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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설익은 악과 농익은 악의 대결>의 줄거리 :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빗나감의 죄와 하나님 이외의 대상을 맛있어하는 썩은 입맛의 저주에 갇혀 있습니다. 이런 상태를 자연스럽고 정상이라고 여겨 묵인하는 상태가 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는 이런 상태에서 나오는 모든 생각 말 행동이 다 악행입니다. 그런데 악행을 함에 있어서 설익은 악이 있고 농익은 악이 있습니다. 이 두 등급의 악이 대결을 펼치면 어느 쪽이 이길까요? 설익은 악이 절대적으로 불리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상태로 삶을 사는 자들이 바로 설익은 악의 사람들입니다.
설익은 악과 농익은 악의 대결
(사사기 20:1~48)
17. 베냐민 자손 외에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칼을 빼는 자의 수는 사십만 명이니 다 전사라
18.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
19. 이스라엘 자손이 아침에 일어나 기브아를 대하여 진을 치니라
20. 이스라엘 사람이 나가 베냐민과 싸우려고 전열을 갖추고 기브아에서 그들과 싸우고자 하매
21. 베냐민 자손이 기브아에서 나와서 당일에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나
22.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 전열을 갖추었던 곳에서 다시 전열을 갖추니라
23.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
24. 그 이튿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자손을 치러 나아가매
25. 베냐민도 그 이튿날에 기브아에서 그들을 치러 나와서 다시 이스라엘 자손 만 팔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26.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2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28. 아론의 손자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시고 섰더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쭈기를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시는지라
베냐민 지파의 기브아에서 일어난 만행으로 인해 이스라엘 총회가 모여 격분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총회가 베냐민 지파와 전쟁을 하게 된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싸움에서 마침내 이스라엘 총회의 군대가 베냐민의 군대 26,700명 중에 25,000명을 격파하고 나머지 600명은 도망합니다. 여기서 1,100명은 1차전과 2차전에서 베냐민의 군대가 이스라엘 총회의 군대 40,000명을 죽일 때 죽은 자들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설익은 악과 농익은 악의 대결>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총회가 각 지파별로 군대를 모은 것이 40만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드린 대로 베냐민 지파가 이스라엘 총회의 요구를 거절하여 싸우기로 작정해서 모은 군대가 26,700명이었습니다. 사실 이 싸움은 불필요한 일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가 기브아에서 레위인의 첩을 집단 성폭행한 인간 말종들을 내주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냐민 지파는 이들을 넘겨주기를 거부했고, 이스라엘 총회 40만과 베냐민의 26,700명의 싸움이 세 차례에 걸쳐서 벌어집니다. 여기서 이상한 것은 이스라엘 총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먼저 하나님께 베냐민 지파를 쳐야 하는지를 여쭈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치라고 대답하셨고 어느 지파가 먼저 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유다 지파가 먼저 가라고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이로부터 베냐민 지파를 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있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첫 전투에서 이스라엘 총회의 군대 22,000명이 죽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손실은 기껏해야 천 명 아래였으리라 여겨집니다. 이스라엘은 날이 저물도록 울고 다시 하나님께 베냐민 지파를 쳐야 하는지를 여쭈었고, 하나님께서 다시 베냐민 지파를 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스라엘 총회의 군대 18,000명이 죽습니다. 1차 2차 전투를 합쳐 베냐민의 군대가 1,100명 정도 죽을 때, 이스라엘 총회의 군대는 무려 4만 명이 죽습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분명히 하나님께 물었고 하나님께서 치라고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두 번이나 패배하고 4만 명이 죽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총회는 금식을 하며 제사장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다시 하나님께 베냐민 지파와 싸울지를 여쭙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올라가서 치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이번에는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라는 말씀을 더 하셨습니다. 1차전 2차전에서 베냐민 지파를 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임에 분명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총회의 군대에 베냐민 지파를 넘겨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제사장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베냐민 지파를 이스라엘 총회의 군대 손에 넘겨주십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베냐민 지파를 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고 행했습니다. 그런데 그 뜻이 두 번이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참 특이합니다. 이제까지는 하나님의 뜻을 묻고 뜻이 확인되었다면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하나님께 묻고 확인을 받아 실행했는데도 두 번이나 실패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나서야 하나님의 뜻은 실제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 이유는 이스라엘 총회가 설익은 악으로써 베냐민 지파의 농익은 악을 처결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본문은 설익은 악과 농익은 악의 대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적 삶은 바로 설익은 악과 농익은 악의 대결의 연속입니다.
지난 시간에 죄와 저주와 악의 개념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 내용을 다시 간략하게 정리해 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은 공백 상태이기에 채워져서 만족하고자 합니다. 채움의 욕구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나 하나님을 빗나가는 것이 죄입니다. 물론 빗나갔더라도 마음 채움과 만족이 없겠다 싶으면 시행착오를 거듭하다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다행입니다. 문제는 좋음을 느끼는 마음의 입맛이 저주를 받아서 유일한 좋음이신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해 맛있음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주받은 상태입니다. 이로부터 수고하고 땀을 흘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 세상에서 내 마음에 맛있게 느껴지는 것들을 위해 수고하고 땀을 흘려야 먹고 사는 저주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자연스럽고 정상이라고 여기는 것이 악입니다.
예를 들어 사장님이 사업에 마음을 붙이고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수익을 많이 내서 흑자 경영을 하면 만족하고 기쁠 것 같습니다. 사장님 마음의 입맛에는 흑자 경영을 맛있게 느끼고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이 상태를 잘못되었다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또 어머니가 자녀에게 마음을 붙입니다. 어머니 마음의 입맛에는 자녀의 형통이 가장 맛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이 어머니를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이러한 상태가 모두 악입니다. 하나님을 빗나간 죄와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좋음으로 맛있게 느끼는 저주에 갇힌 상태를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아는 것이 악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빗나가서 다른 것들을 맛있게 여기는 썩은 입맛의 저주의 상태에서 하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악입니다. 이 악을 기준으로 볼 때 설익은 악이 있고, 농익은 악이 있고, 짓물러서 곯아버린 악이 있습니다. 악에도 등급이 있는 것입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는 같지만 이스라엘 총회는 동성애를 거부합니다. 동성애가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들 또한 죄와 저주에 갇혀 있었던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악하기는 하지만 동성애를 주저 없이 할 정도로 악이 무르익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설익은 악의 상태였습니다. 반면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의 인간 말종들은 동성애를 자연스럽게 하는 것도 모자라서, 공공연하게 집단으로 동성애적 성폭행을 하는 일에 거침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악이 짓물러서 곯아버린 상태입니다. 이들을 감싼 베냐민 지파는 악이 농익은 상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총회든 베냐민 지파든 죄와 저주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은 똑같습니다. 지옥으로 들어가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지옥에 들어가더라도 세상에서 살 동안 드러나는 악의 정도가 다릅니다. 설익은 악이 있는가 하면 농익은 악이 있고, 곯아버린 악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설익은 악이 농익은 악과 곯아버린 악과 대결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이길 확률이 더 높을까요? 농익고 곯아버린 악이 이길 확률이 더 높습니다. 설익은 악이 훨씬 불리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이들은 지옥으로 가기에 충분한 악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빗나감과 썩은 입맛의 저주를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지옥을 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설익은 악의 문제가 있습니다. 농익은 악이나 곯아버린 악을 보면서 우월감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똑같이 악함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윤리적 우월감을 갖습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기브아의 인간 말종들과 그들을 감싸는 베냐민 지파를 바라보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우월감으로 충만했습니다. 이것이 정의감으로 바뀔 때 불평과 불만과 원망이 생기고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문제는 설익은 악의 상태에서 농익은 악을 바라보며 우월감을 가질 때 이미 자기 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빗나감의 죄와 썩은 입맛의 저주 속에 갇힌 상태에서 정의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자기보다 더 무르익은 악을 바라보며 스스로 우월감과 정의감을 갖습니다. 이때 문제는 농익은 악이나 곯아버린 악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이 벌어지는데 우월감에 도취합니다. 분명히 지옥으로 가기에 충분한 조건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빗나감 자체는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 없는 피조물의 악입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농익거나 곯아버린 악을 바라보며 정의롭다고 여기거나 도덕적 윤리적으로 우월하게 느낄 경우에는 자기 자신의 악을 보지 못합니다. 이게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나는 정의롭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옥으로 가기에 충분할 정도의 악과 어울리지 않는 의식을 가짐으로써 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농익은 악이나 곯아버린 악은 내부의 갈등이 없습니다. 공공연하게 동성애적 성폭행을 하겠다는 인간 말종들의 내부에는 아무런 갈등이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막가파로 비유될 수 있는 막무가내식의 강력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 보존의식과 합쳐지면 그 기세는 정말 막강해집니다. 이것이 농익은 악과 곯아버린 악이 강한 이유입니다.
설익은 악은 정의를 이루겠다고 싸웁니다. 그런데 정의를 이룰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명분은 정의지만 자격이 없는 자가 정의를 이루겠다고 싸우기에 힘이 나지 않습니다. 반면 농익은 악과 곯아버린 악은 자기 보존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의식을 가지고 싸움에 임하기에 막강한 힘을 발휘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누가 이길지는 뻔합니다. 어쭙잖은 윤리적 우월감과 도덕적 우월감은 설익은 악의 특징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빗나가고, 하나님 이외의 것을 맛있게 여기는 썩은 입맛의 저주에 갇혀 있습니다. 어쭙잖은 윤리적 우월감이나 정의감을 가지고 이 사회를 바로잡겠다고 나서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같잖게 보십니다.
본문의 내용을 기반으로 한 가지 가정을 해봅니다. 만약 설익은 악에 속하는 이스라엘 총회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싸움에 나갔다면 어땠을까요? 이들이 어쭙잖은 도덕적 윤리적 우월감이나 정의감 때문에 싸운 것이 아니라, 동성애에 물들면 우리 자식들도 망할 것이라는 자기 보존의식을 가지고 싸웠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내 가정을 동성애로부터 지키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러한 의식을 가지고 40만 대군이 싸움에 임했다면 첫 번째 싸움에서 이겼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쭙잖은 도덕감과 윤리적 우월감으로 하나님께 싸워야 할지를 여쭙습니다. 이것이 설상가상으로 이들을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실 만한 조건의 사람들로 바꾸시는 역사가 보태집니다. 하나님께는 이스라엘 총회가 베냐민 지파를 이기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묻는 사람들의 악을 보십니다. 이스라엘 총회가 베냐민 지파를 농익고 곯아버린 악으로 규정하며 하나님께 묻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베냐민의 악을 보시기에 앞서 이스라엘 총회의 악을 보시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올라가서 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베냐민을 멸절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있음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농익고 곯아버린 베냐민을 치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야 할 이스라엘 총회가 설익은 악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설익은 악의 상태는 하나님을 빗나가고 하나님 이외의 것을 맛있게 느끼는 저주받은 입맛을 정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총회는 자신들은 정상이고 베냐민 지파는 악으로 규정하면서 우월감에 빠져 있었기에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뜻을 이루어 가실 수가 없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빗나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찾은 것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정확하게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좋아해서 찾았던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좋아했던 것은 승리였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총회의 설익은 악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설익은 악의 상태에 머문 모든 기독교 종교인들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하나님을 빗나가고 썩은 입맛으로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죄와 저주받은 상태에서 생겨난 소원을 정확하게 이루고 싶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할 뿐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설령 이루고 싶어 하는 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과 같더라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설익은 악의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이루시지 않습니다. 설익은 악의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인생을 살아오며 제대로 되지 않았던 일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중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었던 일도 엄청나게 많았을 것입니다. 삶에는 항상 선택의 폭이 수없이 많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떨 때는 필연적이거나 선택의 폭이 아주 적은 상황도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내가 선택한 일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뜻에 부합하는 선택을 했는데도 대부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설익은 악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모두가 다 죄와 저주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죄와 저주에 빠져 있는 상태를 정상으로 여깁니다. 다만 같은 악이라도 설익은 악이 있는가 하면 농익은 악이 있고 곯아버린 악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설익은 악의 사람들이 윤리와 도덕의 기준을 갖고 농익거나 곯아버린 악의 사람들을 판단하며 정죄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똑같습니다. 전부 지옥에 갈 자들입니다. 지옥으로 갈 것들끼리 모여 있으면서 내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 내가 더 낫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은 설익은 악을 가진 자들입니다. 농익고 곯아버린 악을 가진 자들은 내면의 갈등이 없기에 불행의 지수가 작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내지르고 맙니다. 막가파식으로 가던 길을 계속 갑니다. 그런데 설익은 악의 사람들은 자신이 도덕적 윤리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기에 노골적인 악행을 저지르지도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빗나감과 썩은 입맛을 유지하는 죄와 저주에서 벗어난 것도 아니기에 항상 불만이 있습니다. 직장 동료를 보면 다 불만입니다. 내 마음에 안 맞습니다.
설익은 악의 특징이 불평, 불만, 원망입니다. 이것은 정의감의 왜곡된 형태입니다. 정의감이 변형돼서 나타나는 것들이 원망, 불평, 짜증, 분노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 나한테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 이 사장님, 이 직장 상사는 나 정도 수준의 사람에게 맞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모든 원망과 불평의 본질적인 이유는 바로 설익은 악의 상태에서 갖는 우월감 때문입니다. 남보다 우월하다고 여기기에 불행합니다. 배우자에 대해서 불만이 많다면 설익은 악의 상태라서 그렇습니다. 내가 배우자보다 우월하다고 여기기에 더 많은 것들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여깁니다. 열 개 받아야 하는데 다섯 개만 주니 불만이 생깁니다.
이것이 다 설익은 악의 우월감에서 나오는 일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어쭙잖은 윤리적 우월감은 되지도 않는 정의감으로 자리 잡습니다. 그렇기에 사회의 부패를 척결하라 요구합니다. 정치인들을 탄압하고 정권을 뒤집자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가소롭고 웃기는 일입니다. 설익은 악이 정의감을 갖고 윤리적 우월감을 가질 때 이 세상에는 꼴값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설익은 악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본문에는 그 대답이 이스라엘 총회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것으로 제시되었습니다. 설익은 악의 상태에서 해야 하는 일이란 농익은 악이나 곯아버린 악을 보면서 우월감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기에 앞서서 나의 설익은 악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지옥 가기에 충분한 빗나감의 죄와 썩은 입맛의 저주 속에 갇혀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나를 통째로 번제물과 함께 죽여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설령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과 내 소원이 일치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내 손에 넘겨주시지 않기에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참 독특합니다. 이스라엘 총회는 하나님께 여쭈었고 응답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실행했더니 두 번이나 실패했습니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나서야 드디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습니다. 설익은 악에서는 ‘내가 누구보다 낫다. 왜 이렇게 세상은 내가 원하는 여건을 허락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설익은 악의 상태에서 교만에 취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나 자신이 번제물로 죽어야 합니다.
지독한 악행을 저지르는 농익은 악한 자들과 곯아버린 악한 자들 앞에서도, 나는 십자가에 못 박혀 갈기갈기 찢어 죽일 정도로 충분히 악한 사람입니다. 나의 악을 간과하고 내가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정상이라고 여기는 중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번제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화목제는 번제를 통해 빗나감의 죄와 썩은 입맛의 저주를 극복한 상태의 마음에서 드디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이것이 번제와 화목제의 본질적인 성격입니다. 십자가 죽음이 번제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옷 입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 보는 것이 화목제에 담긴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어떤 사안이나 사건이나 문제에 대해서만이라도 죄와 저주를 극복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만큼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생명줄이 되어야 합니다. 죄와 저주의 상태를 극복해야만 내게 알려진 하나님의 뜻도 그대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내게 존재하는 설익은 악은 제거되어야만 합니다. 우리 중에 농익은 악이나 곯아버린 악을 자행하는 자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설익은 악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위험합니다.
곯아버린 악을 가진 자는 근본적으로 선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회개할 기회가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익은 악을 가진 자는 자신이 정의롭다고 생각하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우월하다고 여기기에 회개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런 악행은 저지르지 않았다. 나는 세금 꼬박꼬박 낸다. 나는 사기 치지 않았다. 나는 간음하지 않았다. 내가 언제 살인을 했느냐?’라고 말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어쭙잖은 윤리적 도덕적 우월감은 나의 설익은 악을 감추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뜻에 있는 일을 하면서도 실패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번제의 의미대로 십자가에서 죽고, 내 마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옷 입고 하늘로 올라가서 화목제의 의미가 충족되는 상태에서만 이 땅에서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나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설익은 악의 상태로 농익은 악과 곯아버린 악을 보며 얼마나 어리석은 짓거리를 하며 살았는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지옥 안방으로 들어가기에 충분한 악이 설익었다는 이유로 의롭거나 올바르거나 정의롭거나 윤리적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을 한순간도 허용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에서 설익은 악의 상태인 나를 철저히 날마다 순간마다 죽이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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