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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8일 주일 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30
설교 제목: 제8요일의 인생
요한복음 20:15
https://youtu.be/_5RPWAqjmWw?si=QiCywId_G2rtaaD1
설교를 위한 묵상: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시려는 목적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신데 그 의미는 하나님의 참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면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의 어떤 모습이 하나님을 닮았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습인가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참 사람이신 예수님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며, 진실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삶이며, 하늘의 뜻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삶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것은 미가 6장 8절이 가리키는 주제이며, 앞으로 계속 생각해 보고 또 적용해 보아야 할 정신이다(히 3:1).
이 주제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나는 톰 라이트의 강연을 소개하면서 우리말 자막을 다는 작업을 한 적이 있다. 그 중에서 ‘십자가의 의미’와 ‘사도 바울이 소개하는 삼위일체’라는 두 개의 강연은 이 주제와 관련된다. 거기서 톰 라이트는 전통적인 삼위일체 개념이 아닌 성경의 이야기에 근거하는 삼위일체 개념을 소개했으며, 예수님의 십자가가 성경 전체의 이야기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소개했다. 그의 설명은 교리적이고 철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성서신학적인 관점에서 위의 개념들의 의미를 풀어나가는 새로운 시도였다.
삼위일체의 개념이나 십자가의 의미를 교리적으로 접근하면 성경 이야기가 들려주는 역동성과 기나긴 맥락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맥락을 떠나 당위나 도덕으로 기독교 신학의 정수를 다루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그는 강연에서 기독교회가 역사적으로 이런 과오를 범했다고 인정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다.
이번 주 설교에서 다루고자 하는 참 사람이신 예수님을 다룰 때도 나는 비슷한 잘못을 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성경 이야기가 들려주는 기나긴 맥락을 벗어나 몇 개의 구절을 연결하여 예수님을 설명하려는 시도가 그것이다. 나의 묵상에서 첫 부분을 보면 바로 그런 식의 접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한정하고 풀어나가야 할까? 그 동안 진행되어 온 설교의 방향을 고려하여 앞으로 몇 주 또는 몇 달간 씨름할 주제가 될 내용을 결정하는 중요한 시간이다. 금년에 나는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나타내는 다른 표현이다. 우리들은 하늘의 뜻을 이 땅에 펼쳐나가는 대리인들이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 하나 되어 만나는 거룩한 곳인 성전의 백성이며, 언약의 백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참 이스라엘이며 왕 같은 제사장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모습은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신약성경의 설명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분이라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시다. 또한 자기 백성을 따뜻하게 돌보시는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시기에 선한 목자가 되신다. 그리고 악한 세력에게서 우리를 건져내시는 구원자가 되시고 출애굽의 백성이 되게 하신다. 그렇게 하심으로 이 세상의 악한 주관자들을 이기는 싸움에 동참하게 하신다. 이 모든 이야기는 다 구약성경의 이야기에 바탕을 둔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 필요하다. 그 등불은 어둠을 밝히는 빛이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는 표지판과 같다. 그것은 이야기로 등장하기에 하늘의 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요한계시록이나 예언자들의 메시지도 이 시대를 비추는 등불과 같고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교회에게 실상이 무엇인지를 비추어주는 거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역할을 하는 이야기는 당위를 담은 도덕률이나 법조문과는 다르며 철학적 사색으로 이끌어가는 교리와도 다르다. 그런 이야기는 신화에 더 가깝다. 우리에게 역사와 세상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게 하는 신화적 이야기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런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더욱 명료하게 소개될 수 있고 그 이야기 안에서 우리의 본분과 역할도 분명해진다. 이반 일리치의 말대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더 강력하고 더 매력적인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복음서의 기자들은 예수님을 철학적으로나 단순히 역사적 사실로서만 소개하지 않고 구약성경이라는 근본이 되는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예언자의 전통에서 예수님을 소개했다. 복음서에 나오는 수많은 인용구들이 바로 그 사실을 반증한다. 톰 라이트에 따르면, 자기 백성에게 오시리라는 예언자들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이야기를 통해서 강조한다. 그뿐 아니라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이 새로운 창조이며 예수님의 성육신은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성막의 그림으로 소개했다. 이것은 모두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통하여 예수님을 소개하는 성경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은 당시의 신화를 활용하고 성경 이야기를 각색하여 그리스도의 현재적 통치와 종말의 완성을 화려하게 그려준다.
새로운 이야기는 기존의 이야기에서 소재와 모티브를 차용하여 전해질 수밖에 없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와 개념에 근거해서만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혀 다른 이야기는 청자에게 아무런 감흥을 줄 수 없고 어떤 의미도 제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새롭고 매력적이고 강력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할 때 화자는 기존의 이야기를 먼저 잘 알아야 하고 그 이야기를 바탕으로 소통해야 한다. 그러나 그 본질의 이야기는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고 않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성경의 이야기는 세대와 장소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와 교류하고 엮여져서 새로운 모습과 색채를 띠게 된다. 그것이 요한복음이 다른 공관복음과 다른 방식으로 기록된 이유다. 그러나 그 안에서 예수님의 사역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이라는 본질적인 틀은 바뀌지 않는다. 요한복음은 유대인인 예수님의 이야기가 헬라인들에게 소개되기 위하여 새로운 색깔의 옷으로 변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설교란 예수님의 이야기를 오늘의 상황에 새롭게 풀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예수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밝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이번 주일 설교 제목을 ‘제8요일 인생’이라고 잡았다. 찾아보니 영화 제8요일이라는 작품이 있다. 프랑스 영화로 1996년에 나온 것이다. 그 영화의 말미에는 이런 멘트가 나온다. 신이 6일 동안 세상을 다 만드시고 하루를 쉬신 후에 뭔가 부족한 것이 없나 살펴보시다가 조르주를 만드셨다고. 그 조르주는 다운증후군을 앓는 청년으로서 주인공 아리가 가족과 화해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결국 이 영화는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과 그것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하게 한다. 그 잃어버린 것은 인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제8요일은 일곱번째 날인 안식일 다음 날을 가리킨다. 성경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안식일 후 첫날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성경은 안식 후 첫날이라고 말한다. 그 날에 세상은 그 이전과 다른 새로운 곳이 되었다는 것이 성경의 설명이다. 그 날은 마치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 것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신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첫 사람처럼 예수님은 동산지기로 여겨진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통치권이 바뀌었음을 골로새서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2:15). 이제 그리스도의 새로운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전부터 예비하신 그 일을 이어가신다. 그렇게 인간은 다시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되며 하나님의 세계를 상속하는 자녀들이 되었다. 그렇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날, 그 날이 바로 제8요일, 안식 후 첫날이다. 오늘 우리는 그 날을 일요일이나 주일이라고 부른다.
영화 제8요일이 정말 소중한 것을 잃고 살아가는 현대인을 일깨우려는 메시지를 담았다면, 설교 제8요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신세계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일깨워주는 메시지를 담아야 한다. 그 새로운 삶은 존재로서 새롭게 된 우리 자신과 새롭게 된 세상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에 대하여 신학자 톰 라이트는 혁명이 시작된 날이라고 불렀다. 낡은 체제를 전복하고 새로운 체제를 세우려는 노력이 혁명이라면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진정한 혁명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혁명의 정신과 목표, 그리고 당위성에 대하여 각성하고 철저하게 깨달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전에 그것을 구원의 필요성이나 구원의 기쁜 소식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필요성과 기쁜 소식을 지옥과 천당이라는 미래적 상황을 대비하자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그런 종말론이나 구원론은 오늘 여기서 살아가는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하여 매우 협소한 해석을 하게 한다. 그것은 인생의 의미를 순식간에 잿빛으로 만드는 파괴적인 행동이 될 수 있다. 그것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며 성경을 통해서 들려주는 하나님의 메시지와도 부합하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시 창조와 재창조, 그리고 구원의 의미에 대한 본래적인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의 이야기를 재발견해야 한다는 뜻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위대한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다시 영화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주인공 아리는 은행의 세일즈 기법 강사로서 가족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실적을 높이는 일에만 매몰되고 있다. 그가 잃어버린 것은 사람이며 가족이며 가족의 생일이며 그리고 그들에게 시간과 물질을 들여 소중한 것을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가 돌보아야 하는 것은 가정인데 그 가정을 위하여 직장이 필요했는데 순서가 뒤바뀌어서 직장 때문에 가정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제8요일은 우리에게 그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날이며 뒤바뀌어 버린 일의 순서를 바로잡는 날이다.
설교 개요:
1. 새로운 인사말-몸 성히 맘 놓이 바탈 태우
2. 제8요일
3. 동산지기로 부활하신 예수님
4. 영화 제8요일
5. 신앙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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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로운 인사말-몸 성히 맘 놓이 바탈 태우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교우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기원합니다. 덥고 습한 날씨가 이어지는 여름을 몸 성히 맘 편히 선한 뜻을 펼치며 사시기를 하나님 앞에서 두 손 모아 빕니다.
우리나라 선각자 중에 다석 류영모 선생님(1890~1981)이 있습니다. 그분은 인생의 복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몸이 성하고 마음이 놓이면 바탈에서 생각을 하게 되고 생각하면 뜻이 타오른다.’ 그것을 짧게 말하면, ‘몸 성히 맘 놓이 바탈 태우’입니다. 여기서 바탈은 마음 속에 받은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몸이 성하고 마음이 놓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기도 가운데 펼쳐보는 것을 바탈을 탄다고 말하며 동시에 뜻을 태운다고 말합니다. 기도의 향불을 태우는 것과 유사합니다.
다석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인사말을 생각해 봅니다. 몸 성히 맘 편히 선한 뜻 태우며 살기를 바랍니다. 이는 건강한 몸과 안정된 심령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바라고 기뻐하며 추구하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짧은 말에는 선각자가 구도의 삶을 살면서 체득한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도 자신과 이웃에게 이런 좋은 말로 복을 빌어 보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몸 성히 맘 편히 선한 뜻을 펼치며 사시길 빕니다.”
2. 제8요일
오늘 저는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의 인생에 대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깨달은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들은 오늘 이 자리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은 일요일이며 주일입니다. 일주일은 칠일입니다. 그런데 오늘을 구별하여 우리들은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주일이라는 이름으로 오늘을 부릅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날이라는 말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안식 후 첫날이라고 불렀습니다(요 20:1).
안식일은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면 안식일은 일곱째 날입니다. 그러므로 안식 후 첫날은 여덟번째 날이라고 하겠습니다. 일요일부터 세어보면 일월화수목금토, 일곱번째 날이 토요일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토요일이고 안식 후 첫날은 다시 일요일입니다. 그러므로 일요일은 제8요일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제8요일의 인생’입니다. 오늘 저는 제8요일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휴일로 정하여 쉬기도 하고 여행을 가기도 하는 일요일을 주일이라 부르며 예배당에 모입니다. 우리는 성탄절과 부활절, 그리고 추수감사절을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시간을 새롭게 해석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이는 주일, 제8요일은 어떤 날일까요? 안식 후 첫날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우리는 이날 모이는 걸까요? 제8요일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안식일이 아니라 제8요일인 주일에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새롭게 된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을 감사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3. 동산지기로 부활하신 예수님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보통 신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중요한 이유에 대하여 우리들도 부활할 것을 확증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신학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로 사망의 권세가 쫓겨났고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통치하시게 되었다고 이해합니다. 그처럼 우리를 억누르던 세력이 쫓겨났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의 권세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며 살게 되었다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생각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일대기를 기록한 복음서 기록자들은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 의미를 암시하는 표현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에서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 무덤에 갔다가 무덤이 빈 것을 보고 놀라 제자들에게 뛰어갔습니다(요 20:1~3). 그런데 마리아는 무덤에 남아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셨는데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요한복음 20:15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오해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오해 시리즈가 특징입니다. 사마리아의 여인은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가 다시 목마르지 않는 생수라고 했을 때 그것을 오해했습니다(요 4:10~11).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나서 자신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자신의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5)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리라’(요 2:19)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오십도 안 된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고 오해했습니다(요 8:57). 대제사장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대신 죽은 것이 옳다고 말했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실을 말하고 있었습니다(요 11:50).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마리아가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오해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이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소개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동산지기십니다. 그리고 그 동산은 에덴동산이며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성전을 지키는 사람이며, 스스로 참된 성전이 되십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의미인가를 설명하려는 요한의 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에덴동산을 지으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그 동산에 들이시고 지키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은 새로운 아담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평강을 기원하시고 숨을 크게 내쉬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대목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을 지으신 후에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명이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신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후에 아담은 동산의 각종 짐승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고 그 동산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주님의 부활은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허와 혼돈이 물러가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동산을 지키는 동산지기이신 예수님이 죽음의 땅에서 일어나신 날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을 공급받아 세상에 죄 사함의 권세를 행함으로 통치할 하나님의 대리인들이 일어난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에 세상이 새롭게 지으심을 받았음을 기념하고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이 새로운 세상을 맡아 다스릴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주일을 기념하고 지키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들려주는 성경 이야기를 배우고 다시 묵상합니다. 그 결과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이 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역사임을 깨닫고 기념합니다. 예수님은 새롭게 창조된 세상의 동산지기이시며, 그 동산을 지키시고 제자들을 불러 그들에게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시고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으로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으로 보내노라(요 20:21)고 말씀하시며 우리들도 하나님의 동산을 지키고 가꾸는 동산지기이며 하나님의 동역자들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동산지기로서 자신의 임무를 말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고린도전서 3:6~9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밭은 하나님의 동산을 의미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라고 아담을 에덴동산에 들이시고 그것을 경작하고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맡기시려고 줄로 준 구역이며 그의 기업입니다(시 16:6). 성경은 사람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합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동산지기이며 하나님의 집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가정과 기업을 주셨습니다. 전 인류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지으시고 그것을 인류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세상을 맡은 동산지기이며 동역자입니다.
이 동산을 관리하는 일은 심고 물을 주는 것에 비유됩니다. 예수님도 여러 번 포도원에서 일하는 농부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본래 동산지기로 지음받았음을 일깨워줍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때때로 우리의 욕심이나 두려움 때문에 심고 물 주는 일을 한쪽에 치우쳐서 우리에게 주어진 구역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4. 영화 제8요일
제8요일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는 1996년에 프랑스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어떤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미래은행에서 세일즈 교육을 맡은 아리입니다. 그에게는 가정이 있고 두 아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업에 온통 집중하느라 가족을 잊고 살았습니다. 자녀들이 도착하는 기차역에 마중 나가는 것도 잊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아내와 별거 중입니다. 직장에서는 일을 잘 해내고 있지만 가족을 만날 수 없습니다. 아내가 그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불행합니다. 죽고 싶습니다. 그때 그에게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는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조르주입니다. 그가 병원에서 나왔다가 아리를 만났고 둘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사업에 빠져서 세상을 잊고 살았고 한 사람은 다운증후군에 걸려서 자기만의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영화의 결론은 아리가 가족과 화해하고 가정의 화목을 회복합니다. 그에게 잃어버린 행복을 찾게 해 주고 삶을 회복하게 도와준 조르주는 삶을 마감합니다. 그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내레이션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날, 신은 태양을 만들었다. 둘째 날, 신은 바다를 만들었다. 셋째 날, 신은 풀을 만들었다. 넷째 날, 신은 소를 만들었다. 다섯째 날, 신은 비행기를 만들었다. 여섯째 날, 신은 인간을 만들었다. 일곱째 날, 신은 쉬기 위해 구름을 만들었고 빠진 것 없나 확인한 뒤, 마지막 여덟번째 날, 신은 조지(조르주)를 만들었다.”
이것은 영화의 이야기로서 성경의 창조 이야기와는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제가 느낀 점은 우리가 지키고 가꾸고 돌보아야 할 것을 소홀히 하게 되면 우리는 행복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사업도 직장도 중요하지만 가정도 소중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교회도 중요합니다. 이 모든 구역을 잘 돌봄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을 거둘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우리의 삶은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5. 신앙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신앙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신앙은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성경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시간이 제8요일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새로운 통치자와 주인이신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 전까지 우리는 한쪽에 치우친 삶을 살았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돈을 최고로 생각하거나 권력이나 명예나 자랑거리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점에서는 속은 것입니다. 속아서 정말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우리를 속여 행복을 도적질해가는 그 악한 세력을 깨닫게 하시고 그들을 이기셨고 쫓아내셨으므로 다시는 그에게 속지 말라고 일깨워주십니다. 그렇게 새롭게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제8요일의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곳이 어디인지를 깨닫습니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 기업과 직장,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줄로 재어준 구역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동산지기로서 경작하고 지키는 일을 성실히 한다면 우리는 이 동산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우리에게 성실한 농부와 동산지기로 살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동산인지를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죄 많은 곳이며 타락한 곳이며 어둡고 혼란스러운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 세상이 아름답고 신비롭고 멋진 곳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은 정말 아무런 의미도 보람도 재미도 없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그렇게 보잘것없는 존재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할 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눈이 열립니다. 그런 깨우침과 각성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새로운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야곱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고 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세기 28:17). 그는 바로 전까지 그곳 들판에서 돌 베개를 베고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며 하늘의 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 앞에 드리는 진실한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사는 바로 그곳이 하늘의 문이며 하나님의 집임을 발견합시다. 그리고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이 제8요일임을 기억합시다. 제8요일의 인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줄로 재어준 구역을 경작하고 지키는 동산지기의 삶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새 힘과 지혜를 주셔서 우리의 동산을 잘 가꿀 수 있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