이 없으면 반드시 우리의 인격에는 요독증이 나타나게 되는데 온갖 종류의 부정적인 마음이 됩니다. 지금 기쁨이 없고 우울 걱정 근심 염려가 가득하다면 독에 의한 증상입니다.
본문의 시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에 의해서 도피하여 지은 시라고 합니다.
다른 정적이 아닌 인간적으로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던 셋째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서 안정된 인생의 황혼기를 맞이했던 다윗에게 엄청난 절망감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피난 중에도 예루살렘의 성막을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를 했습니다. 특이한 점은 다윗이 위급하고 황망한 반역사건을 계기로 하여 사람을 영적인 의미에서 두 부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에 크게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아픈 만큼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게 내 아들이 이런 패륜적인 생각을 하고 실천에 옮기게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왕이 되고 왕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스로의 야망에 의한 것도 아니었고 건전한 포부에 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힘이 강해서도 아니었고 골리앗을 무찔렀기 때문도 아닙니다. 남다른 애국심에 의해 주어진 결과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과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도무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낄 수 없었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생각이 없음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선민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살아서 행동하시고 손으로 움직이시고 역사하고 계신다는 엄연한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요새 뉴스를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살아계시고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고려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의 생각에는 이러한 모습이 너무나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다윗은 왕위를 상실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아들 압살롬과 동조자들이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4절의 말씀대로 ‘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들의 손이 지은 대로 그들에게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으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후에 압살롬이 죽었을 때에 부하들이 민망해할 정도로 압살롬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습니다. 다윗은 인간적으로 이렇게 슬퍼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고 있는 선민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이들의 망함을 바랐습니다. 스스로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저항하는 것이기 때문에 5절의 말씀처럼 ‘그들을 파괴하고 건설하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특별한 생각의 결론에 이릅니다.
자신의 아들이 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못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2절을 보면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라고 합니다. 다윗은 피난을 나와 예루살렘을 떠난 상태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시온을 향하여, 여호와의 집을 향하여’라고 할 수 있었는데 유독 ‘지성소를 향하여’라고 했습니다. 다니엘도 이국땅에 포로로 잡혀가서 기도할 때에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습관적인 선민의 기도가 아님을 의도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지성소’라고 콕 집어 언급한 것입니다.
지성소에는 법궤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법궤는 안치된 것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선민들은 지성소를 생활화해야만 했습니다. 성전이 있고 성전의 여러 문들을 지나면서 번제단 뜰이 나오고 이어서 성소와 지성소가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성소와 지성소의 휘장을 열면 법궤가 있었습니다. 가장 거룩하게 구별된 깊은 곳에 하나님의 말씀의 돌판이 들어있는 법궤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생활화하는 것은 내 마음의 모든 생각이 출발하는 가장 깊은 곳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곳은 기쁨과 만족의 궁극적인 존재의 이름이 있어야 될 곳입니다. 즉 지성소를 생활화하는 것은 성막의 지성소에 법궤가 들어있듯이 마음의 지성소에도 하나님의 이름이 계셔야만 한다는 것을 날마다 진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돈이 들어와 있다면 지성소의 모습을 통해 마음을 진단하여 하나님의 자리에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서 돈이 들어와 있음을 깨닫고 빨리 배출해야 될 노폐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성전의 번제단에서는 아침과 저녁으로 상번제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죽어가는 양과 나의 마음을 일치시켜서 돈이 들어와 있는 마음을 죽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투석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왕이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하나님의 뜻에 반역하는 이유는 지성소를 생활화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압살롬과 그 동조자들은 마음의 투석을 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마음에 왕의 자리라는 권력이 들어왔을 때에 지성소로 진단하여 그것이 독임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닌 권력이 들어온 마음 자체를 상번제의 어린양과 함께 죽는 것으로 인정하는 삶을 매순간마다 반복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졌다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고려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지성소를 향하여 기도한다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지성소를 생활화하지 않고 산 결과가 3절을 통해 나타납니다.
3절의 앞부분에서 다윗은 ‘악인과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라는 말로서 자신은 마음의 투석을 하며 살아온 자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은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들의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라고 합니다. 대체 어떤 사람이 타인을 향해 함부로 ‘그들의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이 보기에 압살롬과 그 동조자들은 지성소를 생활화하지 않음으로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의 이름을 마음에 품은 자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부패함이 발생합니다. 청결은 곧 있어야 될 것이 있어야 될 곳에 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와야 될 마음의 지성소에 돈의 이름이 들어오고 권력의 이름이 들어오고 건강의 이름이 들어오고 출세나 형통 등의 이름이 들어왔다면 더러워지게 됩니다. 있어야 될 것이 있지 말아야 될 곳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또한 있지 말아야 될 것이 있어야 될 곳에 가있으면 이 더러움에서 부패가 발생하고 독이 발생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붙잡고 보니 그동안 좋게 여기고 가치 있게 여겼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던 것은 세상의 가치들이 해가 됨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부패한 마음을 가졌던 압살롬과 그 무리는 입으로는 평화를 이야기할지라도 마음에는 악독이 가득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들에 대해 로마서 1장 28절에서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한다.’라는 것은 곧 지성소를 생활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성소에 하나님의 법궤가 들어있듯이 내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이 이름이 들어와 있는가를 살피지 않았습니다.
28절 하반부에서 31절을 보면 이러한 자들의 결과가 오늘 본문과 똑같이 나타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 모든 죄악이 지성소를 생활화하지 않았다는 단 하나의 이유에서 나옵니다. 마음에서 세상의 가치를 붙잡고 그것을 얻겠다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나타나는 독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지성소를 통하여 투석되지 않으면 그 독은 인격과 삶 전체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마치 요독증이 걸린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이처럼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4~5절에서 악한 자들과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 그리고 그들의 손이 지은 것과 여호와의 손이 지은 것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다윗이 성전을 바라보듯이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우리 마음의 투석기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셨다는 것은 곧 주님의 마음이 하늘로 향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침 흘리는 세상 가치를 얻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모습을 보이신 후에 하늘에 꿀단지라도 숨겨놓으신 것 같이 곧 하늘로 가셨습니다. 그만큼 하늘이 좋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에서 얻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 세상에 대해 미련을 가지지 않으셨던 주님같이 산다면 지금 당장 죽어도 아쉬울 것이 없어야 하는데 무언가 찜찜함이 있습니다. 배우자나 자녀나 건강이나 어떤 이유에서든지 내 마음에 세상 가치가 담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십자가에서 투석해야만 합니다.
다윗이 4절에서 ‘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라고 말한 것처럼 투석함이 없으면 악한 행위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는 일은 무조건 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계획한대로 사업하여 돈 많이 벌어서 기부하며 남을 많이 도왔더라도 악합니다. 그것은 마치 깡패집단 내에서의 의리를 지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선행은 깡패들이 서로 돕고 사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깡패 두목도 자기 부하가 아프면 치료비를 줍니다. 그러나 그 결과로 더 악하게 되듯이 하나님 없이 하는 일은 모두 악할 뿐입니다. 선한 행위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더라도 그것이 하나님 대신이라면 그것 또한 요독증을 발생시키는 노폐물일 뿐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교만이고 자기기만일 뿐입니다.
마음의 투석을 하는 자들에게는 5절의 말씀대로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이 나타나게 됩니다. 지성소를 바라보고 마음의 투석을 하지 않는 자들, 즉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는 자들이 만들어 내는 것은 모두 악독의 열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이유에서 압살롬이 아버지를 죽이려는 패륜적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즉 마음을 투석하지 않는 인간들의 대표격으로 압살롬을 들고 있는 것입니다.
요새 사회가 굉장히 흉흉합니다. 여중생들이 친구를 피투성이로 만들어놓고 좋아합니다. 어쩌다 이런 아이들이 되어버린 것일까요? 이 세상에서 마음 투석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배설물이고 해가 되는 독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끌어안은 채로 부모님이 아이를 키우고 있기 때문이고 아이를 만질 때마다 독이 옮겨졌던 것입니다.
대한민국 사회가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제가 아는 대로 신학적으로 교회를 정의하자면 이 땅에는 교회가 없습니다. 교회를 다시 시작해야 할 판입니다. 마음을 투석하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오늘 본문에서 선민의 나라인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 생겼음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성전을 생활화하지 않음으로 마음의 투석이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한두 사람이라도 더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을 투석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야 할 때입니다. 마음을 투석함으로서 나의 손대는 일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되어야 하고, 나의 계획하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일들은 하나님의 역사의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생활화로 끊임없이 마음을 투석함으로서 내 인격과 삶에서 요독증이 사라지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확장되는 역사가 오늘 하루도 계속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가 제 마음의 투석기임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제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 이외의 세상 가치가 들어올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게 하여 주셔서 마음은 부활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아버지께로 감으로서 이 땅에서는 아버지의 손과 행동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