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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의미화 기법
- 차유: 일상 언어와 괴리, 일상 지각의 균열 -
권대근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문학은 시대를 기억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홍명희의 『임꺽정』이나 박경리의 『토지』와 같은 대하소설은 잊혀져가는 옛 우리말을 기억하는 통로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편 현기영의 『순이삼촌』은 역사서나 신문이 전하지 못한 시대의 비극을 세상에 알렸다. 여러 가지 이유로 문학은 문학이 가진 ‘역할’과 ‘사명’이 있다고, 우리는 배워왔다. 그리고 그 역할과 사명은 문학의 존립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문학은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 『근대문학의 종언』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오늘날의 일본문학은 위기에 빠져있다고 말한다. 뿌옇게 흐려진 문학의 존립근거로 인해, 일본문학이 상품은 잘 만들어내고 있을지 모를지언정, 그 역할과 의미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지식이란 결코 하루 아침에 완성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오늘에 이르렀으며 앞으로도 더욱 변화를 겪으면서 축적될 것이다. 수필학이라는 분야 역시 김광섭, 김진섭의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다.’와 더불어 시작된 과정 속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는 동시에, 역사와 더불어 근대수필 연구로 수필학 박사 학위를 받은 오창익으로부터 현대수필 연구로 수필학 박사 학위를 받은 권대근으로 이어져 오면서 두 연구자에 의해 차츰 본격화되고 체계화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의미화란 사상을 비유나 상상을 통하여 문예적으로 나타내는 작가의 개성적인 시각이요, 마음이다. 사상의 의미화는 수필의 문예화를 위해서 가장 바람직한 표현 형식 중의 하나다.(오창익)
문학은 사건을 의미화하는 특정의 방식을 전제로 성립된다. 수필에서 의미화란 메시지의 숨겨진 뜻이나 가치가 문학적으로 밝혀지거나 읽혀지도록 주제를 간접화하는 방식을 말한다,(권대근)
“내 어머니는 ‘레프라(문둥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어머니를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 않겠습니다.”
“어린이의 생각으론 잘못이 아닌데 그것이 잘못인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꾸중을 듣고 있는 어린이들에게서 나는 슬픔을 느낀다. 이 슬픔은 우리 어른들이 갈아먹어야 할 돌가루 같은 약이다. 어린이날은 어른이 약을 먹어야 하는 날이다.”
시에서는 '얼음 만지듯 춥다'고 할 수도 있지만, '추워서 살 만하다'도 가능하다. 얼음처럼 춥다는 표현은 논리적이고 타당하다. 그런데 추워서 살 만하다니? 엉뚱하다. 하지만 요즘 시는 이렇다. 다른 시각에서 보자. 아름다운 사람을 보고 '꽃 같다'고 하면, 사람도 꽃도 아름다우니 논리적으로 맞아 보인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사람과 꽃을 이어 시어가 된다면 사람과 꽃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수영의 업적
1. 현실에 대한 문학의 실천적 책무 –비판성과 저항성
2. 시와 삶의 일치 –시에 일상의 언어 도입
3. 시에 온점 없애기 –자유정신, 전위성
시의 언어가 되는 기준은 가변적이다. 애초에 ‘시의 언어가 될 것’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시의 언어를 결정짓는 기준은 그것의 애매성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애매성이라 함은 단순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도로 치부될 수 없는 매우 정교하고 첨예한 것이다. 애매성은 즉, 다의성을 이야기한다 할 수 있으며, 이는 ‘일상 지각의 균열’이라고도 부른다. 그렇다면, 특정 언어가 ‘낯섦’ 즉, ‘일상 지각의 균열’을 일으킨다면, 이들을 모두 애매성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그러한 언어들을 ‘시의 언어’라고 부르는 것일까.
시에 있어서 애매성 –다의성(긍정)
문장에 있어서 애매성 –비문성(부정)
시의 언어가 모호하다는 것은 함의하는 바가 많다는 것이다. 애매성 즉, 낯섦에서 생기는 궁금증에서부터 시인의 의도라는 종결지, 그 간극이 의미 창출의 범위이자 규정하고자 하는 최적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이후로 통칭되는 현대 시기의 예술은 주관주의를 강력하게 견지한다. 문학에서 이야기하는 ‘신비평’이 이를 방증한다.
*철학적 배경
주관주의 –현상학 –인문학 –질적 연구
객관주의 –실증주의 –과학 –양적 연구
즉, 작자가 작품을 완성한 순간 작품은 작자의 손을 떠난 것이다. 이 시점부터 작품의 의미는 수용자의 해석에 따라 발산한다. 주관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창출되는 것은 현대 예술의 특성에 비추어 지당하다. 그러나, 그것이 창출될 수 있는 범위가 정해져 있지 않다면, ‘단순 난해’도 ‘시적 애매성’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칸트 판단력비판
심미적 취향
심미적 의무
안쓸안잡에서 들은 것인데, 예를 들어, 한 아이가 소변기에 ‘R. MUTT 1917’이라는 문구를 적어 아무 의미없이 미술관에 전시했다고 해보자. 이 아이는 마르셀 뒤샹과 같이 장르의 개척을 가져올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현대 미술의 면상에 변기를 집어던진 마르셀 뒤샹의 <R' Mutt 1917>이기에 예술작품이 되었던 것이다. 1999년에 23억에 거래되었다. 이 모든 것은 작자의 의도가 무엇일까를 궁리하는 데서 시작된다. 뒤샹의 <샘>이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건 낯섦을 야기하는 애매성, 그것이 그래야만 했던 필연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레디메이드 예술의 창시자인 그는 대량 양산되는 소변기를 전시회에 출품했다. 뒤샹은 일상적인 위치(화장실, 공장 등)에 있었다면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할 소변기를 전시회에 출품함으로써 새로운 개념과 정체성을 창조하였다.
이 필연성에 의존하기에 <샘>의 의미는 정답이 부재한 상태 즉, 무정답 상태가 아닌 다정답 상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정답이 없는 표현은 시적 표현이 아니다. 정답이 많은 것, 정답들이 화수분처럼 쏟아져 나오는 것이 시적 표현이다. 현대시, 혹은 현대시를 넘어선 현대 예술 전반까지도 예술적 애매성의 기준은 규정될 수 있다.
오늘은 슬픔과 놀아주어야겠다. 가끔 등을 밀어주어야하는,
그네를 타는 슬픔이 내게도 있다. 한 숟갈 추억을 떠먹
은 일로 몇 달쯤 슬픔을 곯지 않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현호/말은 말에게 가려고
시는 이별 이후의 느끼는 슬픔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것 같다. 애매성, 즉 낯섦을 느끼는 부분은 시적 표현의 본질이나 다름 없다. 때문에, 위 시를 비롯한 대다수의 시에서 애매성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애매성을 포착하는 지점은 ‘낯섦’을 느끼는 부분이다. 왜 이렇게 쓴 것인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가 궁금해지는 지점. 그것은 일상 언어와의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일상 지각의 균열’을 내는 표현이기 때문이겠다.
“오늘은 슬픔과 놀아주어야겠다.”에서 지각 작용에 지연이 생긴다. 인간의 지각 작용은 관습화되고 자동화되는데, 그것을 깨는 것이 일상 지각의 균열이다. 그 균열로 인해 낯섦을 느낀 독자는 궁금함, 이해가 되지 않음에서 받는 짜증남 등의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이 때문에 독자는 그 자리에 머물러 지연을 야기한 함의를 추출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인용한 부분에서 낯섦이 느껴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슬픔’은 감정으로, 무형의 것이다. 이것을 놀아준다는 것은 실제 발생할 수 없는 일이며, 발생한 적 없는 일이기에 일상 지각에서 벗어나 있다. 이때, 수용자는 필자 즉, 시인이 어떠한 의도로 이러한 표현을 쓴 것일지 궁리해보아야 한다. 이 궁리의 결과는 수용자마다 천차만별일 것이지만, 시의 맥락,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반영하여 정해진 해석의 방향성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시적 표현은 무정답 상태가 아닌 다정답 상태임을 유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네를 타는 슬픔과 놀아주겠다는 것은 맥락에 따라 시인의 의도를 추측해보았을 때, 슬픔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겠다 정도로 이해가 된다. 나아가서는, “한 숟갈 추억을 떠먹은 일로 몇 달쯤 슬픔을 곯지 않게 하는 사람이 있다.” 에서 ‘추억’이라는 무형물을 떠먹는 데서 생긴 애매성이 ‘슬픔’이라는 무형물이 곯지 않는다라는 표현까지 이어진다. 시인의 의도가 무엇이었을까를 궁리해보았을 때, 다음과 같이 정리가 가능하다. 화자는 현재 이별로 생긴 슬픔을 앓고 있으며,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자 한다. 이때, ‘한 숟갈’이라는 표현은 맥락에 따라 ‘소량’ 정도로 해석이 되는데, 추억을 한 숟갈 밖에 떠먹지 않았음에도 슬픔이 몇 달 간이나 곯지 않게 할 수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것은 추억이 그만큼 강렬하다는 것, 조금의 회상만으로도 극심한 슬픔을 야기하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면, 추억 속의 그 사람 혹은 슬픔을 몇 달쯤 곯지 않게 하는 그 사람은 이별의 대상 정도가 되겠다.
신진 시인은 저서 '한국시의 이론'(산지니)에서 '차유(差喩)의 시학'을 말한다. 은유나 환유가 논리적이고 타당한 말로 바꾸는 것이라면 차유는 차이에서 나오는 비유를 말한다. 앞서 '꽃'과 '사람'을 비유한 데서 볼 수 있듯이, 모든 비유는 은유나 환유 외에 차유가 내포돼 있다.
차이성을 지향하되 동일성이란 상대 축의 의의를 잃지 않는 언어적 자질을 저는 ‘차유(差喩, transphor)’라는 말로 불러왔습니다. 이를 구체화 하는 과정에서는 다음의 몇 가지 방침을 아울러 견지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첫째, 동일성보다 차이성을 추구하는 현대시의 다양한 모습들을 드러내 보이면서 읽기와 쓰기의 시스템을 실천적으로 체험하도록 했습니다. 둘째, 차이성이 범하기 쉬운 이율배반-차이를 빙자한 모방성, 차이를 빙자한 비사회성을 극복하고, 의미 있는 차이, 가치지향적인 시의 기반적 윤리를 시적 진정성의 결과로 이해하였습니다. 셋째, 시 쓰기와 읽기의 구체적인 방안과 유형을 체계적으로 탐색하여, 문학적 안목을 심화, 확장해가는 데 도움이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결함들이 독자들의 반복 읽기 과정을 거친다면 실천적인 면에서는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바람도 가지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 과정에서 체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자의 <머리말>에서
우리 시에서 차유가 중요한 것은 우리말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말은 상황의 언어다. 주어 서술어 다 갖추지 않아도 상황을 알면 이해된다. 시도 사회 상황이나 시인 개인의 상황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사고방식도 그렇다. 판소리나 민요에서 해학이나 풍자는 논리보다는 상황에서 빚어진다. 더군다나 현대시는 은유와 환유만으로는 이해되지도, 설명할 수도 없다. 무의식이나 자아의 분열, 주체의 다성성 같은 새로운 개념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교육 현장이나 시 이론에서는 여전히 은유나 환유 같은 비유만 말한다. 신 시인은 "배우는 것 따로, 쓰는 것 따로이다 보니 발상이 자유롭지 못하고 시를 써도 뻔한 시가 된다"고 주장한다.
기존 시 이론도 차이를 강조했다. 그러나 중심축은 은유나 환유였고 이를 보완하는 역할에 그쳤다. 신 시인은 유사성 못지않게 차이성도 하나의 중심축으로 자리해야 현대시를 이해하고 쓸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시는 일말의 유사성만으로 비유를 하기 때문에 차유는 더욱 중요해졌다는 얘기다.
신 시인은 이번 저서에서 이런 '차유의 시학'과 함께 우리의 자생 시문학의 가치도 강조한다. 저서 2부 '우리 시의 논리'에서는 근대의 전통 서정시, 자생의 전위와 모더니티, 생태의식과 도시 의식, 바다 시 등을 집중 조명한다. 신 시인의 인식은 한국 시 문학사가 아전인수식으로 정리됐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신 시인은 "일제는 물론 권위주의 시대에도 '아방가르드'라 해놓고 서양을 모방하면 '아방가르드'가 됐다. 깊은 절망에서 비롯됐다거나 도전이나 비판의 정신은 약했다. 아방가르드나 전위란 시대를 앞서 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실천이 따라야 하고 사회로부터 전위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더니티나 생태주의 같은 것도 서양을 모방하거나 서양에서 들여온 생각들이 중심이 돼 시 문단을 이뤄왔다는 주장이다. 신 시인은 "우리 역사를 우리대로 보는 시각이 시 문학에서도 필요하다. 이제는 자생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차유는 은유와 환유에 대비되며, 문자 그대로 차이성의 비유란 의미이다._75p
차유는 그 일부가 전통적 수사법에 있어 아이러니류로 취급되어 왔다. 하지만 이를 계속 아이러니로 묶어 두지 못하는 이유는 이들이 비유와 같이 고의적으로 언어의 축어적 용도를 저해하며, 전이를 통해 특수한 의미와 기능과 어법을 갖추는 동시에, 언어 생성 원리의 한 축이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차유의 기능은 본질적이고 광범위하다. _87p
"이를 테면, 이런 겁니다. 누가 혜영이 어떻노, 하고 물어보는데, 누군가는 이렇게 답하겠지요. 혜영이 예쁘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대답하기를 혜영이 가는 개똥이다 카거든. 그런데 여기서 개똥이라다고 하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거요. 예쁘다라고 표현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의미일 수도 있는 거지요.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보는 겁니다.“
시란 남과 차이 나는 언어를 갖는 것이라고, 그 자신만의 언어를 만들기 위해 남다른 생각, 남다른 사고, 남다른 세계관을 갖게 해주는 게 바로 시 창작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그저 외국 시를 모방하기만 해왔는데 이러한 선생님의 차유 이론을 도입한다면, 이는 곧 시의 본질에 가까워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17년 3월호] 새로운 시론: 좋은 시의 요건, 차유 / 신진
1. 차유 제안의 배경
인구대비, 우리나라는 시인이 가장 많은 나라일 것이다. 반면에 시 독자의 수는 그에 반비례하지 않을까? 시인이 지나치게 넘쳐나는 건 등단을 상업적으로 거래하는 문예지가 넘쳐나고 등단절차가 쉬워진 탓이라 할 것이다. 시가 읽히지 않는 이유로는 물신화가 가속화 하고 가상세계를 넘나드는 미디어가 급격히 발달하면서 독자를 그에 빼앗긴 까닭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독자들이 시를 외면하는 현상에는 보다 내적인 진단이 필요하다. 첫째는, 상당수의 시가 일반적인 생각과 생활체험을 진부한 언어로 표현하는 넋두리에 그쳐 독자들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는 점, 둘째는 맥락이 이어질 수 없는 난삽한 말장난 때문에 현대시를 정신 나간 사람들의 푸념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데 있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부한 서정시도, 난삽한 기표덩어리도 반성을 하고 있지 않다. 앞의 것은 시인이란 명칭이 좋고, 뒤의 것은 뭔가 남다른 짓을 하고 있다는 데서 긍지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개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렇게라도 명리를 도모할 기회는 허용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리라.
기존의 시학과 문학교육 내지 교사의 한계도 있다. 가르치는 이나 배우는 이나 시는 비유적 표현이다, 시는 멋진 비유적 표현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데서 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광의적으로 보면 시적 표현들이란 모두가 비유라 할 수는 있다. 사람들은 직유, 은유, 의인, 환유, 제유, 상징 등등을 배우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주제를 파악하고 감동의 폭을 가늠할 기준은 부재한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지나치게 표현의 측면에 기울어진다는 한계를 안게 된다. 하고자 하는 말을 비딱하게 다른 말로 대체하는 기술이면 시가 된다고 생각하고, 은유, 직유, 의인법 찾기 따위가 중고등학교 시험의 단골 문제가 되는 것이다. 뻔한 내용에 비유적 표현만 빌면 시라고 생각하거나, 말이 되든 말든 무언가 새로운 모양이 되면 좋은 시가 된다는 관행이 거듭되다 보니, 어슷비슷한 시들끼리 모방과 표절과 재편집을 거듭하는 것이다. 표현적 측면에만 주목해온 근대 시문학사의 관행과도 관련된다.
현재의 시론이 간과하고 있는 핵심 자질을 나는 차유(transphore)라 부르기로 제안한 바 있다. 평범한 일상의 체험을 평범한 생각으로 진부하게 쓴 글은 왜 시가 못되는가? 표현의 새로움만으로 독자의 호응을 받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좋은 시가 있고 그렇지 못한 글이 있는가,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을 ‘차유’란 개념으로 설명하고자 한 의도에서였다.
차유(差喩)란 말 그대로 차이성의 비유란 말로, 유사성과 인접성에 의한 비유, 즉 은유와 비유의 양극성을 극복하며, 비유적 표현이면 시가 된다는 생각과 난삽한 언어유희의 모작(模作)이 창작이 되는 모순을 바로잡을 수 있는 개념이다.
이 글은 한 편의 시 텍스트란 부분적으로나 전반적으로나 비유적 표현으로 이루어진다고 보고, 차유의 의미와 기능을 구체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은유, 환유 중심 비유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시(문학)창작과 해석에 바람직한 방안 하나를 보다 구체적으로 제안하고자 한다. 문학 언어의 기본 자질인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외면당하거나 부분적으로 정형화되어 적용되었던 자질을 드러냄으로써 ‘좋은 시’의 자질과 요건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독자의 반응을 존중하는 관점을 유지하면서 우리 근대시사상 최고의 서정시로 알려진 김소월의 「진달래꽃」, 80년대 대표의 노동시 박노해의 「손무덤」, 그리고 환상시, 해체시의 선구작이자 대표작이라 할 이상의 「거울」,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 등을 텍스트로 하여 설명해보고자 한다.
2. 「진달래꽃」, 「손무덤」 등의 창작 비법
우리나라 근대시 형성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친 김소월(金素月, 1902 -1934), 시 「진달래꽃」은 2008년 KBS TV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이 좋아하는 애송시’ 1위에 뽑히었다. 소월은 2007년 한국시인협회가 선정한 ‘한국 현대시 10대 시인’ 중 1위 시인이고, 시 「진달래꽃」이 표제시인 그의 시집 『진달래꽃』은 2011년 한국 근대문학사상 유일하게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시집이다. 동 시집은 2012년 평론가들이 선별한 ‘한국현대문학사 대표 시집’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우리 근대시사상 「진달래꽃」이 이렇듯 최고의 시로 대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1954년 월간 여성잡지 『여원』의 창간 기념으로 당대의 인기 소설가 정비석이 소월의 시 「산유화」를 제목으로 소월의 시 20편을 인용한 소설을 연재하고, 소설 「산유화」가 1956년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소월이 일약 유명시인으로 떠오른 데도 있을 것이다. 정비석의 소설과 소월의 삶이 영화화, TV드라마화 되어 격찬을 받았다. 젊은 여성들 사이에 소월의 시가 마치 자신의 운명 같은 것으로 받아들여지는가 하면, 전쟁으로 시달렸던 사람들에게는 시름을 달랠 수 있는 위안이 된 까닭이라고도 한다.
정비석의 소설 「산유화」와 영화화, 그리고 숱한 드라마와 기념사업이 김소월의 시를 이른바 ‘국민시’가 되게 하는 요인이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일도 시 텍스트 자체의 자질이 훌륭하지 않고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오랜 세월 「진달래꽃」이 국민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던 시적인 자질은 무엇일까? 우리나라 최고의 시로 자리 잡을 수 있는 훌륭함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세간의 설명을 보면, 영변(寧邊) 약산(藥山)의 진달래꽃은 향토적 정감을 유발시키며, 임이 가시는 길에까지 꽃을 뿌려 축복하는 산화공덕(散花功德)의 이미지, 가실 때에도 원망을 하지 않겠다는, 희생을 통한 사랑의 승화 과정,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는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정신, 이들이 전반적으로 한국인의 인고(忍苦)와 정한(情恨)을 훌륭하게 표현하였다고 한다.
동의할 수 있는 설명이다. 하지만 「진달래꽃」에는 시 교육 현장이나 시험 출제 빈도가 높은 은유, 직유, 의인, 제유 등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시 텍스트가 ‘진달래꽃’과 관련되는 비유적 통일체를 이루고 있는 느낌을 받을 수는 있다. 내밀히 따지자면 영변 약산이란 지명의 환유, 진달래가 한(恨) 어린 민중의 정한을 연상시키는 은유 등이 설명이 될 수는 있다.
그런데 만일 ‘영변 약산’에서 향토적인 정감을 느끼지 못하는 독자, 불교의 산화공덕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독자, 한국인의 정한에 대한 이해가 없는 독자라 할지라도 이 시에서 충분히 감동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 피교육자적인 식견을 갖지 못한 1950, 60년대 여성들마저 감동해마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시 전체의 진술 내용이 특별히 순수한 심경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싫다고 하고 가는 애인에게까지 절대적인 지지를 보이는 건, 일반적인 사랑 놀음이 아니다. 남다른 특별한 예이다. 그래서 이별의 슬픔의 폭과 사랑의 폭은 그만큼 커진다. 시 전체가 이별을 앞둔 사랑의 환유적 사례의 알레고리이지만, 남다른 특수한 지경인 것이다. 진달래꽃을 뿌리고 기꺼이 짓밟히는 장면도,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의 마음도 남다른 진정성을 보이는 대목이다. 이 시는 언어에 수사(비유)의 옷을 잘 입혀서 가장 감동적인 시가 된다기 보다 그 전에 사랑과 이별에 대한 특수한 인식, 남다른 성의로 하여 일반 독자, 전문 독자를 가리지 않고 감동에 젖고, 심금을 울리는 창작력에 감탄하는 것이다.
필자가 제시해온 차유의 관점에서 보면 이 시의 정서는 1연 내용이 수미상관으로 반복되는 끝 연,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의 반어적이거나 역설적인 표현에 집결된다. 이 같은 자기희생적 인고의 정서가 잘 드러난 구절이 또 있을까? 많이 울 것이면서 울지 않는다고 말하는 모순을 반어(反語)라고도 하고, ‘죽어도’와 ‘아니 눈물’ 흘리는 표면의 모순과 그 내면의 진실의 상황을 일컬어 역설(逆說)이라고도 하거니와 이 지점도 오랜 세월 변함없는 사랑과 흠모를 받는 이유가 된다.
시의 탁월함은 운율에도 있다. 이 시가 쓰인 일제 때부터 6.25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시단은 서양시 흉내를 창의력으로 호도해왔거니와 이 시는 전통의 3음보 민요조 양식을 내재적 자유율로 근대화한, 차별화된 운율체계에 있다. 로만 야콥슨이 강조하듯 시에 있어 운율은 은유와 환유의 기능을 하거니와, 「진달래꽃」의 운율이 시단의 풍토에 차별되는 전통미, 전통 민요조에 가하는 근대적 내재율의 변용인 것이다. 이렇게 남다른 차이, 불합리할 정도의 진정성, 일반의 상식을 벗어나는 개별성, 문맥상의 새로운 전개, 이러한 기능적 장치가 ‘차유’이다.
이렇게 차유는 일반적 인식과 텍스트의 문맥 사이의 차이성과 텍스트의 표면적인 의미와 실제 의미 사이의 차이성에 의해 일어나는, 비유적 언어의 기본 축의 하나이다. 시 「진달래꽃」은 임과의 이별을 목전에 둔, 슬픔을 대치하는 은유의 축과 그에 인접한 예(例)를 적시하는 환유의 축, 그와 함께 아니, 그보다 더욱, 진달래꽃을 뿌리고, 다시 짓밟히고, 죽어도 울지 않는다는 자세 등을 통해 화자의 남다른 심성, 진정어린 심성에 연결하는 차유의 축에 의해 각별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차유의 차이성은 이렇게 텍스트 밖의 개인 차, 사회적 상황 인식의 차이와 연동된다. 이는 창작의 언어란 원래 말 바꾸기, 대치(代置)의 놀음이란 수사의 차원을 넘어 남다른 상황 인식이나 남다른 성찰, 즉 차별적 인지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다. 표현의 적절성은 보다 은유나 환유의 기능에 가깝겠지만 그들이 새로움과 긴장과 감동의 폭을 높이는 기능은 차유에 의하는 것이다. 이는 차이성 없는 밋밋한 비유를 넘어서는 건 물론 환상, 해체, 떠도는 기표 따위를 명분으로 삼는 언어유희가 성행하는 풍토에 진정어린 감동 생성을 위한 창작 자세의 핵심이 된다.
「진달래꽃」이 1920년대 소위 낭만파의 개인적 감정토로 시와 카프의 선전 시의 서술에 대해 개인적 서정을 극한의 정황으로 표현해낸 시라면 박노해의 「손무덤」은 사회 역사적 상상력에 의한 80년대 시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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