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마지막날이다 이제는 봄의 기운이 눈 앞에 와 있다
쾌청한 날씨 그리고 오후엔 10도를 넘기는 기온으로 봄 나들이겸 안성 청록뜰을 찾았다
박두진 동상과 시비가 먼저 맞는다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삼흥로 금광호수 주변에 청록뜰이 조성되어 있다
천 여편의 시와 사백여 편의 산문을 남긴 청록파 시인 혜산 박두진의 고향이 안성이다.
안성에 있는 금광호수를 바라보며 걷는 산책길에 박두진 문학길인 청록뜰이 있다.
호수의 물결에 잠겨있는 괴목들이 약간은 태고적 신비로움을 더한다 그 주변에 데크길을 놓아 맑은 호수 그림자와 함께 우리의 마음을 한결 청초롭게 한다
산책길로 들어서면 시인의 동상을 시작으로 산책길 중간중간에 시인의 시가 걸려있다. 호수 위의 테크 길은 호수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다.
걷다 보면 시인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다. 중간중간 걸려있는 시어들이 내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걷다가 쉴 수 있도록 곳곳에 벤치가 있다.
벤치에 앉아 파아란 하늘과 잔잔한 호수의 물결을 보면 어느새 나의 마음에 시를 지을 아름다움이 가득차진다
데크길 한쪽으론 박두진 문학길이 수수하게 이어져 있다 호수 주변으로 빙 둘러 이어진 호숫길은 그다지 급하지도 격하지도 않게 그저 편안하게 이어져 산길로 들어선다
그러다가 가끔 나무 줄기에 걸린 박두진의 시를 스치며 박두진처럼 청록파의 자연을 느끼게 된다
물론 가끔은 박두진의 인생을 닮아 일제강점기에 살아남아야 했던 지식인의 고뇌도 같이 경험하면서 말이다
박두진은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측량소·경성부청·금융조합 등을 전전하다가 1939년경 등단했다.
1939~40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문장〉에 시〈향현 香峴〉·〈묘지송〉·〈낙엽송〉·〈의 蟻〉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1946년 박목월·조지훈과 〈청록집 靑鹿集〉이라는 공동시집을 펴냈는데, 여기에 실린 그의 시들은 질식할 듯한 일제 말기의 절망적 현실 속에서도 자연에 친화력을 느끼며 살아가는 인간의 종교적 기다림을 노래한 것이다.
이후 〈바다로〉(백민, 1947. 2)·〈햇볕살 따실 때〉(학풍, 1949. 2)·〈산(山)아〉(민성, 1949. 5) 등을 발표하고, 1949년에 개인시집으로는 첫번째인 〈해〉를 펴냈다. 이 시들은 자연의 순수한 생명력과 교감하면서 생기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친화력을 부드러운 산문 형식에 담아낸 것이다.
그의 시는 6·25전쟁을 거치면서 새롭게 변하는데, 시집 〈오도午禱〉(1953)·〈거미와 성좌〉(1962)·〈인간밀림〉(1963)에 이르러 인간의 자유와 절대자에 대한 갈망을 반복되는 관념적 언어로 읊었다.
그 뒤 4·19혁명을 겪으면서 민족의 현실과 역사에 관심을 기울여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격정을 보여준 시세계를 창작하였고 계속해서 시련을 겪으면서도 끊이지 않는 민족적 생명력을 읊은 〈아! 민족〉(현대문학, 1971. 4)과 같은 장시를 통하여 조국애를 적극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 또 다른 암흑의 시기에 시인의 현실참여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한편, 자연과 신앙의 심미적 절대화에 머물지 않고 10월유신과 광주민주화운동 등의 격동기에 시인이 지켜야 할 자세와 비판정신을 보여주었다.
사법 처리의 대상이 된 김지하의 담시 〈오적〉에 대한 감정서에서 그는 '독재정권이 계급주의 문학 내지는 이적 표현물로 몰아붙인 이 작품이 문학 본래의 사명과 책임에 충실한 결과로 오히려 우리의 민주 비판적 영향의 잠재력을 과시한 좋은 표징이 된다'고 밝히고 이를 법정에서 옹호하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 해는 1946년 5월 발표되었으나 씌어진 것은 8.15. 해방 전이다. 이 시에서 ‘어둠’‘달밤’‘골짜기’‘칡범’‘짐승’은 악과 추함, 강자의 이미지를, ‘해’‘사슴’‘청산’‘꽃’‘새’는 선과 미, 약자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것으로, 시인은 이들과의 대화를 추구하며 사랑과 평화가 충만하는 이상세계를 그리고 있다.
박두진의 시 <해>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뙨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여, 달밤이 싫여,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여.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여...,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자리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자리 앉아
애뙤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