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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구원, 받기와 이루기의 차이>의 줄거리: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을 받으라고 하면서 동시에 구원을 이루라고도 합니다. 받은 구원은 반드시 이루어야 한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구원 받기와 구원 이루기가 어떻게 구분되는지 그동안 우리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구원에 대한 분명하고 올바른 이해가 없으면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그리스도이신 것조차 밝히기를 거부하십니다.
구원, 받기와 이루기의 차이
(마가복음 8:27~31)
27.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8.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오늘 말씀 중심으로 <구원, 받기와 이루기의 차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구원, 받기와 이루기의 차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한다면 구원이 무효화되는 위험성을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구원을 받았다면 이루어야만 합니다. 받기만 하고 이루지 못할 때에 구원은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
4월 말부터 긴 연휴가 있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코로나19가 진정되는 국면으로 여겨져서 많은 국민들이 긴장이 풀어진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의 고삐가 늦춰졌고 예배당 모임을 비롯한 각종 모임도 재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태원에서 다시 무서운 기세로 코로나19가 번지게 되었고 당국에서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친구 목사님이 사모님과 함께 강릉에 오셨습니다. 대화중에 코로나19로 인한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오늘 본문 말씀과 연관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 목회를 하면서 구원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 없는 채로 목회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성수주일이라는 절대적인 지침이자 강령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기존에는 성수주일을 절대적인 강령으로 여겨 신주단지 모시듯 했던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 분들이 코로나19로 인해 예배당에 나오지 못하게 됨으로 인해서 성수주일로 인해 구원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가정을 해보겠습니다. 예배당이 아예 없다면 구원도 없는 것일까요? 또 예배당이 아예 없다면 예수님의 교회도 없어지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존에 많은 교인들이 예배당이 없으면 신앙이 없어지게 되는 것으로 걱정해왔습니다. 이러한 인식이 생기게 된 이유에는 목회자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예배당은 구원과 관계가 없으며 예수님의 교회도 아닙니다. 교회란 마음이 예수님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 전체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예배당에 모여서 예수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그 모임이 교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모여 있는 사람 전체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배당처럼 출석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것이 확고한 사실이기에 교회의 정의에 대한 다른 의견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각자가 삶의 현장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살아있는 연결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에 둔다면 목회의 목적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당에 몇 명이나 사람을 모을 것이냐를 고민하던 차원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물론 많은 목사님들이 교인들의 영혼을 우선시하는 목회를 하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 또한 목회를 해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영혼을 우선시하겠다는 마음을 강하게 가지면 가질수록 오히려 예배당의 빈지리가 크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배당에 연연하면 결국 몇 명이 모이는지를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고, 예산이 얼마나 풍성해지느냐를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목사님들이 다른 목사님들보다 타락했거나 영성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배당 중심의 목회를 하는 이상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기존 목회의 가장 큰 문제는 잘못된 구원관입니다. 목회는 삶의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연결을 도울 수 있으면 됩니다. 예배당에 몇 명이 모이는가를 목적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출발은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제가 속한 통합측 장로교 등을 비롯한 정통교단들에서는 안타깝게도 구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퇴색되고 희미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미 구원은 결정되었고 해결된 문제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구원 이후에 이 세상에서 어떻게 형통한 삶을 살 수 있는가를 과제로 삼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구원관이 분명치 않은 상태에서 목회자들은 예배당의 형통을 추구하게 되었고, 이단들은 각종 그릇된 구원관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게 되었습니다. 구원론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단 몇 줄이면 정의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몇 줄을 몰라서 지금 기독교는 혼란에 빠져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미 마태복음에서 같은 사건을 다룬 바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구절이 나왔습니다. 한편 본문에서는 이 내용이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29절을 보면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러한 기록의 차이는 같은 사건에 대한 다른 관점을 드러낸 것입니다. 마태가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에 집중한 기록을 하였다면 마가는 이 대화 이후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30절을 보면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이심을 확인시키시고는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구원관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기대했던 구원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주시려고 하신 구원의 내용은 전혀 달랐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신다면 백성들이 잘못된 구원을 요청하는 동안 정작 예수님이 주시려는 구원을 드러내실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외에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시고자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이 확인되자마자 십자가 사건과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처음으로 예고하십니다. 그 내용이 31절에 나타납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 사건과 부활이야말로 결정적으로 구원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대해 성경이 가르쳐주는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구원받기와 구원이루기입니다. 구원받기에 대해서는 성경의 다양한 기록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고, 사도행전 2장 21절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 10장 9절에서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고 이어지는 13절에서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루기란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10장 22절을 보면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은 자 중에서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으리라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어서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 전파한 뒤에도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였고, 히브리서 3장 12절에서도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구원받기와 구원이루기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은 이룰 수 있을 때에야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관의 차이로 인해 제자들에게만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구원관의 차이는 바로 구원받기와 구원이루기의 이해로부터 발생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한편 구원이루기는 실제로 삶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답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받는 것이 구원받기이고,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 됨을 드러내는 것이 구원이루기입니다.
구원받기와 구원이루기의 관계를 비유적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피아노를 선물 받았습니다. 이것이 구원받기입니다. 이제 피아노를 열심히 연습해서 마음껏 연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이루기입니다. 이러한 비유를 통해 생각해보자면 구원을 받았으되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피아노를 선물로 받았지만 장식으로 방치해 두기만 하여서 30년이 지나도록 한곡도 연주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을 이루지 못한 경우입니다. 우리는 구원이루기를 목표로 해야만 합니다. 피아노를 선물로 받았으니 열심히 연주하기를 거듭해서 이윽고 피아니스트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을 무난히 연주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피아노 정도가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입니다. 이제 그 아버지의 자녀 됨을 삶에서 드러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피아노로 쇼팽이나 라흐마니노프의 아름다운 곡들을 연주하듯이 삶을 통해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연주하고 즐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재벌의 자제들은 삶에서 부모의 위상을 드러내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은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창조주의 자녀다운 면모를 드러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선물 받은 피아노를 방치하고 장식품으로 쓴 것과 다름없습니다. 구원을 받았으나 구원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됨을 선물로 받았으나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나의 자녀 됨이 삶에서 드러난 흔적이 없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사도 바울의 말과는 다르게 구원을 이루지 못한 것입니다. 피아노를 무용지물로 만든 것처럼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나의 자녀 됨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보아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구원이루기는 반드시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야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나의 구세주 되심을 고백함으로써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드러내야만 합니다. 직장에서 일할 때에 사장으로부터 모든 직원까지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셨고 모든 일을 주관하심을 체감하실 수 있습니까? 천국에 가는 것은 구원의 내용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되심과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자녀 됨이 구원의 내용입니다. 이 구원을 이룰 때에 결과로써 천국에도 가게 되는 것이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의 내용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구원을 이룰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환경적으로 이루어지는 안정감은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평안이 아닙니다. 구원을 이룬다는 것은 삶의 현장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절대적으로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쇼팽의 야상곡을 연주하는 것처럼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 됨을 연주하는 것입니다. 자녀 됨을 선물로 받았으니 자녀의 티를 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광풍 속의 일엽편주에서 깊은 잠을 주무시며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이신 티를 내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님도 이 기준을 따랐습니다. 돌에 맞아 죽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하늘을 바라보자 평강이 유지되었고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 된 티를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갇혀서 죽기 직전까지 매 맞고 차꼬에 채워진 상태에서 찬양과 기도를 했을 때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렸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 된 티를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이러한 자녀 된 티가 나타나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구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자녀 된 티내기가 이루어지는 모습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상황이 어떠하든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보이고 들리는 어떤 상황보다 하나님만을 태양처럼 바라보며 첫 번째 현실로 삼는 것이 쉬지 않고 기도하기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주권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기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항상 기쁨과 쉬지 않고 기도하기와 범사에 감사하기가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이심을 확신시키시고 곧바로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 사건과 부활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아직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였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제자들 또한 이 고백에 동참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은 이들에게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구원을 받음에 그치지 않고 구원을 이루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구원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직장에서 주님의 십자가에 마음으로 참여합니다. 그럴 때에 직장에 대해 나의 마음은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직장에 대해 죽은 자가 된다는 것은 직장에서 마음을 채울 대상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그럴 때에 주님의 부활과 연합하게 되고 마음은 주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이것이 직장에서 마음이 하늘과 연결되는 모습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자 마음에는 세상과 관계없는 기쁨이 생겨납니다. 마음이 세상을 떠나있으니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기쁨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니 하나님이 제일 크게 보여서 하나님을 첫 번째 관심의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떠나온 직장에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을 보며 생각과 감정과 의지까지도 하나님께서 움직여 가심을 깨닫고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 참여하는 이중의 연결을 통해서 구원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언제 어디서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할 때에 마음은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서 하늘로 가고 몸과 삶은 하나님의 주권과 연결될 것입니다. 이 연결을 통해서 구원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항상 기뻐함으로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 된 티를 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가치를 얻어야만 기뻐합니다. 잃거나 얻지 못하면 슬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사람은 이 세상 가치로 기쁨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의 권세입니다. 돈, 건강, 성공, 승진 등이 기쁨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구원을 이루어가야만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 사건과 부활에 참여하는 이중의 연결을 통해서 내 마음은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몸과 삶은 하나님의 주권과 연결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연결을 끊임없이 이어감으로써 구원을 이루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께서는 구원을 받으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수는 없습니다. 이제 삶의 현장에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구원을 이루지 못하면 구원은 의미를 잃습니다. 사도 바울조차도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하였던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삶의 현장에서 구원을 이루는 방법은 이중연결입니다. 마음은 하늘로 향하고 내 몸과 삶에는 하나님의 주권이 임해야 합니다. 이 일은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연합하고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가능해집니다. 십자가 생활화는 받은 구원을 이루기 위한 방법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십자가 생활화를 해나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구원을 주실 뿐만 아니라 구원을 이룰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구원받고 받은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에 전념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에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