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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31
갈라디아서 3장 12절 [7장 1-2항]
지금까지 살펴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주제를 따라 정리하자면 가장 먼저 성경에 대하여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신앙과 삶에 대하여 가르치는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문의 내용처럼 성경이 제일 중요하게 가르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믿어야 할 바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관하여 믿어야 할 바를 가르친다고 할 때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 누구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는 1장 성경에 이어 2장에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어떤 존재로 계시는가? 나아가 제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에 대해서도 고백하는데,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이 그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은 작정의 실행으로서의 창조와 섭리로 나타나기 때문에 제4장은 창조에 대하여 고백하고, 제5장은 섭리에 대하여 고백합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였지만,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다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제6장 인간의 타락과 죄와 그 형벌에 대한 고백에서 다루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들의 죄에 따라 형벌을 받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모든 사람에 대하여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생명으로 예정된 인류에 속한 자들만큼은 그들의 죄에 따라 형벌을 받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여기에 무엇이 있는가? 오늘부터 살펴보게 될 언약의 내용이 있습니다. 물론 정확하게는 생명으로 예정된 인류에 속한 자들만큼은 그들의 죄에 따라 형벌을 받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고 할 때 행위언약이 아닌 은혜언약이 그 내용으로 있지만, 모든 언약 자체가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7장 하나님과 사람과의 언약에 대한 고백에서 1항은 행위언약, 은혜언약을 말하기 전 언약의 개념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간격은 너무 커서, 이성적 피조물들이 그들의 창조주이신 그분께 순종해야만 할지라도 하나님이 언약의 방식으로 나타내길 기쁘게 여기신 하나님 편에서의 자발적 겸손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들은 그들의 복과 상급이신 그분으로부터 결코 어떤 결실도 가질 수 없습니다(사40:13-17, 욥9:32,33, 22:2,3, 35:7,8, 삼상2:25, 시113:5,6, 100:2,3, 눅17:10, 행17:24,25).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될 표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간격은 너무나도 크다는 사실입니다. 이 간격은 단지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죄를 지었다는 사실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하기 전부터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간격은 너무나도 큰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만드신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 만드실 만큼 존귀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한낱 피조물일 뿐입니다. 피조물로서 창조주와의 간격은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시103:11) 높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간격이고,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시103:12) 멀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간격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시고, 영원하시고, 무한하시고, 불변하신데 반해 인간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영원하지도, 무한하지도, 불변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인간은 지식과 능력에 있어 늘 한계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간격이 이렇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 간격을 가늠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유한은 무한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 있는데,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무한하신 하나님을 담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높고 높으신 하나님과 낮고 낮은 인간을 비교하면서 가늠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성경을 따라 하나님의 높고 높으심을 조금 더 말해보자면, 이사야 40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사40:13-17)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도 비교할 수 없지만, 하나님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다, 저울의 작은 티끌과 같다,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와 같다고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우리가 볼 때 지구라는 곳이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지만, 우주라는 관점에서는 너무나도 작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나라와 민족들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주 만물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욥기 9장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으며 함께 들어가 재판을 할 수도 없고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욥9:32-33) 하나님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그분은 우리처럼 부족하지도, 모자라지도, 어리석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40장에서도 표현되고 있지만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겠습니까?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비슷한 표현이 욥기 22장에서도 나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유익하게 하겠느냐 지혜로운 자도 자기에게 유익할 따름이니라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욥22:2-3) 특히 3절에서 네가 의로운들 전능자에게 무슨 기쁨이 있겠으며 네 행위가 온전한들 그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느냐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내용은 욥기 35장에서도 나옵니다. “그대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그대의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그대의 악은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요 그대의 공의는 어떤 인생에게도 있느니라”(욥35:7-8) 우리는 나의 의로움이 하나님께 뭔가 보탬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나의 불의함이 하나님께 해를 입힌다고 생각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피조물에 의해서도, 피조물의 어떤 행위에 의해서도 더해지거나 덜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홀로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피조물을 만드셨다고 해서 피조물로 인해 뭔가 더해지거나 덜해지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자신을 낮추셔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시편 113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합니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시113:4-6)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살피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 스스로 낮추셔서 행하고 계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 대하여 섭리하시는 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높고 높으심을 찬양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런 일조차 자신을 낮추어 보이고 계신 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신 그 일만으로도 하나님의 높고 높으심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면 그분은 얼마나 높고 높으신 분이시겠습니까? 피조물인 우리가 가늠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간격, 즉 그가 우리의 창조주요 우리가 그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통해 신앙고백이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이성적 피조물들은 그들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피조물의 마땅한 바입니다. 오늘날 성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말미암아 순종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순종했다는 것으로 자신의 공로와 상급을 말하는 일들이 있지만, 앞서 욥기 22장, 35장의 내용으로 하자면 순종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뭔가를 받아 하나님 자신이 유익이 되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아니 피조물이 없을 때부터 하나님은 완전한 분으로 계셔서 피조물을 만드신다고 해서 그들을 통해 뭔가 받아 보충되는 분이 아니십니다. 여기에 무슨 공로를 말할 수 있으며, 무슨 상급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 자체로 피조물인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는 무엇인가? 누가복음 17장 7절 이하 10절입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그런데 이성적 피조물들이라면 그들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것을 언약의 방식으로 나타내길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언약의 방식이란 2항의 행위언약과 3항의 은혜언약의 방식인데, 핵심은 같습니다. 순종과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 복과 상급을 약속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행위언약의 경우는 2항에서 살펴보겠지만 완전하며 개인적인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과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류에게 생명을 약속하신 것이고,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행위언약으로는 약속하신 생명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은혜언약의 방식으로 그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살피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 스스로 낮추셔서 행하고 계신 일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는 방식으로 계시하신 것도 자신을 낮추셔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언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을 맺으신다는 것은 결코 대등한 입장에서 맺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낮추시고 또 낮추셔서 언약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언약의 방식으로 나타내길 기쁘게 여기셨다고 할 때 하나님 편에서의 자발적 겸손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들, 즉 이성적인 피조물들은 그들의 복과 상급이신 그분으로부터 결코 어떤 결실도 가질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는데, 이성적인 피조물들의 복과 상급은 무엇인가?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자 하십니다. 아덴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사도 바울은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17:25)고도 말합니다. 심지어 일시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원한 것도 주십니다. 즉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생명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이 영원토록 있게 하는 영생도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복과 상급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이 참된 복과 상급이라는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는가? 창조하시되 이성적인 피조물들을 만들어 자신을 낮추시면서까지 언약을 맺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복과 상급이신 자신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피조물 중에서는 으뜸일지라도 하나님과의 간격을 보면 너무나도 낮고 낮은 우리이지만, 그런 우리에게 가장 높고 높으신 하나님 자신을 복과 상급으로 주시기 위해서 친히 낮아지셔서 언약을 맺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행위언약이든, 은혜언약이든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 자체가 은혜의 성격으로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셔서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 편에서는 은혜를 베푸시는 성격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과 사람과의 간격으로 하자면 언약 자체를 맺을 수 없지만, 자신을 낮추어 언약을 맺으신다는 것은 그것이 행위언약의 형식이든, 아니면 은혜언약의 형식이든 모든 언약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많은 언약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되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7)는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셔서 자신의 은혜를 드러내시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과의 언약만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 언약을 맺으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19:5-6) 그리고 이후 출애굽기 20장에서 십계명을 주시는데, 형식은 행위언약의 형태이만 여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즉 이렇게 언약을 맺으신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어 자신의 은혜를 드러내는 성격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 언약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7:12-16) 특히 15절에서 다윗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에게서는 빼앗지 않는다는 말씀, 오히려 16절에서 다윗의 집과 다윗의 나라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의 불변성으로까지 나타납니다. 한번 은혜를 베푸시기로 하신 이상 은혜를 거두게 만드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도 언약을 맺으시고, 모세와도 언약을 맺으시고, 다윗과도 언약을 맺으시는 등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을 낮추셔서 언약을 맺으시는데, 성경에 나오는 언약은 크게 2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행위언약이고, 다른 하나는 은혜언약입니다. 신앙고백서는 7장 2항에서 행위언약에 대하여 말하고 3항에서 은혜언약에 대하여 말하는데, 행위언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사람과 맺은 첫 언약은 행위언약이었습니다(갈3:12). 그 안에서 완전하며 개인적인 순종을 조건으로(창2:17, 갈3:10) 아담에게 그리고 아담 안에서 그의 후손에게 생명이 약속되었습니다(롬10:5, 5:12-20).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4장 창조에 대한 두 번째 항에서 인간 창조와 관련해서 살필 바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후에,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이 부여된 이성적이며 죽지 않을 영혼을 지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이 기록되도록 하셨습니다. 보통 양심의 법이라고 하는데, 양심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만 한다면 이 법은 도덕법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2장 14절과 15절에서는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에 기록된 이 법 외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도 하셨습니다. 7장 2항에서 사람과 맺은 첫 언약은 행위언약이었다는 것이 선악과 금지 명령입니다.
이 행위언약에 대하여 신앙고백서는 그 안에서 완전하며 개인적인 순종을 조건으로 아담에게 그리고 아담 안에서 그의 후손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선악과 금지 명령의 내용을 보면 직접적으로 생명을 약속하신 바는 없습니다. 창세기 2장 17절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먹지 말라는 금지령과 함께 하나님은 금지령에 대한 불순종에 대하여 반드시 죽는다고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불순종이 있다면 순종도 있으며, 불순종에 대하여 반드시 죽는다고 했다면 순종에 대하여는 생명을 주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계속해서 생명을 유지하는, 그래서 결국 영생에 이르게 되는 약속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는 행위언약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생명의 언약이라고 표현하는데,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신 것은 이 목적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어느 정도 드러내주는 표상이 있는데, 창세기 2장 9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동산에 여러 나무들이 있지만, 특별히 동산 가운데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두 개를 구별해 두셨습니다. 그리고 16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고 말씀하시고, 17절에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아야 하지만,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게 될 것이지만, 그 금지령을 어기지 않는 한 하나님은 계속해서 생명 나무로부터 나는 열매를 먹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물론 생명 나무의 열매 자체가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자체가 죽음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순종이냐, 불순종이냐에 따라 생명을 주기도 하시고, 죽음을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두 나무를 통해 생명과 죽음이라는 표상을 두셨습니다. 특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기에 생명이 있도록 하셨다는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순종이 아닌 불순종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하여 영적으로 즉시 죽을 뿐만 아니라 육적으로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에서 쫓아 내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창세기 3장 22절과 23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생명 나무의 열매 자체가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닐지라도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생명 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다시 신앙고백서의 내용으로 오면, 사람과 맺은 첫 언약이 행위언약이라고 할 때 신앙고백서는 오늘 본문으로 읽은 갈라디아서 3장 12절을 인용합니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행위언약의 핵심은 언제나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완전히 순종하기만 하면 순종하는 가운데서 계속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5절에서도 동일하게 가르칩니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그런데 인용구절을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행위언약이 모세의 율법과도 일치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도 선악과 금지 명령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레위기 18장 5절입니다.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지금 갈라디아서 3장 12절이나 로마서 10장 5절은 바로 레위기 18장 5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첫 사람 아담과 맺은 언약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것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율법의 총화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선악과 금지 명령을 하신 이유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창조주요 선악과 금지 명령은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알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되 다른 모든 피조물의 으뜸으로 만드셨지만, 다시 말해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지 못하고 유일하게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지만, 심지어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모든 만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하셨지만, 하나님의 형상이요 만물의 으뜸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자기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했으며, 모든 만물을 다스릴지라도 피조물인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도록 하는 것이 선악과 금지 명령입니다. 이런 점에서 선악과 금지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하는 것은 사단이 하와를 유혹할 때 했던 말처럼(창3:5) 하나님 자리에 사람이 대신해서 그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악과 금지 명령으로 나타나든, 율법으로 나타나든 행위언약이란 이런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는 것을 조건으로 합니다. 단지 겉으로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순종하는 것입니다. 부분적으로만 순종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계명, 모든 말씀에 대하여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과 관련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기도 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0) 야고보서 2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십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 즉 율법은 어느 순간에만 지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늘, 항상 지켜야 하고, 어느 하나만이 아니라 모든 계명에 대하여 다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율법 가운데 하나를 지키지 않으면 하나만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지키지 않은 것이 되는데, 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가? 율법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은 완전하고 온전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첫 사람 아담에게 행위언약으로 하신 말씀은 오직 한 가지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모든 것을 허락하시되 임의로,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셨지만, 오직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큼은 먹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우리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6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순종이 아닌 불순종하고 말았습니다.
6장 1항 “우리의 첫 부모는 사단의 간계와 시험에 의해 유혹받아 금지된 열매를 먹음으로 범죄했습니다.” 6장 2항 “이 죄로 인해 그들은 그들의 원의와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떨어져서 죄 가운데 죽게 되었고 영혼과 육체의 모든 기능들과 부분들이 전적으로 오염되었습니다.” 문제는 사람과 맺은 첫 번째 언약인 행위언약이 아담과만 맺은 것이 아니라 아담 안에서 그의 후손 모두와 맺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아담의 불순종은 아담 안에 있는 모든 그의 후손의 불순종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6장 3항에서는 “모든 인류의 뿌리인 그들은 일반적 출생에 의해 그들로부터 내려오는 그들의 모든 후손에 이르기까지 이 죄책이 전가되었고 죄 가운데 동일한 죽음과 부패된 본성이 전달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의 내용은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비록 지금도 하나님은 행위언약을 거두시지 않았지만 행위언약으로 영생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담의 첫 범죄 이후 닫혀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적어도 아담의 첫 범죄 이전에는 행위언약으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상태로는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 이후로는 가능성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게 될 것입니다(갈3:12).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롬10:5). 이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롬3:10a). 왜냐하면 아담과 함께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인류가 사실은 선악과 금지 명령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고, 도리어 죄만 깨닫게 될 뿐입니다(롬3:10).
그렇기 때문에 행위언약은 필요가 없는가? 다음 시간에 살필 은혜언약만 필요한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행위언약이 필요 없는 것이라면 아담의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 모세를 통해 행위언약의 형식으로 된 율법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영생을 소유할 수는 없지만, 은혜언약 안에서 영생을 소유한 자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순종할 수 있도록 삶의 규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9장에서는 1항 행위언약과 관련된 내용을 말하고 난 뒤 2항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도 이 법은 의의 완전한 규범으로 지속되었습니다. 그것은 시내산에서 두 돌판에 기록된 십계명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전달되었습니다. 처음 네 계명들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의무를, 나머지 여섯 계명들은 사람을 향한 우리의 의무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6항에서 율법의 유익을 고백하게 되는데, 소위 율법의 제3사용을 여기서 언급하게 됩니다.
여러분, 율법에는 세 가지 용도가 있습니다. 칼빈에 따르자면(기독교강요, 1559, 2권 7장 6-13), 첫 번째 용도는 정죄의 기능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밝혀 인간의 불의를 경고하고 알리고 책망하며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악인들에게 공포심을 일으키고 절망 상태에 빠지게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과 인자를 바라게 합니다. 두 번째 용도는 억제의 기능입니다. 이것은 내적 감동이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공포심을 일으켜 억제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능은 인간 사회와 질서와 평안을 위해서 필요한데, 비중생자 및 중생 이전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강요된 의에 의해 감독을 받습니다. 세 번째 용도는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의 기능입니다. 여기에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유익이 있는데, 우리는 첫 번째 용도를 거쳐 세 번째 용도로 율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행위언약은 결코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유익에 이바지한다는 점에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삶의 규범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뜻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그것을 따라 행하도록 지도하며 매이게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 줌으로 우리의 본성과 마음과 삶의 죄악 된 오염을 발견하게 하고, 자신을 점검하여 죄를 뉘우치고 겸비해지고 죄를 대적하여 미워할 수 있도록 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부족함을 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그의 완전한 순종을 지녀야 할 필요성을 보다 명확하게 보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내용은 웨스트민스터 제19장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내용에서 살펴보게 되는데(6항), 행위언약 자체가 단지 우리를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은혜언약으로 나아가 더욱 세워가려고 하는 데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위언약 자체도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