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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폰 아타는 이식쿨호수 주변에 있는 휴양도시지만 우리는 지나가는 길에 보고 가는 곳이기에 하루 밤만 머물고 비슈케크로 출발 한다. 비슈케크는 키르기스 산맥과 가까운 추 강 유역 해발 750~900m의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264㎞ 떨어져 있으며 이곳을 가려면 키르기스 산맥을 넘어서 900m를 내려가면 평야가 나온다.
버스로 한 시간 쯤 달리니 발릭치란 조그만 도시가 나타난다. 발릭치는 키르기스어로 어부란 뜻이란다. 발릭치를 조금 지나자 강을 따라 버스가 달리는데 이 강은 추(Chu) 강으로 천산산맥 서부에서 발원해 Orto Tokoy라는 호수와 댐을 거쳐서 비슈케크를 지나 카자흐스탄의 무윤쿰 사막으로 사라질 때까지 1,024㎞를 흘러간다고 한다. 추 강은 양 기슭에 있는 여러 오아시스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강폭은 그리 넓지 않으나 수량이 넉넉해 강기슭을 따라 키르기스스탄에서 가장 기름진 옥토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가는 길에 Food Zone이란 휴게소에 들러 점심을 먹는데 진열된 여러가지 음식 중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골라서 종류별로 계산한다. 남미 뷔페식당에서는 육류나 야채를 불문하고 전체 무게로 계산하는데 여긴 다른 시스템이다.
식당을 지나 20여분쯤 키르기스산맥의 골짜기를 따라 계속 올라간다. 도로변으로는 군데군데 집들이 보이고 동물 조각상과 과속단속 카메라도 보인다. 고개 정상에 오르자 식당인지 카페인지 건물이 보이고 마나스 동상도 보인다. 이곳에서 부터는 추 강을 끼고 계속 내리막을 내려가는데 주변 환경은 건조한 스텝지역에 가까운데 푸른 강물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강기슭에 바짝 붙어 있는 카자흐스탄과의 국경을 표시하는 철조망이 보인다. 보통 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산맥이 두 나라간 국경이어야 하는데, 이렇게 강북 쪽까지 국경선이 내려 온 것은 제정 러시아 시절 이곳 土豪가 말 40마리를 받고 강 북쪽 땅을 카자흐스탄에 넘겨 준 게 오늘날까지 두 나라간 국경선이 되었다고 한다.
추 강을 따라 달리는 길 좌측에 토크목(Tokmok)이란 작은 도시가 보인다. 토크목(Tokmok)은 키르기스스탄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2006년 5월 추이 주의 주도가 비슈케크로 변경되기 전까지 추이 주의 주도(州都)였던 곳이며 도시 이름은 키르기스어로 "망치"를 뜻한다고 한다. 해발 816m에 위치한 토크목은 북쪽으로는 추강과 접하고 카자흐스탄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토크목은 1830년 코칸드 칸국의 북부 군사 전초기지로 건설되었으며 이후 1867년 지역 일대가 러시아령이 되며 러시아의 미하일 체르냐예프 소장에 의해 지역 중심지가 되었으나 지역 중심지를 비슈케크로 이전하여 쇠퇴했지만 1938년에 철도가 건설된 이래 공업도시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이곳 토크목(Tokmok)은 중국 당나라의 시인 이백(李白, 자는 태백太白)의 출생지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출생지를 놓고 많은 논란이 있는데 중국 측은 쓰촨(四川) 성의 장요우(江油) 라고 하고 키르기스스탄에서는 토크목이 출생지라고 주장해 2008년 키르기스스탄 문화정보부는 이곳 토크목이 이백의 고향이라고 인터뷰까지 했다고 한다.
토크목은 사통팔달이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실크로드의 동서를 연결하는 대표적 무역도시로 성장했으며, 무슬림들은 장사를 위해, 기도를 위해 브라나 탑을 줄지어 찾았다고 한다. 초원의 비바람과 사막의 먼지를 뚫고 도착한 이곳 토크목에서 그들은 육신과 영혼의 위안을 얻곤 했다고 한다.
브라나 탑(브라나 미나렛이라고도 함)은 토크목이라는 도시에서 8km 정도 남쪽으로 들어가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살던 소그드인(스키타이, 또는 사카 등으로 불리는 기마민족으로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스키타이족)이 세운 발라사군드의 옛 성채 중에서 남아 있는 탑으로 천문대겸 전망대로 10세기에 지어 졌다고 한다. 원래 이 탑의 높이는 45m로 건축되어 이곳을 지나는 대상(隊商)들의 길잡이로 초원의 등대로 불렸지만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 특성상 풍화되고 16세기 큰 지진으로 현재 높이인 24.6m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높이로도 멀리서 눈에 확 들어오는데 원래 45m였을 때 이 탑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부라나 탑 꼭대기로 오르는 내부 통로>
부라나 탑은 좁은 내부 통로를 통해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다. 탑 옆으로 난 철제 계단을 5~6m 올라가면 본격적인 탑 내부 통로가 나오는데 딱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로 좁고 조명도 없어 통로 중간 지점부터는 너무 깜깜해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야 했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깜깜한 계단을 더듬대며 기어오르니 갑자기 하늘이 밝아지며 평평하고 둥근 정상이 나왔다. 워낙 길이 좁아 올라오는 사람과 내려가는 사람이 중간에 만나면 낭패일 것 같았으나 신기하게도 그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신호기나 안내해주는 사람도 없는데 누가 올라오면 알아서 기다리고 누가 내려가면 딱 알아서 대기했다.
탑 정상에서 주변을 둘러보면 초원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원이 멀리까지 보이는데 실크로드의 긴 여정에 지친 상인들에게 불이 켜진 이 탑 불빛이 안도와 위로를 주웠을 것을 상상하니 '초원의 등대'라는 말이 참 잘 어울린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에 이 지역을 다스리던 왕에게 딸이 한 명 있었는데 왕은 어느 날 한 점술가로부터 그의 딸이 18세가 되기 전에 뱀에 물려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되자 왕은 딸을 보호하기 위해 높은 탑을 세웠고, 딸을 그 탑 안에 가두어 놓았다. 탑에서 딸은 아무런 위협없이 안전하게 살았으나 18세 생일이 되던 날, 왕은 딸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기 위해 탑으로 과일바구니를 보냈는데 바구니 속에 뱀이 숨어 있었고, 딸은 결국 뱀에게 물려 죽고 말았다고 한다.
탑 주변에는 고대 성터가 남아있다.
그리고 탑 뒤에는 투르크족이 만든 돌 조각상 발발(balbals ; 石人像)이 다양한 모양으로 있는데 이는 투르크족의 묘비(墓碑)로 귀족, 무사, 성직자등 다양한 계급을 상징한다고 한다. 발발이라는 단어는 현지어로 조상, 아버지를 뜻한다고 한다. 그러나 모두 침울한 얼굴을 가진 석상이어서 혹시 그 당시에 슬프고 괴로운 일이 많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발은 몽골,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아나톨리아 지역 초원 등 투르크 계 유목인이 거주하던 지역에 분포돼 있는데 크기도 다양하고 표정도 각기 다르지만 대부분 손에 컵이나 유리잔 모양의 물체를 들고 있는데 와인 잔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지역에 살았던 초기 기독교집단인 네스토리아인들의 흔적이라지만 현지인들에 의하면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마유주' 잔이라고 한다.
발발석 사이에는 암각화들도 보이는데 이는 이식쿨호수의 암각화를 가져 온 것이라고 한다. 발발석과 맷돌처럼 생긴 것들과 상형문자 등이 새겨진 돌들이 줄을 지어 서 있는데 왜 그렇게 거기다가 줄을 맞추어 늘어놓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떻든 과거의 유적이 거의 없는 이 나라에서 이런 것이라도 남아 있는 것이 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부라나 탑 박물관 내부>
이곳이 어떤 곳인지에는 그리 관심들이 없고 이곳에 다녀 온 인증 샷에만 관심들이 있어서 바로 옆에 박물관이나 입간판(立看板)에 이곳의 역사에 대해서 설명한 것이 있지만 박물관을 관람하거나 입간간을 읽어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부라나 탑은 당시 무슬림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탑으로 아기가 태어나거나 축복할 일이 있으면 탑 위에 올라가 소리치거나 제사장이 기도를 하는 공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이 도시의 주인이었던 소그드인의 상권은 멀리 발해까지 뻗어 있을 정도였으며, 발해의 옛 땅인 연해주에서도 소그드인들의 유물들이 아직까지도 종종 발견되기도 한다고 한다. 지금은 소그드인들이 다른 민족들과 동화되면서 남아 있지 않지만 실크로드 요지에서 교역활동을 지속하여 동서 문명 교류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한다. 세월은 흘러 수천 명의 실크로드 캐러밴들을 영접하며 한때 번성했던 이곳은 이제는 부라나 탑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수 세기 동안 수많은 지진으로 도시는 파괴됐어도 약 1천년 동안 홀로 우뚝 선 부라나 탑에서 강인한 생존력을 본다. 부라나 탑을 떠나면서 사라진 도시와 옛사람들을 잠시 생각해 본다.
이 지역이 고도(古都) 발라사군으로 카라한 칸국 등 3개국의 수도로서 약 462년간 중앙아시아의 문화와 교역의 중심지였다고 하는데 그를 증명하듯 부라나 탑 입구 우측에는 카라한 칸국의 영묘가 보인다.
숙소에 도착하니 오후 6시 정도로 밖은 아직 덥다.
비슈케크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에서 차창 밖을 보니 이곳의 사람들은 한국인과 얼굴이 많이 비슷하다. 나는 그동안 우리나라와 몽골인의 얼굴이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곳 키르기스스탄인의 얼굴이 한국인과 거의 같다. 상점이나 안내판에 있는 글씨는 러시아 키릴 문자라 읽기조차 어렵고, 얼굴과 복식은 몽골과 비슷하다. 그래서 몽골 남자들의 모자와 이곳 남자들의 모자 모양이 같다 아마도 유목문화의 영향인가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보니 도로에 한국의 현대, 기아차가 많이 보여 감사한 마음이다. 가로수가 추운 곳에서 자라는 자작나무이며, 도로는 거의 모든 곳이 일직선으로 쭉 뻗은 도로인데 이는 중앙아시아 나라들이 소련이 이곳을 지배해 도로를 건설할 때 국가 소유 땅이므로 개인 소유권 침해 걱정 없이 일직선으로 도로 건설이 가능했던 것 같다.
오후 6시 반경 호텔(Discovery Hotel)에 도착해 방을 배정 받고 구글지도를 다운 받아 길잡이가 추천한 대로 호텔에서 멀지 않은 ASIA MALL로 저녁식사를 하러 간다. 호텔 주변은 소련지배시 가로 세로로 반듯반듯하게 구획정리가 된 주택단지 내에 3~40년 쯤 됨직한 낡은 민가들이 들어서 있고 호텔 앞 주 도로를 제외하면 주택단지는 아직 비포장 상태다. 아시아 몰 쪽으로 5분 쯤 걸어가면 식물원(Botanic Garden)이 있는데 문은 닫혀 있고 내부를 들여다보니 수목정리가 안돼 어수선하다. 이런 걸 보면 키르기스스탄의 경제력이 바로 눈에 보이는 듯하다.
아시아 몰 5층에 있는 키르기스탄 전통음식점에서 베쉬바르막으로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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