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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게서 숨은 ‘다른 신’을 색출하라>의 줄거리 :
제1계명이 말씀하시는 '다른 신'은 다른 종교의 신을 가리킴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고 다른 대상을 신격화하지 말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내가 가지면 마음이 채워지리라고 믿는 것이 좋아함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실제로 마음 채움이 일어나는 좋음이 될 수 있는 대상은 오로지 하나님뿐이십니다. 인간에게 '좋음'은 하나님만의 속성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 말고 다른 대상을 좋아합니다. 이것은 그 대상을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신격화가 모든 대상을 다른 신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내게서 숨은 ‘다른 신’을 색출하라
(출애굽기 20:1~3)
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십계명이 시작되는 본문입니다. 오늘은 제1계명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 중심으로 ‘내게서 숨은 다른 신을 색출하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우리는 나도 모르게 내 속에 숨어 있는 다른 신들을 다 수색하여 찾아내고 축출해야 합니다.
십계명의 제1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곧 ‘네게 두어야 할 유일한 신은 나 여호와 하나님이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제까지 출애굽의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을 드러내어 소개했다. 이제 너희 각자는 절대로 다른 신을 두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셈입니다. 이것은 참 황송한 말씀입니다. 마치 백마 탄 왕자가 거지 아가씨에게 다가와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남자를 쳐다보지 말아라.’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선민에 대한 사랑을 출애굽 사건과 광야의 삶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보인 실제 반응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거지 아가씨가 백마 탄 왕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다른 허접한 남자들에게만 마음을 줍니다. 이것이 선민의 모습이고 실제 상황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다른 계명은 몰라도 제1계명은 잘 지키고 있다. 나는 기독교 종교인으로서 다른 종교의 우상 앞에서 절을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답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완전히 틀린 대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제1계명을 오해합니다. 기독교 종교인이었을 때도 오해했으며 심지어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지금도 오해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계명은 십계명 중에서 가장 많이 범하는 계명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다른 신이 무엇이며 나에게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먼저 다른 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제1계명을 보면 하나님은 자존심도 없으신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실 일이 아니라 선민이라면 알아서 지켜야 할 당연한 덕목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내가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다른 신을 둘 리가 없습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둘 수 있습니까? 죽으면 죽었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내게 두지는 않겠습니다.’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다릅니다. 우리는 마치 다른 신 제조업자처럼 살아갑니다. 다른 신 두기의 달인들로 살아갑니다. 내게 다른 신을 두고도 다른 신인 줄도 모른 채 살아갑니다. 여기에 우리의 불행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신을 다른 종교에서 섬기는 영적인 초월자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존재 중에는 신이 없습니다. 흔히 귀신(鬼神)이라고 부르는 존재에 대해서도 표현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귀신이라고 부르는 존재에 대해 본래 중국에서는 귀(鬼)라고만 표현합니다. 좋은 의미가 들어있는 신(神)을 붙이지 않습니다. 영어에서도 devil, demon으로 표현되는 악마는 신이 아닙니다. 희한하게 우리나라에서는 악마를 일컫는 귀(鬼)에 신(神)을 붙이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출애굽을 허락하신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신이시며 다른 신은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 말씀은 실제로 하나님과 대등한 다른 신이 없음을 염두에 둘 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이 말씀하시는 유일한 신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출애굽의 하나님이시며 모세의 하나님이 유일한 신이십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신 하나님이 유일한 신이십니다. 이로부터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제1계명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만 유일한 참 신이다. 너는 나 이외의 다른 대상을 신으로 여기면 안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셈입니다. 이것은 신격화의 문제입니다.
지금 지구에는 80억 명이 살고 있습니다. 이 80억 각자의 마음에는 여호와 하나님께만 드려야 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티벳 불교를 믿는 스님의 마음에조차 여호와 하나님의 자리가 있습니다. 이처럼 본래 모든 사람은 마음에서 가장 먼저 의식되고 가장 밝게 의식되는 일등의 자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 마음에 드는 다른 대상을 앉힙니다. 이때 신격화가 일어나고 다른 신이라는 표현이 발생합니다. 그 대상을 하나님으로 대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사에는 사장님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사장님의 자리가 비어서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대체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장님의 자리에 앉으면 이제 그 사람이 사장님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출애굽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다른 대상을 앉혔다면 하나님으로 취급하게 된 것입니다. 회사에서 사장님 자리에 앉은 사람을 사장님으로 취급하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힌 대상을 하나님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신을 섬기는 신격화의 문제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기에 객관적으로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서 다른 대상을 신격화함으로써 신으로 취급할 수 있을 뿐입니다.
본래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자리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마음으로 다른 대상의 있음을 존재감으로 가짐으로써 자기 있음의 토대를 만들고, 이 토대가 든든할 때 평강을 느낍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은 비어있게 지음 받았기에 무엇인가로 채워서 만족하려고 합니다. 어떤 대상을 가질 때 마음이 채워지리라 여기는 믿음의 확신이 좋아함입니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 존재감의 자리이자 좋음의 자리입니다. 이는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존재감을 가지게 하는 있음이고, 인간의 마음을 채워주는 좋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존재감으로 가질 때만 마음이 평안합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으로 채워질 때만 마음이 만족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리에 하나님이 계실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로부터 제1계명이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가는 무척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회사에서 사장님의 있음을 첫 번째 존재감으로 갖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첫 번째 자리는 본래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사장님과 마주하고 있다고 해서 마음에 사장님을 모셔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장님을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으로 가지게 되었다면 이 시점에서 사장님을 하나님처럼 여기는 신격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좋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의 좋음으로 마음을 채우려 한다면 재물을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내가 존재감을 가져야 할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회사에서 사장님의 존재감을 갖는다면 사장님을 다른 신으로 섬기게 된 것입니다. 가정에서 첫 번째 존재감을 배우자로 갖는다면 배우자를 다른 신으로 섬기게 된 것이고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좋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좋음을 느껴야 할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렇듯 우리는 삶에서 존재감의 자리와 좋음의 자리에 끊임없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을 앉힙니다. 그러면 하루 종일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한두 가지 대상을 다른 신들로 삼는 것이 아닙니다. 수없이 많은 대상을 다른 신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의 거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에서 이 세상 어떤 대상보다도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심지어 내 마음에서 몸보다도 가까이 계십니다. 그런데 죄의 체질은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굳이 우회하여 다른 대상에게로 가게 합니다. 다른 대상의 존재감을 갖고자 합니다. 본래라면 사장님이 앞에 계시고, 시부모님이 앞에 계셔도 내 마음에서는 하나님이 가장 가깝기에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 속에서도 깊은 잠을 주무셨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풍랑이 대작하는 상황을 마주하는 몸보다도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연스럽게 가장 가까우신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셨기에 풍랑 속에서도 평강을 유지하면서 주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의 체질 때문에 가장 가까이 계신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갖지 못한 채 우회하여 다른 대상을 찾고자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빗나가는 것입니다. 죄로 번역된 헬라어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는 과녁에서 빗나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삶의 상황이 끊임없이 바뀔 때마다 제일 먼저 있음을 느끼는 대상의 존재감을 갖게 됩니다. 그 존재감의 대상이 다른 신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신에 대해 오해해 왔습니다. 다른 신을 하나님 이외의 영적 초월자를 지속적으로 섬기는 것이라고 오해했기에 제1계명부터 지킬 수 없었습니다. 다른 신의 정체를 몰랐던 것입니다. 다른 신은 우리의 인식 속에서 숨겨진 채로 끊임없이 나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로마의 판테온(Πάνθειον) 신전에 대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판테온은 소위 만신전으로 온갖 신을 섬기기 위한 신당입니다. 내 삶은 만신전의 상태입니다. 모든 신이 다 들어 있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내 마음이 제일 먼저 존재감의 대상을 다른 신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본래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깝기에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만 가지면 됩니다. 그럴 때 평강한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의 마음은 공백을 가지고 있기에 채워지기 위해 흡입력이 작용합니다. 마음의 흡입력을 향해야 할 대상은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죄 때문에 빗나가서 다른 대상으로 마음을 채우려 합니다. 하루를 살다 보면 상황과 장소와 때에 따라서 다른 신을 두게 됩니다. 열 개의 신, 스무 개의 신, 백 개의 신을 둘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유일한 있음이며 유일한 좋음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 있음을 존재감으로 가지고 하나님의 좋음으로 채워야 마땅합니다. 천하 만물 어떤 것에도 있음과 좋음의 속성이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만물은 있게 된 것들이기에 있음의 속성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있게 된 것의 속성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들은 우리 마음에서 존재감을 가져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존재감을 가져야 하는 분은 언제나 하나님뿐입니다. 그런데 죄는 우리의 마음을 그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배우자를 들여놓고, 자녀를 들여놓고, 내 몸을 들여놓고, 사장님을 들여놓고, 돈 문제를 들여놓고, 건강 문제를 들여놓습니다. 그것들의 존재감이 가장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때 다른 신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은 채워지기 위한 흡입력이 작용합니다. 그런데 죄는 가장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우회하여 다른 것들을 향하게 합니다. 돈을 좋아하고, 건강과 장수를 좋아하고, 승진과 합격을 좋아하고, 부자 되는 것을 좋아하고, 인기와 명성을 좋아합니다. 그럴 때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며 다른 신이 됩니다. 로미오에게는 줄리엣이 다른 신이었고, 줄리엣에게는 로미오가 다른 신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신에 대한 이해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다른 신이란 다른 종교에서 만들어 낸 영적인 초월자가 아닙니다. 그것이 가짜 신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제1계명을 어기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대상을 들여놓으며 제1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앞으로 제2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의 내용을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데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신 제1계명을 지킬 수 없다면 나머지 계명들도 지킬 수 없습니다. 제1계명 이후의 아홉 계명은 제1계명을 지키지 않을 때 나타나는 증상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에 다른 신을 둘 때 하나의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고 몇 가지 증상이 함께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유일한 있음인 하나님은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첫 번째 존재감의 대상으로 유지할 때, 풍랑 만난 배 위에서 잠을 주무신 예수님처럼 마음의 평강은 깨어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라는 계명은 마음의 평강, 마음의 만족과 기쁨에 중요한 관계가 있기에 너무나 아름다운 계명입니다. 내 삶에 평강이 충만하다 못해 터져 나올 수 있게 해주는 기가 막힌 계명입니다. 내 삶에 만족과 기쁨이 넘쳐흐르도록 해주는 계명입니다.
그렇기에 다른 신이 누군지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내가 생활 속에서 있음과 좋음의 무게를 하나님 외에 첫 번째로 느끼는 모든 대상이 다른 신이 됩니다. 더 간단히 말하자면 내가 세상에서 하나님보다 좋아하는 모든 것이 다른 신입니다. 다른 신 두기는 삶의 현장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루에도 수십, 수백의 다른 신들을 섬기는 만신전입니다. 모든 신이 다 들어와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는 마음의 평강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제1계명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내 마음에 가장 가까이 계신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열망하면 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의 평강을 좌우하는 존재감의 대상은 하나님이 됩니다. 평강의 문제가 하나님으로 매듭지어지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마음으로는 내 몸보다 더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만나서 평강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공백을 하나님의 속성인 유일한 좋음으로 채웁니다. 마음의 평강과 채움의 문제를 몸보다 더 가까이 계신 하나님으로 해결을 본 후에 누구라도 만날 수 있고, 일할 수 있고, 과제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몸보다 더 가까이에 계십니다. 그렇기에 몸으로 살기 전에 마음의 평강을 좌우하는 존재감의 문제와 만족과 기쁨의 문제를 하나님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람과의 관계에서 더 이상 존재감과 좋음을 찾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감과 좋음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은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신을 섬기던 차원에서 보자면 기기묘묘한 삶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있음과 좋음을 바랄 수 없어야 다른 신을 섬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움직임을 통해 마음이 평안하기를 기대하고 기쁨이 채워지기를 바란다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내 마음에 가장 가까이 계신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열망할 수 있을까요? 이것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문제는 죄의 체질입니다. 죄의 체질은 내 마음에서 가장 가장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빗나가게 합니다. 정면에 계신 하나님께로 가지 못하고 게처럼 자꾸만 옆으로 벗어나려 합니다. 있음의 존재감과 좋음의 흡입력도 자꾸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려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을 피하려는 나를 십자가로 부르십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함께 죽고 나면 그 길은 하늘로 뻗어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하늘이라는 차원은 내 마음과 육체 사이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할 때 하늘이라는 차원은 내 몸이 있는 세상 바깥 어디에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늘은 사실로써 존재하는 영적인 차원의 세계입니다. 이 영적인 세계인 하늘은 내 마음과 내 육체 사이에 있습니다.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에 계신 하나님이 계신 곳이 하늘입니다. 그런데 죄는 마음을 하나님이 계신 하늘을 피해서 몸이 있는 땅으로 가게 하여 다른 신을 섬기게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으로 이 죄를 틀어막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붙잡으면 마음은 부활 승천의 길을 따르게 됩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하늘을 우회하지 않고 직통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땅으로 가려는 나를 죽여서 하늘에 이르게 하는 길입니다. 이 하늘에 이르는 길인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면 비로소 다른 신을 두는 일이 비로소 중지됩니다.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예표하는 사건으로써 성전의 상번제가 생깁니다. 성전의 상번제는 날마다 아침과 저녁으로 어린양을 번제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사는 곳에서 상번제의 의미를 생활화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다른 신을 향해 빗나가는 내 마음 때문에 어린양이 죽고 있다. 내 마음은 상번제로 바쳐지는 어린양과 함께 죽어야 한다. 이제 다른 신을 향해 가려는 마음이 죽었으니 마음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제1계명을 지키기 위해 성전에서의 상번제를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생활화를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다른 신을 두지 않을 때 마음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천국에 계신 하나님께 직통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흡입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표현했습니다. 항상 기뻐함, 쉬지 말고 기도함, 범사에 감사함은 내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을 때 내게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이고 계획입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마주 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하고 영원한 좋음이기에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마주하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기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생각하는 모든 순간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을 마주하면서 대화함에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이란 언어의 독백이고 대화란 언어로 생각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앞에 두고 있고, 하나님과 마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음이기에 항상 기쁠 수밖에 없고, 살아계신 인격이기에 마주하는 동안 하나님께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문제에 대해 혼자 생각한다면 하나님께 등을 돌린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마주한다면 쉬지 않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이 세상 일에 정신을 쏟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신경 쓸 수 없는 모든 구멍은 하나님의 주권적 이끄심으로 메워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권에 이끌리는 범사에 대해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계명은 시작이자 전부입니다. 첫째 계명을 지킬 때 나머지 계명들도 지켜질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계신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가질 때 평강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의 좋음을 느낄 때 만족과 기쁨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제 세상에서 누구를 만나든 무슨 일을 하든 좋음을 구하지 않기에 오직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으로 채워지고 하나님의 좋음으로 채워진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만을 바라며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이웃 사랑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으로 일할 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결혼을 해도 배우자로 기뻐할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이 기뻐하기에는 마음에서 거리가 너무 먼 대상입니다. 내 마음에는 하나님이 가장 가까이 계시며, 하나님께로 이끄시는 주님이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기쁨이 되기에는 몸으로 만나는 배우자는 2차, 3차, 4차로 미뤄져야 할 대상입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똑똑한 자녀로 기뻐하기에는 자녀는 마음에서 너무 먼 대상입니다. 내 마음에서는 가장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으로 기쁨의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상은 배우자로 기뻐하고, 자녀로 기뻐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기뻐하고, 몸이 건강함으로 기뻐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우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가지고 하나님으로 기쁨을 누려야 되는데, 그 하나님 자리에 다른 신을 두고 신격화하는 일을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의 존재감을 첫 번째로 가지는 대상이 다른 신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가져야 할 마음으로 다른 대상의 존재감을 가지고, 그 대상이 하나님의 자리에 들어와 있기에 신격화가 발생합니다. 눈앞에 있는 배우자를 신격화해서는 안 됩니다. 눈앞에 있는 자녀를 신격화해서는 안 됩니다. 눈앞에 있는 사장님을 신격화해서는 안 됩니다. 눈앞에서 있는 시부모님을 신격화해서는 안 됩니다. 돈 문제를 신격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참으실 수 없습니다. 신격화의 생활화를 십자가로 끊어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평강을 위한 존재감의 문제는 하나님을 통해 해결되어야만 합니다. 채움을 위한 좋음의 문제도 하나님으로 매듭지어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나서 몸으로 사는 삶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 하늘은 저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하늘은 위에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승천의 모습을 목격하게 하심으로써 하늘로 올라가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실제로 내 마음에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 영적 세계인 하늘입니다. 하늘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신 곳입니다.
이 가까움을 우회하려는 죄를 십자가 생활화로 틀어막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다른 신 제조업자 같은 만신전의 삶은 중단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인한 평강과 하나님으로 인한 좋음으로 매듭되고 완결된 상태로 살아가는 진짜 선민의 삶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느 집도 제1계명을 가훈으로 정해놓은 곳을 본 적이 없고, 어떤 식당도 제1계명을 액자에 걸어둔 곳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처럼 좋은 계명이 어디 있으며, 이처럼 엄청난 복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른 신을 만드는 만신전의 삶을 중단하고 제1계명을 따르기 위하여 이를 악물고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