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은 20세를 넘기면 성인신분으로 혼인의 정년기가 된다. 내 나이 23세가 되다보니 이웃 사람들의 입에서 혼담이 나오고 나의 혼인에 대한 공감대가 조성되어갔다. 어머니도 서서히 나의 혼인을 위해 혼수를 준비하고 계신 것 같았다. 그 때만해도 혼인은 중매가 주를 이루었고, 최종적으로 혼인당사자들이 맞선을 보고 본인들의 의사에 따라 성혼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내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나의 의사는 간 데 없고, 아버지와 김용해 목사의 일방적인 뜻에 따라 전격적으로 혼인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혼인은 오직 부모의 말에 순종하려는 나의 마음과 목사님의 말에 순종하려는 아버지의 마음이 만들어낸 하나의 작품이었다.
사연은 이렇다. 어느 날 돌연히 강경교회에서 아버지에게 다녀가시라는 기별이 왔다. 아버지는 부랴부랴 서둘러 40리 거리를 가셨다. 초청하신 분은 강경교회를 담임하시는 김용해 목사였다. 김목사는 “김권사님, 잘 오셨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권사님의 맏아들 갑수의 혼인에 대해 의논드리려고 초청했습니다.” 당시 한국 침례교는 일시적으로 장로와 권사를 두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권사” 직분을 받고 교회를 섬기셨다. 그 때 아버지와 김목사의 대화는 아버지가 얼마나 목사님들에 대한 신뢰가 컸었던 가를 잘 보여준다. “강경교회에 규수 한 사람이 있는데, 내 보기에 적합하여 김권사님을 이리 오시라 한 것입니다.” “목사님이 보시기에 가합하시면 그대로 진행하시지요.” “그럼 어느 때가 좋을까요?” “그것도 목사님이 정하시지요” “그럼 내달 음력 9월 14일이 달도 밝으니 그때가 좋겠습니다.” “참 좋겠네요. 그렇게 하시지요.” 이것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귀가하여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큰애 혼인이 한 달 뒤 음력 9월 14일로 결정되었다” 하고 선언하셨다.
청천벽력이라고 했던가. 나는 무척 당황했다. 아버지의 그런 처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불쾌하기까지 했다. 이 때 어머니는 내 편이 되어 “혼인은 인륜지대사인데 시간을 가지고 본인들의 의사를 들어보는 것이 좋지 않나” 하시자, 아버지는 “이게 무슨 말이오. 목사님의 말씀에 이의가 있을 수 없어” 하셨다.
아버지는 하나님 다음에 이 땅에서는 목사님의 말씀이라고 하시면서 목사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신 분이다. 우리들은 아버지의 신앙생활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교회서나 직장에서 윗사람의 명령에는 이의를 제기하기 전에 습관적으로 복종하며 살아왔다.
1949년 9월 14일(음), 원당교회에서 노재천(盧載天) 목사의 주례로 혼인식이 거행되었다. 나는 30분 전에 교회에 도착했다. 잠시 후 교회 청년들이 신부를 태운 가마를 내려놓았다. 중매하신 김용해 목사와 이종덕 총회장도 같이 도착했다. 뒤이어 처조부되시는 곽태훈 목사도 오셨다. 주례 목사가 신랑 입장을 외치자 나는 들러리 두 청년과 함께 들어갔고, 신부도 뒤이어 두 여자 청년과 함께 입장했다. 그 때는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혼인식이 끝날 때까지 신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주례목사는 “이 혼인예식에 이의가 있으면 말씀하시오” 하니 아무도 말하는 자가 없었다. 우리 당사자도 침묵을 지켰다. “신랑, 신부도 가합하게 여기느뇨?” 하기에 “예”로 대답했다. 주례목사는 식순대로 진행하고 주의 이름으로 성혼을 선언했다.
신랑신부가 퇴장한 뒤 나는 비로소 신부를 바라보았다. 그 때가 신부를 처음 본 순간이었다. 신부는 키가 작았다. 그것은 나를 실망시켰다. 평소 나는 키가 큰 사람을 이상형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즉시 그 꿈을 포기하고 현실에 적응하기로 했다. 아내는 언제 나를 처음 보았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그녀는 혼인식 뒤에 가마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내 뒷모습을 보았고, 집에 도착해서 내 얼굴을 보았다고 했다.
아내는 비록 키는 작았지만, 마음은 결코 작지 않은 여인이었다. 목회하는 동안 얼마나 가난한 삶을 살았던가. 아내는 초인적인 인내로 그 가난을 참고 견뎌 주었다. 목회생활을 하는 동안, 아내는 사모로서 단 한 번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혼인 후, 50년 이상을 살아오는 동안, 나는 아내와 때때로 의견 충돌을 하는 경우가 있었어도, 싸움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아내는 세상 지식을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헌신적이고 공평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것은 목회자 가정에서 성장하면서 가정교육을 통해 몸에 익혀온 하나의 덕성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