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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늘 뉴스 생방송 사고가 일상인 삶>의 줄거리:
모든 사람은 하늘 뉴스 데스크 아나운서여야 합니다.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뉴스 앵커가 대본을 따라 말하듯 하늘에서 준비된 대본만을 따라야 한다는 뜻이지요. 아나운서가 생방송 중 대본에 없는 말을 하게 되면 이것은 대형 방송사고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서 이렇게 스스로 말하는 방송 사고가 일상이 되었습니다.
하늘 뉴스 생방송 사고가 일상인 삶
(요한복음 7:10~24)
14. 이미 명절의 중간이 되어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
15.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18.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늘 뉴스 생방송 사고가 일상인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늘 뉴스 생방송 사고가 일상인 삶”
요즘 아나운서와 앵커의 차이를 점점 더 강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나운서는 앵무새처럼 뉴스 대본을 잘 따라 읽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기에 아나운서에게 중요시 되었던 것은 사람들이 늘 본다는 이유에서 외모였습니다. 그런데 뉴스데스크와 같은 심층 보도를 기획하는 담당자로서 앵커는 대본을 따라 읽는 아나운서의 자질만을 가지고는 부족하다 여겨집니다. 자기가 다루고 있는 뉴스의 내용을 잘 파악해서 분석하고 그 뉴스를 개인적인 철학을 가지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층 보도 방송에서 강조되는 앵커의 역할입니다.
한편 성경에서 제시되는 예수님은 전형적인 앵무새 아나운서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창세기의 진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생방송 앵무새 아나운서로 만드셨음을 보여줍니다. 앵무새 아나운서로 만들어진 사람의 타락이란 마치 생방송으로 진행되던 뉴스의 방송 사고와 같습니다. 타락한 인류의 모습이란 방송 사고가 많아지다 못해 일상이 되어버린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방송 뉴스 시간에 가장 큰 방송 사고는 아나운서가 대본과 상관없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면 아나운서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나타나게 되는 이유는 하늘 뉴스가 되어야 하는 우리의 삶에서 방송 사고가 났기 때문입니다. 대본을 따르지 않은 말들을 하고 살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사고입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는 카이로스의 때를 말씀하셨습니다. 카이로스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뜻이 수직 하강하여 지금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때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카이로스의 때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형제들과는 다른 시간에 예루살렘에 은밀히 올라가셔서 초막절을 지내십니다. 이로부터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일주일 동안 진행되는 초막절 중간에 공개적으로 성전에 모습을 드러내시며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이 가르침에 대해 놀라워합니다. 이들은 이미 유명해진 예수님의 배경과 출신에 대해 조사를 끝낸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하층민에 속하는 목수 집안에서 태어났고 유대 땅에 이름 있는 유명한 랍비에게 수학을 하였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예수님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15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의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고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유명한 랍비의 이름을 인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랍비나 서기관이나 율법사도 아니셨지만 많은 표적과 기적을 행하셨기에 그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가르침을 듣는 많은 사람들이 놀라게 됩니다.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조사를 통해 예수님이 공적인 교육을 받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는 권세와 지혜가 있었습니다. 랍비들이나 서기관들처럼 화석화된 생명 없는 말씀을 전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울림을 주는 살아있는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다.
16절을 보면 의아해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이어집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다해서 아버지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입으로 당신의 생각을 내려보내십니다. 이 지상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아나운서가 대본을 읽듯이 아버지의 생각을 읽어서 말씀하시는 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카이로스 즉, 수직의 시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수직의 시간으로만 활동하셨습니다. 단 하나도 예외 없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만 말씀하시고 행동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모든 사건들을 젖혀둔 채 하나님의 생각만 받아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뉴스의 대본을 읽는 아나운서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뉴스는 새로운 사건에 대한 보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알아야할 가장 최신의 뉴스거리를 지금 하나님께서 살아서, 알아서, 사랑해서, 앞서서 이 땅을 생각하시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뉴스의 아나운서는 어느 나라에 무슨 일이 있었다, 어디서 사고가 났다는 것에 대한 대본을 받아 읽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한다고 여기신 중요한 뉴스거리는 바로 지금 현장에서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지금 이 땅을 내려다보시며 갖고 계신 그 생각을 전하시는 일에 당신의 생애를 바치셨습니다.
카이로스의 때를 염두에 둘 때 말의 중요성은 엄청납니다. 카이로스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수직으로 개입하시는 순간을 말합니다. 우리는 출애굽이나 홍해가 갈라지거나 250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사건들만을 하나님의 개입의 결과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건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수직으로 개입하셔서 이루어진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개입은 이렇게 초월적인 기적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이라면 바로 입으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상적이라고 해서 결코 비중이 작은 사건은 아닙니다. 말의 의미를 염두에 둔다면 말을 하고 산다는 것은 결코 가볍거나 하찮게 여겨질 수 없습니다. 인간의 말이란 본래 하나님의 생각이나 뜻을 받아서 하는 것이기에 그 말이라는 사건의 비중은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의 생각을 담는 것이기에 우리는 하늘 뉴스 생방송의 아나운서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보시면서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이것이 인간이 알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뉴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말은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담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무한한 우주와 지구의 삼라만상을 말씀으로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생각과 뜻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에는 이 말씀을 인간을 통해 대행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이 과정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각과 뜻을 가지고 계셨고 그것을 말씀으로 표현하심으로써 세상은 창조되었습니다. 그 창조된 세상에는 인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생각과 뜻을 인간에게 집어넣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할 수 있는 존재로서 인간을 지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말을 하며 산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으레 있는 일이고 작고 가벼운 일이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과 예수님의 형제들이 초막절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두고 이야기하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남성이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은 규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규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서 행동하시고자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 본연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이 오늘 본문에서 다시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생각만을 받아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마치 뉴스의 대본을 받아 읽는 앵무새 아나운서와 같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막절 중간에 성전에서 가르치시고자 하십니다. 성전에 모여 있는 사람들 전체가 제일 먼저 알아야 하는 가장 중대한 뉴스는 바로 하나님께서 이 현장을 내려다보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TV를 보다보면 중요한 사건에 대한 속보가 자막으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현재 방영 중인 방송보다도 먼저 알아야 될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알아야만 하고 말해야만 하는 가장 최신의 중대한 뉴스거리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뉴스는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바라보고 계시며 살아서, 알아서, 사랑해서, 앞서서 생각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보다 더 중요하고 절박하고 급하게 알아야 될 뉴스거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뉴스거리를 젖혀둔 채 스스로 말하면서 살아갑니다.
이와 관련하여 18절을 보면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의가 없다는 것은 이 세상을 향해 갖고 있는 사적인 이해관계가 전혀 끼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말하는 자”라는 표현은 참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누구나 스스로 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할 말을 누가 대신해 주는 것도 아니고 내게 대변인이 필요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내가 대변인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아나운서가 되어야 합니다. 아나운서는 스스로 말하지만 자기의 생각을 말하는 자는 아닙니다.
뉴스 생방송이 시작되면 아나운서 앞에서는 사전에 준비된 대본이 앞에서 화면에 흘러갑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아나운서는 이것을 보고 소식을 전합니다. 그런데 아나운서가 대본을 무시한 채 뉴스 시간 내내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면 어떨까요? 대형 사고가 터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살아계시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앞서서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이 내려다보고 계시는 현장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뜻을 품고 말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자면 스스로 말한다는 것에 대해서 엄청난 제약이나 부담을 느끼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말하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나의 뜻과 생각을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살아계시고, 모든 것을 아시고, 사랑하시고, 앞서서 생각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그러하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생각과 뜻을 말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며 산다는 것이 무척 어이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생방송 뉴스 중에 나타난 방송 사고와 같은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방송 사고가 모든 사람에게서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뉴스에서 대본에 없는 말은 쓰레기입니다. 해서는 안 되는 말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현장을 바라보고 계신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아니라면 쓰레기입니다. 이것을 말한다는 것은 내 삶에 쓰레기를 생산해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지금도 75억 명이 말과 행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이 하늘에서 수직 하강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재료가 아니라면 전부 쓰레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로마서 3장 13~15절에서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들이란 유대인이나 헬라인을 넘어서 죄인인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언제 혀로 속이고 입술에는 독사의 독을 품고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했다는 것일까요? 지금 삶의 현장에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따라서 말한 것이 아니라면 전부 독사의 독이고 속임수이며 거짓입니다. 나름대로 진실을 말한다고 여길지라도 그것은 진실일 수 없습니다. 배우자에게 진심으로 무슨 말을 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현장을 내려다보시며 주신 뜻과 생각을 받아서 한 것이 아니라면 전부 독이고 거짓입니다. 배우자를 사랑해서 배려한답시고 한 말일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속 대본과 다른 말을 하고 있다면 방송 사고가 난 것입니다. 사고는 일어나서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람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마음속 생각과 뜻을 받아서만 말을 할 수 있느냐?”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이야기와 함께 할례와 안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카이로스 때는 수직으로 하강하여 내려오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받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카이로스의 때를 살기 위해서는 할례와 안식의 의미를 알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할례와 안식은 모세가 준 모든 율법의 근본취지입니다. 이 취지를 모른다면 문자적으로 율법을 지키더라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맹목적으로 항목과 조항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취지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율법을 바르게 지키는 것입니다. 율법의 취지가 바로 할례와 안식 속에 나타납니다. 할례는 양피를 벗겨내어 흔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창세기 17장을 보면 할례 언약이 만들어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내 앞에서 행하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아내 사라 앞에서도 하나님 앞에 있음을 기억해야 하고, 사고를 당했을 때도 하나님 앞에 있음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어떤 삶의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상황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음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할례의 흔적을 보고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기억해서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먼저 의식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에 담긴 할례의 의미입니다.
안식의 의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안식은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안식의 상태에서는 삶의 현장을 내려다보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수직 하강으로 받아서 말로 사건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뜻과 생각을 말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입으로 끊임없이 쓰레기를 내뱉는 것입니다. 현장을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엄연히 살아계십니다. 제일 급하고 중요한 것은 삶의 현장을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은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지금 가장 절박하고 급하게 알아야 되는 뉴스입니다.
하나님이 이 현장을 보고 뜻하시는 것을 알고 따라 말하고 행동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내게서 안식과 할례의 의미가 성취되어야만 합니다.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안식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에서 안식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을 떠올려봅니다. 5장 17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는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가 움직이시는 것을 밝히 보고 따라 움직이실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입을 움직이실 때 똑같은 것을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행동도 말도 앵무새가 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처한 현장에서 가장 급하게 알아야 될 뉴스거리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들이 아닙니다. 이 세상 현장을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 마음속의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삶의 현장을 바라보시며 갖고 계신 생각은 내가 알아야 하는 가장 최신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뉴스를 전하는 앵무새 아나운서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할례와 안식의 의미대로 나와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하나님 아버지가 제일 좋은 분으로서, 하나님과 마주하는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처하신 현장마다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을 제일 큰 사건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을 그대로 앵무새 아나운서처럼 보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 때문에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마주하는 안식과 할례의 취지에 도달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없이도 하나님과 마주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과 마주하시고 현장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최신 뉴스로 앵무새 아나운서처럼 말씀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루신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할례 대신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함으로써 세상을 마음에서 잘라낼 수 있습니다. 할례가 양피를 잘라내는 것이라면 십자가는 세상을 잘라냄으로써 내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게 합니다.
내가 어디를 가든지 가장 먼저 알아야 될 중대한 뉴스는 하나님께서 그 현장에 대해 갖고 계신 생각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늘 마음에서 기억하고 의식으로 붙잡을 때 하나님의 생각은 대본이 되어서 나의 입에 실리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말하며 사는 인생을 끝내게 됩니다. 스스로 하는 모든 말은 쓰레기입니다. 그 쓰레기가 쌓일수록 제일 먼저 피해를 보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또한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쓰레기 말을 할 때 나 자신과 그 사람에게 독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기억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는 누구를 향해서도 아무 생각도 하지 말 것이고 아무 말도 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 없는 입은 쓰레기 제조기입니다. 십자가 없는 행동은 끊임없는 독가스와 같습니다. 십자가 없는 입으로 말하는 삶은 중단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여 주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의식을 유지함으로써 마음에서 할례와 안식의 취지를 이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내 마음이 마주하는 상태가 되어서 언제나 내가 처한 현장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가장 큰 뉴스거리임을 알고, 그 생각과 뜻이 나의 대본이 되어서 그대로 말하며 사는 앵무새 아나운서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무슨 일이 일어나도 우리의 의식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의 의식을 지켜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어떤 현장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생각을 대본으로 읽으며 말하는 하늘 뉴스 생방송의 아나운서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