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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한문학, 견내량(見乃梁) 한문학(漢文學)>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차례 : 1. 견내량(見乃梁) 개요 2. 관해루(觀海樓)와 무이루(撫夷樓) 3. 견내량(見乃梁) 한문학 4. 마무리
1. 견내량(見乃梁) 개요
견내량(見乃梁)은 예로부터 ①고성군 또는 통제영과, 거제도의 행정 경계지역이자, ② 육지와 섬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③ 외적의 침입을 가로막는 요해처이자 ④해상무역과 해상 운송로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먼저 견내량(見乃梁) 지명유래를 살펴보면 “다 보일 듯 가까운 여울”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1554년 정황(丁熿)의 유헌집에 들어 있는 한시에서 그 어원을 유추할 수 있다. [思君見乃見乃見乃梁地名瀧] 그대 그리워 "다 보이네" "다 보이네" "견내량" 여울의 지명이 됐다네.
마주보는 견내량의 빠른 물살에 건너지 못해, 애가 타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며, 그 어원은 2가지로 유추된다. ① 빠른 물살 땜에 건너지 못해 "다 보인단다" " 다 보인단다" "기다려" 라고 외치는 거제민의 일상적인 생활 장면과 ② 오양역에 도착한, 거제도로 유배 온 분들의 심정을 나타낸 듯하다. 육지와 바다 섬에 나뉘어져 보고픈 임과 가고픈 곳을 가지 못하는 애통한 심정을 읽을 수 있다.
○ 통영시 쪽에는 용남면 장평리 유방 견유 마을에서 연기 마을까지, 거제시 쪽은 사등면 덕호리 해안 사이 해협, 넓은 여울을 견내량(見乃梁)이라 부른다. 길이는 약 3km, 폭은 약 180m, 400m까지 이다. 임진왜란 때 한산 대첩의 주요 배경이자, 현재는 거제대교와 신거제대교가 걸쳐 있다. 견내량은 고려시대에는 고려 의종이 1170년~1173년까지 약 3년간 거제도로 유배되어 전하도(殿下渡)로 불렸고, 임진왜란 때는 옥포해전과 한산해전의 주요 배경지가 되었다. 특히 한산해전은 7월 5일부터 7월 13일까지 견내량에서부터 한산도 앞바다 그리고 안골포 전투를 벌이는 시발점이 되었다. 매년 5월, 6월만 채취하는 견내량 돌미역(일명 연기미역)은 예로부터 그 품질을 알아주는 유명한 진상품이었다.
◯ 거제도는 통일신라 시대부터 고려중기까지는 거제현령(수령)이 수군을 함께 통솔하며 연근해를 지켰다. 거제현령이 왜구와 수군전을 치르다가 전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이후 고려말기 가라산방어소가 송변현에 설치되었으나 공식적인 수군진영은 아니었다. 고려말 몽고의 일본 침략과, 대마도 정벌 때부터 견내량 수군진영이 구축되었고 공민왕의 수군진영창설로 해운 교통로인 진해만과 견내량을 보호코져, 수군이 주둔하였다. 또한 조선초기 태조 때 벌써 견내량과 영등포(장목면)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각종 고문헌에서 이를 전하고 있다.(통영 삼천진 가배량진, 고성 소비포 사량 당포, 진해 제포 등)
고려시대와 조선건국 時까지는 바다를 끼고 있는, 통영 남동쪽 해안과 섬, 미륵도 포함하여 모두 거제도 관할 지역이었다. 이는 바다와 육지의 관리를 2원화 하였던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 것이다. (당시 미륵도에는 삼천진과 가배량진이 위치하고 있었다).
◯ 고려말에는 견내량 천호였다가, 태종4년 1404년 해상해운로를 보호코져 견내량만호가 설치되면서 거제도의 공식적인 최초의 만호진영이 되었다. 견내량진은 세종1년 1419년 대마도 2차 정벌 후 폐지되었다.
2. <관해루(觀海樓)와 무이루(撫夷樓)>
<신증동국여지승람>, 거제의 누정으로는 견내량 동쪽 벼랑에 무이루(撫夷樓), <거제군읍지 1759년, 1899년>에는, 무이루(撫夷樓)[재 견내량 동쪽 해안 금폐(在見乃梁今廢)] 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이(撫夷)는 “오랑캐를 주무르다.“ 관해(觀海)는 ”바다를 바라(살펴)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속동문선 제14권 <관해루기(觀海樓記)>는 김종직(金宗直)이 1470년 함양군수로 재직 시에 고성을 방문했다가 견내량 통영쪽 관해루(견유 마을)에 올라 마주보는 거제도 무이루를 바라보고 지은 기(記)가 ‘관해루기’이다.
그리고 무이루(撫夷樓)에서 지은 한시는 하연(河演,1376~1453)과 권반(權攀, 1419-1472) 두 분의 칠언율시가 전해온다. 또한 김종직(金宗直)의 <관해루기(觀海樓記)>에도 무이루가 언급 되어 있다. 현재 전하는 두 누각의 기록 시기가 조선초기(1400년대)였던 점을 감안하면 무이루(撫夷樓)나 관해루(觀海樓)는 견내량에 천호 또는 만호 진영이 설치되었던 려말선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 예전 두 곳의 누각은 고성쪽 나루터 마을과 거제쪽 나루터에 위치하고 있었다. 현재 오량초등학교 주위에 ‘무이루(撫夷樓)’가 위치하고 있었고, 통영시 용남면 견유 마을 언덕진 곳에 ‘관해루(觀海樓)’가 서로 마주보며 위치했다. 두 누각은 김종직(金宗直)의 <관해루기(觀海樓記)> 내용에서 알 수 있듯, 다락에서 바라보면 바다가 탁 트인, 조망이 좋은 언덕 위에 위치했고, 육지에서 ‘오양역‘ 역참으로 향하는 견내량 길목 양쪽에 두 누각이 마주보고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옛 거제관문이었던, 사등면 '오양(오량)'의 지명어원은 우리나라 고어 '오랑'=뱃대끈, 즉 '안장이나 길마를 소나 말 위에 지울 적에 배에 조르는 줄'을 말한다. 오랑>오량>오양. 역참의 마지막 오양역에서 '역말을 교체하고 다시 안장과 길마를 장착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는 남부지방 곳곳에서 옛 지명에 사용되었다. 당시 고유어 지명을, 한자를 빌려 차용한 것이 지금까지 쓰인 예이다. 현재 거제도에만 한자어 ‘烏壤’을 차용해 지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 <관해루기(觀海樓記)>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철성(鐵城 고성) 남쪽 벼랑에 다락 하나가 있는데, 바닷가와 그 거리가 지척도 못 된다. 나는 듯이 높아 마치 신기루(蜃氣樓)가 허공에 솟은 듯하였다. 무이루(無夷樓)로 바다와 떨어져 서로 바랐으니, 이 고을의 대부(大夫) 이후(李侯) 귀미(貴美)의 중신한 바이었다. 대체 남쪽 고을로서 큰 바다를 다달아서 누대(樓臺)가 이룩된 것이 하나 둘로서 셀 수는 없겠으나, 바다를 굽어보는 것은 이 다락만큼 친절한 곳이 없었다.성화(成化) 11년에 영평(鈴平) 윤상공(尹相公)이 위의 명을 받아 진한(辰韓) 옛터를 관찰할 제, 행장이 호탕하여 바다를 따라 남으로 와서 이곳에 깃발을 멎고 이 다락에 올라 사방을 돌보았었다. 이 날에 태풍이 잠자고 햇빛이 파도가 잔잔하여 만리가 한결같이 푸르렀으며, 깃발이 움직이고 고각 소리가 맑고 웅장하였으며, 고기들과 해오라기가 뛰놀며 서로 모이었다. 상공(相公)은 정신이 맑고 마음이 트여서, 희이(希夷)와 혼돈하고 홍몽(鴻濛)을 초월하여 마치 안기생(安期生)과 연문자(羨門子) 같은 신선과 더불어 어깨를 겨누고 노는 듯하여, 그 평생에 운몽(蕓夢)과 팽려(彭蠡)같이 넓은 흉금이 더욱 넓어졌었다. 이에 추서(鄒書) 중의, 바다를 구경한다[觀海]는 말을 읊어서 이 다락의 이름을 짓고, 또 스물여덟 글자를 써서 오늘날의 태평을 형용하고는, 얼마 안 되어 천령(天嶺)을 순찰하여 이르러서 나에게 얘기하여 기문(記文)을 짓게 할 제, 나는 두 번 절하고 공(公)에게 대답하기를, “이 땅의 웅장과 명승이 만고에 하루와 같으나, 조대(朝代)는 혹시 융성과 쇠퇴함에 인심의 걱정과 기쁨이 이에 매인 것이었다.” 하였다.내 일찍 젊었을 적에 메와 바닷가에 잠간 놀다가, 이 다락에 올라서 바라보니, 그 동쪽은 곧 합포(合捕)인데, 원 나라의 정동원수부(征東元帥付)이다 홀돈(忽敦)과 홍다구(洪茶丘 본래 고려 사람으로 원 나라 장수가 된 자)는 여우가 범의 위엄을 빌어서 제멋대로 날뛰었으므로, 호남(湖南) 몇 천리가 역시 몰락되어서 전함을 만들고 군량을 감독하였으므로, 이곳이 징수(徵輸)의 길이 되어 백성이 소연하였다. 그 남쪽은 거제(巨濟)였다. 신라(新羅)로부터 중요한 변진이 되었는데 고려 말기에 이르러서 여러 차례 병화를 겪어 인연(人煙)이 텅 비고, 이매 망량(魑魅魍魎)의 소굴이 되자 모두 내지(內地)로 옮긴 자가 몇 백 년이나 되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어찌 이 다락이 세워질 수 있겠는가. 비록 있었다 하더라도 이에 올라서 기뻐할 이 뉘 있으리요. 이제 밝은 임금이 잘 다스리시매 농사와 누에치기에 즐거움이 있고, 바닷가에 더욱 발전하여 합포의 군문(軍門)에 장사가 숲처럼 벌여 있으며, 전쟁할 태세를 갖추어 사람마다 한 번 싸울 것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거제의 옛 땅에 도망쳤던 백성이 다 이제 돌아와, 호구가 배나 불어서 낙토(樂土)가 이룩되고, 바다 수자리 터에 모든 군영이 별인 양 벌여 있으며, 바둑처럼 깔렸고, 누른 용의 여러 깃발과 배가 바다를 에워쌌으며, 그 서쪽의 창선(彰善)과 북의 해평(海平)에는 말을 길러 떼를 이루고, 비단 구름이 메를 간직하였었다. 이때를 당하여 이 다락에 올라서 바람 맞아 술잔을 잡는다면, 비록 기뻐하지 않으려 하더라도 할 수 없을 만큼 되었거늘, 하물며 상공(相公)의 깃발이 지향하는 곳마다 멧부리가 움직여, 그가 한 번 기뻐하면 한 도(道)가 모두 그 경사를 입고, 그가 한 번 노하면 한 도가 모두 그의 위풍을 두려워하여, 봄볕과 가을 이슬이 삽시간에 다르게 되는 것이었다. 이제 물건을 보아 회포를 일으켜 기쁘고 유창하며, 바닷가의 초목ㆍ금어(金魚)가 모두 그의 감상을 입었으므로, 일찍이 이 다락의 아름다운 이름을 내려 성현(聖賢)이 입언(立言)하신 미묘한 뜻이 은연히 그 가운데에 붙여 있으니, 옛 사람의 이장(弛張 문무(文武))의 도와 군자(君子)가 인민을 인도하는 방법이 이에서 양득(兩得)이라 할 수 있다. 아, 슬프외다. 뒷날 이 다락의 일고 허물어짐에 대해서는 예측할 수 없겠으나, 관해(觀海)라는 그 이름은 곧 산해(山海)와 함께 그 유구함을 같이할 것이요, 이 다락 이름이 썩지 않는 것이 곧 상공의 이름이 썩지 않은 것이라. 이제 이후(李侯)는 나와 함께 인연을 얻어 이 다락에 이름을 붙인 것인 바, 그 대행이 이보다 더 커다란 것이 다시금 있겠는가.
[주1] 희이(希夷)와 …… 초월하여 : 희이(希夷)는 《노자》에,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희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이라 한다.” 하였고, 홍몽(鴻濛)은, “천지가 생기기 전에 기운만 엉키어 있는 상태이다[混希夷超鴻濛].”는 유자후(柳子厚)의 글에서 나온 말인데, 마음은 만물의 밖에서 초연하다는 뜻이다.
[주2] 바다를 구경한다[觀海] : 《맹자》에 “바다를 구경한 사람에게 여간한 물은 물로 보이지 않는다[觀於海者 難爲水].”는 말이 있다.
[주3] 전쟁할 태세를 갖추어 : 진(秦)나라 장수 왕전(王剪)이 초(楚)나라를 칠 때에, 군사를 쉬게 하고 싸우지 않고 잘 먹이기만 하여 힘을 기르니, 군사들이 큰 돌을 던져 보고 뜀을 뛰었다. 왕전이 그제야 싸워서 이겼다.《史記》
3. 견내량(見乃梁) 한문학(견내량 인근 지역과 견내량을 언급한 한시)
1) 무이루(撫夷樓) / 하연의 시(詩) 1425년 作.
古島衣冠異 옛 섬은 의관이 다르고
元戎號令新 원융(元戎)의 호령은 신(神) 같도다
葦航通北路 갈잎배는 북쪽 길과 통하고
獷俗接東鄰 거친 풍속은 동쪽 이웃과 접했네
海晏妖氛息 바다가 고요하니 요사한 기운 그쳤고
時淸化日新 시대가 청명하니 교화가 날로 새롭다
一區烟火足 한 구역에 연화(煙火)가 흡족하니
盡是太平民 모두 다 태평 성대 백성이어라
[주1] 하연(河演,1376~1453) 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ㆍ신희옹(新稀翁),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태조 5년(1396)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의, 대사헌, 좌찬성,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하고, 편서에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진양연고(晉陽聯藁)』가 있으며, 저서로는 『경재집(敬齋集)』이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1425년(세종 7)에 경상도관찰사로 부임시 경남 남해안을 순행하다 거제도 무이루撫夷樓에서 지은 한시(漢詩)이다.
[주2] 무이루(撫夷樓) : 견내량 동쪽 해안 오량초등학교 인근에 있었다. 1759년 현재 금폐.
2) 등 거제무이루(登 巨濟撫夷樓) 거제 무이루에 올라 / 동문선(東文選) 권반(權攀) , 제17권 칠언율시(七言律詩)
聖聖相承鎭四溟 어진 성군이 이으시와 사해를 진정하시니
戎夷賓服自來庭 오랑캐랑 왜랑들 절로 와서 복종하네
戈鋋不用封疆靜 창ㆍ칼을 아니 쓰니 국경이 조용하고
戰伐無聲海岳寧 싸우는 소리 없으니 강산이 편안하구나
千尋浩浩鯨濤白 넓기도 넓은지고 천 길 물결 희게 솟고
一點茫茫馬島靑 망망한 가운데 대마도인 듯 푸르네
幸是大平無一事 다행히 천하가 태평 아무 일도 없으니
元戎閑臥亞夫營 원수가 아부영 안에 한가로이 누웠네
[주] 권반(權攀, 1419-1472) : 자는 자룡(子龍)으로 권제(權踶)의 아들이요, 권람(權擥)의 아우이다. 세조 즉위에 좌익공신이 되고 음직(蔭職)으로 전농시윤(典農寺尹)이 되었다가 나중에 과거에 급제하고 화산군(花山君)에 책봉되었다
3) 별인(別人) 임과 이별하고. / 소옥화(小玉花), 거제도 남촌(南村) 출신 妓女.
歲暮風寒又夕暉 세모의 찬바람 속에 저녁 해는 지는데
送君千里沾淚衣 천리 먼 곳, 임 보내니 눈물 옷을 적시네
春堤芳草年年綠 봄 언덕의 풀이 해마다 푸르기만 해도
莫學王孫去不歸 왕손처럼 불귀의 객이 되면 아니 된다오.
[주1] 세모(歲暮) : 그 해가 저무는 때, 年末(연말), 세밑,
[주2] 석휘(夕暉) : 저녁 노을, 석조(夕照)
[주3] 방초(芳草) : 향기롭고 꽃다운 풀.
[주4] 소옥(小玉) : 고대 전설 속의 선녀 이름, 중국 오나라 부차(夫差)의 시녀. 나중에 선녀가 되었다고 전해짐.
○ 이 시(詩)에서 왕손(王孫)은 조선 태조 때(1394년) 고려 왕씨들이 거제도 둔덕기성으로 유배 와서 대부분 견내량에 빠져 죽거나 참살 당했다는 사실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봄이 되면 언덕에 새싹이 돋아나듯이, 사랑하는 사람도 꼭 살아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애절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세모의 어스름에 눈물로 옷 적시며 임을 보낸다. 머나먼 천리 길 떠나는 임, 쉽게 돌아오지 못할 것을 짐작하기에 더욱 서럽다. 새봄 돌아와 방죽마다 푸른 움 돋을 것인 즉, 한번 가서 돌아오지 않을 임을 어이 할거나… 원컨대 기다리는 나를 잊지 말아 주소서. 봄풀을 매개로 하여 기다리는 자신을 환기 시키려는… 님과 마음의 줄을 잇고 싶어 하는 간절함을 읽을 수 있다. 기녀인 소옥화(小玉花)는 조선 시대 거제도 남촌(현 동부면)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거제도는 조선시대의 유배지로도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4) 바다를 건너오면서 경신년(1680, 숙종 6년, 선생 74세). 견내량을 건너며. / 송시열(宋時烈, 1607년 음력 11월 12일~1689년 음력 7월 24일)
聖德寬臣海島囚 성덕으로 해도의 신하 풀어 주시어
鯨波重渡淚雙流 큰 물결 다시 건너며 눈물 흘렸노라
惟玆舊要要同利 옛 친구 함께 이로움 요하니
千里山川摠帶羞 천 리 산천 모두 부끄러움 띠었네.
[주] 옛 친구 이로움 요하니 : 기해년 효종의 상사(喪事)에 자의전(慈懿殿)이 기년복을 입도록 주장한 우암이나 초려는 다른 한쪽의 공격을 받아 왔다. 15년 후 현종 갑인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사 때 예론(禮論)이 또 일어났는데 이때 초려는 효종이 적자(適子)이지만 복은 기년이어야 한다는 예설을 만들어 우암과 서신을 왕복한 일이 있다. 그후 6년 경신옥사(庚申獄事) 후에 유배에서 풀릴 때 숙종이 “송시열(宋時烈)의 소견도 이유태(李惟泰)와 같다 하니 모두 해배(解配)토록 하라.” 하였다.
5) 우거즉사(寓居卽事) 오양성, 둔덕기성 / 정황(丁熿).정황 선생은 1552년경 고현성 북편에 있다가, 거제현령이 육지로 통하는 거제시 사등면 오양역 인근에, 배소를 잠시 옮기도록 허락한다. 정황(丁熿)은 몇 개월 거주하는 동안 둔덕기성과 오양역 일대를 둘러보게 된다. 다음은 신라시대부터 이어 왔다는 ‘둔덕기성’을 언급한 유일한 문헌기록이다.
一島浮眉碧(일도부미벽) 푸른 눈썹처럼 떠 있는 한 섬
四年住嘯歌(사년주소가) 4년간 거주하며 휘파람불고 노래했다.
山河通日本(산하통일본) 산하는 일본과 통하고
城郭自新羅(성곽자신라) 성곽(둔덕기성)은 신라 때부터 있었다.
安分非今爾(안분비금이) 분수에 편히 하려고 함이 오늘뿐만 아니지만
向隅是命何(향우시명하) 실망하는 이 운명을 어찌하랴.
月明倚東柱(월명의동주) 밝은 달은 동쪽 기둥에 기대고
回鴈聽西過(회안청서과) 돌아온 기러기 서쪽으로 가는 소리 들리네.
6) 오양신조우성(烏壤新造偶成) 中 일부 / 정황(丁熿 1512~1560)
朝日東南心上受 동남쪽 아침 해는 마음속 깊이 응(應)하고
暮雲西北眼邊過 서북쪽 저물녘 구름은 눈가를 지난다.
秋風無限孤臣意 끝없는 가을바람 외로운 신하, 아~
見乃津頭費苦哦 견내량 나루에서 괴롭게 신음하네.
7) 기성유배 고려의종을 추도하며(追悼岐城謫毅宗) / 고영화(高永和)
不向普賢飛(불향보현비) 어찌하여 보현원(普賢院)에 날아가지 않고서,
岐城見者稀(기성견자희) 보아 주는 이 없는 기성(거제)에 사는고?
俗世身早蜕(속세신조태) 속세에 일찌감치 벗어난 뒤로,
歲寒且安歸(세한차안귀) 추운겨울 오면 어디로 돌아가리.
浩浩雲濤闊(호호운도활) 구름과 바다물결 끝없이 펼쳐 있고
殘月海上窺(잔월해상규) 새벽달은 바다 위를 살피네.
春回山舊靑(춘회산구청) 돌아 온 봄, 산은 옛 같이 푸르니
不肖復爲悲(불초부위비) 다시는 슬퍼하지 않으리.
[주1] 둔덕기성(屯德岐城) : 폐왕성(피왕성). 거제지역 국가사적지정 제509호 문화재, 해발 326m 우봉산 자락에 위치, 신라시대부터 내려 온 성(城)으로 고려의종(약 3년간)과 조선태조 때 고려 왕씨들의 유배지. 기성(岐城)은 거제의 별호.
[주2] 보현원(普賢院) : 1170년 의종이 보현원(普賢院)에 거동하였을 때에 정중부(鄭仲夫)·이의방 (李義方)·이고(李高) 등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8) 그대 그리워(思君) / 고영화(高永和)
見乃梁雲看漠然(견내량운간막연) 견내량의 구름, 막연히 보이는데
逸韻忙情散遠汀(일운망정산원정) 빼어난 소리와 애타는 정이 멀리 물가에 흩어지네.
送君鷄林不敢忘(송군계림불감망) 계림으로 보낸 그대, 차마 잊을 수가 없어
不眠深夜月孤懸(불면심야월고현) 잠 못 이루는 깊은 밤, 외로운 달만 걸렸구나.
◯ 고려 의종이 거제에 도착한, 한달 후까지 정과정곡을 지은 정서는 오양역에서 13년간 거제도 귀양살이 중이었다. 그도 산남대로(통영별로)를 이용해 견내량을 건너 오양포에 도착, 오양리에서 유배 생활을 했다. 당시 서해안 뱃길은 너무 위험하고 또한 수백 명의 문무백관과 가솔들, 각 지역추종자, 각종 화물을 싣고 오기가 힘들었고, 또한 왜구가 남해 서해안에 득실하던 때라 안전한 육로를 이용했다. 당시 고려초기에 개설한 역길의 역원 중에 개경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 거제도 오양역이라, 왕자나 대군, 고려의종이나 정서 등 중요 인물이 거제도로 유배 온 이유였다.
9) 거제도 견내량을 건너며[渡巨濟見乃梁] / 五言律詩.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1347~1434) 1401년作.
曠望海空闊 멀리 바라보니 바다가 넓고
願瞻山紏紛 돌아보니 산이 얽혀 있다.
光陰古今變 세월은 예와 지금이 변했는데,
潮汐往來分 밀물과 썰물은 가고 옴이 분명하구나.
盡角穿秋漢 나팔 소리는 가을 하늘을 뚫고,
危檣劃暮雲 높은 돛대는 저녁 구름을 가리네.
入舟還有惑 배에 오르니 도리어 감회 있어,
簫皷酹王孫 퉁소와 북으로 왕손을 조상하네
濯足滄海水 창랑수(滄浪水)에 발을 씻고
停艫杜若洲 두약주(杜若洲)에 배를 대누나.
潮生靑嶂斷 파도가 이니 푸른 멧부리가 끊어진 듯하고,
海闊碧天浮 바다가 넓으니 파란 하늘이 둥실하네.
橫樂曹公詠 조공(曹公 조조)은 창을 가로잡고 시 읊었고
乘槎漢使遊 한(漢) 나라 사신은 타고 놀았다지.
往來成信宿 오가노라 이틀을 머무르며
相伴有沙鷗 모래 위 갈매기 짝을 짓는다.
長風送征㠶 긴 바람에 돛배 보내고,
高枕舟中臥 배 안에서 편안히 베개 베고 누웠네.
回回白沙平 빙빙 돌아드니 흰 모래가 평평하고,
冉冉靑山過 언뜻 언뜻 청산을 지나가네.
江闊浪花多 강이 넓으니 파도에 꽃 같은 무늬 일고,
天晴雲葉破 하늘이 개니 구름 잎처럼 갈라지네.
何圖島夷窟 섬 오랑캐들, 이날에
此日歸王化 왕화(王化)에 돌아올 줄 어찌 짐작했으리.
[주1] 두약(杜若) : 다년생 향초의 이름, 높이 1,2척에 매운 향이 있고 여름에 흰 꽃이 피며 열매는 검푸른 색이다. 문학작품에서는 군자, 현인을 비유한다.[주2] 신숙(信宿) : 연이어 이틀 밤을 묶는 것을 말한다. 혹은 2~3일을 가리킨다.[주3] 낭하(浪花) : 혹은 낭화(浪華)라고하며 파도가 서로 충돌하여 좌우로 일어나는 물거품(泡沫)을 말한다.[주4] 도이(島夷) : 중국 동부의 해양민족 또는 왜구를 가리키며, 국내로 침략하는 해적을 총칭해서 말한다.[주5] 왕화(王化) : 임금의 교화
4. 마무리
現 거제시와 통영시 사이 바다를 경계로 한 견내량 지역은 향후 통영시와 거제시가 서로 협력하여 개발을 해야 할 천혜의 여울(梁)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예로부터 역사적 지역이었던 사실은 물론이고, 해양 생태 관광의 보고인 곳이다. 한산도에서 가조도 사이의 아름다운 섬과 바다, 그리고 그 지역 분들이 삶의 터전을 일구고 있는 ‘해양보호구역’으로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다만 통영시나 거제시의 변두리 지역이라, 다소 소홀한 부분이 있긴 하나, 앞으로 두 지자체가 함께 협조해서 생태환경문화 보존지역으로 발전시켜 전국에 모범적인 지자체의 본보기가 되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국가와 국가의 경계에서, 지자체와 지자체의 경계에서 경제 문화가 더욱 꽃 피울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한다. 그러므로 견내량을 중심으로 유럽의 지중해와 같이 아름다운 관광지로써, 가슴에 묵직한 자연의 그림 하나 그릴 수 있는 곳으로 변모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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