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난간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아침 설거지를 하던 중이었다. 나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무슨 새일까 궁금하여 핸드폰을 꺼내 들고 살며시 다가갔다. 그리고 셔터를 눌렀다. 순간, 놀라서 날아갈 줄 알았던 새는 그대로 가만히 있는 게 아닌가. 물끄러미 보고 있는 나를 녀석도 눈 맞춤 하듯 꿈쩍하지 않고 바라보았다. 내가 기척을 내자 새는 이 난간 저 난간으로 자리만 이동할 뿐이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다시 나가려는데 새는 푸드득 날아갔다. 아차! 얼마 전에 새들의 안식처를 없앤 것이 생각이 났다. 요즘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도 그제야 깨달았다. 새는 내게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왔던 걸까.
뒷마당에는 나무가 울창하여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에도 마당에 들어서면 서늘했다. 상추나 깻잎을 먹으려고 꽃나무 몇 그루 베어내고 채소밭을 만들었지만, 볕이 들지 않아 채소들이 부실했다. 대신 쿠그바라, 휘파람새, 알록달록한 수다쟁이 로리킷등 온갖 새들의 놀이터였다. 아침이면 새소리에 저절로 일찍 잠이 깨었다.
뒷집 담장에 버티고 있던 커다란 유칼립투스도 문제였다. 처음 이 집에 이사 왔을 때는 나무의 존재가 그리 크지 않았다. 10년쯤 살고 보니 부쩍부쩍 자라는 나무가 부담스러웠다. 나무는 자랄수록 가지가 자꾸 우리 집 담장을 넘어 지붕을 향해 뻗어 왔다. 나뭇잎이 온통 지붕으로 떨어져 빗물받이가 자주 막히고 비가 올 때 지붕 누수로 이어졌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은 윙윙 소리를 내며 온몸을 떨었다. 그럴 때면 머리위로 곤두박질할 것 같아 두려웠다. 유칼립투스는 갑자기 가지가 뚝 부러지며 밑으로 떨어져 다치게 되는 일이 많아서 ‘위도우트리’라는 별명이 있다. 뒷집 사람에게 나무를 잘라줄 것을 몇 차례 요구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우리 집 나무도 담장을 넘어 옆집 수영장으로 나뭇잎이 무수히 떨어졌다. 수시로 가지치기하지만, 밑동이 부실한 나무는 점점 옆집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옆집에 사는 피터는 노골적으로 항의하지는 않고, 나와 마주칠 때면 은근히 나무 자르기를 원하는 눈치였다.
얼마 전, 뒷집이 팔리고 새 주인이 이사를 왔다. 아침부터 한바탕 소란스러웠다. 창을 열자 담장의 유칼립투스가 잘리고 있었다. 밧줄을 몸에 감고 전기톱을 든 남자는 나무 꼭대기에서 익숙한 솜씨로 차근차근 토막을 내어 아래로 던졌다. 인부들은 나무토막을 바로 분쇄기에 넣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톱밥으로 갈아서 차에 담았다.
이참에 우리 집 나무도 잘라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무 자르는 비용이 상당할 거란 짐작에 벼르기만 했는데 뒷집 사람에게 알아보니 생각보다 저렴했다. 며칠 뒤 잎이 넓은 야자수 하나만 놔두고 뒤뜰의 나무는 모두 없앴다. 뭉텅뭉텅 분쇄기 속으로 사라지는 나무를 보며 아쉬운 마음에 큰 둥치의 나무토막 몇 개만 남겼다. 나무 베는 작업은 반나절 만에 끝났다. 앓던 이 뺀 듯 속이 시원하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새는 내게 무언의 항의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밤이면 슬피 울던 새도 있었는데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식솔들은 제대로 챙겨 떠났을까? 하루아침에 둥지를 잃은 새들은 얼마나 막막했을까? 인간의 부주의함과 자연생태에 관한 문제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갑자기 집이 사라진다는 것은 얼마나 황망한 일인가.
나 역시 오랜 이민 생활동안 셋집을 전전한 끝에 이 집에 정착했다. 집을 구하러 다닐 때마다 어려움을 겪었다. 서울서 가져온 돈으로 집부터 샀더라면 좋았을 것을. 어설프게 시작한 가게에 다 말아먹었다. 또다시 부모님께 지원받았지만, 그 돈 역시 밑 빠진 독에 물처럼 다 새어 나갔다. 이민 와서 몇 번의 이사를 했다. 처음 살던 동네에서 세 차례나 도둑을 맞고 나서 서둘러 집을 옮겼다. 다시 정 붙여 살던 집에서는 갑자기 집이 팔리어 급하게 집을 비워줘야 하는 상황에 닥친 일도 있다. 우리가 얻으려고 하던 집은 늘 신청자가 많았다. 우리는 번번이 순위에서 밀렸다. 안정된 직장이 없는 사람은 셋집을 구하는 일부터 어려웠다. 그때 춥고 쓸쓸하던 마음이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가까스로 자립하고 생활이 나아져서 다시 집을 사려고 했을 때 마음에 드는 동네의 집은 우리가 가진 돈으로 부족했다. 중심에서 벗어난 변두리의 집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어려움을 많이 겪었는데도 집을 사는 큰일 앞에서 이런저런 판단을 할 겨를이 없었다. 집안에 큰 나무가 있는 집은 피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상식도 몰랐다. 그때는 마당에 나무가 많고 정원이 잘 가꾸어진 것이 그저 좋았다.
이제 뒷마당에는 두꺼운 장막을 걷어낸 듯 뻥 뚫렸다. 새 한 마리 날아와 편히 앉을 나무 한 그루도 남아있지 않다. 아침이면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따가운 햇살만 창가에 꽂힌다. 그동안 뒷동네에 누가 사는지 보이지도 않았는데, 매일 아침 뒷집 아낙들이 빨랫줄에 한가득 빨래를 널고 바삐 움직이는 그들의 일상이 그대로 보인다. 터번을 쓰고 산신령 같이 수염이 긴 뒷집 할배가 가끔 마당에 나와서 어슬렁거린다. 나 역시 파자마 바람에 뒷마당을 거닐 곤 하는데, 그들에게 내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불편하다. 다시 뭔가 가림막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스멀거린다.
이번 주말엔 꽃시장엘 가야겠다. 나무를 베어낸 자리를 채워줄 무화과나무를 찾아 심어야겠다. 열매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햇살을 가리지 않을 적당히 크기의 나무를 심고 나뭇잎이 우거지면 보고 싶지 않은 풍경도 가려줄 것이다. 그때쯤이면 둥지를 잃고 떠났던 새가 다시 돌아와 안부를 전할지도 모른다.
김미경 / 2009년 ‘문학시대’ 수필 등단. 수필집 ‘배틀한 맛을 위하여’, 공동 수필집 ‘바다 건너 당신’.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