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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성령은 영구에너지, 은사는 발산 방식>의 줄거리:
마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며 승천하심까지 따라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이 선민입니다. 이들의 육체와 생각 감정 의지는 이 세상에 남아서 삶을 계속해야 합니다. 이 때 이 지정의를 움직이는 에너지가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러한 인격적 활동의 영구 에너지이신 성령께서 활동하실 때 표현되는 다양한 방식이 바로 은사이지요. 지혜, 지식,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 등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은 영구 에너지, 은사는 발산 방식
(고린도전서 12:8~11)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성령은 영구 에너지, 은사는 연소 방식>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성령은 영구 에너지, 은사는 연소 방식”
성령은 물리적인 에너지가 아닌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이시는 에너지가 되십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영구한 에너지이십니다. 요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때문에 에너지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유럽으로 보내는 가스관을 잠금으로써 유럽이 에너지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인격적 활동의 에너지이시며 영구하십니다. 마치 핵잠수함이나 핵 항공모함들이 다른 에너지 충당 없이도 반영구적으로 운행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인격에 대해서 핵에너지와 같은 역할을 하십니다. 삶에서 성령의 에너지가 구체적으로 표현될 때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기름이 타며 자동차가 움직이듯이 에너지이신 성령께서 표현되고 나타나실 때의 방식이 바로 은사입니다.
은사가 중요한 이유는 선민의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야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염두에 두고 은사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사는 교회생활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민은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도 성령을 받아서 살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는 선민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움직이시는 에너지가 되어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교회에 국한 시켜서 성령의 은사를 언급하고 있지만, 삶에서도 성령의 에너지가 표현되고 나타나는 방식의 윤곽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성령의 에너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귀신의 이끌림을 받아 살면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간다고 착각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성령이 오실 수 있는 내적인 전제조건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귀신에 이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적 삶의 현장은 반드시 성령의 에너지를 통해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에너지가 표현되는 방식이 바로 은사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이 땅을 떠날 때 땅에는 몸이 남게 됩니다. 몸이란 육체와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기능의 복합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몸을 통하여 이 땅에서 이루시려는 계획이 있습니다. 그 계획의 내용을 사역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이 예수님의 공생애 때 몸을 대신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주어진 신분으로 예수님의 공생애 때 몸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성별로는 여자이고 가정에서는 엄마라면 여자이자 엄마라는 신분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때 몸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수님의 공생애 때 몸으로써 살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가 되어주십니다. 성령께서 에너지가 되어주셔야만 예수님의 공생애 때 몸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몸이 성령의 에너지를 통해 움직일 때 표현되는 방식들이 바로 은사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선물의 포장지를 뜯듯이 은사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들여다보기로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나머지 내용을 살펴볼 것인데 방언을 말함과 방언을 통역함에 대한 은사에 대해서는 14장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14장에서는 은사에 대한 결론을 이야기하면서 예언과 방언이 집중적으로 언급되는데 그때에 가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지혜의 말씀의 은사는 당장 벌어지고 있는 일과 문제와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계획과 뜻을 마치 통로가 연결된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인간 자체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닌 성령의 선물입니다. 선물인 이유는 생각 안으로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 8절에서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에 이어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TV를 통해 여행이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면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외국 곳곳에 숨겨져 있던 사실들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내용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행이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서 지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세계에 대한 지식도 존재하며 하나님과 관련된 수많은 영적인 사실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천국의 좋음은 사실이지만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TV를 통해 숨겨져 있던 외국의 절경이나 비경을 대할 때에 감탄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실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사실은 거짓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사실로 믿어지는 것들이야말로 거짓일 수 있습니다. 앞서서 좋아하는 대상은 추구하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을 추구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세상의 좋음을 추구함은 제대로 된 추구함이 아닌 귀신에 이끌려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영적인 사실을 앎으로써 이렇게 숨겨진 사실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늘나라의 좋음과 하나님의 좋음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됨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예수님이 보시고 천사들이 볼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 안에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복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분명한 사실임에도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숨겨져 있는 사실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숨겨져 있는 것이 휘장이 찢어지듯 드러나고 밝혀지고 깨달아지고 이해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지식의 말씀의 은사입니다.
이 영적인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고 냄새도 나지 않지만 실제로 존재합니다. 이 영적인 사실에 대한 지식은 공부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책을 읽어도 영적 사실에 대한 지식을 알 수 없습니다. 지식의 은사를 받아서 영적인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이 깨달은 것을 글로 적어서 발표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은사로써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말씀하시는 내용을 보면 “세상을 추구함은 귀신에 이끌리는 것이다”라고 하고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가 있다.”라고 하는데 이 모든 것들은 영적인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실로써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 또한 지식의 은사입니다. 이 은사가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이런 말을 들어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역사하고 계시지 않기 때문에 영적인 사실이 제시되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실은 성령의 에너지가 나타나야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의 은사와 지식의 은사의 차이에 대해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지혜의 은사는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될 일과 상황과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뜻과 계획이 생각에 알려지는 것입니다. 지식의 은사는 이미 존재하지만 가려져 있고 숨겨져 있던 영적인 사실들이 드러나 밝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두 은사 모두 엄청난 축복이고 신나는 선물입니다. 그중에서도 오늘 살펴본 지식의 은사를 통해서 전지전능하시고 조물주이신 아버지의 시각을 갖게 된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는 믿음의 은사가 언급됩니다. 사도 바울은 3절에서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십자가 사건을 저주할 사건이 아닌 축복의 사건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성령이 오셔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는 믿음은 구원을 얻는 믿음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서 언급되는 믿음의 은사란 구원의 믿음 위에 보태지는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믿음만 해도 엄청난 은혜인데 그 은혜 위에 주어지는 은혜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모든 은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축복 된 사건임을 믿고 받아들이고, 그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상태가 전제되었을 때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전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성령의 은사는 주어질 수 없습니다. 믿음의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은사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호흡이 맞아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뜻과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뜻과 계획 중에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상식이나 교양 혹은 논리나 고정관념과 관습을 뛰어넘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이 모두 인간의 상식과 논리를 뛰어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상식이나 논리로 이해될 수 있는 선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나타납니다. 추석 때 고향에 가기 위해서 버스를 타고 갈 것인가 기차를 타고 갈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 생각을 갖고 계시다면 버스를 타든 기차를 타든 상식적인 것입니다. 다만 이 땅에 대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 중에는 사람들의 상식이나 교양 혹은 논리나 고정관념과 관습을 초월하는 일 또한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기드온과 삼백 용사를 통해 모래알처럼 많은 미디안 군대를 무찔렀습니다. 이러한 계획은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또 모세는 지팡이 하나 들고 초강대국이었던 애굽의 바로에게 갑니다. 그리고 당시 애굽의 하층 경제구조를 떠맡고 있었던 250만 히브리 노예를 방면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바로나 애굽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조차 도무지 상식적이거나 논리적이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또 모세가 넘실거리는 홍해 앞에서 지팡이를 들고 섰을 때 바다가 갈라질 것이라고 외치는 모습은 완전히 인간의 상식이나 논리를 뚫고 나가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식과 논리를 초월하고 고정관념과 관습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계획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바로 믿음의 은사입니다.
믿음의 은사에 대해서는 홍해가 갈라지는 것처럼 대단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회사를 잘 다니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계획은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하는 것이라 해보겠습니다. 심지어 그 사업의 아이템은 모든 사람들이 외면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외면하기에 이 사업에 도전하는 것은 도무지 상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성령의 에너지로 살고 있는 믿음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면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회사를 그만둔다고 하면 회사에서도 난리가 나고 집에서도 가족들이 난리가 날 것입니다. 조금만 버티다 보면 승진할 텐데 이 시점에서 그만두고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이상한 아이템을 붙잡고 사업을 하겠다고 하니 말이 되느냐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은사의 특징은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그것이 초상식적이고 초논리적이고 초관습적인 일일지라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의 선물을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다만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은사는 한 사람에게 고정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살다 보면 이렇게 초상식적이고 초논리적인 하나님의 계획이 성령을 통하여 당연히 그렇게 해야 되는 일로 받아들여질 때가 있습니다. 성령의 에너지가 믿음의 은사로 표현되는 순간과 사건들이 얼마든지 우리의 생애에 주어질 수 있습니다.
9절 하반절을 보면 이어서 병 고침의 은사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지금 세대와 크게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2000년 전인 당시에는 나병은 하늘이 내린 형벌로 여겨졌습니다. 나병을 고치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는 증거로 여겨졌을 만큼 무섭고 어쩔 수 없는 불치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새 나병은 평범한 피부병으로 취급됩니다. 중풍 같은 병도 미리미리 혈압을 측정하고 고지혈증을 준비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질병이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지금은 혈압약도 있고 당뇨약도 있습니다. 옛날에는 맹장이 터지면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처럼 옛날이라면 기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의술의 발전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결과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도 여전히 병 고침의 은사는 유효합니다. 현대의 의술로 고치지 못하는 병도 있고 고칠 수 있는 병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낫게 해주시는 은사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만 병 고침의 은사도 크게 보면 믿음의 은사에 속합니다. 초상식적이고 초논리적이고 초관습적인 하나님의 계획 중에서 특정한 환자에 대한 치유 계획이 있으실 때 병 고침의 은사가 발휘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사람이 환자에게 손을 얹고 안수를 하든지 외치든지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온 상태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배고픈 사람이 밥 먹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올 때 “이 병에서 놓임을 받을지어다.”라는 말은 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이 병 고침의 은사입니다.
우리는 병 고침의 은사를 오해하기 쉽습니다. 100만 원을 주고 냉장고를 샀다면 그 냉장고는 이제 내 것입니다. 또 자동차를 샀다면 타고 싶을 때 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의 은사를 이렇게 도구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병 고침의 은사뿐만 아니라 모든 성령의 은사는 말씀드린 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나의 마음이 연결된 상태가 유지될 때에만 나타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결이 유지될 때에만 하나님과도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면 하나님과 연결이 되고, 그 연결의 통로를 따라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께서는 하늘에서 아버지가 갖고 계신 뜻을 가져다주십니다. 따라서 성령의 은사는 절대 도구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컴퓨터에 USB 드라이브를 연결하면 안에 사진이나 영상을 저장하거나 빼내서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이렇게 저장하거나 빼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성령의 은사는 흐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방송을 보실 수 있는 것도 서버로부터 스트리밍(streaming)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은사는 다운로드 받아 내 것으로 이용하는 USB가 아니라 항상 연결되어 흐름이 유지되어야 하는 스트리밍입니다.
병 고침의 은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한 번 받으면 내 것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환자를 대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고치시려는 계획이 있고 그 계획이 주어질 때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병 고침의 은사가 믿음의 은사에 속한다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믿음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초상식적이고 초논리적인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실 때에 성령께서는 그것이 내게 당연하게 이루어져야 될 것으로 심어주십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환자를 고치시겠다는 계획이 없으시다면 병 고침의 은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없기 때문에 은사가 나타나지 않을 뿐입니다. 앞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늘과 연결됨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이 연결됨이 전제되어야만 은사에 대한 이야기는 바르게 될 수 있습니다. 하늘과의 연결됨이 유지되는 것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로 오직 은사만을 따놓은 당상인 것처럼 구하는 태도로는 결코 은사를 받을 수 없습니다.
10절에서는 능력 행함의 은사가 언급됩니다. 이 또한 병 고침의 은사와 마찬가지로 믿음의 은사 속에 속합니다. 단지 성령님을 통해 나타나는 능력이 병 고침 이외의 일들로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3장에는 사도 바울이 박수 엘루마를 향하여 외칠 때에 맹인이 되었습니다. 또 사도행전 5장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재산을 몰래 숨겨두고 나머지를 전부인 것처럼 헌금했을 때에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꿰뚫어보고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라고 책망하자 죽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도행전 16장에는 빌립보에서 사도 바울이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고정된 능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점치는 여종 안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초상식적이고 초논리적이고 초관습적인 계획을 가지고 계실 때에만 이루어집니다. 사도 바울에게 귀신을 쫓아낼 능력이 자신의 재량권 안에 있었다면 진작 귀신을 쫓아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한참을 귀신들로부터 괴로움을 당한 뒤에야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이 은사가 재량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예언의 은사가 언급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예언의 은사를 굉장히 중시하여 14장에서도 자세히 언급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언의 은사는 장래 일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는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늘과 땅 사이의 관계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이 관계의 내용은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의 마음이 직선으로 하늘과 연결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직선이라 함은 마음이 어디에도 치우침 없이 곧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늘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직선으로 아버지께 갈 때 마음은 하늘에서 은혜를 누리고 땅에 남아있는 몸은 성령의 에너지로 살며 은사를 통해 살게 됩니다.
이로부터 예언의 은사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땅에서 하늘로 직선으로 연결돼있는 사람에게 예언의 은사가 주어지면, 직선을 기준으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직선으로 돌아오라 권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예언의 은사입니다. 이 직선을 기준으로 간격과 거리가 벌어진 채로 삶을 지속했다가는 앞으로 큰일 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예언입니다. 이 과정에서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에 예언하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언의 은사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미래가 아닌 지금입니다. 지금 마음이 하나님과 이어지는 기준에서 볼 때 얼마나 간격과 거리가 벌어져 있는가를 측정해서 그것을 좁히라고 말해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언의 은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예언의 은사를 교회 내에서 이루어야 될 일로써 특별히 강조합니다. 지혜의 은사나 지식의 은사나 믿음의 은사는 일상생활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고 나타나야만 합니다. 지혜의 은사가 없이 살면 내 뜻과 내 계획대로 산다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계획에 부합할 수 없습니다. 지식의 은사가 없이 살면 영적인 사실을 알 수 없기에 하는 모든 일이 오류가 됩니다. 하나님이 좋으시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주권자라는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이 이 세상에서 최고의 복이라는 사실을 지식도 없이 생각하고 감정을 갖고 의지를 발동시킨다면 그것은 오류일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은사도 삶에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때때로 초상식적이고 초논리적인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여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언함의 은사는 선민에게 특별히 강하게 적용되는 은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미워하셔서 저주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들을 향한 사랑에서 밝히신 예언이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하나님과 연결되는 직선을 기준으로 볼 때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에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게 되면 화가 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언의 의미는 하나님과 이어지는 직선을 기준으로 치우침을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민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의 직선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봅니다.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의 특징은 자기 자신이 이 땅에서부터 하늘로 이어지는 직선상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직선상에 머물 수 없다면 직선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측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과 온라인 교회 모임을 통하여 나누는 모든 이야기가 하나님께로 이어지는 직선에서 멀어지는 것을 경계해야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 직선의 출발점인 십자가로 와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서 마음은 어떤 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과 온라인 교회 모임의 모든 내용 또한 예언의 은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서 무엇보다 예언의 은사가 나타나야 함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다 알고 있어도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직선을 벗어나 좌우로 치우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좌로 치우친다는 것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마음이 싫어하면서 직선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우로 치우친다는 것은 세상에 있는 것을 마음이 좋아하면서 직선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이 반복하여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마음의 문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1장 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과의 싸움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대할 적들이 무서워서 좌로 치우치지도 말고 좋아하여 우로 치우치지도 말라는 말씀입니다.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하심은 율법 속에 하나님의 정신이 계신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직선으로 연결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성령의 힘이 행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시간 관계상 오늘 하지 못한 영들 분별하는 은사와 방언 말함의 은사와 방언 통역의 은사 그리고 나머지 부분들에 대해서는 주일날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가장 복되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끊임없이 붙잡음으로써 성령의 에너지를 받아 은사들이 나타나는 신바람 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