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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께 썸타는 믿음>의 줄거리:
젊은이들에게 회자되는 '썸타다'는 말은 관심 가는 이성과 잘돼가다. 혹은, 관심 있는 사람과 연애하기 직전의 관계를 유지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성간에 그냥 남자 사람이나 여자 사람이 아니라 이성으로서의 느낌이 생겨나는 상태인 셈이지요. 우리 스스로에게 한 번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 썸탄 적이 있었던가? 삶의 상황의 호불호에 따라 도매금으로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자신을 향한 마음의 느낌인 썸이 있었던가요?
하나님께 썸타는 믿음
(히브리서 11:1~3)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께 썸타는 믿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께 썸타는 믿음’
젊은이들 사이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썸타다”라는 유행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찾아보니 정식 연애에 돌입하기 전에 서로를 이성으로 느끼기 시작하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에서도 썸타기는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정확히 어떻게 좋으시다는 것인지에 대하여 답하실 수 있는 분은 많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저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기준으로 삼아 도매금으로 좋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나쁘더라도 “나쁘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나쁜 상황이라도 좋은 상황으로 바꾸어 주실 것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찾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모든 표현들은 언제나 우리의 실제적인 삶의 상황과 하나님에 대한 느낌이 묶여서 도매금으로 넘어갑니다.
그런데 남녀가 썸타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와는 반대입니다. 상황이나 조건을 계산해보기 전에 오직 마음의 반응에 따라 상대를 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에서 이렇게 조건 없이 하나님을 느껴본 적이 있을까요?
물론 남녀가 썸타는 것과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남녀가 썸타기 위해서는 일단 서로를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썸탄다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에 대해 아무런 느낌도 없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서정주 시인의 “문둥이”라는 제목의 짧은 시 한 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표현은 아름답지만 상황적으로는 스릴러 영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살벌할 장면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에만 해도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이 시의 제목처럼 문둥이로 불렸습니다. 여기서는 시인의 마음을 잘 느껴보기 위해 비하의 의도 없이 문둥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해보고자 합니다.
저의 어린 시절 동네에도 이런 문둥병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분들이 눈만 내놓고 온 몸을 감싸고 다녔는데 동네에 문둥이가 나타났다는 소리가 들리면 집집마다 아기들을 단속했습니다. 아기의 생간을 먹으면 문둥병이 낫는다는 속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실제로 병에 걸린 당사자들은 그것을 믿지도 않았고 그렇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만이 떠돌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막이 이 시의 배경이 됩니다.
한편 이 시에 대해 한 문학인의 고백이 인상적입니다. “서정주를 읽었을 때 직감했다. 문둥이라는 시를 읽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평생토록 이것보다 더 나은 시를 쓸 수 없으리라고. (중략) 나는 가끔 묻는다. 네가 이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느냐고. 나의 시와 소설은 늘 헛되고 고되다. 나의 문학이 치졸한 언어를 더할 때마다, 나는 이 시를 다시 보고는 책을 덮는다. 그리고 내가 썼던 것들을 다시 지운다. 이 시가 나에게는 문둥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화자는 서정주 시인의 문학성을 통해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느낌과 동시에 자신의 재능이 그에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절망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볼 때에 이 시는 에덴에서 쫓겨나 살아가게 된 모든 인간의 실존을 무척 잘 드러내었다고 느껴집니다. 서정주 시인의 시는 마치 조직신학 대가의 전집 속에 들어있는 타락과 원죄와 죄를 다루고 있는 죄론(罪論) 부분을 압축해놓은 것만 같은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한 권의 죄론을 보는 것보다 이 짧은 시가 더 낫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 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핵심은 단순히 문둥이의 애환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문둥이라는 것입니다. 문둥이를 비유삼아 인간의 원초적 슬픔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초적이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해당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의 내용을 피해갈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는 본문 1절에 나온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의 이해가 뚜렷해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1~2연을 보면 ‘해와 하늘빛이 / 문둥이는 서러워 / 보리밭에 달 뜨면 / 애기 하나 먹고’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서 배척당하는 문둥이는 해가 떠 있는 대낮에 파란하늘 아래에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리밭에 달 뜨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애기를 잡아먹습니다. 그런데 3연의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라는 구절을 보시면 알겠지만 이것이 무의미한 행위임을 압니다.
이 시가 모든 인간을 대변하는 이유는 ‘해와 하늘빛과 보리밭에 달 뜨면’이라는 표현 속에 시간과 공간에 대한 깨달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강한 체감이 이 시를 떠받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중에는 해와 하늘빛으로 상징되는 밝음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는 곧 마음의 기쁨과 만족입니다. 행복과 평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달이 뜨는 밤은 마음의 슬픔과 불만이고 불행과 두려움을 뜻합니다.
문둥이가 파란하늘과 밝은 해 아래에서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원죄로 인해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은 기쁨과 만족을 떳떳하게 추구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이 유일하게 존재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달이 뜬 보리밭입니다. 달이 의미하는 것은 희망입니다. 여전히 기쁨대신 슬픔이 있고 만족대신 불만이 있으며 행복대신 불행이 있고 평안대신 불안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을 바라보며 빛에 대한 희망을 갖습니다. 인간은 본래 기쁨과 만족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문둥이는 이러한 상태에서 애기를 먹습니다. 애기는 인격적으로 완성되지 못한 인간입니다. 또 살아가야 될 시간이 많이 남은 존재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규정되지 않는 순수한 생명 그 자체입니다. 시간과 생명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문둥이와 같이 된 인간은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그것을 얻을 수가 없기에 스스로의 생명과 시간을 먹으며 마음을 채우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쁨과 만족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명이 소실되어갈 뿐입니다. 그래서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라고 한 것처럼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꽃처럼 붉은 울음은 피를 상징합니다. 어둠에 갇힌 삶에서 생명이 새어나가고 소모되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확하게 인간의 실존에 대해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기쁨과 만족을 얻기 위해서 스스로의 시간과 생명까지 먹지만 그럼에도 기쁨과 만족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이 그렇습니다. “내년에는 나아지겠지”라는 마음으로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희망을 가져봅니다. 그러나 결국 나의 시간과 생명을 잡아먹고 있을 뿐 기쁨과 만족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애기를 잡아먹어도 문둥병이 낫지 않는 것처럼 나의 시간과 생명이 아무리 소모되어도 기쁨과 만족은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꽃처럼 붉은 울음을 울 수밖에 없는 인간의 원초적 슬픔입니다.
인간이 기쁨과 만족을 상징하는 해와 하늘빛을 느끼든, 슬픔과 불만을 상징하는 달이 뜬 밤을 느끼든 결국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마음의 슬픔과 불만을 기쁨과 만족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반대로 말하면 인간의 마음이 육체의 의해 제한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육체의 삶에 마음이 제한받는 것이 곧 인간이 가진 원초적 슬픔의 원인입니다.
본문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왜 육체에 의해서만 얻으려 하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이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는 통로는 육체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통로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육체로는 얻을 수 없는 기쁨과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문둥이의 슬픔과 같은 인간의 원초적 슬픔이 극복될 수 있음을 오늘 본문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통로가 아니면 인간은 꽃처럼 붉은 울음을 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슬픔은 생애가 끝난 후에도 영원토록 지속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해야 할 일은 육체가 아닌 믿음을 통로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지금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바라고 있다는 것은 아직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을 갖게 되면 그 바라는 것에 대해 실제로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무엇인가를 손에 쥐면 그것을 느낄 수 있듯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 마음이 바라는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바라는 것을 얻을 때에 꽃처럼 붉은 울음도 비로소 그치게 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바라는 것들이란 단순히 육체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소유하고 싶어 하는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선 10장을 보면 믿음에 관한 이야기가 선행됩니다. 10장 34절을 보면 믿음이 흔들리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고 하였고, 또 36절을 보면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육체를 통해 느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바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공부하는 아들에게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차를 선물로 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이 약속을 믿고 아들은 더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아들은 차를 바래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약속을 해줌으로 인해서 바라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도 이루어집니다. 본문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약속과 뜻을 바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로 접하는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하나님께 바라라는 것이 아닙니다.
“5년 뒤에는 10억을 벌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바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서정주 시인의 시에서 나타난 것처럼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는 삶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삶은 결국 꽃처럼 붉은 울음을 울 수밖에 없습니다. 애기를 먹듯 10억을 얻는다고 해도 마음에 해와 하늘빛은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바라라고 한 것은 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이고 뜻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로버트 쉴러(Robert J. Shiller) 목사는 “신념의 마력(The Magic of Believing)”이라는 책의 전도사 노릇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마음에서 꿈꾸고 그것을 반복해서 새기라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갖고 유지하는 동안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약속과 뜻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입니다. 세상에서 바라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는 김빠지는 소리이고 원치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진실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주시겠다는 것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에 우리를 참여시키시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천국을 주시겠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계신 자리로 바뀌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유일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바라지 않고 문둥이의 삶을 고집한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육체로 느끼는 영역 안에서의 바람을 가지려합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는 삶이 계속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내게 기쁨과 만족이 없지만 달이라는 희망을 봅니다. 세속적 가치를 더 많이 얻음을 통해서 3년 뒤 5년 뒤에는 온전히 기쁘고 만족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스스로의 시간과 생명을 먹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손가락이 썩어서 떨어져나가는 것과 같은 좌절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은 허물어졌는데 여전히 이전과 다름없는 슬픔과 불만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뜻이 해와 하늘빛 같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약속하신 하나님 자신과 천국을 해와 하늘빛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를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추위에 떨고 있다가 따듯한 목욕물 속에 들어가면 온 몸이 풀어지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믿음을 통해서 마음으로 하나님과 그 나라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 말대로 하나님과 썸을 타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문제는 문둥이의 삶을 고집하며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바른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느낌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지 하나님과 천국에 대해 느끼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도 없으며 신앙생활에서 비롯되는 기쁨과 만족과 행복과 환희가 있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내년에는 나아지겠지”라고 기도하면서 육체가 느끼는 상황에 변화가 생기기만을 기대하는 동안에는 꽃처럼 붉은 울음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손가락이 떨어져나가는 문둥이가 어둔 밤에 달을 바라보듯이 앞날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애기를 잡아먹는 심정으로 시간과 생명을 소비해갈 뿐입니다. 결국 이 시간과 생명이 다 소비되고 나면 한 번도 하나님을 느껴보지 못한 채로 삶이 끝나고 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1절 하반부를 보면 믿음에 대해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신념의 마력에서 나오는 것처럼 세속적 욕심을 구체적으로 그려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100억의 재산이 지금은 없지만 있는 것처럼 마음에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으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천국은 지금 이 순간 존재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배우자나 자녀들보다도 더 가까운 곳에 확실하게 있습니다. 다만 육체를 통해 볼 수 없고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짐으로써 마음으로 바로 그 하나님과 천국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충하기 위해 4절부터는 믿음의 선진들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됩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육체가 아닌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느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믿었던 이유는 하나님 자신과 천국을 내 것으로 주셨다는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천국을 바라고 느끼기 위해서 믿음을 가졌던 선진들의 예를 통해서 우리에게도 보고 배울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에 더해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해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이 세상을 등지고 하늘로 올라가실 때에 33세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등진 세상은 모든 인류가 좋다고 침 흘리며 갖기를 바라는 세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칭기즈칸 같은 제국을 이루실 수도 있었고, 솔로몬이 누렸던 영화보다 더한 영화를 누리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주님의 소유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 전체를 통치하시는 왕의 자리에 오르실 수도 있었고,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여인으로 아내를 삼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바라는 10억 정도의 재산, 건강한 몸, 그리고 건강한 몸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등 뒤로 하신 채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등지신 예수님을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자니 예수님이 등지신 것을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탐내는 가치들에 대해서 한 방울의 미련도 없이 올라가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 자신과 천국이 말할 수 없이 좋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모아도 하나님과 천국에 비할 수 없다고 느끼셨던 예수님의 마음의 느낌을 믿음을 통해 나의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10억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킵니다. “예수님이 등지셨던 것을 보니 10억이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천국이 최소한 10억보다는 좋다는 것이 분명하다.”라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과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예수님이 느끼셨던 천국을 똑같이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나님과 천국을 느끼게 되면 세상에 대한 느낌도 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헌신짝 버리듯이 이 세상을 등지셨던 것처럼 우리도 같은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재벌들이 뉴스에 나올 때 부러워하던 마음은 사라집니다. 그들이 가진 것이 예수님이 등진 것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게 됩니다.
변화산 사건을 목격했던 베드로도 이와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경험하지 못한 제자들이 육체를 통해 천국을 체험할 수 있도록 변화산 사건을 보이셨습니다. 육체의 눈으로 하늘나라에서의 영화로운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을 본 베드로는 산 아래에서 꿈꾸던 모든 일을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자신과 가족들에 대한 일, 앞으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출세의 꿈, 나라의 독립과 같은 일들을 모두 잊고 그저 예수님과 함께 그곳에서 살기를 바라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러한 상태가 되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예언하신 직후에 변화산 사건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에서 최고로 이루고 싶었던 일조차 완전히 망각하게 될 만큼 천국이 좋은 곳임을 느껴보라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이 땅에서 천국을 느낄 수 있게 됨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렇게 육체를 통해서 천국을 보고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자 모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제자들을 다시 모으시고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때 비로소 제자들은 육체로 보았던 천국을 믿음을 통해 마음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또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천국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자 죽음조차 문제로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베드로는 감옥에서 참수형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천사가 발로 차서 깨울 정도로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치 강력하게 믿음으로 하나님과 천국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서정주 시인이 쓴 문둥이라는 시로부터 모든 인간이 육체를 마음의 통로로 삼고 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육체를 마음의 통로로 삼는 것이 바로 원죄이고 천형입니다. 이 원죄가 믿음을 가짜로 여기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믿음의 내용이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채우지 못하게 합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느꼈던 바로 그 느낌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비유를 생각해봅니다. 부자는 돈 쓰는 즐거움을 누리고 살았지만 지옥에 간 순간 그것은 물 한 방울의 가치도 없는 일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지금 믿음으로 느껴야 합니다. 천국이 좋다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 바라는 것들이란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는 것처럼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의미한 일의 끝에는 반드시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우는 결과만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느끼는 것이 본문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내년에는 돈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어둔 밤에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희망입니다. 그러나 그 희망을 바라보는 동안에 나의 시간과 생명을 애기를 잡아먹듯 소실시키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마음은 문둥이의 썩은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괴로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깨닫고 믿음의 내용으로 하나님과 천국을 붙잡아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등지신 것을 원할 이유가 없음을 믿음을 통해 느껴야 합니다. 그 동안은 육체를 통해 느꼈던 이 세상 것들을 이제는 믿음을 통해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과 천국을 믿음으로 추구하듯이, 이제 세상에 대해서는 동일한 믿음으로 등지는 것입니다. 부자는 지옥에 들어가고서야 세상의 가치가 무가치함을 느꼈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지금 그것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이전에는 육체를 통해 느낌을 받을 때에는 재벌을 부러워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음에서 믿음을 통해 재벌의 삶 또한 예수님이 등지셨고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망각해버렸던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재벌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과정은 우리가 하나님을 느끼는 과정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육체로 느끼는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과거에는 돈을 좋아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동안 그것이 예수님이 등지신 것이고, 베드로가 망각했던 것이고, 부자가 지옥에서 무가치함을 깨달았던 것임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이전 설교에서도 하나님을 체감해야만 한다는 말씀을 많이 드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체감은 육체가 아닌 마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추울 때에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온 몸이 풀어지는 것처럼 몸의 감각을 통해 느끼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마음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등지신 예수님의 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천국이 얼마나 좋으셨으면 그렇게 쉽게 세상을 등지셨을까?”라고 생각하고 믿을 때에 하나님을 느끼게 됩니다. 또 세상에 대해서도 달라진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하늘과 비교할 때에 세상은 일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등질만큼 가치가 없는 대상입니다. 반대로 세상과 비교할 때에 천국은 일순간의 주저함 없이 향할 정도로 가치가 충분합니다. 이렇게 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믿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변화산의 베드로처럼 육체로 천국을 체감해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얼마든지 하나님과 천국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천국과 천군천사의 모습을 다 보여주셨다면 믿음이라는 단어는 존재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천국이 실제로 눈에 보인다면 아무도 돈을 벌려고 노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천국의 문지기가 되었으면 되었지 누구도 세상에 남아서 빌게이츠처럼 부자 되기를 선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상을 등지고 승천하신 예수님이 그러하셨고 변화산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또한 그러했으며 신구약의 모든 믿음의 선진들의 마음 또한 그러했습니다. 당장 천국이 보이는데 연예인이 돼서 인기 끌고 싶다는 생각을 할 사람도 없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성공하겠다고 생각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천국을 믿음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을 보면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또 11장 6절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상이 바로 하나님 자신과 천국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믿음은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사는 천사들에게는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육체로 인해 믿음을 발동시킴으로써만 하나님께 상을 받을 수 있는 훌륭한 과정을 갖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보다 인간을 더 위에 두시고 품어주실 수 있는 조건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서정주 시인의 문둥이라는 시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비극은 철학자들에게서나 발견되는 고도의 성찰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겪고 있는 슬픔입니다. 보리밭에 달 뜨면 홀로 선 문둥이처럼 모든 인간은 외롭습니다. 끝없는 슬픔과 불만 그리고 불행과 불안 또 분노를 해결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이 외로움을 해결하고 싶어서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해보지만 연인도 배우자도 이 외로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는 못합니다. 연애하고 결혼생활을 해온 만큼의 시간과 생명을 애기를 잡아먹듯이 소모했을 뿐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이제는 육체로 느낌을 바라지 않고 마음에서 믿음으로 발동시켜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늘 변화산 사건과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사건을 언급합니다. 그것은 이 두 사건이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목이 “하나님께 썸타는 믿음”인 것처럼 스데반 집사님은 하나님과 썸을 타던 사람이었습니다. 변화산의 베드로가 몸으로 느꼈던 천국을 스데반 집사님은 믿음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돌에 맞아 죽어가는 순간에도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통해 믿음이 무엇이고 그 결과가 어떠한지 배울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천국을 바라보는 동안에는 죄 없이 맞아죽을 지경이 되었어도 원한이나 불평이 조금도 생기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천국을 보고 하나님과 썸을 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지면 천국이 내 것입니다. 천국을 가졌으니 돌로 때려죽이는 상대에게도 원망이 생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는 천국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그 느낌을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또한 믿음의 가장 큰 선진이십니다. 또 성경의 많은 선진들이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기생 라합 등 모두 하나님과 썸을 타고 있었습니다. 기생 라합은 하나님과 썸타는 동안 나라와 민족까지도 등졌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기도 하였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서정주 시인의 문둥이라는 시에서 본 것처럼 육체로 한정되었던 마음의 느낌의 통로를 믿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약속된 하나님과 천국을 느끼고,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선진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확인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확인되지 않는 믿음은 원죄로 인해 육체의 느낌에 밀려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또 믿음으로 느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 천국뿐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도 육체로 느낄 때와는 다르게 믿음으로 느끼며 세상을 등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등지신 것처럼, 베드로가 망각했던 것처럼, 스데반 집사님이 용서하셨던 것처럼, 부자가 지옥에서 세상을 무가치하게 여기게 되었던 것처럼, 천국을 눈앞에서 볼 때에 세상을 선택할 자가 없는 것처럼 세상은 천국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이렇게 믿음의 내용들을 생각하면서 천국에 대한 느낌을 강화시켜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남녀가 썸을 탈수록 서로에 대한 느낌이 강화되는 것처럼, 믿음의 선진들이 전해준 교훈을 떠올리며 하나님과 썸을 타시기를 바랍니다. 이 과정이 곧 믿음입니다. 문둥이로서의 삶은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육체를 통로로 마음이 느낌을 받는 동안에는 문둥이의 삶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믿음으로 마음이 느낌을 받는 통로로 붙잡고 하나님과 천국을 느끼고 또한 세상에 대한 느낌을 달리하며 살아가실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 이제까지 가졌던 세상에 대한 느낌이 죽게 해주셔서 주님과 똑같이 하늘과 세상에 대해 느끼며 살아가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