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예정론
고래(古來)로 예정설(豫定說)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성도(聖徒)들의 신앙생활의 실제에 적지 않은 혼란을 일으켜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그러한 결과를 가져왔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성서에는 인생의 영고성쇠(榮枯盛衰)와 행·불행은 물론 타락인간의 구원(救援) 여부와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하여 되어지는 것으로 해석되는 성구가 많이 있다.
그 예를 들면, 로마서 8장 29절 이하에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이를 부르시고, 부르신 이를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이를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셨다. 또 로마서 9장 15절 이하에는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하였으며, 로마서 9장 21절에는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고 하였다. 그뿐 아니라 로마서 9장 11절 이하에는, 하나님은 복중(腹中)에서부터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시어 장자(長子)된 에서는 차자(次子) 야곱을 섬기리라고 한 말씀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완전예정설(完全豫定說)을 세워 줄 수 있는 성서적인 근거는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예정설을 부정할 수 있는 또 다른 성서적인 근거도 많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창세기 2장 17절에 인간 조상의 타락(墮落)을 막으시기 위하여 ‘따먹지 말라’고 권고하신 것을 보면, 인간의 타락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예정에서 되어진 것이 아니고, 인간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치 않은 결과였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한편 또 창세기 6장 6절에는 인간 시조(始祖)가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創造)하신 것을 한탄하신 기록이 있는데,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하여 타락되었다면 하나님 자신의 예정대로 타락된 인간을 두시고 한탄하셨을 리가 없는 것이다. 또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救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바로 멸망으로 예정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성구인 마태복음 7장 7절에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찾는 자에게 만나게 하시며,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보면, 모든 성사(成事)가 하나님의 예정으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으로 좌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모든 성사가 하나님의 예정으로만 되어진다면 무엇 때문에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실 필요가 있겠는가?
또 야고보서 5장 14절에 환중(患中)에 있는 형제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이 있는 것을 보면, 병이 나거나 낫거나 하게 되는 것도 역시 모두 하나님의 예정에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서 불가피한 운명으로 결정지어지는 것이라면 인간이 애써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종래의 예정설(豫定說)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기도나 전도나 자선행위 등 인간의 모든 노력은 하나님의 복귀섭리(復歸攝理)에 아무 도움도 될 수 없고 전혀 무의미한 것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절대자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이라면 그것도 역시 절대적일 것이므로, 인간의 노력으로 변경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예정설을 둘러싸고 찬반 양론이 모두 세워질 수 있는 성서의 문자적인 근거가 충분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교리의 논쟁은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문제가 원리(原理)로써는 어떻게 해결될 것인가? 예정론에 대한 문제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제1절 뜻에 대한 예정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정(豫定)을 논술하기 위하여, 우리는 여기에서 ‘뜻’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먼저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墮落)으로 인하여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이루지 못하셨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들을 놓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어디까지나 이 창조목적을 다시 찾아 이루시려는 데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뜻은 복귀섭리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은 이러한 뜻을 예정하시고 그것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창조목적을 이루시려는 뜻을 세우셨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루지 못하셨던 그 뜻을 다시 이루시기 위하여 그것을 다시 예정하시고 복귀섭리를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이 뜻을 선(善)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셔야 하며, 악(惡)으로 예정하시고 이루실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의 주체(主體)이시므로 창조목적(創造目的)도 선이요, 따라서 복귀섭리의 목적도 선이어서 그 목적을 이루시려는 ‘뜻’도 선이 아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목적을 이루시는데 반대되거나 장애가 되는 것을 예정하실 수는 없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이나 타락인간에 대한 심판이나 혹은 우주의 멸망 등을 예정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악의 결과도 하나님의 예정으로 되어지는 필연적인 것이라면 하나님은 선의 주체라고 할 수 없으며, 자신이 예정하신 대로 되어진 악의 결과에 대하여 후회하셔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하나님은 타락된 인간을 보시고 한탄하셨고(창 6:6), 또 불신으로 돌아간 사울 왕을 보시고 그를 택하셨던 자신의 일을 후회하셨던 것이니(삼상 15:11), 이것은 그것들이 모두 예정으로 되어진 결과가 아니었음을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이다. 악의 결과는 모두 인간 자신이 사탄과 짝함으로써 그의 책임분담(責任分擔)을 다하지 못한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목적을 다시 이루시려는 뜻을 예정하심에 있어서 그것을 어느 정도로 예정하시고 이루시는 것인가?
하나님은 유일(唯一)하시고 영원(永遠)하시며 불변(不變)하신 절대자이시므로, 하나님의 창조목적도 역시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창조목적을 다시 이루시려는 복귀섭리(復歸攝理)의 뜻도 유일하고 불변하며 또한 절대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뜻에 대한 예정 또한 절대적일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사 46:11). 이와 같이 뜻을 절대적인 것으로 예정하시기 때문에, 만일 이 뜻을 위하여 세워진 인물이 그것을 이루어 드리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은 그의 대신 다른 인물을 세워서라도 끝까지 이 뜻을 이루어 나아가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예를 들면, 아담을 중심하고 창조목적(創造目的)을 이루려 하셨던 그 뜻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이 뜻에 대한 예정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후아담으로 보내시어 그를 중심하고 그 뜻을 다시 이루시려 하셨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이 뜻도 역시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전편 제4장 제1절 Ⅱ), 예수님은 재림하셔서까지 이 뜻을 기필코 완수하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이다(마 16:27).
또 하나님은 아담가정에서 가인과 아벨을 중심한 섭리로써 ‘메시아를 위한 가정적인 기대’를 세우려 하셨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이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그 대신 노아가정을 세우시어 이 뜻을 이루려 하셨던 것이다. 나아가 노아가정이 또 이 뜻을 이루어 드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대신으로 아브라함을 세우시어 기필코 그 뜻을 이루셔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또 아벨로써 이루시지 못한 뜻을 그 대신 셋을 세우시어 이루려 하셨고(창 4:25), 또 모세로써 이루어지지 않은 뜻을 그 대신 여호수아를 택하여 이루려 하셨으며(수 1:5), 가룟 유다의 반역(反逆)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던 뜻을 그의 대신 맛디아를 택하시어 이루려 하셨던 것이다(행 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