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31
마태복음 28장 19절
죄와 비참함 가운데 있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행위 공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이때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행위 공로에 대한 거절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믿음 자체가 공로가 되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도 거절합니다. 다시 말해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에 근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전 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시되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 그로 인하여 이루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보상과 의와 거룩함을 믿는 자들에게 베푸시고 전가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말할 때 나의 믿음이 가치가 있어서 그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받으실 만 한 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보상과 의와 거룩함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요 그 의를 받기 위해서는 오로지 믿음 이외에 다른 길을 없기에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을 사람이 스스로 가질 수 있는가? 없습니다. 성경은 이 믿음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엡2:8).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일으키십니다. 믿음을 일으키시되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에(롬10:17) 말씀이라는 방편을 사용하십니다. 특별히 복음의 선포를 통해 믿음을 일으키십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복음 선포를 통해 일으키신 믿음을 성례 시행을 통하여 확증하시는데, 성례란 복음의 약속을 더욱 충만히 선포하고 우리에게 인 치시고자 하는 의도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바 눈에 보이는 거룩한 표와 인입니다. 여기서 복음의 약속을 더욱 충만히 선포하고 우리에게 인 친다고 할 때 복음의 약속이 부족하거나 불분명해서 성례를 통해 채워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의 약속은 그 자체로 충분하고 명확합니다. 그러나 칼빈이 표현한 것처럼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서 각종 수단을 사용하여 사방으로 괴어 주고 받쳐 주지 않으면 떨리고 흔들리며 비틀거리다가 결국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듣는 방식으로만이 아니라 보는 방식으로도 믿음을 확증하길 기뻐하셨습니다. 즉 복음 선포를 통해 믿음을 일으키시고 또한 복음 선포를 통해 믿음을 확증하시지만, 듣는 것으로만이 아니라 보이는 성례를 더하여 믿음을 확증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런 성례에 대하여 옛 언약 아래 있던 자들이 아니라 새 언약 아래 있는 자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재정하신 것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세례이고 다른 하나는 성찬입니다. 오늘과 다음 시간은 세례에 대하여 살필 것인데, 오늘 본문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보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 사도들에게 이런 명령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여기서 핵심은 제자를 삼으라는 데 있습니다. 누구의 제자를 삼으라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너희는 가되, 모든 민족에게로 가라고 명하십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과 같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합니다. 이때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고백하지 않는데도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바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순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자가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제가 일반적인 순서라고 말하는 것은 다음번에 확인하게 될 유아세례의 내용 때문인데, 어쨌든 복음 전파가 먼저 있고 그 복음을 통하여 제자가 되었다면 제자 된 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례를 명하시는 분이 누구신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를 제정하신 분이십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시기 전 요한의 세례가 있었습니다. 그를 보내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세례 베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요1:33 참조). 또한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로 하여금 세례를 베풀도록 하신 일도 있었습니다(요4:2 참조). 그러나 세례 요한의 경우 주의 길을 준비하고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도록 할 사명으로서(마3:3) 먼저 보냄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세례 요한 자신도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막1:8) 물 세례의 진정한 의미는 성령 세례이고, 자신은 주의 길을 준비하고 곧게 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물로만 세례를 줄 뿐이라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요한이 먼저 세례를 베풀었지만 그의 세례조차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고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도록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주의 길을 준비하고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는 자로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내다보도록 하는 성격에서 세례를 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눅16:16)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사도들이 준 세례도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역을 완성하시기 전 세례를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의 세례나 사도들의 세례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내다보는 성격이 있습니다. 요한은 장차 고난당하시고 다시 사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던 것이고, 사도들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는 그런 의미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뒤 승천에 앞서 세례에 대한 제정을 하신 이후로는 고난당하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으로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 세례를 제정하셨다는 것이고, 그 사실을 더욱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 모든 사역을 마치고 승천에 앞서 말씀하신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 세례란 무엇인가? 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모든 민족에게로 보내시면서 제자를 삼으라고만 말씀하시지 않고 제자 된 자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시는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9문은 세례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69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드리신 제사가 그대에게 유익이 됨을 거룩한 세례에서 어떻게 깨닫고 확신합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물로 씻는 외형적인 의식을 제정하셨고(마28:19), 또한 마치 몸의 더러운 것을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듯이, 내가 그의 피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의 영혼의 오염, 즉 나의 모든 죄를 확실히 씻음 받는다는 약속을 덧붙이셨습니다(마3:11, 막1:4, 16:16, 눅3:3, 요1:33, 행2:38, 롬6:3-4, 벧전3:21).
간단히 말하면 세례란 씻는 의식입니다. 더러움을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세례 방식에 있어서 물에 잠그기도 하고 또 물을 뿌리기도 하는데, 세례 요한의 경우는 전자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 때 마가복음 1장 10절은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성경이 이런 방식만을 고집하는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실 때 모든 지역이 사람으로 하여금 몸을 물에 잠글만한 곳으로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 교회 역사 안에서도 보면 동방교회의 경우 보통 물에 담그는 방식으로 세례를 행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북방 추운 지역에 사는 사람들조차 이런 방식을 취했는가 할 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추운 지역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들은 물을 뿌리는 방식으로 행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방식을 취하느냐에 대해서는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의식자체가 강조되기보다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더 중요하다는 측면에서 물에 완전히 잠그는 방식보다는 물을 뿌리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일정한 시간과 일정한 장소에 모인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그때 성례를 행하기 때문에 물에 완전히 잠그는 방식보다는 물을 뿌리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분명한 것은 물에 잠그든 아니면 물을 뿌리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요리문답은 마치 몸의 더러운 것을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듯이, 내가 그의 피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의 영혼의 오염, 즉 나의 모든 죄를 확실히 씻음 받는다는 약속을 덧붙이셨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막1:4, 눅3:3).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는 것은 회개하라고 전파함과 동시에 세례까지도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말과 함께 세례가 갖는 의미도 전하면서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에게나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자에게 세례를 베풀되, 그 세례를 통해 죄 사함의 은총을 나타내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분명하게 말하는 내용이 사도행전 2장 38절을 통해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하시는가? 회개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세례 자체가 죄 사함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를 행할 때 물을 뿌리는데, 물 자체가 죄 사함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은 표일 뿐입니다. 그 표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요 그리스도의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죄 사함은 세례가 의미하는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그리스도의 성령의 깨끗하게 하시는 역사로 말미암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말하면서 참된 회개로 말미암아 세례를 받는다면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과 함께 성령까지 선물로 받는다고 증거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물은 구원의 표요, 구원 자체는 아닙니다. 같은 의미에서 물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표지, 깨끗하게 만드는 자체는 아닙니다.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나타내는 표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 표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사도 베드로의 서신서 안에서 찾는다면 베드로전서 1장에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8-19) 그러니까 참된 믿음으로 세례에 참여하게 되면 물 자체가 우리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의미하는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거한다면 굳이 세례를 행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세례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를 가지고 만든다고까지 설명합니다. 어떻게 세례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를 가지게 만드는가? 이때도 세례 자체보다는 세례가 가지는 의미 때문인데, 세례의 의미 안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있고 그런 연합은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산다는 내용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로마서 6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6:3-4)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라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로마서 6장 4절의 의미입니다. “...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간단히 말하면 믿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연합되지만 이런 연합이 세례의 내용을 통해 가르쳐진다고 할 때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우리도 그 안에서 죽으며 그리스도께서 다시금 살아나실 때 우리도 그 안에서 다시 살아나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할 수 있는 자로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참된 믿음을 가진 자 안에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정리하자면 세례에서 물은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하고 물로 씻는다는 것은 물이라는 표가 의미하는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에베소서 1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요한계시록 1장 5절에도 보면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는 말씀합니다. 또한 히브리서 9장 22절에서는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깨끗하게 하는 물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신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미합니다. 물로 우리 몸을 깨끗하게 씻는 것처럼 오직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례에서 물은 두 번째로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세례 요한은 자신의 세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를 비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막1:8) 그러니까 물로 세례를 베푼다고 할 때 그 물이 의미하는 것은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줄 뿐이지만 세례의 제정자이신 예수님은 그 물이 의미하는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주체라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다음의 말씀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이때 물과 성령이라는 말은 세례의 의미에서의 물이 아니라, 물 곧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성령을 불로도 표현하기도 하고 또 물로도 표현하기도 하는데, 요한복음 3장에서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물 곧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에는 중생의 의미도 있습니다.
참고로 가톨릭에서는 요한복음 3장 물과 성령이라고 할 때 물은 세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서 세례가 곧 거듭남을 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2문은 겉으로 물로 씻는 것 자체가 죄를 씻는 것이냐는 물음에 대하여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표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표가 의미하는바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이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요한복음 3장 물과 성령으로 난다고 할 때 물을 세례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물은 곧 성령이라는 의미고, 하나님께서는 성령 하나님을 통해 우리를 거듭나게 하여 깨끗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뜻을 담고 있는 것이 지금 세례인 것입니다.
결국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9문은 세례에 두 가지 씻음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는 물로 하는 외적 씻음과 또 다른 하나는 그것이 의미하는바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하는 내적 씻음입니다. 이때 외적 씻음이 항상 내적 씻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참된 믿음이 아니라 거짓된 믿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이 있을 때는 외적 씻음이 내적 씻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내적 씻음은 외적 씻음으로 인 쳐집니다. 따라서 세례를 정당하게 시행할 때면 언제나 이 내적 씻음이 외적 씻음과 함께 행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0문은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씻음 받는 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70문.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으로 씻음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답.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해서 행하신 제사에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죄 사함을 받고(겔36:25, 슥13:1, 엡1:7-8, 히12:24, 벧전1:2, 계1:5, 7:14), 또한 성령으로 새롭게 되고, 그리스도의 지체로 거룩하게 되어 점점 더 죄에 대하여 죽고 거룩하고 흠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겔36:25-27, 요1:33, 3:5-8, 롬6:4, 고전6:11, 12:13, 골2:11-12).
세례에 두 가지 씻음, 즉 외적 씻음과 내적 씻음이 있다고 했는데, 내적 씻음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피로 씻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씻는 것입니다. 그럼 그리스도의 피로 씻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리문답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행하신 제사에서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죄 사함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씻는다는 것은 성령으로 새롭게 되고, 그리스도의 지체로 거룩하게 되어 점점 더 죄에 대하여 죽고 거룩하고 흠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을 얻는다는 것인데, 이는 악한 성향이 선한 성향으로 바뀌는 데 있으며, 이 일은 죄에 대한 미움과 또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열심이 생기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지와 마음에 역사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금 더 상세하게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우리의 죄책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살도록 하시면서 그렇게 하십니다. 이때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부패와 오염을 제거하신다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들로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거룩하게 하심을 얻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이미 구약을 통해서도 나타내신 바 있습니다. 에스겔 36장 25절 이하 27절입니다.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그런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입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디도서 3장 5절에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로마서 6장 4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세례는 죄 사함과 우리의 본성의 새로워짐을 포함한 이런 형태의 씻음 혹은 그리스도의 은덕들의 표인데, 둘은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지만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의롭다 하심은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것으로 전가에 의하여 금생에서 완전합니다. 그래서 증거 하기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라고 말씀하십니다. 반면 거룩하게 하심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중생된 자에게 이루어지는 것으로 금생에서 완전하지 않고 중생으로부터 시작해서 완전해져 가는 것으로 있습니다. 물론 로마서 7장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남아 있는 부패성 때문에 크게 탄식하는 일이 있지만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만들어 더디지만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행하게 만드십니다.
이상의 설명을 통해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세례가 반복될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 시대에 있었던 재세례파의 주장에 대한 반박인데, 그들은 재세례파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다시금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세례 외에 그들은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례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에 받아들여졌음을 나타내는 표입니다. 회개하는 자들의 경우에는 언제나 확실하고 효용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혹 죄에 빠짐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다시금 세례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때는 죄에 대한 회개만 하면 됩니다. 또한 중생이 한 개인에게 단 한번 이외에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에서도 세례가 반복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중생의 씻음인 세례는 단 한번 받는 것으로 족합니다. 유아세례와 관련해 설명할 때 할례에 대해 언급하겠지만, 신약의 세례는 구약의 할례를 대체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할례는 남자만 일평생 한번 시행하게 됩니다. 신약의 세례가 구약의 할례를 대체시킨 것이라고 할 때 세례 역시 일평생 한번으로 족합니다. 반복해서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계속해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71문을 보시면,
71문. 그리스도께서는 세례의 물로 씻음 받는 만큼 확실하게 그가 그의 피와 성령으로 우리를 씻으시리라는 확신을 어디에서 주셨습니까?
답. 세례를 제정하시는 데에서 주셨는데,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마28:19),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은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 또 성경은 세례를 “중생의 씻음”과 “죄를 씻음”이라고 부르는 곳에서도 이 약속이 거듭 나타납니다(딛3:5, 행22:16).
첫 번째 성경 구절로 마태복음 28장 19절을 언급하는데,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 앞에서 살폈습니다. 두 번째 구절인 마가복음 16장 16절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는 말씀인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더 이상 정죄를 받지 않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때 세례가 가지는 의미는 지금까지 살핀 바에 근거하자면 믿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그래서 더 이상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인장과도 같습니다. 세례 자체가 구원이라는 말이 아니라, 세례를 받는 자는 이 성례를 통해 나타내지는 그 은덕들을 믿음 안에서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은 정죄를 받는데, 이때 믿음 없이 세례를 받을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사실은 참된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믿는다고 고백하기 때문에 세례는 받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때문에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당할 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구절들은 세례라는 의식을 통하여 씻는다는 것을 나타내되 그리스도의 피와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씻으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 성경에서는 세례를 ‘중생의 씻음’ 혹은 ‘죄의 씻음’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런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자체가 중생을 주는 것도 아니요, 세례 자체가 죄를 씻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가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례의 정당한 시행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의식과 전례들을 준수하는 데 있으며, 그 외에 다른 모든 것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의식과 전례들 외에 다른 것을 더하거나 빼는 것은 거부하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께서 제정하신 성례를 그가 명하신대로 시행함으로 유익함이 있도록 구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믿음을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히11:6). 또한 성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지혜와 지식이 없다는 것은 결국 믿음으로 참여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