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0일 하늘언어교회
성경봉독: 시편 42편 1절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설교: ‘인간, 무한결핍의 존재’ 조영찬 전도사
인간은 양면적이고 역설적인 존재입니다. 인간 자체는 유한자이지만 그 속에 무한한 갈망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무한한 구멍을 가진 유한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존재가 유한하다면 구멍도 유한해야 타당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유한자에게 무한한 공백이 뚫린 것인지 참으로 불가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도 무한자의 형상을 받았기 때문에 무한에 대한 열망이 생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무한열망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평생을 분투하는 이유가 바로 그 무한한 공백을 메꾸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는 무엇을 추구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부추기는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돈, 쾌락, 명예 등이 대표적인 세상의 가치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바닷물과 같아서 아무리 목을 축여도 목마름을 해소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 갈증이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무한공백은 오직 무한자만이 채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무한자와 단절된 존재입니다. 때문에 무한자에게로 회귀하는 여정은 무한히 험하고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다행히 우리는 그 길을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가는 여행자들입니다. 길도 모르고 진리도 모르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몸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과 동행함으로 길을 잃지 않고 무한자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완강하게 양면성을 고집하기 때문에 그 은혜의 길을 걷는 일조차 자기분열적인 장벽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한자이신 하나님을 사모하는 동시에 그분을 꺼리고 거부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진리의 길을 가고자하는 열망과 동시에 그 길을 거부하고 싫어하는 고집도 상당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뿌리깊은 거부 때문에 우리는 영적으로 모두 유아단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나이를 먹으면 육체는 자동으로 성인이 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수준은 아기나 백살 노인이나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아기들은 부모가 좋은 것을 주는데도 싫다고 울고불고 떼를 쓸 때가 많습니다. 어른의 영혼도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는데 싫어하고 거부하는 속성이 철벽처럼 완고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한 습벽은 신자가 된 뒤에도 완전히 사라질 수 없습니다. 부단히 경건의 훈련과 순종을 통해 줄여나가는 길 외에 왕도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 함께 가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시련이 닥치니까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로 성령 충만을 받고 담대하게 말씀을 전했지만 훗날 옳지 못한 행동으로 바울에게 책망을 듣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인간은 한번 회심한다고 해서 그대로 고정되는 게 아니라 부단히 양면성을 대면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양면성은 건강한 상태가 아니기에 부단히 훈련과 성화를 통해 본성을 거스르고 하나님 뜻을 따르는 선택을 해나가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기가 얼마나 곤고한 상태에 빠져 있는가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즉 문제의식 자체가 없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병이 걸렸을 때 자각증상이 있다면 그것을 고치고 치료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각증상이 없다면 아주 큰 병이 들었는데도 고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문제의식과 자각증상이 있다는 것은 큰 깨달음이고 복입니다. 자각증상도 없고 문제의식도 없다면 그는 자기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하고 생을 마치게 됩니다.
육체적인 문제는 통증이나 불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문제는 훨씬 고차원의 문제여서 거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배우고 공부하고 깨닫고 반성하려는 몸부림이 있어야 비로소 서서히 영적 지각이 되살아나게 됩니다.
우리가 진리의 길을 가는 데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무한대여서 한 두마디로 표현하는 일은 원천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일단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것을 고치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인데 전적으로 등한시하고 무관심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성경을 배우기 위해서는 성경을 펴서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글을 읽고 이해하는 독서 훈련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공동체 식구들을 비롯해 교회와 사회 전반적으로 책을 전혀 읽지 않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책뿐 아니라 운동에 무관심한 사람, 나눔에 관심 없는 사람, 배움에 담을 쌓은 사람, 마음챙김에 아무 관심 없는 사람 등 이런저런 무관심으로 자기를 방치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더 이상 자기를 방치하는 죄를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돈이든 책이든 그 어떤 자원이 있다면 그것으로 자기의 무한결핍을 해소하는 데에 최대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특히 책을 읽으려고 노력하십시오. 책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와 영혼이 서린 정신적인 물건입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책을 읽지 않는다면 영혼의 빈곤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선 가장 쉽고 읽기 편한 책부터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초등학생용이건 유아용이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게 아무 책이라도 시작해서 글을 읽고 이해하는 힘을 길러야만 성경이라는 위대한 책을 읽고 이해하는 지식과 지혜가 자라날 수 있습니다.
공동체소식
1. 기도문 갱신
그동안 예배시간에 사용하던 니케아신경과 주기도문을 새사도신경과 김형석교수의 버전으로 교체합니다.
우리말의 높임말 어법에 맞게 새사도신경에서는 ‘나’를 ‘저’로 바꾸었고 ‘죽으시고’를 ‘돌아가시고’로 수정했습니다.
김형석 주기도문은 한 절 한 절을 깊이 묵상할 수 있도록 각 문장을 ‘소서’로 끝맺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예배 시작시에는 수정한 ‘성호경’을 도입합니다.
가톨릭과 성공회 버전에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렇게 되어 있는데 저는 우리말 공대법에 따라 ‘성부님 성자님 성령님 이름으로’라고 고쳤습니다.
이렇게 기도문을 다듬는 이유는 우리의 신앙이 언어에 기반한 언어적 삶이기 때문에 언어의 세부항목까지 다듬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마땅한 예의와 도리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선은 이렇게 해보고 어색하거나 불편이 발견되면 계속해서 개선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2. 오늘 읽을 말씀은 마태복음 6장-10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