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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형상(衡祥)이고, 자는 중옥(仲玉)이며, 병와(甁窩)는 호이다. 선계(先系)는 선원(璿源)에서 나왔고, 태종대왕(太宗大王)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孝寧大君) 휘 보(補)는 왕세자의 지위를 양보하는 지극한 덕이 있었는데, 공은 그 10세손이다.
효령대군은 서원군(瑞原君) 시호 이안(夷安) 휘 친(𡩁)을 낳았고, 서원군은 청거수(淸渠守) 휘 혜(蕙)를 낳았고, 청거수는 밀산부수(密山副守) 휘 신손(信孫)을 낳았다. 이로부터 친진(親盡)하여 작위가 계승되지 않았다. 3대를 내려와서 참판에 증직된 행 현감(行縣監) 휘 승기(承器)에 이르렀는데, 이분이 공의 고조부이다. 증조부 휘 사민(師閔)은 좌랑(佐郞)을 지냈고, 조부 휘 장형(長馨)은 문과에 급제하고 현령을 지냈으며 도승지에 증직되었고, 아버지 휘 주하(柱廈)는 성균관 진사이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진사 윤세구(尹世耈)의 딸이자 군수 윤정립(尹貞立)의 손녀이며 판서 윤국형(尹國馨)의 증손녀로, 효묘(孝廟) 계사년(1653, 효종4) 5월 23일에 인천 소암촌(疎巖村)의 저택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4, 5세 때부터 이미 덕을 이룬 사람처럼 의젓하였다. 매일 새벽 일어나 부모의 침소 곁에 서서 모셨는데 참판공이 자주 칭찬하기를 “훗날 우리 집안을 창성하게 할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 하였다.
계묘년(1663, 현종4)에 《독동사기(讀東史記)》를 지었는데, 공의 동무들이 학문을 좋아하는 장로(長老)에게 전해 보여 주었다. 나중에 공이 동무들을 따라 장로의 집에 갔는데, 장로가 일어나 읍을 하고 말하기를 “이 책은 숙유(宿儒)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로구나.”라고 하였다.
갑진년(1664)에 대사성(大司成)이 《서경》의 기삼백(朞三百) 주(註)를 강의하는 것을 들었는데, 성균관 유생 중에는 구두를 떼는 자가 없었으나 공은 혼자 계산하여 깊이 탐구해 내고야 말았다. 이때부터 과거 공부에 뜻을 두지 않고 경사(經史)와 예서(禮書)에 있는 힘을 다하며 노력을 몹시 지극하게 하자, 양친은 아들이 병들까 걱정되어 밤에는 글을 읽지 말라고 경계하니, 공은 왕골로 짠 발로 등불을 가리고 남몰래 글을 읽었다. 공이 공부를 독실하게 한 것이 이와 같았다.
기유년(1669)에 장가들기 위해 강령현(康翎縣) 관아로 길을 떠났는데, 길이 황해도 감영을 경유하였다. 황해도 관찰사 정공 륜(鄭公錀)은 곧 공의 이모부였다. 정공이 어느 날 반자(半刺)와 마주 앉아 있는데, 아전이 문서를 안고서 들어왔다. 반자가 일어나려고 하는데, 정공이 말하기를,
“앉게.”
하고, 이어서 공을 곁에 바짝 붙어 앉게 하고 말하기를,
“네 재능을 시험해 보려 한다. 너는 이 문서들을 처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공이 아뢰기를,
“어찌 감히 공사(公事)로 장난을 하겠습니까.”
하며, 누차 사양하였다. 그러나 누차 강권하자, 입으로 내용을 불렀다. 정공이 반자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반자가 감탄하며 아뢰기를,
“참으로 재상이 될 인재입니다.”
하였다.
신해년(1671)에 참판공의 상을 당하여 예를 지키다가 야위었고 여러 번 기절했다가 소생하였다. 인천의 농장에서 대부인을 봉양하였으며, 상복을 벗은 뒤에는 자력으로 농사를 지으며 봉양하였다. 이때 인천에는 청금록(靑衿錄)으로 인하여 싸움이 심해져 사람들이 각각 원수가 되어 더불어 말하기 어렵게 된 지가 오래되었다. 어느 날 시골 노인 10여 인이 서로 부축하며 장차 공을 방문하려고 하면서 말하기를 “공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라고 하였으나, 공은 또한 정중히 거절하였다. 다음 날 공을 추천하여 장의(掌議)로 삼자, 공은 세 번을 사양한 뒤에 경중을 따라 그 사람들을 처벌하니, 영구히 문안(文案)에서 삭제된 사람이 아홉 집에 이르렀는데, 아홉 집은 원망하거나 매도하는 말이 없었다.
숙종(肅宗) 정사년(1677, 숙종3)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경신년(1680)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에 선발되어 들어갔다.
임술년(1682)에 율봉 찰방(栗峯察訪)에 보임되었다. 호서(湖西) 지역의 과거 고시관으로 가서 12인을 선발했는데 그중에 문과에 급제한 자가 8인이나 되어, 공이 인재를 선발한 것을 연석에서 아뢴 대신(大臣)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갑자년(1684)에 부정자(副正字)에 올랐다. 이때 윗자리에 있는 두 사람에게 벼슬하기 어려운 혐의가 있어 대신이 진달하고 아랫자리에 있는 사람을 등급을 뛰어넘어 승진시켰는데, 공이 불가함을 고집하며 천장(遷狀)을 지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이 또 천장법(遷狀法)을 혁파할 것을 아뢰었으나 공은 명령을 봉행하지 않았고, 공을 의금부로 잡아다 신문하여 고신(告身)을 빼앗는 데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공은 안색을 변하지 않았다. 상이 한림으로 하여금 편지로 자문하게 하고 공의 뜻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분부하기를 “이형상 같은 자는 나도 그의 뜻을 굽히게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대신이 상에게 아뢰어 끝내 모두 공의 말대로 하였다.
을축년(1685)에 정자(正字)에 올랐다. 저작(著作)으로서 관례대로 봉상시 직장을 겸임하였다. 봉상시에는 신실(神室)이 있는데, 봉안한 위판(位版)은 34위이다. 이전에 이 직임을 맡은 자는 절사(節祀) 및 기우제를 지낼 때마다 관아의 노복에게 일을 맡겨 위판의 순서가 많이 뒤섞이고 글자의 획이 얼룩져 공이 개수(改修)할 것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이안제(移安祭)와 환안제(還安祭)를 설행할 때 도제조가 잘못된 사례를 인용하여 5위를 한 탁자에 함께 모실 것을 계하받았는데, 공이 천지와 사람은 기운의 종류가 다르므로 한 탁자에 함께 모시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여기고, 널리 예설(禮說)을 증거로 삼아 따져 각각 설행하게 하였다. 그런 뒤에 술을 빚는 방식을 바로잡고 포(脯)를 만드는 방식을 고쳤는데, 제사에 쓰이는 물품을 정결하게 하고 공물 바친 백성을 후대하는 데 힘썼다. 대신이 연석에서 진달하여 시행하였다.
박사로 옮겼다가 곧 전적에 올랐다. 감찰을 지내다가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나 상피(相避) 때문에 호조 좌랑으로 옮겼다. 이때 동지사(冬至使)가 출발해야 하는데 세폐포(歲幣布)의 길이가 해마다 길어져 병자년(1636, 인조14)의 보포(報布)에 비해 길이가 9자나 늘었으므로 공이 보포를 기준으로 하여 세폐포를 자르고 대신을 만나 아뢰기를,
“제 마음대로 세폐포를 자른 것은 훗날의 무궁한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보포를 들여보내어 증거로 삼게 하고, 만약 이것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면 수역(首譯)을 나라 팔아먹은 형률로 논하십시오.”
하였다. 조정 신하들이 모두 낯빛을 잃었는데, 상사(上使) 정재숭(鄭載嵩)만이 공의 말을 옳게 여겼고, 나중에 끝내 아무 일이 없었다. 그리고 병조 좌랑으로 옮겼다가 정랑에 올랐다.
병인년(1686)에 지평의 망단자(望單子)에 올라 통의(通擬)되었다. 이에 앞서 어떤 명부(命婦)의 아들이 이조 전랑이었는데, 아들에게 묻기를,
“이형상이 대선(臺選)에 통의되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하자, 명부가 이르기를,
“일찍이 듣건대 이형상은 당대의 위인이라고 하던데, 너는 어찌 관직을 잘못 아끼느냐.”
하여, 그 아들이 즉시 공을 의망하였다고 한다.
광주 경력(廣州經歷)에 제수되었다. 다음 해 겨울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이배(移拜)되었다. 광주를 다스릴 적에 강직함과 명석함이 한 도에 드러나서 소송하는 자들이 모두 광주로 달려왔고, 들어온 금시(金矢)를 산골짜기의 조 5000섬과 바꾸어 봄 기근을 진휼하였다. 성주를 다스릴 적에는 유학(儒學)을 더욱 중시하여 20조의 훈첩(訓帖)을 반포하고, 유생 150명을 선발하여 관아의 비용으로 양성하며 날마다 학업을 닦게 하고, 이사룡(李士龍)의 묘에 제사를 지내고 충렬사(忠烈祠)를 세워서 충의를 권면하니, 온 고을의 인사들이 모두 감격하였다.
성주에는 독용산성(禿用山城)이 있는데, 성벽이 무너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때 조정에서 성주 목사에게 산성을 보수하게 하였는데, 공은 곧 집집마다 장정을 한 명씩 뽑아 1만여 명을 모으고 군법(軍法)으로 공사를 감독하여 3일 만에 성 쌓기를 마쳤다. 이어서 독진(獨鎭)을 설치할 것을 청하였으며, 성을 쌓고 남은 재물로 성 안에 있는 돌을 파서 절구를 천 개 만드니, 사람들이 모두 공의 원려(遠慮)에 감복하였다. 절도사가 보고하자 상이 공에게 말을 하사하며 위로하였다.
기사년(1689, 숙종15) 봄에 상국 권대운(權大運)이 유배 도중에 영의정에 제수되어 조정으로 돌아올 때 공을 차원(差員)으로 삼았는데, 행차가 문희관(聞喜館)에 도달하자 사람들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그대의 말을 듣고 나의 처신을 결정하고 싶은데 괜찮겠는가?”
하여, 공이 말하기를,
“상공은 힘써 사직하고 공무를 보지 말기를 바랍니다. 성조(聖朝)에서 비상한 거조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나중에 박태보(朴泰輔)가 형벌을 받을 때 권 상공이 국문하는 자리에 나와서 말하기를,
“내가 무슨 낯으로 성주 백(星州伯)을 다시 보겠는가.”
하였다.
정재(定齋) 박공(朴公 박태보)은 공이 마음으로 사귄 벗이다. 공은 박공이 상소문을 올렸다가 형벌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박공이 기필코 목숨을 버리려 하는 것을 알고 발 빠른 심부름꾼을 사서 편지를 보냈다. 편지가 노량진에 도착한 때는 박공이 세상을 떠나기 전날 저녁이었다. 박공이 공의 자를 부르면서 말하기를,
“이형상이 아니면 지금 세상에 그 누가 나를 가엾게 여기겠는가.”
하였다.
이때 공과 서로 잘 알고 가깝게 지내는 세 명의 조신(朝臣)이 있었는데, 그들이 말을 보내와 곤궁한 처지를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다. 공은 후하게 구휼해 주려고 여러 달을 머물게 했는데, 조정의 정국이 변하여 세 명의 조사가 모두 요직에 앉았다는 소식을 듣자 세 집안의 노복을 불러 양식을 주어 보내며 말하기를,
“너희 주인이 청요직을 맡았다고 하니, 내게 도움을 받아 굶주림을 구제받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나는 풍족한 사람을 보태 주지는 않는다.”
하였다. 오래 지나지 않아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이때 금산(錦山) 사람이 상소문을 올려 덕유산(德裕山)에 있는 큰 도적이 팔도의 도적들과 세력을 연합한 상황을 진달하였다. 조정은 그것을 염려하여 문관, 음관, 무관 중에서 사람을 엄선하여 금산 군수로 임명하고 별도로 사목(事目)을 작성하여 세 도의 감사(監司)와 병사(兵使)를 압박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런 사람을 찾기 어렵지 않겠는가?”
하자, 대신이 아뢰기를,
“이미 얻었습니다.”
하고, 곧 공을 추천하여 임명하고 부임을 재촉하였다. 도적들은 공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 뿔뿔이 흩어져 다시는 도적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오지 않았다.
경오년(1690) 가을에 청주 목사(淸州牧使)에 이배되었다. 청주의 풍속은 붕당의 폐습이 고질이 되어서 갑(甲)과 을(乙)이 되어 관아에서 서로 비난하는 자들이 각각 4, 5백 명이나 되었는데, 공은 그들을 타이르고 꾸짖어 유감을 풀게 하고야 말았다. 이때 굶주린 백성들이 공에게 먹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못 지극하였는데, 8월에 동래 부사(東萊府使)에 승진하자, 청주의 선비들과 백성들이 밤낮으로 성을 에워싸고 공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가마채를 잡고 가마를 되돌렸다. 이와 같이 하기를 두 번 세 번 하자, 관찰사가 공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관원과 백성이 서로 버텨 부임할 기약이 없습니다. 장차 조정에 보고하면 죄가 관원에게 미칠 것입니다.”
하니, 성문을 지키던 선비와 백성 들이 먼저 편지를 뜯어보고 서로 눈물을 흘리면서 물러났다.
동래에 든 흉년은 청주보다 몇 배는 더 심하였다. 공은 부임하자 쌀 3만 섬, 벼와 보리 각 3000섬, 백금(白金) 5000냥, 무명 400동(同)을 마련하고, 동래 백성 3만 명과 떠도는 거지 4만 명을 뽑아서 일곱 곳에 나누어 놓고 진휼하였다. 동짓달부터 다음 해 6월까지 진휼하고 그쳤다. 진휼을 마친 뒤에는 유랑민들에게 양식을 주어 각각 향리로 돌려보냈다. 백성이 납부해야 할, 이를테면 양세(兩稅), 신포(身布), 환곡(還穀)을 관아에서 스스로 막으면서도 백성들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 백성들은 공이 부모를 생각할까 근심하여 단을 쌓고 날마다 하늘에 축원하기를,
“태부인이 병들지 않게 해 주소서.”
하였다. 7월에 사직을 일곱 번이나 청하자, 상이 공의 개인 사정을 불쌍히 여기고 교체를 윤허하였다. 고을 백성들은 모두 여기저기 모여 울면서 인사하고, 길가 사람들은 곳곳에 무리를 지어 수레를 붙잡고 울면서 말하기를,
“저희가 오늘 살아 있는 것은 모두 공 덕분입니다.”
하였다. 동래 백성들이 청동 비석을 세워 잊지 않으려는 마음을 담았다. 9년 뒤에 공이 경주 부윤(慶州府尹)에 제수되어 조령(鳥嶺)을 넘어 가자, 앞에서 공을 맞이하여 절을 하고 손을 모으고 선 백성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지난날 동래에 가서 진휼을 받은 자들이었다.
공은 처음부터 왜노(倭奴)의 이른바 구송사(九送使)가 한 도(道)의 폐해가 되는 것을 걱정하였다. 동래에 있을 때 훈도(訓導)로 하여금 재판차왜(裁判差倭) 평성상(平成尙)을 은밀히 격동시켜 구송사 중 제1선(第一船)과 일특송선(一特送船) 외에는 모두 폐지하거나 감축할 것을 요청하게 하여, 조선으로 응당 나와야 하는 차왜(差倭)와 격왜(格倭)로 하여금 관례대로 주는 물품을 앉아서 받게 하고, 그렇게 하여 남는 쌀 수백 섬은 대마도주(對馬島主)가 마음대로 쓰게 하며, 우리나라에서도 그들을 접대하는 연향(宴享) 비용을 아낄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편리한 계책을 세워 주었으나 공이 교체되어 돌아왔다.
평성상이란 자는 과연 저쪽에서 성취를 꾀하고 나서 우리 조정에 요청했는데, 조정의 의론이 일치하지 않고 도리어 방계(防啓)하였다. 평성상이 통역을 마주하고 탄식하기를,
“이 부사(李府使) 외에 너희 나라에는 사람이 없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묘당(廟堂)이 그 뒤에 후회하고 다시 도모하고자 하여 일부러 도해역관(渡海譯官)을 보내어 요청하였으나, 평성상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처음에 차임된 차왜를 다른 직임으로 옮긴 뒤에야 겨우 성취를 꾀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다시 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10월 양주 목사(楊州牧使)에 제수되었다. 상이 분부하기를,
“나는 그에게 노모(老母)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가 노모를 봉양하는 데 편리하게 하려고 말의(末擬)이지만 제수한다.”
하였다. 관찰사가 경기 전체의 송사를 모두 공에게 맡겨서, 금시(金矢)의 양이 수천 금이 넘을 정도로 많았다. 이 돈으로 춘궁기의 백성을 진휼하기를 광주에 있을 때처럼 하였다. 때마침 임금의 능행(陵幸)에서 사대(賜對)하자, 당(唐)나라 때의 봉선현(奉先縣)의 고사를 인용하여 아뢰었다. 상이 봄철 대동미(大同米)와 포적(逋糴) 1만여 섬과 아직 거두지 못한 신포 80동(同)을 영원히 감면할 것을 특별히 명하고, 또한 쌀 1말씩을 내려 주니, 백성들이 그 쌀로 은택에 감사드리는 잔치를 열었다.
이 당시 칙사 다섯 명이 온다는 말에 백성들이 놀라 소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공론이 공을 원수(元帥)에 의망하였는데 끝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중지되었다.
가을에 경주 부윤(慶州府尹)에 제수되기도 하고 나주 목사(羅州牧使)에 제수되기도 하였으나 공이 한창 피폐한 백성을 소생시키는 일을 맡고 있다는 이유로 양주 목사에 그대로 잉임되었다.
계유년(1693)에 어떤 사건으로 파직되어 돌아왔는데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갑술년(1694)에 조정의 정국이 다시 바뀌면서 공을 꺼리는 사람이 많아지자 공은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갔다. 안주 목사(安州牧使)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여 교체되었다. 《강도지(江都誌)》 2권을 지어 방어 대책을 상세하게 논술하여 조정에 올리려고 했으나 올리지는 않았다.
정축년(1697)에 어머니 윤씨 부인의 상을 당하여 묘의 곁에 여막을 차려 놓고 날마다 두 번 성묘하는 것을 비바람이 쳐도 중지하지 않았으며, 곡하고 울면서 애도하기를 3년 동안 하루같이 하였다.
기묘년(1699)에 중추부(中樞府)에 제수되고 또다시 나주 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에 경주 금주산(金住山)에 있는 도적 떼 수천 명이 대낮에도 서로 불러 모여서 원근 지역을 노략질하였다. 이에 공을 특별히 경주 부윤에 제수했는데, 공은 경주부에 도착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목패(木牌)를 만들어서 한쪽 면에는 ‘기찰(譏察)’ 두 글자를 새기고 다른 면에는 ‘사(使)’ 자와 관인(官印)을 새기며 새긴 글자는 붉은 물감으로 메우고, 장교(將校) 한 명, 아전 한 명, 병졸 한 명으로 하여금 그것을 장대에 걸고 하루 종일 경내(境內)와 인근의 시장을 돌아다니게 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한 달 남짓 했을 때 토포사(討捕使)가 와서 말하기를,
“조정에서는 도적을 깊이 우려하여 공을 별도로 파견하였는데 공께서는 목패만 들고 시장을 돌아다니게 하고 있으니, 목패를 든 자들이 과연 도적을 몇이나 잡아들였습니까?”
하여, 공이 천천히 말하기를,
“목패를 들고 다니게 한 것은 도적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적을 흩어지게 하려 한 것이네. 내가 여기에 오기 전에 각 읍리(邑里)에서 도적질을 당하여 본영에 보고한 것이 하루에 몇 건이며, 내가 온 뒤에는 또한 하루에 몇 건이나 되는가?”
하니, 토포사가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공께서 부임하기 전에는 하루에 최하 4, 5건이었는데 요즘에는 아직 한 건도 없습니다.”
하자, 공이 말하기를,
“이 도적 떼는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서 무리를 모아 입에 풀칠을 해 보려고 도모한 자들에 불과하네. 그리고 도적 떼가 약탈을 할 때는 반드시 시장에 모여서 의논하는데, 지금 목패를 든 자들이 시장을 돌아다녀서 도적들이 겁을 먹고 감히 모여서 의논하지 못하네. 이미 모여서 의논하지 못하였다면 돌아가 농사를 짓고 있을 것이네. 농사를 지으러 돌아가면 바로 선량한 백성인데, 어찌 꼭 잡아 죽이는 것만이 능사이겠는가.”
하였다. 이에 토포사가 깊이 감복하고 돌아갔으며, 도적들은 그대로 저절로 흩어졌다. 이에 향교나 서원(書院)에 학업을 권장하고 감독할 것을 거듭 타이르고,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고, 향약(鄕約)을 시행하며, 충(忠), 효(孝), 열(烈)을 실천한 사람들을 뽑아서 잔치를 베풀어서 권장하였다. 이때 어떤 9세 되는 아이가 손가락을 잘라서 아버지를 살리는 일이 일어나자, 관아에서 아이를 사서 양민이 되게 해 주었다.
고을에 음사(淫祀)가 있는데, 관청이 대동미를 가지고 신당(神堂) 두 채를 설립하여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백성들의 돈을 거두어서 제사를 지냈고, 바깥 마을에도 성황당이 36곳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폐단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느냐.”
하고, 제문을 지어서 직접 성황당에 제사를 지내고 각각 소속한 곳으로 돌아가라고 고한 뒤에 모두 불사르고, 성황당 터는 학궁(學宮)에 귀속하였다. 원전(轅田)의 터를 측량하고 그 경계를 범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경진년(1700) 상관(上官)에게 미움을 받자 관직을 버리고 영천(永川)에 집터를 정하고, 성고(城皐)에 정자를 짓고 ‘호연정(浩然亭)’이란 편액을 걸었는데, 이는 그곳에서 노년을 마칠 계획이었던 것이다.
신사년(1701) 겨울에 제주 목사에 제수되었다. 공은 제주에 도착하자 제주도의 비루한 풍속을 혁신할 생각으로 세 곳의 읍에 있는 성묘(聖廟)를 보수하고 이름 있는 선비를 선발하여 훈장(訓長)으로 정하여 학업을 독려하게 하였다. 고(高), 부(夫), 양(良)의 삼성사(三姓祠)를 세웠다. 동성(同姓) 간의 혼인, 이성(異姓)이라도 공친(功親) 간의 혼인, 혼례 때에 맞절을 하지 않는 것, 처(妻)를 두고 또 처를 취하는 것, 남녀가 함께 목욕하거나 여자가 나체로 있는 것 등을 조례(條例)로 만들어서 금지하고, 그 밖에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은 모두 장계를 보내어 보고했는데 그 조목이 14가지였으며 상이 모두 윤허하였다. 제주도 백성 700명이 건포(巾浦)에 모여서 임금의 은혜에 절을 올리고 공에게 와서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공이 곧 음사의 폐해를 자세히 말하니, 모두들 말하기를,
“공이 명령을 하셨는데, 어찌 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고, 나와서는 스스로 서로 전달하여 신당(神堂) 129채 및 사찰 2채를 일시에 불사르고 불상(佛像)을 바다에 던져 버렸으며, 1000여 명의 무당과 박수 들이 모두 그들의 탁자를 불사르고 농사를 지으러 돌아갔다.
이전에는 관에서 민가의 우황(牛黃)을 취했기에 담당자는 주머니가 자못 두둑하였다. 공이 부임했을 때 마침 심약(審藥)이 몇 개의 우황을 가지고 감영에 들어왔는데, 공이 말하기를,
“백성의 소에게 우황이 생겼으면 백성이 스스로 취해야 하거늘 관이 어찌하여 관여하는가.”
하고, 드디어 종전의 법을 고쳐 버렸다.
계미년(1703)에 어떤 사건으로 교체되어 돌아왔다. 돌아오는 행장(行裝)에는 아무 것도 없고, 단지 백록담 가에서 저절로 말라 죽은 박달나무로 만든 거문고 1장(張)과 시를 써 놓은 책 몇 권뿐이었다. 백성들이 네 곳에 비를 세우고 각기 덕을 기록하여 칭송하였다.
공이 제주도에서 돌아올 때 호남에 들렀는데, 당시 그곳에서 몰래 숨어 살아오던 노비들이 공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가 거의 1000명이고 살림도 풍족하였다. 공은 그들의 바람대로 속량(贖良)을 허락하였다. 어느 날 아들들을 불러 놓고 말하기를,
“현종(顯宗) 때의 수교(受敎)에 ‘무릇 노비에 관하여는 60년 이전의 일로 당사자가 살아 있지 않으면 소장을 받아 처리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라고 한 것이 있는데, 나는 평소에 이 법을 매우 굳게 지켜 왔다. 지금 호남의 노비들은 이미 당사자가 현재 살아 있지 않으며 또한 60년이 넘었다. 나는 문득 그 햇수를 헤아리다가 깨달았다. 비록 1년이라도 실수한다면 이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어찌 공사(公私) 간에 법을 달리할 수 있겠느냐. 나는 이 논리로써 저들을 해방시키려 하는데 너희 마음은 어떠하냐?”
하니, 아들들이 아뢰기를,
“삼가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약 1000명의 노비를 재물로 여기지 않는 것에 대해 너희가 난색을 표하지 않으니, 다행히도 내가 너희를 가르치는 데에 그리 엉성하지는 않았던 모양이구나.”
하고, 드디어 옛날 문서를 태워 버리고 그들을 놓아 주었다.
을유년(1705) 겨울에 영광 군수(靈光郡守)에 임명되었다. 이해는 크게 흉년이 들고 공의 부임 시기도 늦었다. 그런데도 공은 쌀 4000섬을 마련해 진휼하고 백성으로 하여금 기근이 든 해라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였다. 영광의 풍속은 사람이 죽으면 산에 임시로 빈소를 만들었는데, 어쩌다 몇 년이 지나도록 장사를 지내지 못한 사람들이 400명이 넘어서, 공이 필요한 용품을 헤아려 모두에게 주어 장사 지내게 하였다. 혼기를 놓치고 시집가지 못한 처녀가 386명에 이르렀는데, 공이 또한 혼수를 헤아려 주어 혼례를 치르게 하였다.
병술년(1706)에 휴가를 얻어서 호연정으로 돌아갔는데 이것이 영원히 낙향한 것이 되었다. 이때에 백성들이 공이 돌아오기를 목마른 듯이 바랐으며 관찰사도 공이 돌아오기를 매우 급하게 재촉하였다. 어사가 마음속으로 공을 미워하여 성상께 아뢰어 파직하였는데, 그가 “일을 처리하는 솜씨가 실제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라고 한 것은 대개 혼인시키고 장사 지내 준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었다. 뒤에 그 사람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이 공을 미워하여 파직하게 한 일이 잘못된 처사였음을 후회했다고 한다. 공은 이때부터 날마다 성현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는 세상에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자년(1708) 경원 부사(慶源府使)에 제수되고, 경인년(1710)에 판결사(判決事)에 제수되고, 신묘년(1711)에 장단 부사(長湍府使)에 제수되고, 경종(景宗) 임인년(1722, 경종2)에 또다시 판결사에 제수되고, 금상(今上) 을사년(1725, 영조1)에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정미년(1727)에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대개 호연정을 지은 뒤로 이때까지 30년 동안에는 서울에 한 발자국도 걸음을 들여놓지 않았다.
일찍이 1만 자에 달하는 〈팔외십요소(八畏十要疏)〉를 지었는데 원고를 완성하던 날 밤 꿈에 이런 것을 보았다. 장식한 활 한 자루는 화살통에 든 채 엷은 판자로 막혀 있고 합죽선 세 자루는 접힌 채 종이 갑에 들어 있는데, 부채 한 자루는 가장 길어서 거의 한 자에 이를 정도였으며, 이 모두는 가죽 주머니에 꽂혀 있었다. 스스로 꿈풀이 하기를,
“활은 쏘아야 마땅한데 반대로 화살통이 막혀 있고, 부채는 흔들어야 마땅한데 반대로 접힌 채 모두 주머니 속에 묶였으니, 아마도 둔서(遯筮)의 조짐이로다.”
하고, 그대로 책 이름을 《둔서록(遯筮錄)》이라 하였다.
무신년(1728)에 흉적(凶賊)이 반란을 일으키자 대신과 연신(筵臣) 들이 아뢰어 공을 가선대부(嘉善大夫)에 발탁하고 경상하도(慶尙下道)의 호소사(號召使)에 제수하였다. 공이 명을 받자마자 급히 관찰사의 감영에 달려가서 군사를 모집하고 역적을 토벌할 일을 의논하는데, 갑자기 체포 명령이 내려서 조옥(詔獄 의금부)에 잡혀갔다. 상이 직접 문초한 뒤에 무고(誣告)로 끌려온 정상을 알고 즉시 석방하려 했으나 연신들이 아뢰기를,
“뒷날을 기다려서 석방해도 늦지 않습니다.”
하여, 상이 억지로 그 말을 따랐다. 그러나 그 뒤에 동지의금부사 송인명(宋寅明)에게 명하여 성상의 분부를 타이르고 전하며 공을 석방하게 하였다. 이때 공의 나이는 76세였다.
공이 옥에 갇혀 있을 때 목에 쓴 칼은 무겁고 수갑은 꽉 조여서 목에 굳은살이 생기고 손은 찢어져 피가 흘렀다. 이때는 또 무더운 날씨라서 수졸이 불쌍하게 여겨 칼을 벗길 것을 청하자, 공이 말하기를,
“안 된다.”
하고, 다음 날 또다시 청하자, 공이 또 말하기를,
“안 된다.”
하였으며, 그다음 날 또 청하자, 공이 말하기를,
“나의 운명이며, 임금의 명령이다. 자신의 운명은 피할 수 없고 임금의 명령은 어길 수 없다.”
하였다. 그동안 국기일(國忌日)을 한 번 만나고 집안의 기일을 두 번 만났는데 그때마다 밥 먹을 때 고기를 빼냈다. 수졸이 말하기를,
“80세의 나이로 이곳에 들어왔는데 어찌하여 소밥을 드십니까.”
하니, 공이 말하기를,
“평소에 하던 것을 지금 차마 중단하지 못하겠네.”
하였다. 구료관(救療官)이 이야기를 듣고 감격하여 소찬(素饌)을 갖추는 데 더욱 정성을 썼다고 한다. 석방되어 돌아올 때 얼굴의 모습이 지난날과 같아서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공이 말하기를,
“몸은 비록 칼을 쓰고 수갑을 찼으나 마음은 태연하여 나의 정자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네. 고문(古文)을 생각하거나 전에 읽었던 경서의 뜻을 다시 궁리하면서 70일 동안 먹고 자는 것을 평소처럼 하였네. 이 때문에 병들지 않았네.”
하였다. 이때부터 공은 임금이 있는 곳에서 차마 멀리 떠나지 못하고 서울에 머물면서 가끔 인천에 다녀왔다.
기유년(1729)에 서반(西班)의 직함을 받았다. 공이 말하기를,
“죄 없이 크게 놀란 뒤에 보살펴 주는 은혜를 받았으니 의리상 사양할 수 없다.”
하고, 녹봉을 받아오게 하여 친척과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서 임금이 하사한 것을 영광되게 하였다.
계축년(1733)에 인천에서 양강(楊江)으로 옮겨 가 살기 위해 길을 떠나 과천(果川)에 도착했는데 병이 들어 한 달을 머물다가 11월 30일 여관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81세이다. 부고를 들은 임금은 조제(弔祭)를 지내고 부의를 후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갑인년(1734) 1월에 양산(楊山)의 정부인(貞夫人) 묘 오른쪽에 장사 지냈다가, 기묘년(1759) 10월에 광주(廣州) 동편 우산(牛山) 묘좌(卯坐)의 언덕으로 이장하며 부인과 합장하였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얼굴 생김새도 빼어나서, 멀리서 바라보면 범하기 어려운 위엄이 있고 가까이 다가가 보면 상서롭고 온화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훌륭한 기량에다 총명한 식견을 갖추었고, 활기찬 흉금은 세상만사에 막힘이 없었다. 예컨대 이유재 현석(李游齋玄錫)이 공을 찬양하는 시에서 읊기를 “천 이랑 파도치는 드넓은 바다요, 열 장 푸른빛 드리운 낙락장송일세.[洋洋大海波千頃 落落長松翠十尋]”라고 하였다. 이근곡 관징(李芹谷觀徵)이 공의 풍도를 품평하기를,
“언제나 조정의 반열에 서서 눈을 들어 위에서 아래로 훑어볼 때도 반드시 공에게 눈길이 머물고, 아래에서 위로 훑어볼 때도 반드시 공에게 눈길이 머문다.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시험 삼아 살펴보니 역시 모두 공을 보고 있었다.”
하였다. 한 시대의 인물을 논평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병와공의 눈동자는 마치 잘 익은 청포도 같아서 한 점의 물욕도 없이 반짝인다.”
하였다. 공보다 후대에 태어나서 마음으로 공을 사모하는 사람이 이상의 시와 말을 음미해 본다면 아마도 공의 실상을 7분은 이해할 것이다.
부모에 대한 공의 효성으로 말하자면, 8세 때 마침 참외밭에 가게 되었는데 밭주인이 참외를 올리자 공이 밭주인에게 맛이 없는 것을 골라 달라고 한 다음에 그것을 먹었다. 밭주인이 묻기를,
“왜 그럽니까?”
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맛이 좋은 참외는 부모님께 드리려고 그런다네.”
하니, 밭주인이 감탄하여 맛이 좋은 참외를 더 따서 직접 집에까지 가져다주었다.
입신(立身)한 뒤에는 어머니를 집에서 모셨는데, 그것은 공의 녹봉이 어머니를 모실 만했기 때문이다. 늘 큰형님과 두 분의 자형 및 조카들까지 단란하게 모이게 하고, 녹봉은 적었지만 자주 조촐한 술자리를 마련하여 언제나 어머니 앞에 화목한 기운이 가득하게 하였다. 막 업무를 마치고 돌아온 때라도 곁에서 모시고 주선했는데 태도를 재빠르게 교묘히 변화하여 점잖은 모습을 차리지 않았다. 부모가 다 세상을 떠난 뒤에는 누가 돌아가신 부모의 옛날 일을 말하기라도 하면, 문득 눈물을 머금고 흐느끼곤 했기에 사람들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남쪽으로 낙향한 뒤에는 매번 부모의 제삿날을 당하면 선유(先儒)의 고사를 따라 영위(靈位)를 마련하고 제사 지냈으며, 재계(齋戒)를 극진히 하고 제사 때 울부짖고 그리워하는 모습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어떤 때는 제사를 마치고 나면 탄식하며 말하기를,
“오늘의 제사는 헛되이 지낸 듯하구나. 제사 지내는 이치는 지극히 미묘해서 칠일계(七日戒)와 삼일재(三日齋) 동안 반드시 기쁜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생각하기를 잡념 없이 순수하게 해야 바야흐로 영령을 강림하게 할 만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 놓아도 제사 지내지 않은 것과 같다.”
하였다.
임금을 섬긴 것으로 말하자면, 공은 늘 말하기를,
“인재를 취하고 버리는 것이 공정하지 못하고 죽이고 해치는 것이 서로 이어지는 것은 붕당이 그 빌미를 제공해서이다. 끝내는 반드시 국가를 망하게 하고야 마는 것이니, 우리 임금의 신하 된 사람으로서 어찌 차마 국가를 망하게 하는 말을 하겠는가.”
하고, 자손들에게도 사람들을 만나 말할 때에 감히 당론을 거론하지 못하게 엄금하였다. 간혹 나라를 다스리는 요령을 묻는 사람이 있으면 번번이 붕당을 없애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말하였다.
공이 처음 벼슬에 올랐을 적에, 당시 공과 잘 지내던 어떤 재상이 와서 공에게 말하기를,
“근래에 여러 재상도 그대의 재능이 쓸 만하다고는 여기지만 그대를 임금의 측근에 두면 임금의 마음이 그대에게 쏠릴 것이 걱정되어 단지 음직(蔭職)의 사례에 따라 지방 수령에만 쓰려고 하니, 그대는 끝내 높은 벼슬은 하지 못할 것이네.”
하였다. 대개 서인과 남인 두 붕당이 일진일퇴(一進一退)하여 서인이 세력을 잡으면 그들의 말이 이와 같았고, 남인이 세력을 잡으면 공이 늘 민(閔)과 유(柳)가 권력을 탐하는 것을 배척하였으므로, 민과 유도 공이 자신들에게 아부하지 않는 것을 괘씸하게 여겨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재목인 공으로 하여금 팔다리와 몸을 펴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만언소(萬言疏)와 《강도지(江都誌)》를 써서 올리려 한 것은 진실로 원대한 계획으로 국가의 근본을 견고히 하는 도리에 힘쓴 것인데 끝내 시행되지 못한 공언(空言)이 되어 버렸으니, 애석하다.
집안을 다스린 것으로 말하자면, 온 집안을 화목하게 만드는 데 주로 힘쓰면서도 남녀의 예법과 적서(嫡庶)의 명분을 엄정하게 나누었고, 늘 재물을 각자 소유하지 못하게 자녀들을 단단히 타일렀으며, 재산이 없는 앙역노(仰役奴)가 부모의 제삿날이나 명절을 만나면 제수 용품을 주어서 제사 지내게 해 주었다.
공의 관직 생활로 말하자면, 처음 광주(廣州)를 다스릴 적에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마음과 힘을 쏟았으며,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제수된 뒤에는 마음속에서 깨닫고 말하기를,
“포부는 지극히 크나 총명에는 한계가 있다. 한계가 있는 총명을 아주 작은 일들에 허비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때부터 단지 대체를 지킬 뿐이었으며, 늘 관문을 활짝 열어 놓고 동헌 가득 손님을 맞아들이고 각각의 손님들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었는데, 싫증을 내거나 번거로워하는 기색을 볼 수 없었다. 아전들을 단속할 때는 엄중함을 위주로 하였으나 엄중함 속에 온화함이 있었고, 백성을 부릴 때에는 온화함을 위주로 하였으나 온화함 속에 엄중함이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백성이 나의 자식이라면 아전들도 나의 백성인데 어찌 너무 편협하게 억누를 필요가 있겠는가. 단지 백성과 아전 모두를 편리하게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그리고 유정지공(惟正之供)에 관련된 것은 매우 극심한 흉년을 당한 해가 아니면 관용(官用) 물품으로 백성의 조세를 대신 납부하거나 감면해 주지 않았다. 공이 말하기를,
“곡식과 삼실 등을 생산하여 윗사람을 섬기는 것이 백성의 직분이다.”
하였다.
옥사(獄事)를 다스린 것으로 말하자면, 공은 늘 말하기를,
“죄인이라고 해서 어찌 반드시 사람마다 몹시 억울하겠으며, 형벌이라고 해서 어찌 반드시 매번 매를 가혹하게 쳐야 하겠는가.”
하였다. 가벼운 죄를 지은 사람은 즉시 죄를 다스렸으나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옥에 가두고 말하기를,
“막 화가 난 때에는 일의 처결이 중도를 얻기가 쉽지 않다.”
하였다.
공이 광주를 다스릴 적에, 아전으로서 재물을 잘 훔친 주흥(周興)이란 자가 있었는데, 고을 백성들이 모두 죽이기를 바랐고, 감영에서도 속히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공이 그의 죄상을 조사해 보니 죄가 사형에 해당하였다. 막 공초(供招)를 받아서 사형을 집행할 무렵에 그의 용모를 보니 잘생겼고, 또한 그의 서명을 보니 필력이 환부(萑苻) 무리의 솜씨가 아니었다. 이에 공은 “그를 교화하는 것이 어찌 안 될 것이 있으랴.”라고 하고, 이런 뜻을 감영에 보고한 뒤에 주흥을 불러 놓고 타이르기를,
“네 애비가 너를 끌고 강물로 뛰어들려 하다가 눈물을 흘리면서 차마 하지 못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고 들었는데, 네가 만약 부모가 키워 준 은혜를 생각한다면 은혜를 갚지는 못할망정 어찌 차마 늙은 아버지의 속을 이처럼 썩이고 애타게 하겠느냐.”
하니, 주흥이 아뢰기를,
“죽을죄를 진 저를 용서해 주신다면 반드시 마음을 고쳐먹겠습니다.”
하여, 곧 그를 옥졸에 충원하고 잠시도 떠나지 못하도록 명령하였다. 공이 천천히 그를 살펴보았는데, 얼굴이 벌겋고 눈동자가 튀어나왔으며 정신과 마음이 서로 결합되지 못하였다. 기운이 차츰 가라앉고 눈동자도 점점 안정되기를 기다려서 지인(知印)으로 승직하고, 얼마 뒤에 형리(刑吏)로 진급시켰는데, 마침내 청렴하고 근면한 아전이 되었다.
그리고 공이 동래 부사로 있을 때, 동래에는 이름이 족곤(足昆)이라는 도둑이 있었는데 체포에 실패하여 그 아버지를 잡아왔다. 공이 그 아버지의 생김새가 도둑질을 하는 아들과 같지 않은 것을 보고 말하기를,
“나쁜 아들 때문에 차마 그 아버지를 가혹하게 때리지 못하겠다.”
하고, 곧 풀어 주었다. 그 며칠 뒤에 어떤 동판(銅版)을 지고 온 사람이 아뢰기를,
“저는 관아에서 현상금을 걸고 찾고 있는 족곤입니다. 관아에서 저의 아버지를 처벌하지 않고 타이르고 용서해 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감동하여 사형을 받기 위해 스스로 왔습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등에 짊어진 것은 무슨 물건이냐?”
하니, 족곤이 아뢰기를,
“이것은 도둑질한 물건인데 지금 사형을 받기 위해 오는 길이므로 관아에 가져왔습니다.”
하였다. 이때 어사가 마침 동래부에 도착했다가 묻기를,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자, 공이 대답하기를,
“이 사람이 선(善)을 향해 나아왔으니 죄를 주고 싶지 않습니다.”
하고, 곧 그를 풀어 주니, 마침내 족곤은 양민이 되었다. 어사가 이 사실을 돌아가서 보고하였다.
공의 청렴결백함으로 말하자면, 공은 늘 말하기를,
“어찌하여 꼭 청렴하다는 명성을 얻으려고 하는가. 오직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이 없어야 한다.”
하였다. 이런 까닭에 큰 고을을 아홉 번 맡을 적에 기쁜 마음으로 베풀어 주었으며 재물을 쓸 때도 아까울 것이 없는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집에는 송곳 꽂을 땅도 없었다. 백형(伯兄)이 재산을 나누어 주려 할 때 공이 굳이 사양을 하자 백형이 말하기를,
“이것은 세업(世業)이다. 내가 어찌 독차지할 수 있겠느냐. 아무 곳의 전장(田莊)은 네가 소유하거라.”
하니, 공이 말하기를,
“형님의 말씀도 옳습니다.”
하면서, 억지로 받았다. 그러나 큰집 조카며느리가 처음 뵈러 왔을 때 곧 그 전장을 주었다. 재물에 대한 공의 청렴은 집안에서나 관직에서나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공의 문장으로 말하자면, 공은 평소의 저술이 많게는 수백 권에 이르렀지만 애써 다듬은 적이 없고 오직 이치가 순하여 말이 잘 통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으며, 그것을 본 사람들은 도(道)를 지닌 사람의 말로 여기며 탄복할 뿐이었다.
공의 예악(禮樂)에 대해 말하자면, 공은 일찍이 예는 논쟁이 일어나는 문이고, 또한 선조의 예절을 따르기 때문에 집안마다 각기 같지 않으며, 길사(吉事)와 흉사(凶事)를 치를 때 자기의 견해를 치우치게 고집하며 한쪽만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고, 곧 《가례(家禮)》의 조목을 죽 벌여서 기록하고 그 아래에 의심나는 절목을 모아서 분류하니, 가지 위에 또 가지가 나고 잎 위에 또 잎이 났는데, 위로는 《의례(儀禮)》로부터 아래로는 우리나라의 문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모아서 책을 만들어 《가례편고(家禮便考)》, 《가례혹문(家禮或問)》, 《가례부록(家禮附錄)》, 《가례도설(家禮圖說)》 등 30여 권을 이루었다. 이 책들을 취하여 상고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책을 펴면 분명하게 알 수 있게 하였으니, 정력을 쏟아 후인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 실로 이에 있었다.
공은 또한 말하기를,
“예와 악(樂)은 한쪽을 버려서는 안 된다. 예가 지나치면 사이가 멀어진다. 그러므로 송나라 때에 예교(禮敎)가 극도로 성하여 말엽에 이르러서는 삼당(三黨)으로 나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오로지 번거로운 예문을 일삼고 악학(樂學)을 익히지 않았으니, 근래의 당화는 역시 예가 지나쳐 생긴 오래된 폐단이다.”
하고, 이에 《시경》의 〈관저(關雎)〉, 〈종사우(螽斯羽)〉, 〈인지지(麟之趾)〉의 가사를 종류별로 시조의 평조(平調), 계면조(界面調), 우조(羽調)에 화음을 맞추어서 《악학편고(樂學便考)》 1권을 지었는데, 장차 후세의 자운(子雲)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공의 학문으로 말하자면, 공은 중년에 은거한 이후에는 성리학에 전념하며 새벽에 일어나 글을 읽었는데, 글자마다 연구하며 깨닫는 대로 기록하였다. 겨울에는 언 붓에 입김을 불어 넣지 않고 여름에는 땀을 뿌리지 않아 맑은 창과 깨끗한 책상은 마치 사람이 없는 것처럼 적막하였다. 밤을 새우는 것이 일상이 되었으며, 잠자리에서 깊이 생각했던 의리를 때로는 꿈속에서 깨닫기도 하였다. 전후로 끝까지 30여 년 동안 부지런하고 돈독하게 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다.
만년에는 순(順)과 시(是) 두 글자를 마음가짐과 몸가짐의 요체로 삼고 말하기를,
“이(理)는 본디 시(是)이니 시는 대본(大本)이고, 기(氣)는 또한 순(順)이니 순은 달도(達道)이다. 시를 체(體)로 삼고 순을 용(用)으로 삼아서 지(知)와 행(行)을 서로 합치하고 내(內)와 외(外)를 함께 갖추어, 우리 사람의 천만 가지 일을 순과 시를 따라서 해 나가야 한다.”
하고, 때로는 자신을 순옹(順翁)이라 불렀다. 일찍이 손자인 약송(若松)에게 분부하기를,
“훗날 병와순옹(甁窩順翁)이란 네 글자를 내 무덤의 명정(銘旌)에 쓰거라.”
하였다.
공이 사람을 가르친 것으로 말하자면, 공은 학생이 찾아와서 가르침을 받을 때는 말로 가르쳐 주며 대체로 스스로 분발하고 고심하게 하였다. 일찍이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강의하는 글을 지어 학생으로 하여금 참고하게 하였으며, 배운 각 장(章) 안에서 가장 긴요한 구절을 뽑아 제목으로 삼아서 날마다 글짓기 과제를 내주었다. 공은 늘 말하기를,
“후진들을 지도할 때는 오직 몸은 삼가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도록 하고 마음은 명쾌하고 평이하게 갖도록 해야 한다. 어찌 반드시 곡경(曲擎)과 섭제(攝齊)의 말단에 얽매여서 끝내 도(道)는 듣지 못하고 한갓 선비라는 이름을 빌리게 하겠는가.”
하였다. 고을 사람이 오면 비록 글을 배우러 온 경우가 아닐지라도 반드시 몸가짐이나 제사 지내는 절차에 대해 자상하게 일러 주어서 그 지방 사람들로 하여금 한 번 변하는 효과를 보게 하였다.
배위(配位) 정부인(貞夫人) 은진 송씨(恩津宋氏)는 통덕랑 송지규(宋之奎)의 딸이자, 사복시 판관 송석복(宋錫福)의 손녀이고, 세상 사람들이 쌍청당(雙淸堂)이라 부르는 송유(宋愉)의 9세손이다. 가난 속에서도 효성을 극진히 하여 봉양에 필요한 맛있는 음식이 떨어지는 일이 없었고, 간혹 밥이 적을 때를 당하여 자신이 함께 먹지 못할 것 같으면 반드시 빈 밥그릇을 앞에 놓고 짐짓 시어머니와 멀리 떨어져 앉아서 숟가락 소리를 내어 밥 뜨는 시늉을 해서 시어머니를 안심시켰다. 전후로 남편의 임소를 따라다닐 때도 옷은 여벌이 없었으며, 맑은 덕행과 검소한 행동에 대해 모든 사람이 부부의 아름다움이 서로 잘 맞는다고 하였다. 효종 경인년(1650)에 태어나 숙종 기해년(1719)에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0세이다.
4남 2녀를 두었는데, 장자는 여강(如綱)이고, 둘째 아들은 생원인 여항(如沆)이며, 셋째 아들은 생원인 여성(如晟)이고, 넷째 아들은 진사인 여적(如廸)이며, 장녀는 문과에 급제한 정랑 김징경(金徵慶)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오명운(吳命運)에게 시집갔고, 여극(如克)은 측실에서 난 아들이다.
여강의 계자(繼子)는 약송(若松)이다. 여항은 약송, 지송(志松), 후송(後松), 만송(晩松)과 권숙징(權淑徵)의 처, 안취삼(安就三)의 처를 낳았다. 여성은 제송(齊松), 우송(友松), 유송(惟松), 기송(期松)과 권복인(權復仁)의 처를 낳았다. 여적의 계자는 만송이고, 두 딸은 권세석(權世錫)과 김정봉(金廷鳳)의 처이다.
아, 제공(濟恭)은 공보다 후대에 태어나 직접 뵙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통가(通家)한 집안의 자손으로서 공의 훌륭한 행적과 아름다운 모범을 들어서 이미 다 상세히 알고 있었으므로 일찍부터 존경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지금 만송 씨가 엮은 가장(家狀)을 말미암아 나의 못난 솜씨를 헤아리지 않고 미더워서 고증이 될 만한 것을 골라 이상과 같이 차례대로 엮었다. 제공의 붓은 여기에서 부끄럽지 않고 또한 천리마의 꼬리에 붙는 행운을 절로 갖게 되었다. 그러나 가령 공께서 때를 만나 포부를 펼쳐 치군택민(致君澤民)의 뜻을 실행했더라면 죽백(竹帛)과 이정(彝鼎)에 공의 업적이 반드시 많이 기록되었을 것이니, 이 행장 따위는 없어도 또한 괜찮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행장은 공의 불행인가, 아니면 이 세상의 불행인가? 세상에 언론을 남길 만한 군자가 이것을 보면 또한 반드시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다.
[주-D001] 병와(甁窩) 이공(李公) : 이형상(李衡祥, 1653~1733)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중옥, 호는 병와ㆍ순옹(順翁)이다.[주-D002] 기삼백(朞三百) 주(註) : 《서경》 〈요전(堯典)〉의 “기는 366일이다.[朞三百有六旬六日]”라는 구절에 대한 채침(蔡沈)의 주를 말한다. 이것은 월력(月曆)을 만드는 기본이 되는 계산법을 설명한 것으로, 하늘 둘레가 365와 4분의 1도이므로 그에 맞추어 월력을 만들되 1년을 355.56일로 정하고, 그 나머지 수를 모아 3년마다 한 번 또는 5년에 두 번의 윤월(閏月)을 두는 것인데, 구체적인 계산법이 난해하다.[주-D003] 정공 륜(鄭公錀) : 정륜(1609~1686)으로,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극념(克恬)이다.[주-D004] 반자(半刺) : 주군(州郡) 장관(長官)의 속관(屬官)으로, 장사(長史), 별가(別駕), 통판(通判) 등의 관직을 일컫는 말이다.[주-D005] 청금록(靑衿錄) : 성균관, 향교, 서원 등에 있던 선비들의 명부이다. 중국 고대 선비들이 청백색의 깃을 단 옷을 입었다는 데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여기에 오르면 유림 사회에서 선비로 인정받고 특권을 누렸다.[주-D006] 천장(遷狀) : 인사 이동 임명장이다.[주-D007] 이안제(移安祭)와 환안제(還安祭) : 이안제는 위판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지내는 제사이고, 환안제는 다시 원래 자리로 봉안하고 지내는 제사이다.[주-D008] 정재숭(鄭載嵩) : 1632~1692.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자고(子高), 호는 송와(松窩)이다. 1685년 함경도 지역 백성들이 국경을 넘어가 청나라 사람을 창으로 찌른 일이 발생하자, 청나라에서 칙사를 파견하여 직접 관련자들을 조사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청나라에 진주사(陳奏使)를 보내어 사건 처리를 보고하고 사죄하였는데, 이때에 정재숭이 진주사의 상사가 되어 청나라에 갔다.[주-D009] 금시(金矢) : 옥송(獄訟)을 벌일 때 소송 쌍방이 관가(官家)에 맡기는 물건인데, 판결이 나면 이긴 자는 금(金)과 시(矢)를 돌려받고, 패한 자는 몰수당한다. 《주역》 〈서합괘(噬嗑卦) 구사(九四)〉의 《본의(本義)》에 “《주례(周禮)》에 ‘옥송을 할 경우 균금(鈞金)과 속시(束矢)를 납입한 뒤에 송사(訟事)를 다스린다.’ 하였다.”라는 말이 있다.[주-D010] 이사룡(李士龍) : 1638년 청나라에서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에 군사를 요구했는데, 성주에 살던 이사룡도 징발되었다. 그는 포수(砲手)로 참전하여 명나라 조대수(祖大壽)의 군대와 접전하게 되자 공포를 쏘아 응전하다가 청군에게 발각되어 고문을 당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나라의 은덕을 배반할 수 없음을 역설하다가 살해되었다.[주-D011] 독용산성(禿用山城) : 경북 성주군 가천면 금봉리에 있는 산성이다.[주-D012] 독진(獨鎭) : 각 도(道)의 중요한 고을과 해안 지대에 독립하여 편제한 군대의 진영(鎭營)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나 그 지방의 수령(守令)이 다스렸다. 세조(世祖) 때 혁파되었다가, 숙종 대 이후 지방군이 편성되지 않은 변방과 연해의 일부 지역에 다시 설치했다.[주-D013] 권대운(權大運) : 1612~1699.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시회(時會), 호는 석담(石潭)이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득세하게 되자, 파직당하고 영일(迎日)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풀려나와 영의정에 올라 유배 중인 서인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을 사사(賜死)하게 하는 등, 서인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절도(絶島)에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 고향에 돌아갔다. 죽은 뒤 왕의 특명으로 직첩이 환급되었다.[주-D014] 박태보(朴泰輔) : 1654~1689.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사원(士元), 호는 정재(定齋)이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는 소를 올리는 데 주동적인 구실을 하였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도중 옥독(獄毒)으로 노량진에서 죽었다. 저서로 《정재집》이 있다.[주-D015] 양세(兩稅) : 전세(田稅)와 대동세(大同稅)를 말한다.[주-D016] 구송사(九送使) : 팔송사(八送使)에 세견선(歲遣船)을 하나 더 더한 것이다. 팔송사는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연례적으로 여덟 차례 보내오는 세견선이다. 팔송사는 제1선이 일송사(一送使), 제2선이 이송사(二送使), 제3선이 삼송사(三送使), 제4선에서 제17선까지가 사송사(四送使), 일특송선(一特送船)에서 삼특송선(三特送船)까지가 오송사(五送使), 부특송선(副特送船)이 육송사(六送使), 만송원사(萬松院使)가 칠송사(七送使), 이정암사(以酊菴使)가 팔송사이다. 특송선은 해마다 정해진 예대로 보내는 세견선과는 달리 특별한 일로 보내오는 배를 말한다.[주-D017] 훈도(訓導) : 사역원(司譯院) 등에 딸린 정9품직이며, 여기서의 훈도는 동래부(東萊府)에 딸려 일본과의 무역, 접대, 의식 등의 일을 보던 직임이다.[주-D018] 재판차왜(裁判差倭) : 일본에서 5년마다 한 번씩 공무역(公貿易)을 할 목적으로 우리나라에 파견하던 사신이다. 1651년(효종2)부터 갑년(甲年)과 기년(己年)마다 파견하게 하였는데, 이를 연한 재판(年限裁判)이라고도 칭하였다. 《通文館志5 交隣 差倭》 《萬機要覽 財用編5 公貿公作米下納》[주-D019] 평성상(平成尙) : 대마도주 종의진(宗義眞)이 파견했던 사자이다.[주-D020] 차왜(差倭) : 차견왜(差遣倭), 차송왜(差送倭) 등과 같이 선발하여 보낸 왜인이란 의미이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일본의 막부장군(幕府將軍) 또는 그 명을 받은 대마도주가 특별한 임무의 수행을 위해 파견한 왜인’이라는 의미로 조선 후기 일본이 보낸 임시 외교사절을 지칭하는 용어이다.[주-D021] 방계(防啓) : 상주(上奏)된 안건에 대하여 담당 관원이 그 일의 부당함을 아뢰어 반대하는 것을 말한다.[주-D022] 도해역관(渡海譯官) :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하는 사신이다.[주-D023] 공은 처음부터 …… 하였다 : 《병와집(甁窩集)》 권5 〈답유예판(答柳禮判)〉에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주-D024] 말의(末擬) : 말망(末望)으로 주의(注擬)함을 이른다. 관리를 임명할 때 전형(銓衡)을 맡은 아문에서 합당하다고 여기는 세 사람의 후보자로 삼망(三望)을 갖추어 올리는데, 삼망의 끝자리에 추천된 사람을 말한다.[주-D025] 사대(賜對) : 임금이 신하를 불러서 특별히 접견하는 것이다.[주-D026] 봉선현(奉先縣)의 고사 : 당 경종(唐敬宗)이 제왕의 능이 8곳이나 있는 봉선현에 조세(租稅)의 절반을 감해 준 것을 말한다. 《全唐文 卷68 減奉先縣租役勅》[주-D027] 포적(逋糴) : 포흠(逋欠)된 관적(官糴)으로, 관에서 대여하였다가 제 시기에 거두어들이지 못한 곡식이다.[주-D028] 강도지(江都誌) : 이형상이 1694년부터 1696년까지 강화도에 머물면서 지은 강화도 지리지(地理誌)로, 강화도의 전략적 가치를 설명하고 방어 대책을 서술하였다.[주-D029] 금주산(金住山) : 《병와집》 부록 〈병와선생이공행장(甁窩先生李公行狀)〉에는 ‘운주산(雲住山)’으로 되어 있다.[주-D030] 원전(轅田)의 …… 금지하였다 : 《병와집》 권18 〈경주정전기지범할청립금첩(慶州井田基址犯割請立禁牒)〉에 상세히 나온다. 원전은 직전(直田)이라고 하는데, 곧 정전(井田)이다. 경주에 남아 있었다고 하는 고대의 토지 제도의 유허지이다. 이형상이 옛 토지 형태를 복구하려 했으나 관찰사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東史綱目 附錄 上卷下 題久庵韓氏箕田說後》[주-D031] 호연정(浩然亭) : 영천시 성내동 금호강 가에 있는 정자로, 이형상이 벼슬을 그만두고 영천 성고에 지었다. 이형상은 여기서 주희(朱熹)의 〈무이구곡(武夷九曲)〉에 차운하여 〈성고구곡(城皐九曲)〉을 지었다. 《甁窩集 卷1》[주-D032] 세 곳의 읍 : 제주도의 제주(濟州), 대정(大靜), 정의(旌義)를 말한다. 이 세 곳에는 향교가 있었다.[주-D033] 삼성사(三姓祠) : 제주도 제주시 이도동에 있는 사당으로, 고(高), 양(良), 부(夫) 세 신인(神人)을 모신 곳이다.[주-D034] 공친(功親) : 대공(大功), 소공(小功)의 상복을 입는 친척이다.[주-D035] 건포(巾浦) : 제주도 건입동 일대에 있는 포구를 말한다. 건입포(健入浦) 또는 건입포(巾入浦)라고도 불렸다.[주-D036] 당시 …… 허락하였다 : 노비를 속량한 일은 《병와집》 권13 〈약가노인발문(約家奴仁發文)〉에 상세히 나온다.[주-D037] 팔외십요소(八畏十要疏) : 나라를 운영하는 데 8가지 두려워할 일과 그것에 대처하는 10가지 요령을 진술한 상소문이다. 8가지 두려워할 일은 국내외의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말하고, 10가지 요령은 8가지 두려워할 일에 대한 대비책을 제시한 것으로, 국가의 근본을 함양할 것[養國本], 인재를 취할 것[取人材],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비축할 것[儲將材], 군사 제도를 바꿀 것[變軍制], 군량미를 비축할 것[備軍食], 탐욕의 구멍을 막을 것[塞利竇], 민심을 모을 것[收民心], 국경의 방비를 안정시킬 것[定關防], 조정을 바로잡을 것[正朝廷], 기회를 소중히 여길 것[惜機會]이다. 《甁窩全書 遯筮錄》[주-D038] 둔서(遯筮) : 《주역》의 둔괘(遯卦)를 뜻하는데, 둔괘는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것이 좋다는 것을 보이는 괘다.[주-D039] 둔서록(遯筮錄) : 〈팔외십요소〉가 들어 있는 서명(書名)이다. 《甁窩全書》[주-D040] 흉적(凶賊) : 이인좌(李麟佐, ?~1728)를 가리킨다.[주-D041] 호소사(號召使) : 전쟁 때 군대나 물품을 모으는 임시 관원을 말한다.[주-D042] 갑자기 …… 잡혀갔다 :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이형상은 경상하도 호소사에 임명되어 경상도 관찰사의 감영에 달려갔으나, 관찰사 황선(黃璿)의 무고로 적당(賊黨)과 내통한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고 옥에 갇혔다가, 그해 6월에 석방되었다.[주-D043] 송인명(宋寅明) : 1689~1746.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성빈(聖賓), 호는 장밀헌(藏密軒),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붕당을 막도록 건의하여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에 적극 협조하였으며 영조의 신임을 받았다.[주-D044] 구료관(救療官) : 옥에 갇힌 죄인의 병을 고치는 관리이다.[주-D045] 서반(西班) : 벼슬하는 사람이 사직하면 군직을 주거나 중추부(中樞府) 벼슬을 주는 것을 말한다. 대개 문관은 동반(東班), 무관은 서반인데, 문관도 서반을 할 수 있다. 또 벼슬하는 사람이 죄가 없는 한 벼슬을 아주 없애는 것이 아니고 녹이 끊어지지 않게 하니, 서반을 주는 것은 휴직봉(休職俸)을 주는 것과 같다.[주-D046] 양강(楊江) : 경기도 양평 근처의 남한강을 말한다.[주-D047] 이유재 현석(李游齋玄錫) : 이현석(1647~1703)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하서(夏瑞), 호는 유재이다.[주-D048] 이근곡 관징(李芹谷觀徵) : 이관징(1618~1695)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국빈(國賓), 호는 근옹(芹翁)ㆍ근곡이다.[주-D049] 칠일계(七日戒)와 삼일재(三日齋) : 제사 지내기 7일 전부터 계(戒)하고 3일 동안 재(齋)하는 것을 말한다. 《論語集註 八佾》[주-D050] 앙역노(仰役奴) : 가솔 노비에 속하는 부류로, 상전의 집 문 밖에 초막을 짓고 따로 생활하는 종을 이른다. 《承政院日記 顯宗 7年 7月 25日》[주-D051] 유정지공(惟正之供) : 경상적(經常的) 세공(稅貢)으로, 국가의 기본 조세인 조(租), 용(庸), 조(調)를 모두 아우른 것이다. 《서경》 〈무일(無逸)〉에 “문왕이 감히 유람과 사냥에 빠지지 아니하여 각국에서 납부하는 유정지공으로 나라를 운영하였다.[文王不敢盤於遊田, 以庶邦惟正之供.]”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조(租)는 전세(田稅)이고, 용(庸)은 군역(軍役)이고, 조(調)는 공납(貢納)이다.[주-D052] 곡식과 …… 직분이다 : 한유(韓愈)의 〈원도(原道)〉에 “백성은 곡식과 삼실을 생산하고 그릇을 만들고 재화를 유통하여 윗사람을 섬기는 자이다.[民者, 出粟米麻絲, 作器皿, 通貨財, 以事其上者也.]”라고 한 데에서 인용한 말이다. 《唐宋八大家文鈔 卷9》[주-D053] 주흥(周興) : 《병와집》 부록 〈병와선생이공행장(甁窩先生李公行狀)〉에는 ‘한주흥(韓周興)’으로 되어 있다.[주-D054] 환부(萑苻) : 출몰하는 도적 떼를 말한다. 춘추 시대 정(鄭)나라의 도적들이 환부라는 늪지대에서 많이 나온 데에서 비롯된 말이다. 《春秋左氏傳 昭公20年》[주-D055] 지인(知印) : 지방 관아에서 잔심부름하는 사람으로 통인(通引)과 같다.[주-D056] 백형(伯兄) : 이형징(李衡徵, 1651~1715)으로, 본관은 전주이다. 이형상의 형이다.[주-D057] 세업(世業) : 대대로 물려 오는 가업(家業) 또는 토지 같은 한 집안의 경제적 기반을 말한다.[주-D058] 삼당(三黨) : 송(宋)나라 철종(哲宗) 때의 세 당파이다. 낙양(洛陽) 사람 정이(程頤)를 영수로 하는 낙당(洛黨), 촉인(蜀人) 소식(蘇軾)을 영수로 하는 촉당(蜀黨), 유지(劉摯)를 영수로 하는 북쪽의 세력인 삭당(朔黨)을 말한다. 철종의 연호를 따서 원우 삼당(元祐三黨)이라고도 한다.[주-D059] 후세의 …… 것이다 : 후세에 알아주는 사람을 기다린다는 말이다. 자운은 한(漢)나라 양웅(揚雄)의 자(字)이다. 그가 《태현경(太玄經)》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비웃자 말하기를 “세상에서 나를 알아주지 않음이 해로울 것이 없다. 후세에 다시 양자운이 있어 반드시 좋아할 것이다.[世不我知無害也. 後世復有揚子雲必好之.]”라고 하였다.[주-D060] 언 …… 않고 : 붓으로 글도 쓰지 않고 조용히 앉아 독서와 사색에 몰입했다는 말이다. 언 붓에 입김을 불어 넣는다는 것은 겨울에 저술 활동을 하는 것을 뜻한다.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 권4 〈미인가필(美人呵筆)〉에 “10월 이백(李白)이 조서(詔書)를 작성하려고 하였는데 그때 날씨가 매우 추워 붓이 꽁꽁 얼어붙었다. 그러자 황제가 궁녀 10명에게 명하여 각각 붓에 입김을 불어 넣으라고 하였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61] 땀을 뿌리지 않아 : 찾아온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사기》 〈소진열전(蘇秦列傳)〉에 “제(齊)나라 서울 임치에 가면, 도로에 수렛대가 서로 부딪치고 사람들의 어깨가 서로 닿아 옷깃을 연결하면 휘장을 이루고 소매를 치켜들면 장막을 이루고, 땀방울을 서로 흩뿌리면 금방 비를 이룬다.[臨淄之途, 車轂擊, 人肩摩, 連衽成帷, 擧袂成幕, 揮汗成雨.]”라는 말이 나온다.[주-D062] 이(理)는 …… 한다 : 《중용장구》 제1장에 “희로애락이 미발한 것을 중이라 하고, 발해서 다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 하니, 중은 천하의 대본이요, 화는 천하의 달도이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라고 한 말을 바탕으로 하였다. 주희는 이 구절에 대해 주석하기를 “대본은 하늘이 명한 성이다. 천하의 이치는 모두 여기에서 나오니 도의 체이다. 달도는 성을 따름이다. 천하와 고금에 함께 행하는 것이니 도의 용이다.[大本者, 天命之性. 天下之理, 皆由此出, 道之體也. 達道者, 循性之謂. 天下古今之所共由, 道之用也.]”라고 하였다.[주-D063] 약송(若松) : 이약송(李若松)으로, 이형상의 맏손자이다. 이여항(李如沆)의 아들로 태어나 이여강(李如綱)의 양자가 되었다.[주-D064]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강의하는 글 : 《병와강의(甁窩講義)》를 말한다.[주-D065] 곡경(曲擎)과 섭제(攝齊) : 공손한 예의를 말한다. 곡경은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손을 높이 들어 무릎을 꿇고 몸을 굽혀서 절을 하는 것은 신하로서의 예의이다.[擎跪曲拳, 人臣之禮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윗사람을 공경하는 뜻을 표하는 예법이다. 섭제는 《논어》 〈향당(鄕黨)〉에 “옷자락을 잡고 당에 오를 적에 몸을 구부렸다.[攝齊升堂, 鞠躬如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공손한 몸가짐을 말한다.[주-D066] 한 …… 효과 : 과거의 습관을 말끔히 씻고 새로운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논어》 〈옹야(雍也)〉에서 공자가 “제나라가 한 번 변하면 노나라의 경지에 이르고, 노나라가 한 번 변하면 도의 경지에 이른다.[齊一變至於魯, 魯一變至於道.]”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67] 송지규(宋之奎) : 1629~1691.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문백(文伯)이다.[주-D068] 송석복(宋錫福) : 1610~1679. 자는 여수(汝受)이다.[주-D069] 송유(宋愉) : 1388~1446. 호는 쌍청당이다.[주-D070] 만송 씨 : 이만송(李晩松)으로, 이형상의 손자이다. 1774년(영조50) 《병와집》을 편집하고 간행하였다.[주-D071] 천리마의 …… 행운 : 이형상의 행장을 기록하는 것을 좋은 행운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사기(史記)》 〈백이열전(伯夷列傳)〉에 “안연(顔淵)이 비록 학문에 독실했으나 공자(孔子)라는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서 가는 바람에 더욱 이름이 드러났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주-D072] 이정(彝鼎) : 종묘 제기의 하나인 이와 정을 말한다. 이는 돼지 머리 모양의 솥 형태인 주기(酒器)이며, 정은 세 발과 두 귀가 달린 큰 솥이다. 여기에 공이 있는 사람의 행적을 새기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