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길장편소설 '야망의 계절'
제 3 부 <야망의 계절>
계절의 흐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누가 떠민다고, 오라한다고 가거나 오지 않는 것을 보면 조화옹의 자연을 다루는 솜씨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어느 듯 겨울이 눈앞이다. 성수가 ‘서울상사’에 취직한지도 3 개월을 넘기고 있었다. 첫 달은 2층에 위치한 탈의실 겸 직원 휴게실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숙식하다가 다음 달 부터는 출퇴근했었다. 이때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인근 지정 식당을 오가는 것이 바깥출입의 전부였으니 감옥생활을 한 것이나 다름 아니었다. 고단한 육신보다 왁자했던 분위기가 남긴 정적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경은과 연락을 취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지만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신입이어도 어느 누가 멀쩡한 자택을 두고 사생활까지 반납하면서 한 달간이나 숙식하며 근무를 할까, 그것도 소규모 개인사업장에서.’
이러면서 성수는 자신이 정상적으로 채용된 직원이라면 거부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이런 과정을 겪은 성수에게 기회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장의 계획이었다.
사장은 상속자를 찾고 있었다. 상속자는 먼저 구직의 목마름이 있어야하고 나중은 무턱대고 남의 물건을 탐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요구는 누구에게나 적용되지 않았다. 첫 인상이 자신의 눈에 들어 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사람이래야 나 과장 후로 5 년 만에 성수가 처음이었다. 그동안 몇 사람이 더 있었으나 포기했었다.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일정 경지에 이르렀다는 자부심의 결과였다.
사장이 이런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5 년 전이었다. 누구보다 건강에 자신이 있었던 사장은 갑자기 쓰러졌다. 심근경색증이라는 병명이었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열정적 사업추진에서 얻은 심한 스트레스와 끽연의 습관이 원인이었다. 병간에 아내는 늘 곁에 붙어 지냈으므로 일을 대신할 사람이 없었다. 결국 나 과장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완치는 아니지만 일을 보기에 지장이 없을 정도에서 퇴원한 사장은 지난 3개월의 병상생활에서 무자식에 가까운 친척조차 없는 서러움을 톡톡히 겪어야만 했다. 후로 자기 관리에 신경 써 건강이 차츰 호전되었을 때, 남이든 먼 친척이든 상속자로 삼을 만한 사람이 있으면 양성하여 모든 것을 물려주고 아름다운 은퇴를 결심했다. 서울영업소를 연 것도 그때까지는 갈 데까지 가겠다면서 이룬 결과였다. 아무에게도 발설은 물론, 눈치조차 주지 않았으니 아무도 낌새를 채지 못했다.
처음 성수의 일이라고는 제품의 정돈이나 청소 그리고 철물점, 주방용품점, 잡화점 등의 거래처에 배달할 제품을 포장하여 차에 싣는 것이 고작이었다가 지금은 주문장을 받고 스스로 포장하고 계산서를 끊어줄 만큼 손놀림이 노련해졌다. 완벽하지는 않았으나 어떤 제품은 어디에 있고 그 가격은 얼마라는 것도 웬만큼 외기까지 했다. 그러다 보니 직접 구매하러 온 작은 상인의 일부는 전산보다 자필 흑지영수증으로도 충분하다면서 성수의 빠른 쪽을 요구했다. 제품을 들고 카운터로 이동하거나 기다리는 시간을 벌겠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윗장은 상인에게, 아랫장은 따로 모았다가 여유가 있을 때 나 과장에게 건네 전산처리하게 했다. 많지 않았고 나 과장의 승낙이 있어서 며칠 전부터 해왔던 일이다. 직원 중 가장 일에 노련하다는 ‘김창순‘도 이랬는데 언제부턴가 하지 않았다.
마음이 통하는 남자들의 세계란 언제나 술이 있게 마련인가, 성수는 얼마 전 ‘김창순‘과 거나하게 술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그는 나이가 같으니 말을 터고 지내자며 제의했고 성수는 못 이기는 채 동의했었다. 그리고 그 주 휴일에 인근 고수부지에서 만났을 때 그는 친구로서 걱정스러워 하는 말이라며 나 과장을 조심하라는 조언을 했었다.
성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직원들을 공평하게 잘 챙겼던 나 과장에게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까닭을 묻는 성수에게 그는 아직 확신할 수 없어 무어라 말할 단계가 아니라며 조심성을 보였고 성수가 흘렸던 일이었다.
그는 배달을 갔고 나 과장과 다른 직원들은 창고에서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 않는다. 성수는 창고로 향하는 동선에서 쇼윈도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밖은 아까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이 때문인지 모처럼 한가한 시간이다.
비는 한 잎 두 잎 은행나무 가로수 잎을 떨어뜨리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추위를 몰고 왔다. ‘이 비가 그치면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겠지.’ 성수의 가슴 한 구석에 쓸쓸한 기분이 스며들었다.
‘오늘은 좀 한가하군.’
반입속말로 웅얼거리던 성수는 문득 노변의 코스모스를 발견했다. 계절의 순환에 맞서 강렬한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때였다.
“박 기사, 이리 좀!”
어디선가 자신을 부르는 나 과장의 거친 음성이 들렸다. 그쪽으로 목을 꺾는 성수의 눈빛은 의아함에 젖어있다.
“네.”
은행나무를 바라보기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는 어느 순간에 자신의 책상에 앉아 있었다. 옆의 사장 자리는 비어 있었다. 다가가 보니 그는 작은 메모지에 무언가 기록한 흔적이 보였다. 메모지 주위에 몇 장의 영수증이 흩어져 있다.
“좀 앉게.”
하고 주위의 간이 의자를 가리켰다. 성수가 그것을 당겨 앉자 나 과장은 기다렸다는 듯 무슨 글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며 검지로 영수증을 콕콕 찧었다. 성수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자신이 작성한 영수증이었다. 바쁠 때 쓴 것이어서 다른 사람으로서는 내용 파악이 잘 되지 않을 만큼 보였다. 조금은 거친 나 과장의 어투가 이해할만했다.
“죄송합니다, 과장님. 주의하겠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앞으로 주의하라고.”
“예.”
그제 서야 나 과장의 눈빛이 잔잔해졌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성수는 잔잔한 나 과장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희구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당사자가 말하지 않으면 그 목마름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돌아가 일을 보라는 나 과장의 말이 성수의 귀에 도달해 일어나 몸을 돌리려는데
“아참, 박 기사.”
그는 해야 할 말을 잊어버렸다가 생각이라도 난 듯 다시 불렀다. 어쩌면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렸을 수도 있었다.
“예?! 과장님.”
도로 자리에 앉는 성수에게 단도직입으로 말한다.
“박 기사, 나 좀 도와주게.”
“아니, 과장님도 참. 과장님 말씀이라면 여태 시키는 대로 다 하지 않았습니까? 새삼스럽게 무슨 ...”
의아하던 성수는 말도 되지 않는다는 듯 웃음 끼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말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따랐던 것은 그가 상급자이기도 했지만 오갈 때 없었던 자신을 받아 준 사람이었으니 보은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랬기에 성수는 직원들에게 나 과장의 예스맨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그의 다음 말이 이어지려는데
“먼 비가 이리 오노!”
배달 갔던 창순이 매장 문을 열고는 입구 벽에 걸린 수건을 낚아채 머리를 털었다. 나 과장은 다음에 보자는 시늉을 보이고 일어나 입구 쪽으로 갔고 성수도 뒤따랐다.
“어, 수고 했어.”
“고생했다.”
창순의 등장으로 대화는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의지만 있다면 그를 반기고도 다시 말을 이을 수 있을 텐데,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듣거나 그런 분위기조차 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인지. 성수의 궁금증은 더욱 증폭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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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부는 소설의 구성상 7 편까지 전개됩니다.
클라이맥스를 예상하고 전개되는만큼 작가로서 가장 힘든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 2 편에서는 나 과장의 야망과 경은의 실종이 전개됩니다.
갈수록 점점 재미를 더하는 이호길장편소설 '야망의 계절'...기대하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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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점점 송곳니를 드러내는 나과장이군요..ㅎㅎㅎㅎ 재미있었습니다. 다음편도 기대하고있습니다~^^
이건 뭐 감질나지 않으신지...
@창이 기대되지요~ 경은의 실종이라는 타이틀이..ㅋㅋ 기대됩니다~과연 어떻게 납치될지 어떤장면이 펼쳐질지 기대됩니다
ㅎㅎㅎ 잼나게 읽었습니다..^^*
아이고 박 사장님, 사장님이 잼나다시니 힘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