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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줄을 믿노라! / 2023년 7월 30일 주일 예배
본문 / 사도행전 15:1-11
요즘 극한호우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사연을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오송 지하차도에서는 두 달 전에 결혼한 30대 새 신랑도 죽고, 여행을 가려던 20대 청년들도, 40대 가장 치과의사도, 6-70대 어머니들도 죽었습니다. 예천에서는 산사태로 죽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검도 찾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실종자를 수색하던 해병대 군인이 급류에 휩쓸려 죽은 것입니다.
생때같은 자식을 군대에 보냈지만 다시는 볼 수 없는 그 부모는 평생 얼마나 그 아들을 그리워하고 아파하며 살아야 할까요? 사랑하는 자식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게 얼마나 큰 고통이겠습니까?
죽음은 늘 인간의 삶 속에 있는 것이지만 예상치 못한 극한호우가 쏟아지듯 사망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누구도 당황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겁니다. 내가 그곳에 있었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정말 인생이 뭔가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때입니다. 우리는 안 죽겠습니까? 우리는 지금도 죽음을 향해 가고 있고 반드시 그 죽음을 만나야 하는 겁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때와 시기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불현 듯 찾아온 죽음 앞에 꼼짝 못하고 생명을 내놓아야 하는 것을 보며 인생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20대 청년이면 얼마나 살아갈 날들이 많습니까? 하고 싶은 일들은 얼마나 많을까요? 치과의사면 최고가 아닙니까? 머리도 좋았을 것이고 공부는 얼마나 잘했겠습니까? 자신이 원하는 꿈을 이룬 것이 아닙니까?
세상에는 살만큼 살다 죽는 사람도 많지만 인생은 얼마큼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꿈을 이루는 것도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나에게 생명을 주셔서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은 내 꿈을 이루라고 세상에 보내신 게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은 존귀하지만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하는 겁니다. 사람의 그 마음의 중심과 인생의 주인의 자리에 생명을 주신 창조주 하나님이 없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이 세상에서 몇 년을 살든 어떤 영광을 누리든 관계없이 마지막에는 영원한 고통으로 들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죽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마음이 아픈 이유가 있는 겁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나이가 많든 적든, 많이 배웠든 못 배웠든, 돈이 많든 적든, 이 세상에서 어떤 사회적인 위치와 영광을 얻었는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살아있을 때 나에게 생명을 주셔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었느냐는 겁니다.
내 죄를 대속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 죄를 회개하고 거듭났느냐는 겁니다. 구원을 받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십자가의 좁은 길로 가며 구원을 이루고 있었느냐는 겁니다.
사람은 순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 회개하고 구원을 받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들으십시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 인생은 저주입니다. 세상 온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지 못하면 이 세상에서 천년을 살며 부귀영화를 다 누린다고 해도 결국은 영원한 고통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겁니다.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고 있는 그 부자가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세상에서는 병든 거지로 살았지만 천국에서 영원히 안식을 누리는 나사로가 존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내 인생의 주인의 자리에 하나님이 없으면 그게 저주요 고통이다! 벌레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정신이 있다면 내가 내 인생을 그렇게 만들어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죄로 타락한 인생을 어떻게 구원하십니까?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방법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 11절에서 베드로가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타락한 죄인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와 그 믿음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타락한 죄인들이 자력으로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번에 집중호우에 제방이 무너지며 순식간에 엄청난 물이 차도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화물차 기사가 탈출하려고 차 지붕 위에 올라갔을 때 급류에 휩쓸려 가는 세 사람을 발견하고 구조하였고 그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화물차 기사가 구조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살지 못했을 겁니다. 지하차도 안으로 빨려 들어갔을 겁니다. 젊은 청년도 버티다가 이렇게 죽는 구나 포기하려고 할 때 화물차 기사에게 구조되었다고 합니다. 그 기사가 그 순간에 사람을 봐가면서 구조했겠습니까? 내가 구조하지 않으면 죽어야 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타락하여 영원한 사망으로 즉 영원한 지옥의 고통으로 들어가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화물차 운전기사가 손을 내밀어 물에 휩쓸려 죽어가는 사람을 끌어올린 것처럼 하나님도 영원한 사망과 고통으로 가는 이 불쌍한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하신 것입니다.
버스에 탔던 사람들 중에 아홉 명은 죽고 한 명만 구조되었습니다. 생명을 건진 그 한 사람은 얼마나 고마울까요? 평생 그 사람을 잊을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이 자기를 그 물속에서 끌어올리던 그 순간을 어떻게 잊을까요? 꼼짝없이 죽어야하는 그 죽음의 공포에서 구원을 받았는데 말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죽음이 아닙니까?
살아있을 때는 죽는 게 두려운 것인 줄 모르지만 내 힘으로는 나올 수 없는 꼼짝 못할 죽음에 빠졌을 때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기 전까지는 자신이 영원한 사망과 고통에 빠져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지옥과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육체의 죽음으로 눈을 뜨면 지금까지 사망과 영원한 고통 안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죽기 전에 즉 심판대 앞에 가기 전에 아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의 손을 붙잡는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절대로 그 손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 손을 놓으면 지옥의 영원한 불구덩이에 떨어지는데 놓겠습니까? 물에 빠져 죽어가던 사람이 구조자의 손을 놓을 것 같습니까? 죽을힘을 다하여 지푸라기도 잡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화물차 기사가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해 하나 밖에 없는 자기 아들을 희생했다면 어떨까요? 만약 다른 사람을 구조하기 위해 자신이 죽어야 했다면 어떨까요?
화물차 기사가 자신의 것을 희생한 것도 없이 물론 힘은 들었겠죠. 그저 나를 구조해준 것도 평생 잊을 수 없는데 자신의 가장 고귀한 것을 희생하고 나를 구조한 것이라면 그것은 정말 감당할 수가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목숨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과 목적과 가치관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전환점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자기 생명을 버리고 나를 구할 수 있었을까 말입니다.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죄인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런 것입니다. 어떻게 나를 구원하기 위해 그것도 하나님의 원수인 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이냐 말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는 일입니까? 이 은혜를 정말 받았을까요? 받고도 믿음이 그 모양입니까? 차라리 받지 못했다고 하는 게 낫지 않습니까?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내가 손을 내밀어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려고 했더니 학교 다닐 때에 괴롭힌 놈이면 어떻겠습니까? 그때 받은 그 고통이 떠오르면 어떨까요? 그런데 죄를 반드시 심판하셔야 하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된 나를 그 심판에서 구원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영원한 고통에 떨어져야 할 나를 대신하여 아들을 심판하여 그 공의를 이루시고는 죄인을 용서하기를 즐겨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동시에 성취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이라는 그 의를 모두 이루신 것입니다.
흉악한 죄는 내가 짓고 고통과 심판은 예수님이 받으셨습니다. 그것이 타락한 죄인들에게,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거저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정말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세상에 이런 사랑과 은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세상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그 사랑과 공의를 즉 하나님의 의를, 그 은혜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은 어떤 죄인이라도 그 죄를 십자가의 대속의 피로 깨끗하게 씻어주시고 다 용서해 주시고 이제는 의롭게 되었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주시는 것입니다. 정말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이게 진짜 미치고 환장하게 하는 것 아닙니까? 기뻐 뛰며 주를 보겠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습니까? 이것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이것보다 기쁜 소식이 또 있겠습니까?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 십자가의 복음을 깨닫고 믿게 된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믿으면 누구든지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이 십자가의 복음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초대교회 안에 충만한 진리는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유대인들은 여전히 율법에 대한 자신의 열심과 행함과 자기 의라는 율법주의를 버리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구원은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 즉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노력과 행위 즉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 문제로 인하여 교회 안에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이 시대의 교회 안에는 이런 문제들이 없을까요? 구원에 관하여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이냐? 사람의 열심과 행위 즉 사람의 의도 있어야 하는 것이냐? 말입니다.
우리는 이 논쟁을 율법과 복음의 대립과 싸움으로 인식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과 복음은 서로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고 협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논쟁에 관한 싸움은 율법과 복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와의 싸움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법과 인간의 법 즉 성령과 육신의 대립인 것입니다.
교만하게 타락한 인간의 의가 건방지고 오만하게 하나님의 의를 즉 하나님의 은혜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의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그 은혜를 전적으로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인간은 자신의 주인 됨과 그 자존심을 다 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기억이 있는데 어떤 복지단체에서 노인들에게 무료급식을 하는데 공짜는 아닙니다. 밥값이 100원입니다. 왜 그러느냐? 공짜로 주면 누굴 거지로 아나? 이 교만한 어르신들의 자존심이 상하지만 100원을 받으면 자기들이 돈을 내고 당당하게 사먹는 것 같다는 겁니다. 공짜로 얻어먹는 게 아니라 내 돈 내고 먹는 거야! 그래서 그 100원을 품위유지비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생각나는 말이 있쥬? 개뿔이쥬! 이런 얼어 죽을 자존심!
그런데 이것이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똑같다는 겁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즉 인본주의자들이 이방인들에게 뭐라고 하느냐? 야! 너희들 아무리 은혜 은혜 은혜가 좋다고 해도 양심은 있어야지. 구원을, 이 십자가의 은혜를 날로 먹으려고 하니? 야! 우리는 여태껏 만원을 내고 돈 내고 사먹었거든. 그런데 그냥 준다고 양심도 없이 공짜로 먹으려하니? 아무리 못해도 천원이라도 내야지! 이 도둑놈들아! 지금 이러는 겁니다.
누가 진짜 도둑놈일까요? 저는 공짜가 좋습니다. 저도 전에는 공짜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자존심이 있지요.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내가 돈이 어디 있어요? 이제 나는 돈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와서 그냥 먹으라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그 거지 같은 자존심을 챙기겠다고 폐지를 주워서 100원 벌어 당당하게 100원을 내고 내돈내산 해야 합니까? 그 자아숭배가 그렇게 중요한 자존심입니까?
하나님도 분명히 돈 없는 자는 와서 그냥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에서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나님이 공짜로 주겠다는데 왜 지가 뭐라고 돈을 내고 먹겠다고 꼴 값을 떠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이 100원이라도 내는 사람들을 양심을 있다고 좋아하실까요?
복음은 공짜가 아니라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복음은 일단 공짭니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와서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돈 내고 마시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을 값없이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어떤 행위를 먼저 드리고 구원을 받은 게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은 받은 것이기 때문에 구원은 공짜다! 할렐루야! 아멘! 돈 가져오라고 했으면 그게 기쁜 소식입니까?
영원히 천국에서 안식을 누리는 구원을 받으려면 만조를 가져와야 한다면 그게 무슨 복음이겠습니까? 기쁜 소식이 아니라 슬픈 소식인 겁니다. 만조를 벌어서 헌금할 수 있습니까? 지구에서 몇 사람이 만조를 헌금하겠습니까? 내가 도저히 벌지 못하고 드릴 수 없는 그 만조가 내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만 달란트인 겁니다. 죄의 빚인 겁니다. 임금이 한 푼이라도 받고 만 달란트 빚 진자를 탕감해주었습니까? 아무 것도 받지 않고 다만 불쌍해서 공짜로 탕감해주신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만 달란트를 자기 아들에게 받은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그 아들의 피로 말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와 복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해를 한 겁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빚을 갚고 구원을 사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율법으로 빚을 갚고 구원을 사라고 주신 것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너희들의 힘과 의로는 죽어도 안 된다는 것을 알라고 주신 것을 그것 몇 가지 육체로 행했다고 자기 의에 빠져 아주 교만해진 것입니다. 얼마나 율법으로 자기 의를 만들었으면 예수님을 죽이고 말겠습니까? 율법을 행함으로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아직도 그 율법주의와 인본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이방인들에게까지 그것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과 절기를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사람들에게 잘 먹히는 겁니다. 그래? 할례를 받고 절기를 지키면 구원을 받아? 그것을 안 하면 두려운 겁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 안타깝게도 율법의 저주 안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이 시대의 교회 안에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고 육으로 마친다고 한 것입니다.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는 그 은혜가 떨어지자 나중에는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사는 것입니다.
타락한 죄인은 어떠한 종교적인 열심과 선행으로 자기 의를 지불한 후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가능했다면 예수님은 괜히 세상에 오셔서 헛되게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죄인이 열심히 예배하고 헌금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경건하게 거룩하게 착하게 살고 겸손하고 온유하게 살아서 자기 의로 구원을 살 수 있었다면 정말 단 한 사람이라도 그것이 가능했다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실수와 실패인 것입니다.
아들아! 네가 세상에 내려가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되었는데 우리가 괜한 짓을 했다고 하시겠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실수하는 분입니까?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교만한 인간의 의로 대적함으로 말미암아 여전히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런데 사람들이 십자가의 은혜를 전적으로 믿지 않고 자기 행위와 의를 믿는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헛되이 죽은 것이 되겠습니까? 십자가의 은혜와 의는 헛되지 않지만 그것을 헛되게 하는 자들은 영원히 헛된 자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내 죄를 대속해주신 주님의 십자가 즉 하나님의 그 은혜와 의 앞에서 나는 죽어야 할 죄인이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속량해주셨다는 그 은혜를 믿고 회개하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나에게서 어떤 선한 행위와 종교적인 열심히 없어도 오직 내 죄를 대속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만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복음은 공짜인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구원을 받는 복음은 공짜인데 사람들이 세상에서 공짜는 좋아해도 구원에서 공짜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내 죄를 대속해주신 십자가의 은혜 즉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행위와 의 즉 율법주의를 혼합한 이상한 복음을, 다른 복음을 시대마다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다른 하나님을 만들어 냈듯이 말입니다.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 안에도 여전히 자신의 행위와 의를 의지하는 율법주의가 만연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자기 의도 섬기는 겁니다. 그 인본주의가 만들어낸 다른 믿음이 하나님과 재물을,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섬기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죄인의 구원은 인간에서 0,1%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구원은 100%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낼 때에 자신도 힘을 보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 힘으로 구조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사망의 물에 빠진 자들을 구원할 때 우리의 힘을 조금도 보탤 수도 없게 완전히 안아서 구원해 내시는 겁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왜 말씀을 전할 때는 행함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고 합니까? 왜 가짜라고 합니까? 그것은 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제가 이것을 언제까지 설명해야 됩니까? 저는 죽을 때까지 설명할 수 있는데 언제 이해하고 깨달으려고 합니까? 십자가의 은혜 없이 또는 은혜와 함께 자신의 행위를 의지하여 구원을 이루려는 것을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반대로 십자가의 은혜는 있다고 하는데 행함이 없으면 그것은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뭡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쌍해서 내 상에서 그냥 먹게 했습니다. 먹지 못해 굶어죽어 가고 있었는데 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건강을 회복하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누워있으면 어떻겠습니까? 건강해지니 돌아다니며 술 먹고 노름하고 싸우고 다니면 어떻겠습니까? 불쌍해서 내 상에서 은혜로 먹게 한 것이 보람이 있겠습니까? 내가 저 꼴을 보려고 은혜를 베풀었단 말인가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반대로 다 죽어가던 사람이 밥을 먹고 건강을 회복하더니 내 일을 도와주는 겁니다.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그 은혜를 갚겠다고 성실하게 산다면 이게 얼마나 고맙고 보람이 있겠느냐는 겁니다. 볼 때 마다 그래 내가 잘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누가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까? 누가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은 공짜이지만 정말 그 나를 대신하여 그 치욕과 고통과 심판을 받은 그 십자가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받았다면 어떻게 또 다시 나를 위해 살겠느냐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지 말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은혜로 구원하신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겁니다. 그 사람이 진짜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믿음인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으면 구원을 받은 자답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든든하게 세운다고 말씀하고 예수님은 순종이라는 열매로 그 믿음 즉 나무를 판단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그 믿음이 무엇인지 깨닫고 반드시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에 이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