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문이 있는 자리- 80
12/12/2024
in 칼럼
졸업식
고속도로를 벗어나 해안 길을 따라 30여 분 후에 아내의 고등학교 담임이셨던 P선생 댁에 도착했습니다. 집 앞엔 남편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차에서 내리는 나를 향하여 고맙다고 말합니다. 아내에겐 더욱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인사하는 것 같습니다.
P선생께서 마지막으로 자신의 제자를 보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 내일, 호스피스 병동으로 가야 한다고 합니다. 이제는 2~3주 넘기기 어렵다는 의사의 판단에 따라 서울에서 두 자녀 가족이 급히 들어왔습니다. 우리 부부가 마지막으로 만나는 외부 사람이라고 합니다. P선생은 미술을 전공하고 첫 부임지인 여고에서 아내를 제자로 만났던 사이입니다. 50여년 이상을 이어온 인연입니다.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거실로 안내되어 소파에 앉았습니다. 안방에서 나오는 간호사가 P선생께서 지금 예쁘게 화장하고 계시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합니다.
P선생 부부는 세 자녀와 함께 30여 년 전에 시드니로 이민 오면서 이미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던 제자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갓 대학 졸업 후 첫 부임지에서 만난 사제지간이 중년이 되어 이어졌습니다. 아내는 P선생을 종종 만나게 되었고 얼마 지난 후부터는 P선생 부부가 운영하는 가게에 주말 직원으로 일하면서 더욱 가깝게 지냈습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만나 함께 나누는 점심시간은 가장 즐거운 시간들이었다고 아내는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내를 향하여 언니, 누나하던 세 자녀도 모두 장성하여 각각 결혼하고 P선생 부부만 남게 되어 사제지간의 만남은 더욱 빈번해졌습니다. 그런 시간의 흐름 속에 사업에만 열중하던 P선생의 몸에 이상이 발견되어 병원 출입이 잦아졌습니다. 결국엔 생존을 위한 투석을 해야만 했습니다. P선생 부부는 모든 일을 정리하고 단둘이서 강가의 단란한 주택에 정착하였습니다. 병원에서는 환자의 남편에게 투석하는 모든 과정을 몇 주에 걸쳐 교육시키고는 집에서 남편의 손으로 투석하게 했습니다. P선생 댁은 정부의 지원으로 화장실부터 투석 환자의 편의를 위하여 개조되었으며 간호사를 포함한 두 명의 간병인이 교대로 상주합니다. 그런 과정 속에 사제지간의 만남은 P선생의 생일 때와 연초의 신년 인사 때에나 만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지난 연초에도 우리 부부는 투석으로 외출이 자연스럽지 못한 P선생과 드라이브를 하며 근처 바닷가의 아담한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도 했습니다.
“왔구나, 왔어!”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에 고개를 돌려 안방에서 나오는 P선생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아내는 급하게 다가가 P선생의 손을 잡았습니다. 한참 동안, 서로 감싸며 조용했습니다. 간호사가 휠체어를 밀어 거실로 나왔습니다.
“고마워요, 고마워!”
이번엔 나의 손을 잡으며 반가워하십니다. 나의 손 위에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습니다. 잠시 후, 하얀 나비는 제자의 손등으로 옮겨 갑니다. 아마도 30킬로그램도 안 될 것 같은 몰골입니다. 간신히 인간의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듯합니다. 나직하게라도 말을 하는 것이 경이롭습니다. 투석 장치를 모두 제거하여 몸은 평온하게 보입니다. P선생은 담담한 표정인데 제자는 눈물을 감추지 못합니다.
두 남자는 테이블로 이동하고 둘만이 오롯이 대화를 나눕니다. P선생이 오히려 말을 이끌어 갑니다. 아마도 비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양입니다. 기도하듯이 이마를 맞대기도 하고 귀를 바짝 붙이기도 합니다. 시드니에서 토요일마다 만나 나누던 점심시간 때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인간의 기능 중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청력이라고 하는데 그 전 단계가 말하는 것인가 봅니다. 반 시간 정도 지났습니다. 환자가 피곤하여 더 견디기 어렵다며 간호사가 휠체어를 밀고 안방으로 들어갑니다. 나는 눈인사밖에 할 수 없습니다. 아내는 짧은 거리이지만 함께 갑니다. 안방 문이 열리고 들어가는 P선생께 아내는 아무 말도 못하고 손을 살며시 놓습니다.
P선생 이름 앞에 ‘고(故)’자가 붙었습니다. 100여 명의 추모객이 모였습니다.
사랑하는 선생님,
시월입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유엔 데이가 오네요. 특별한 날에 태어나신 우리 선생님, 부족한 제자가 유엔 데이를 기억하고 생신 카드를 보냈는데 기다려 주시지 않고 가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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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조사를 마쳤습니다.
마지막 뵙는(Viewing) 시간입니다. P선생의 상반신이 보입니다. 차례대로 인사합니다. 아내는 조사가 적혀있는 용지를 P선생 머리 곁에 놓습니다. 하얀 종이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빛을 타고 하얀 나비가 되어 날아갑니다.
P선생께서는 투석치료를 받기 전까지 문학회 모임에 참석하였으며 한 권의 산문집을 출간하고, 일곱 할머니의 공동 에세이에 참여하여 글을 발표했습니다. 이 두 권의 저서는 P선생께서 호주 시드니에서 문인으로 살아왔었음을 증명하는 기록이 되었습니다.
장석재 / 2012년 제14회 재외동포문학상 수필부문 대상 수상. 수필집 ‘둥근달 속의 캥거루’, 그림책 ‘고목나무가 살아났어요’. 문학동인 캥거루 회원. 현 시드니한국문학작가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