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조글 출처: 다음 백과>
호우가 내리는 날 누가 날 이리 불렀던가?
능참봉의 신세로 이 재실에서 융건릉을 돌보라 하는가?
한발 내딛지 못할 빗줄기가 세차게 내리솟는 즈음 죽죽 처마로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보는 한가한 마음 한구석 사도세자의 그 시간으로 여행하는 찰라이다
융릉은 제21대 영조의 둘째 아들로 사후 왕으로 추존된 장조(사도세자, 1735~1762)와 현경왕후(1735~1815, 혜경궁 홍 씨)의 합장릉이다. 사도세자는 이복형인 효장세자(추존 진종)가 요절하고 영조가 마흔이 넘은 나이에 태어난 두 번째 왕자다.
후사가 없어 애태우던 영조는 삼종(효종, 현종, 숙종)의 혈맥이 끊어지려다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돌아가서 여러 성조를 뵐 면목이 서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영조는 즉시 왕자를 중전의 양자로 들이고 원자로 삼았으며, 다음 해에 왕세자로 책봉했다. 원자 정호와 세자 책봉 모두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빠른 기록이었다. 영조는 아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왕위를 물려줄 것을 결심한 것이다.
왕세자에 책봉된 사도세자는 영조의 기대에 부응해 3세 때 『효경』, 『동몽선습』 등을 익혔고 글을 쓸 줄 알았다. 이때 세자가 썼던 글이 '천지왕춘(天地王春)'이다. 이에 놀란 여러 신하들이 앞다투어 세자의 글을 하사해줄 것을 청하니 영조는 기뻐하며 "네가 주고 싶은 사람을 가리키라"라며 세자의 재간을 대견스럽게 생각했다.
세자는 글쓰기를 좋아했으며 10세 때 당시 세마(정9품)였던 홍봉한의 동갑내기 딸과 혼인했는데 그녀가 혜경궁 홍 씨다. 홍봉한이 당시에 급제하지 못하고 세마라는 말직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을 볼 때, 홍봉한은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되어서야 비로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홍봉한은 딸의 간택을 계기로 도승지, 어영대장, 예조, 이조판서, 좌참찬을 거쳐 우의정, 영의정까지 오르면서 영조 중・후반 노론의 대표적 대신으로 활동했는데, 홍봉한의 승세는 사도세자의 몰락과 관련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봉한,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익여(翼汝), 호는 익익재(翼翼齋). 이조판서 홍만용(洪萬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중기(洪重箕)이고, 아버지는 홍현보(洪鉉輔)이며, 어머니는 임방(任埅)의 딸이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장인이다.
홍봉한의 고조 할아버지는 홍주원으로 선조의 딸 정명공주와 결혼을 하여 왕실의 부마였기에 그 자손들은 대대로 기득권의 위치에 있어 조선 후기 노론의 중요한 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동생 홍인한은 노론의 중심으로 자신의 형인 홍봉한의 손자임에도 정조를 왕위에 올리지 않으려다 나중에 유배후 사사된다 할아버지 홍중기는 이민서의 딸을 어머니로 두었으니 홍봉한에게 이관명, 이건명, 이이명(노론 4대신) 같은 인물들이 대부(친척 조부)뻘이 된다
다시 사도세자로 돌아오면 세자는 영특하면서도 무인 기질이 강했다. 어릴 때부터 반드시 군사놀이를 하면서 놀았으며, 병서도 즐겨 읽어 속임수와 정공법을 적절히 변화시키는 오묘한 이치를 터득했다고 한다. 또한 힘 좋은 무사들도 움직이기 어려울 만큼 무거운 청룡도와 쇠몽둥이를 15~16세 때 자유롭게 사용할 정도로 기운이 대단했다. 무예에 대한 세자의 열정은 저술로 이어졌다. 24세 때인 영조 35년(1759)에 장수와 신하들이 무예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걱정해 『무기신식』이라는 책을 엮었을 정도다. 이 책은 훈련도감1) 에서 교재로 사용되었으며, 그 뒤 정조 때 간행된 『무예도보통지』의 원본이 되기도 했다. 『한중록』에 따르면 세자는 늘 군복을 입고 다녔다.
아울러 어릴 때 저승전에서 성장하며 경종을 모시던 시녀들과 가까웠기에 이 나라 조선이 왕의 권위보다 노론이라는 신하들 패거리(카르텔)에 얼마나 놀아나는지를 절실히 느꼈다 경종이라는 선왕을 독살하였다는 소문 그리고 아버지 영조가 그들의 택군으로 허수아비 같은 왕의 자리에 있음을 간파하였다 그래서 그것이 사도세자의 비극을 낳는다
사도세자의 비극은 영조 25년(1749) 15세 때 영조를 대신해 국사를 대리청정할 때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영조의 처신이었다. 그는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도 글 읽는 것보다 무예를 중요시하는 데 불만이 있었다. 조선 왕조에서 대리청정은 기회이자 위기였다. 국왕을 대신해 정무를 잘 처리할 경우에는 능력을 인정받고 입지를 다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신뢰를 잃고 실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대리청정은 훈련을 목적으로 한 우호적 기회임이 틀림없었다. 영조도 정무와 거리가 있는 세자의 기질을 사전에 훈련하려는 의도로 대리청정을 도입했다고 평가된다.
영조는 아들을 세자로 명한 후에 이를 양위 파동으로 적절히 이용했다. 왕이 그럴 의사가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세자와 신하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양위를 만류했고, 국왕은 자신의 뜻을 관철하겠다고 고집했다. 이런 실랑이를 몇 차례씩 거친 뒤에야 어명은 마지못해 거두어졌다. 그 과정에서 충성은 검증되고 불충은 적발되며, 왕권은 공고해지고 정치적 전환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시기가 매우 부적절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기 전까지 무려 5회나 양위 의사를 밝혔다. 재위 15년, 16년, 20년, 21년, 25년 때로 세자 나이 4세, 5세, 9세, 10세, 14세 때였다.
무엇보다 4~5세의 세자에게 전권을 물려주겠다는 말을 왕이 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어린 세자는 양위 파동 때마다 긴장하고 두려워하면서 철회를 애원했다. 대리청정이 시작된 뒤에도 세 번의 양위 파동이 나타났다. 이 사건들은 그 기간에 누적된 영조와 세자의 갈등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문제는 이런 양위 파동에도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가자 노론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영조의 후궁 숙의 문 씨 등이 세자를 무고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영조가 사도세자를 질책하자 그는 화병과 정신병을 얻었다. 10여 세 뒤부터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청정한 뒤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적극 동조한 장인 홍봉한은 훗날 "무엇이라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병도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했다"라고 술회할 정도였다.
1761년 정순왕후의 생부인 김한구와 홍계희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을 무고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는 "동궁이 왕손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들였으며, 자신을 따르는 관료들과 20여 일이나 무단으로 관서 지역을 유람했다"라는 내용이 적힌 '허물십조'를 상소한 것을 가리킨다. 이를 본 영조는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인가"라고 한탄하며 세자에게 명해 땅에 엎드려 관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 한 후 자결할 것을 명했다. "네가 자결하면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있으니 어서 그리하라"라는 나름의 명분도 만들었다.
영조가 칼을 들고 자결을 재촉하자 사도세자는 부모 앞에서 자결하는 것이 효에 어긋난다고 항변했고, 영조는 당시 11세였던 정조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게 했다. 1762년 임오화변이다 이런 사건이 일어나야 했던 조선 왕실의 적나라한 모습은 누가 만든 것인가? 제 정신으론 살아갈 수 없도록 한 그들은 누구인가?
그런 후 영조는 사도(세자를 생각하며 추도한다)라는 시호를 내리고, 나라의 앞날을 위해 그것이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내외에 알렸다. 흔히들 말하는 '사도세자'라는 호칭은 이때 생겨났고 이후 사도세자는 비운의 대명사처럼 불린다.
그런데 사도세자 비극에서 가장 잘 알려진 '뒤주'가 『영조실록』에는 나오지 않는다. 『영조실록』 38년(1762) 윤 5월 13일의 기록에는 "세자를 폐해 서인으로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다"라는 말이 나온다. 국사편찬위원회 김범 편사연구사는 뒤주와 같은 협소한 공간에서 9일 동안 살아 있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논거를 들어 뒤주 사망설을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뒤주라는 표현이 혜경궁 홍 씨의 『한중록』에 나오며 『정조실록』에는 '한 물건(一物)'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뒤주가 사망에 중요한 도구가 된 것은 사실로 생각된다고 첨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