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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조춘숙
말 씀 사무엘하 4장 4-12절
제 목 성도들의 오해[5]
사랑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말을 좋아하는지 서로 알고 있습니다.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너무나 쉽게 거절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을 닫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면서도 상대를 존중하고 감사하며 서로를 높여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은 상대가 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더 깊이 사랑하면서도 존중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오래 지속될 수 있으며 곁에서 보는 사람들에게도 즐거움을 줍니다.
하지만 반대로 상대방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거나 알아주지 못하면 그 때부터는 오해가 생기고,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닫아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아주면서 그의 뜻을 최대한 들어주는 것처럼 귀한 것은 없습니다.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함께 고민하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선물을 받는 것보다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한다는 말은 잘하는데 상대에게 감동을 주려고 고민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늘 곁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하고, 그를 통해 내가 받을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아픔을 주며 해결하지 못할 어려운 상황까지 끌고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선물이나 보이는 것으로 얻으려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를 배려하고 마음을 쓰고 있음을 순간순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모일 때 힘든 일을 만나도 함께 넘길 수 있는 것입니다.
진심을 전하는 것과 진심을 알아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의 뜻을 알아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듯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드리는 것은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날마다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고백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랑과 뜻을 가지고 백성을 이끌어 가시는지, 또 백성들이 어떻게 행동을 할 때 기뻐하시는지 깨닫고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일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고 불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 것을 알고 있었고, 열방들과의 전쟁에서 보호하신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또 많은 선지자들과 사사들을 세워서 백성들이 죄에 빠지지 않도록 기적과 이적을 나타내신 것도 알았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백성은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만 하나님을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며 자신들에게 어떤 사랑을 받고 싶어 하시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도 사랑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저 부모에게 사랑을 달라고 요구하고, 자신들의 요구대로 채워달라고 부탁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도 자녀들이 부모의 마음을 알아주면서 감사하고 존경하며, 부모의 아픔과 고통을 감싸주면 자녀라 할지라도 그를 의지하는 마음이 생기며 더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게 됩니다.
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을 신으로만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려운 신이고, 정성을 보이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아주 멀리 계신 하나님으로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함께 계시기 때문에 자녀들이 어려움에 처하면 즉각 응답하시는 분이며, 자녀들의 마음을 헤아려 책망도 하시고 칭찬도 하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시원케 해 드릴까 고민하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고민을 하며 자녀로 살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세상의 문제들이 자신을 괴롭혀도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며 그 분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에 사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며, 처음과 나중이신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바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다윗과 하나님을 먼 곳에 계신 신으로만 알고 사는 사람들은 삶 자체가 다릅니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행동도 다른 것입니다.
1절에 이스보셋은 아브넬이 헤브론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맥이 풀렸고 이스라엘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아브넬이 이스라엘을 다윗에게 넘기겠다고 간 것도 이스보셋 입장에서는 두려운데 그가 헤브론에서 살해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혹시 다윗이 바로 쳐들어오는 것은 아닌지 두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자신을 지키고 있는 두 군장이 있기 때문에 그는 조금은 안심하고 낮잠에 들었습니다.
군장의 이름은 바아나와 레갑인데 이들은 베냐민지파입니다.
이스보셋이 믿었던 바아나와 레갑의 마음은 이미 변했습니다.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라면 섬기던 왕의 곁을 조용히 떠나면 될터인데 그들은 다윗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낮잠을 자고 있는 이스보셋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군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빈손으로 가면 다윗이 죽일 것이라는 두려움이 자기들이 섬기고 있던 이스보셋을 죽인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바로 하나님을 오해하는 성도들의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서는 빈손으로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에 성도는 정성이라는 이스보셋과, 헌금과 기도와 찬양이라는 이스보셋을 나를 위해 가지고 갑니다.
하지만 생명이 없는 이스보셋의 머리를 다윗에게 가지고 간 것이 죄가 되는 것처럼, 믿음없는 정성과 헌금과 기도와 찬양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바아나와 레갑은 이스보셋을 죽이면 다윗이 좋아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죽은 이스보셋의 머리를 원한 것이 아니라 비록 적이라 할지라도 모두가 살아 있는 하나님백성을 원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다가 비록 만족할만한 열매를 맺지 못했어도 수고한 그 모습 그대로 나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보기에 좋은 열매가 없거나, 계획대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하지 못하면 그 모든 노력과 시간과 믿음을 다 죽여서 보기 좋게 포장하여 거짓 열매를 하나님께 내 놓습니다.
내가 하나님께서 보기에 좋은 포장을 했으니까 그 안에 있는 것은 이스보셋과 같이 죽었을지라도 상을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세상의 사고방식입니다.
세상은 선물을 주는 사람의 마음을 귀하게 받기보다는 크기와 화려한 포장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겉치레가 결국 다 뜯어서 버릴 포장에 더 많은 돈을 들이고 정성을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허나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바아나와 레갑은 이스보셋의 침실까지 들어가 그를 죽이고는 이스보셋의 목을 가지고 밤새도록 아라바길로 행하여 다윗에게 온 것입니다.
죽은 이스보셋의 머리가 그들의 목숨은 물론 상급까지 갖게 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왔습니다.
아라바길은 마하나님에서 헤브론으로 오는 지름길인데 밤새도록 지름길로 달렸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늘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과보다 그 과정을 보시기 때문에 그들이 지름길로 왔든 최선을 다해 달렸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손에 무엇이 들려 있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남자 스피드 스케이팅 만미터 경기에서 네덜란드 스벤 크라머선수가 이승훈선수보다 4초정도 일찍 들어왔지만 아웃코스와 인코스로 달리는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실격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가는 성도들의 길은 이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빨리 들어와도 정해진 규칙대로 행하지 않으면 결승점을 먼저 통과했다고 해도 그는 메달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수들이 경기규칙을 알지 못하고 경기에 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 개의 올림픽메달을 따기 위해서 선수들은 경기의 규칙을 외우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을 합니다.
세상도 나라와 백성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메달을 따기 위해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이 규칙을 몰라서 자기마음대로 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 개의 메달에 자신의 인생을 거는 선수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인생을 거는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을 만났을 때 큰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을 열심히 가르쳐 드리는 것은 네델란드선수처럼 자기가 지금 아웃코스로 가야 하는지 아니면 인코스로 가야 하는지 순간 잊거나 몰라서 결승선을 통과하고도 메달을 빼앗기는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코치가 잘못 가르쳐줘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경기를 뛰는 사람은 선수입니다.
자기의 판단이 확실하다면 남의 핑계를 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도 진리를 왜곡해서 가르치는 코치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알지 못하면 그들의 말을 듣고 혼란스러워하며 잘못 판단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11절에 다윗은 밤새 달려온 바아나와 레갑을 책망하며 어떻게 왕의 침상까지 가서 그를 죽일 수 있느냐고 진노했습니다.
다윗은 그들의 악함을 그들의 죄로 돌려 죽였습니다.
사무엘하는 시작부터 다윗의 원수들이 하나씩 죽어가는 장면과 그럴 때마다 기회를 타는 죄인들의 모습과 원수라 할지라도 그들의 죽음을 애통하는 다윗이 그려져 있습니다.
사울의 집이 멸망하는 이 상황을 이용해서 계속 우리들에게 동일한 사건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해 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해 달라는 이 기도를 다윗이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처럼 하나님만이 방패와 산성이시며 능력이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그 앞에 서 있는 자신은 개미와 같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이라는 죄송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보잘 것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원수들의 죄가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습니다.
원수의 죄가 작게 보여야만 그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만이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이고, 원수들의 생명까지도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인생을 맡겼습니다.
다윗이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자 하나님께서 사울의 집을 직접 심판하셨습니다.
이제 사울의 집은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만 남았습니다.
그는 왕으로써 연약함을 가졌기에 온전히 다윗의 승리로 두 집안간의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인내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중의 은혜이며 성도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상급입니다.
왕을 목표로 인내한 것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때까지 견딘 것뿐인데 하나님은 다윗에게 왕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용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의 주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맡긴 것뿐인데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통일왕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라도 왕위도 모두 주셨으므로 다윗이 그 축복을 잘 간직하고 누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다윗의 믿음을 보시고 여러분도 하나님앞에 인내하고, 용서하며, 하나님께 충성하여 많은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사랑받고 인정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010, 6,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