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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안>
제목: 구원받는 것이 뭘까?
일자: 2023년 6월 18일 주일
[사도행전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설교를 위한 묵상:
지난 주일에 준비한 설교를 절반 정도 했다. 그때 나누지 못한 내용도 중요한 것이었는데… 그래서 이번 주일에 그것을 포함하여 설교안을 준비하고 싶다. 주제는 구원이다!
구원, 성경은 왜 구원에 대하여 그렇게 많이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위기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빌립보의 간수장은 그 위기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그는 왜 죽으려고 했을까? 전에 이 본문을 설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요새 드는 생각은 그때와는 조금 다르다. 나는 그 간수장이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도 바울이 섬기는 신이 내리는 진노의 형벌을 실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2017년 6월 4일 주일에 설교한 그 대목을 나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평생을 군대에서 쌓은 명성 때문에 빌립보의 교도소장을 하게 되었는데, 자신이 지키던 죄수들이 모두 달아난 것을 보고 그만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자기를 지키고 보호해주던 신들의 은총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섬기는 신이 진노했는가? 그들이 점치는 귀신을 쫓아내더니 간밤의 기도와 찬양으로 신을 깨웠는가? 자신이 섬기던 신들이 이제는 자기를 버렸는가 생각하면서 로마의 장군이라면 명예롭게 죽는 길을 택하리라고 칼을 빼 들었습니다. 자결하려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4) 빌립보 교도소장의 경우)
위의 설교안을 보면 간수장이 죽으려고 한 까닭은 명예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라고 되어 있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6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간수장이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땅이 흔들리는 지진을 내리는 신에 대한 두려움이 그것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사람은 자신이 그토록 의지하던 것이 흔들릴 때 쉽게 생을 포기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두려워하던 그 간수장을 안심시키며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 사도 바울의 메시지는 그 간수장을 회심하게 했고 안도감을 되찾게 해 주었다.
나는 이번 설교에서 구원이 필요한 인간의 실존에 대하여 다시 한번 다룰 예정이다. 지난 주에는 구원의 필요성과 관련하여 고독의 관점에서 삭개오를 예시로 들었다. 그리고 서로를 돌아보자는 메시지로 결론을 맺었다.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제사이며 구원의 노래라는 것이었다.
이번 주에는 구원이 필요한 인간의 실존에 대하여 좀더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그리고 구원의 결과 얻게 되는 선물인 영생이 결국 새로운 삶임을 소개할 것이다. 즉, 영생은 오는 세상의 삶으로서 하나님이 완성하실 세상이 오는 세상이며 우리의 미래 세상이다. 그것을 미리 바라보고 현실에서 살아내는 것이 구원의 목적임을 분명하게 하고자 한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결국 그런 삶을 살라는 모범이며 명령이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현실에 굴복하지 말고 다가오는 미래를 소망하며 그것을 현실로 앞당겨 살라는 초청이며 격려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현실의 위기에 삼켜질 것 같은 사람이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과 용기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에 가능하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며 영생이다.
설교 개요
1.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겪는 고충
2. 하나님이 구원하실 때 일어나는 일
3. 심판과 구원은 같은 날에 이루어진다
4. 심판은 멸망을, 구원은 새 출발을 의미한다
5. 새 출발을 위한 구원을 영생이라고 부른다
6. 주 예수를 믿으라, 구원을 얻으리라
1.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겪는 고충
설교나 전도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일까요, 아니면 괴롭고 부담스러운 일일까요?
성경을 보니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비밀을 깨닫고 그것을 전하는 임무를 맡은 것은 지극히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맡은 임무가 얼마나 크고 영광스러운지 자신은 그에 비하면 너무 부족하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전도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으로서 하나님이 자신을 충성되게 여기셨기 때문에 이 귀한 임무를 맡기셨다고 고백했습니다(딤전 1:12). 이것이 사도 바울의 입장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임무에 대하여 거부 반응을 보입니다. 자신이 그 임무를 맡기에는 너무 부족하다는 겸양의 모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예언자 요나 같은 사람은 아예 그 임무를 맡기 싫어서 정반대 방향으로 달아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심정이 어떤지에 잘 보여주는 고백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언자 예레미야의 고백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 20:9
예언자 예레미야가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고난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해져서 예루살렘이 망한다고 전하라는 강력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싫어할 줄 알면서도 그렇게 전했더니 사람들이 그를 싫어하고 조롱하며 심지어 그를 때리기까지 합니다. 이런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어쩌면 죽기보다 싫은 일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한편으로는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몹시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하는 곳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설교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일 것입니다.
특별히 목회자가 되는 일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조롱의 대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괴로운 일이었고 동시에 영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 둘 중에 오직 하나의 대접만을 받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나 목회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도 좋은 그 말씀이 있다면 그는 후회없이 그 길을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이 없다면 그는 언제나 이리 저리 흔들리며 마침내 하나님의 종으로서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모든 신자들 앞에 놓여 있는 시험대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특별한 각오를 할 것을 주문하셨습니다. 이런 각오가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결국 신앙이라는 구도의 길을 떠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얻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일념으로 사는 구도자들은 결국 좁은 길을 지나 생명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구도자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도 구원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 주에는 이토록 충만한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살면서도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찬송을 올려드린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드리는 감사의 찬송은 구원의 노래이며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제사입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찬미의 제사와 나눔과 섬김의 제사는 종교가 최고도로 발전할 때 나타나는 영성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이 무엇이며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2. 하나님이 구원하실 때 일어나는 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는 사도 바울의 외침은 그 후에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기독교인들에게 하나의 전도구호가 되었습니다. 교회들은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에 이 말씀을 걸어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본래 빌립보의 간수장에게 사도 바울이 한 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을 지키는 간수장이 자결하려는 것을 보고 그를 만류했습니다. 그 간수장은 오늘날로 말하면 교도소장입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한 것은 지진이 나서 죄수들이 모두 달아났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의 간수장은 아마 평생을 전장에서 싸우던 로마군단의 지휘관이었을 것입니다. 로마의 군대는 용감하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렇게 군율이 엄한 군대에서 복무하고 제대를 한 후에 로마제국에 속한 도시들에 나가서 그 지역을 다스리는 공직자가 되는 것은 로마 군인의 영광스러운 퇴임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의 교도소장은 군인으로서 자신의 명예를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교도소 관리에 실패했음을 깨달았을 때 자결하려고 한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지진이 났을 때 왜 죄수들은 달아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빌립보의 간수장은 무서워 떨며 사도 바울 앞에서 엎드려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을까요? 여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죄수들과 간수장은 사도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하나님께 부르는 찬송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진이 났습니다. 얼마나 큰 지진이었는지 감옥 문이 떨어져 나가고 죄수들을 묶고 있던 족쇄가 끊어졌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섬기는 신의 진노가 틀림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지진이 사도 바울 일행을 구하려는 신의 진노였기에 그들과 함께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빌립보의 간수장도 사도 바울을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큰 역사를 보고 무서워 떨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때는 하나님의 큰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하신 후에 세상에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내시고 자기 백성을 건져 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날에는 세상 사람들이 그 백성들을 우러러 바라보며 따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높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 내실 때에도 큰 능력을 행하셨고 그 결과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백성들을 존대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출애굽기 11:3
하나님의 구원은 늘 심판과 함께 일어납니다.
3. 심판과 구원은 같은 날에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노아의 시대에 세상을 물로 심판하실 때 노아의 가족 여덟 명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을 대적하던 사람들을 심판하실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별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을 받았고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을 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활동입니다. 이 세상이 어그러지고 거슬릴 때 하나님은 그것을 바로잡으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을 기뻐하고 찬양합니다.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
시편 96:1, 10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임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는 것이며 우리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때로 악한 사람들이 일어나 세상을 어지럽게 할지라도 하나님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어그러진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활동입니다. 그 결과 다시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세상에는 질서와 평화가 찾아옵니다. 이런 이유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찬양했습니다.
노아의 시대에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신 결과 낡고 병든 세상은 없어지고 물에서 새롭게 드러난 신세계가 펼쳐졌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노아의 가족에게 그 새로운 세상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창조의 아침에 하신 축복선언을 노아의 가정이 맞이하는 세상을 향하여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창세기 9:1
노아의 심판은 단지 세상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로 가득하여 더 이상 연약한 생명이 살 수 없는 세계가 될 정도로 세상이 망가졌을 때 하나님은 낡은 세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노아의 시대에 세상은 다시 창조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세상을 공허와 혼돈으로부터 질서와 생명으로 바로잡으시는 새 창조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새 창조라는 사실을 우리는 출애굽기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때 애굽에 살고 있던 히브리인들은 고된 노동과 착취와 억압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고통은 사내아이를 잃을 때마다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은 이 모든 어그러진 것을 바로잡기 위하여 일어서셨습니다. 그것이 애굽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애굽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히브리인들을 괴롭게 하던 악한 세력은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가 되었고 히브리인들은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예비된 약속의 땅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 약속의 땅은 히브리인들이 들어가서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 살게 될 에덴동산과 같은 거룩한 땅이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한 나라에게는 심판이지만 한 나라에게는 새로운 임무를 맡은 백성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자기 조상들이 애굽에서 건짐을 받은 출애굽 사건을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창조된 사건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맡은 일은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세계 만방에 드러낼 제사장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애굽에 심판이 임하던 날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구원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이사야 43: 1, 7
4. 심판은 멸망을, 구원은 새 출발을 의미한다
위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일어나는 날에 하나님의 구원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어떤 사람들에게 멸망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구원은 어떤 사람들에게 새 출발을 의미합니다. 구원이 새로운 출발인 이유는 하나님이 새롭게 열어 주시는 세상을 맡아 관리하고 다스릴 사람들이 되라고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대하여 가장 실감나게 표현한 성경을 들라면 구약에서는 출애굽기가 있고, 신약에서는 요한계시록이 있습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세상의 악한 세력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여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지 잘 묘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묘사는 상당히 비유적입니다. 예를 들면, 짐승으로 표현된 악한 세력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기 앞에 굴복하게 하려고 그 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게 합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물건을 사고 팔 수 없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들은 짐승의 표를 받고 음녀가 주는 포도주를 마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옷이 더럽혀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한 사람들의 행실이 어떤 것인지를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짐승을 따르는 사람들과 짐승이 어떤 심판을 받게 되는지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 표현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4:9~11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표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표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 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져지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들의 살로 배불리더라
요한계시록 19:20~21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참 인간의 삶과 형상을 잃어버리고 짐승처럼 살아가게 하는 세력들에 굴복하고 복종하는 사람들이 결국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들려줍니다. 그들은 아무리 화려하고 부요하게 살지라도 결국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불구덩이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악한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진심으로 섬기는 친 백성에게는 어떤 약속이 주어졌습니까? 그들을 향한 약속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래의 구절에서 확인해보겠습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요한계시록 2:26~27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요한계시록 20:4, 6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요한계시록 22:5
이 본문들은 구원받을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것은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구원받을 사람들에게 이런 약속을 주시는 걸까요? 우리는 성경의 시작을 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인간을 만드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육하고 번성하며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이 세상의 관리자나 청지기 또는 왕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인간을 위하여 계획하신 바로 그 모습과 영광을 회복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새로운 출발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날을 열어 주시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제사장들로 살 수 있게 기회를 주십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아 새로운 출발을 하는 사람들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5. 새 출발을 위한 구원을 영생이라고 부른다
구원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을 때 그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으므로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부르거나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거듭난 사람과 새로운 피조물이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요 3:3, 딛 3:5, 고후 5:17, 엡 2:10).
그런데 성경이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용어가 있는데 그것은 영생입니다.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으로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아래의 구절들은 이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24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요한일서 5:11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얻는 구원을 영생이라고 소개합니다. 영생은 오는 세상의 삶으로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삶입니다(요 17:3).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예언자 요엘이 말한 것처럼 자녀들은 예언을 말하고, 청년들은 환상을 보며, 아비들은 꿈을 꾸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예언자급으로 하나님과 친밀하고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것이 장차 하나님이 새롭게 열어 주실 세상에서 일어날 일입니다.
오는 세상의 삶은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새로운 세상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입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는 말씀의 의미는 그런 삶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지금부터 누리기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보면 삭개오가 구원을 받았을 때 그는 사실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삭개오가 얻은 영생은 오는 세상의 삶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나누고 베푸는 삶이며, 진실하고 따뜻하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산상수훈의 가르침도 사실 영생을 얻은 사람들의 삶을 보여줍니다. 먼저 대접하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깨끗하고 참되게 살아가는 것, 이웃의 슬픔을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 그런 삶이 오는 세상에서는 완전하게 꽃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이미 그런 삶을 살기 시작했으며 영생을 맛보기 시작했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약속 중에 왕 노릇 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도 역시 오는 세상에서 신자가 누리게 될 복입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영역을 생명과 평화가 가득한 곳이 되게 가꾸는 일입니다. 이것은 영생을 얻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지금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실 때 기대하셨던 바로 그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만물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이며,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모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사람들이 누리는 새로운 삶이며 영생입니다.
영생은 단지 시간의 길이가 영원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삶의 질이 현재 세속적인 삶과는 다르다는 의미입니다. 세속적인 삶은 탐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착취하고 죽음을 확대합니다. 그러나 영생은 신적인 삶이며, 하늘에 그려진 하나님의 청사진을 이 땅에서 실현하는 삶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하는 삶이며 진리 가운데서 행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생이며 구원받은 사람이 누리는 새로운 삶입니다.
6. 주 예수를 믿으라, 구원을 얻으리라
그러면 주 예수님을 믿으면 왜 구원을 얻게 될까요? 예수님은 어떤 점에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실까요?
먼저 앞에서 살펴본 구원에 대해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어그러진 세상을 바로잡으시는 심판의 날에 자기 백성을 구별하시는 거룩한 행동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별하시는 이유는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의 낡은 삶을 버리고 하나님이 만드실 오는 세상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는 것이며 그것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과 모범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이 누리는 삶을 영생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구원이란 결국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자신의 삶을 맞추어 나아가는 새로운 삶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리를 하나님께 속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바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3:18
사도 바울도 로마서에서 같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로마서 4:25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죄인된 우리를 대신한 것이었으며 그 결과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으며 그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전에는 원수처럼 멀리 있었으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삶이었다면 이제는 친 백성이 되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그 뜻을 배우고 따르기를 즐거워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이 누리는 복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것에 대하여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구원이 하나님께 속하며 하나님 앞에 있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에 동참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시 16:11).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걸까요? 이는 마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주문처럼 사용하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의지하고 기도하라는 것이며, 동시에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본받음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저 예수님의 이름만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마 7:21).
이런 이유로 사도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을 가리켜 예수님을 본받는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은 이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린도전서 11:1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힘입어 그를 본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의 어떤 점을 본받아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에베소서 5:1~2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은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 청주 지역에서 선교사역을 하던 미국 북장로교 출신의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프레데릭 밀러(1866~1937)입니다. 한국식 이름은 민로아 선교사입니다. 그분은 한국어에도 능통하여 찬송시를 여러 편 짓고 전도지 제작에도 열정을 냈습니다. 우리말 찬송가에는 민로아 선교사가 작시한 찬송 몇 곡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96장), 공중 나는 새를 보라(307장), 주의 말씀 듣고서(204장) 등.
그런데 민로아 선교사가 지은 찬송시는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명확하게 가르쳐줍니다. 그 찬송이 451장 ‘예수 영광 버리사’입니다:
1. 예수 영광 버리사 사람 되신 것 보고
너도 고난당하나 길이 참으라
2. 예수 친히 십자가 지고 가신 것 보고
너도 주의 십자가 지고 따르라
3. 예수 너를 위하여 죽으심을 본받아
너도 남을 위하여 몸을 바쳐라
4. 예수 부활하셔서 승리하신 것 보고
너도 승리할 줄을 믿고 싸워라
5. 예수 승천하셔서 영광 받으심 보고
너도 영광 받을 줄 믿고 섬겨라
6. 예수 다시 오셔서 상을 주실 줄 믿고
너도 상을 얻도록 참고 참으라
오늘도 우리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100년 전보다 더 아름답지 못한 방식으로 전달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을 기독교회에 들어와야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유대인들이 할례를 받아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할례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할례만 받는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지난 6월 3일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빌리그래함 전도집회 50주년 기념대회에서 프랭크 그래함 목사가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는 예수님을 영접하면 죄사함을 받으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메시지가 핵심이었습니다. 저는 6월 6일에 유튜브로 그 설교 영상을 보고 적지 않게 실망했습니다(나의 소감문). 그 이유는 50년 전에 열렸던 집회에서 전달된 메시지가 시대에 맞지 않게 다시 한국에 전달된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받는 구원이 무엇이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는 방식이 너무 피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본받고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런 결단을 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보여주시고 가르치신 모범과 교훈이 현재의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오는 세상의 삶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정 사는 것이며 참 인간의 길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영원한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영생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영생은 오는 세상의 삶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시면서 우리를 그리로 초대하시는 것에 대하여 응답하면서 나아오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들은 이 세상의 삶과 문화, 그리고 추구하는 것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더 멋지고 더 아름답고 더 거룩한 세상의 삶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그 길을 열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바라보고 본받아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다가올 미래를 앞당겨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영생을 얻었으며 심판에 이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 무엇임을 분명하게 이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바쳐 그 길을 따르며 사람들에게도 그 길을 권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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