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번째 순례의 향기(7)
2015. 11 . 8 (전주교구 상반기)
◉ 순례 장소 : 풍남문 ➟전동성당 ➟초록바위 ➟서천교
➟숲쟁이➟ 치명자산➟ 초남이➟천호성지
축복의 비가 소록소록 내리며 순례의 길을 축복해 주었다.
비가 와서 순례자회원이 6명이 빠져서 텅 빈자리가 많아서 여유롭
기까지 하였다.
회장님의 시작기도로 순례를 시작부터 끝 날 때까지 아버지께
이끌어 주시길 바라며 각자 소개하기, 본당 , 이름(세례명) 밝히며
날씨가 좋지 않지만 여러 가지 순례길 ‘ 은총의 비 ’맞고 순교 뜻
새기어 ‘스스로 내어 맡기는 기도 ’ 뜻 의미를 잘 생각하셔서
내 생활이 어떠한 생활로 가고 있나 생각해 보세요. 하신다.
첫 번째 간 곳
● 풍남문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 호남의 사도 유항검 등이 처형된 곳
전주 전동 성당 맞은편에 위치한 풍남문(豊南門)은 당시 풍남문 밖 처형 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았던 죄인들의 목을 그 문 위에 걸어 두어 지나다니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도록 했던 곳이었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 호남의 사도 유항검 등이 처형되고 그 목을 매달았던 거룩한 곳이다.
지금은 전주 지역 시민들에게도 잊혀 가고 있는 풍남문은 당시 목을 걸어야만 했던 역사의 뒤안길이다.호남의 사도 유항검(柳恒儉, 1756~1801, 아우구스티노)과 그의 동료들이 복음 전파에 온 힘을 쏟고 있던 1790년경, 조선의 천주교인들에게는 처음으로 큰 시련이 닥쳐왔다. 천주교의 전례와 유교 의식간의 충돌이라 할 수 있는 제사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소위 ‘진산 사건’으로 알려진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사가 시작됐다.
윤지충(尹持忠, 1759~1791, 바오로)은 고산 윤선도(尹善道, 호 孤山, 1587~1671)의 6대손으로 전라도 진산에서 태어났다.
25세에 진사에 급제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선비였으며, 권상연(權尙然, 1751~1791, 야고보)은 안동이 고향으로 문학과 윤리를 공부하다가 고종 사촌인 윤지충에게서 교리를 배워 충실히 실천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윤지충은 1791년(신 해년) 5월에 모친상을 당하자 외종형 권상연과 상의한 후, 모친의 유언과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유교식 조상 제사를 폐지하였다.이는 숭유정책(崇儒政策 :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으로 유교가 국교이다시피 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가 양반가를 유지하는 골격을 이루는 사회에서 폐제분주(廢祭焚主: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움)라는 엄청난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우리 역사에 커다란 충격을 몰고 왔다.
그 후 전통 사상을 거스르는 이 행위는 천주교 박해의 구실이 되었고 12월 8일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 한국 교회 최초의 참수형 순교자로 기록되었다.참수된 목은 9일 동안 전주 풍남문에 내걸렸다. 정조 임금은 그들이 순교한 지 9일만에야 시체를 거두어 가도록 허락하였는데 12월 혹한에도 응고되지 않은 선혈로 이때 흘린 그분들의 숭고한 피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등 많은 기적과 일화를 남겼다. 이렇게 해서 한국 천주교회의 첫 참수 순교자가 탄생하였다.그리고 신유박해 때인 1801년 9월 17일에는 전라도에 처음 복음을 전파한 유항검과 그의 아우 관검(柳觀儉, 1768~1801, 세례명은 미상), 윤지헌(尹持憲, 1764~1801, 프란치스코)이 능지 처참형을 당하였고, 김유산(金有山, 1760~1801, 토마스)과 이우집(李宇集, 1762~1801, 세례명 미상)은 참수형을 당하였다. 특히 정부는 유항검의 목을 풍남문 누각에 매달아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갖도록 하였으니, 풍남문은 이들의 피가 서린 곳이다.
■ 순교자
◆ 복자 윤지충 바오로 (1759∼1791년)
윤지충(尹持忠) 바오로는 1759년 전라도 진산 장구 동에 거주하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전주에서 순교한 윤지헌(프란치스코)은 그의 아우이다. 본래 총명한데다가 품행이 단정하였던 바오로는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1783년 봄에는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이 무렵 고종 사촌 정약용 형제를 통해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1787년 인척인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어머니와 아우 윤지헌, 이종 사촌 권상연(야고보)에게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또 인척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자주 왕래하면서 널리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바오로는 권상연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어머니(즉 권상연의 고모)가 사망하자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하였다. 이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해 오라는 명령이 진산 군수에게 내려졌다. 체포령 소식을 듣고 윤지충은 충청도 광천으로, 권상연은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진산 군수는 그들 대신 바오로의 숙부를 감금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그들은 즉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그때가 1791년 10월 중순경이었다. 진산 군수는 먼저 그들을 달래면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권유하였으나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하여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에 도착한 그들은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전주 감사는 할 수 없이 조정에 보고하여 처형의 윤허를 받았다.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바오로와 권상연은 전주 남문 밖에서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 복자 권상연 야고보 (1751∼1791년)
권상연(權尙然) 야고보는 1751년 진산의 유명한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래 그는 학문에 정진해 오고 있었으나, 고종 사촌 윤지충(바오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운 뒤에는 기존의 학문을 버리고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입교하였다.
그때가 1787년 무렵이었다. 이후 그는 교리를 실천하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러다가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 여름 고모(즉 윤지충의 어머니)가 사망한 뒤에는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다.
이 소문은 조정에까지 전해져 체포령이 내려져 권상연은 충청도 한산으로, 윤지충은 충청도 광천으로 각각 피신하였으나 그들 대신 윤지충의 숙부를 감금하자, 그들은 즉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진산 군수의 설득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태도가 조금도 변하지 않자, 전주 감영으로 이송토록 하였다. 전주 감영에 도착한 그들은 이튿날부터 문초를 받기 시작하였다. 조정에서 사형 판결문이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는 즉시 야고보와 윤지충을 옥에서 끌어내 형장으로 정해진 남문 밖으로 끌고 갔다. 그는 이때 초죽음이 된 상태였으면서도 이따금씩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형장에 이르자, 윤지충이 먼저 칼날을 받았다. 이어 야고보도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때는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1세였다.
◆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1756∼1801년)
1754년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가 된 것이다.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그의 아들이고, 그 다음해에 순교한 이순이(루갈다)는 그의 며느리, 유중성(마태오)은 그의 조카이다. 그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은 경기도 양근의 인척 권일신이었다. 이내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 고향으로 내려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가족과 친척은 물론 그의 집에 있던 종들도 모두 그의 전교 대상이 되었다. 1786년 봄에 가성직제도하에서 그도 전라도 지역의 신부로 임명되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거나 그들을 모아놓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지도층 신자들은 이러한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따라서 그는 자신의 성무 활동을 중단하였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그는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장 일찍 체포되었다. 그는 전주에서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치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고 그에게 모반죄를 적용하여 처형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판결에 따라 그는 전주로 옮겨져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두 번째 간 곳
● 전동성당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형을 당한 순교 터이며 호남의 모태 본당
전동 성당 자리는 한국 천주교회사적으로 출중한 순교자를 낳은 순교지 가운데 한 곳이다.
특히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尹持忠, 1759~1791, 바오로)과 권상연(權尙然, 1751~1791, 야고보)은 1791년 12월 8일 전주 남문 밖(현 전동 본당 자리)에서 관장의 배교 권유와 회유를 단호히 거부하고 당당히 천주교가 진리의 종교임을 밝히면서 처형되었다.
신유박해 때인 1801년 9월 17일에는 전라도에 처음 복음을 전파한 하느님의 종 유항검(柳恒儉, 1756~1801, 아우구스티노)과 그의 아우 유관검(柳觀儉, 1768~1801, 세례명 미상), 윤지헌(尹持憲, 1764~1801, 프란치스코)이 능지처참 형을 당하였고, 김유산(金有山, 1760~1801, 토마스)과 이우집(李宇集, 1762~1801, 세례명 미상)은 참수형을 당하였다.
특히 유항검의 목을 풍남문 누각에 매달아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갖도록 하였으니, 현 전동 성당 터는 이들의 피가 서린 곳이다.
1889년 봄, 경상도 지역에서 사목하던 보두네(Baudounet, 尹沙勿, 1859-1915,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전주로 부임하였으나 당시 전주에는 감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주 부중에 신자가 한 명도 없어 배경집 베드로 회장의 안내로 우선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일명 대승리)에 정착하여 전주 이외의 북쪽 지역을 관할하였다.
이것이 전주 본당, 즉 지금의 전동 본당의 시작이었다.하지만 보두네. 신부는 본당의 장래를 위해 인구가 많은 전주 부중으로 본당을 이전하기 위해 노력하여 1891년 6월 23일에 전주 남문 밖에 있는 구례 영저리(營低吏) 집을 매입하였다. 대성동에서 전주 부중으로 본당을 이전한 보두네 신부는 연령 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100주년이 되던 1891년 봄에야 현재의 자리에 본당의 터전을 마련하고, 전교를 시작하여 호남의 모태 본당이 되었다. 전동 성당은 1908년 보두네 신부가 성당 건축을 시작하여 7년 만인 1914년에야 우여곡절 끝에 외형 공사를 마무리 하였다. 주춧돌은 1909년 7월 전주부의 허가를 얻어 남문 밖 성벽의 돌을 다 썼다.
이로써 1791년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권상연의 순교 현장을, 또 1801년 호남의 사도 유항검과 동료 순교자들의 능지처참과 참수를 지켜보았던 그 성곽의 돌들이 하느님 성전 건립의 주춧돌로 사용된 것이다.
1937년 한국 교회 최초의 자치 교구로 전주교구가 설정되고 전동 성당은 주교좌성당(1937~1957)이 되었다.1957년 주교좌성당이 중앙 성당으로 옮겨지게 되었으나 전동 성당은 전주교구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했던 본당답게 교구의 중추적 역할을 하며 성장했다.
▒ 꿈 버리지 않으면 (전동 성당에서) <김영수>
피 어린 풍남문 밝아 있고
곁에는 향내 나는 전동성당 죽어서 살아나면
영원히 죽지 않는 법입니까 눈부시게 다가오는 생명들
돌아와 햇살 되는 생명들 정녕 죽음보다 완벽한 삶 없는 것입니까
내 만 겹의 허물 벗으며 죽음에 닿는 법 익힐까요.
나는 비둘기 날아드는 '순교터'에 서서 스스로 목매달아 하늘 바라봅니다. 누구라도 꿈 버리지 않으면 설렐 수 있는 것입니까
가까이에서도 충만한 거리 멀리에서도 충만한 거리
■ 순교자
◆ 복자 윤지헌 프란치스코 (1764∼1801년) 윤지헌 프란치스코는 1764년 전라도 진산(현 충남 금산군과 논산군 지역)에서 학문으로 이름이 있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1791년의 신해박해 때 순교한 윤지충(바오로)은 그의 형이다.
1791년에 형이 순교하자 그는 더 이상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되어 가족들을 데리고 전라도 고산의 운동(현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으로 이주해 살았다.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동료들과 함께 전주 감영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를 거치면서 의금부에서 마지막 문초를 받은 후 다시 전주로 이송되어 1801년 10월 24일(음력 9월 17일)에 능지처참 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그가 순교한 뒤 고산에 갇혀 있던 아내와 가족들은 모두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 그 외 전동 성당의 순교자들
○ 윤관검(34세) 유항검의 아우/전주 초남리 출신. 능지처참형/순교일 : 1801년 9월 17일(음력)○ 김유산(토마스 41세) 북경 왕래 밀사/전라도 진잠 거주. 참수형/순교일 : 1801년 9월 17일(음력)○ 이우집(40세) 유관검과 친척/전라도 영광 사람. 참수형/순교일 : 1801년 9월 17일(음력)
세 번째 간 곳
● 초록바위
성인 남종삼의 아들 남명 희와 홍봉주 아들이 떠밀려 수장되어 순교한 바위
전주시 완산구 서(西)서학 동에 위치한 초록 바위는 전주교를 건너면 전 주천 쪽으로 내밀어 있는 산줄기를 말하며 지금은 길이 생겨 끊겼지만 전 주천에 연결된 낭떠러지였다. 그 모체격인 곤 지산은 조선 말엽 동학교도들의 처형장으로 행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남종삼의 큰아들 남명 희와 역시 새남터에서 남종삼과 함께 순교한 홍봉주의 아들을 이곳 초록 바위 위에서 전 주천으로 밀어 수장시켜 처형한 곳이다.
남종삼(南鍾三, 호 煙波, 1817~1866, 요한)이 처형되고 난 후 부친 남상교(南尙敎, 호 雨村, 1783~1866, 아우구스티노)와 큰아들 남명희(南明熙, 1853~1867)는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는데, 할아버지와 손자를 한 감옥에 가두지 않는다는 국법에 따라 14세였던 남명희는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전주 감영으로 이송된 남명희는 국법에 따라 성인(15세)이 되는 이듬해까지 처형이 연기되었다. 이를 불쌍히 여긴 전라 감사는 이 어린 소년을 꼭 살려 주고 싶어 “너는 내년이면 성인이 된다. 그때까지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국법에 따라 나는 너를 죽여야만 한다. 그러니 제발 잘 생각해다오.” 하며 회유했지만 끝내 그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마침내 남명희와 홍봉주 아들은 성년(15세)이 된 이듬해 이곳 전주천 옆의 초록 바위에서 교수형으로 죽인 다음 그 시신을 전주천 밑에 밀어 넣었다. 이로써 남씨 집안은 3대가 순교의 화관을 받은 셈이다.
병인박해 때 서울 인근에서 체포되어 의금부로 연행된 남종삼 성인과 홍봉주(洪鳳周, 1814~1866, 토마스)는 이선이(李先伊, 배교자), 최형(崔炯, 일명 치장, 1814~1866, 베드로), 정의배(丁義培, 1795~1866, 마르코), 전장운(全長雲, 일명 승연, 1810~1866, 요한) 및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 시메온) 주교 등과 함께 문초를 당하고 그해 음력 정월 21일 서소문 밖 사거리에서 참수되었다. 이어 남종삼의 부친 남상교는 공주 진영으로, 장자인 남명희는 전주 진영으로 잡혀가, 공주와 전주에서 각각 순교했고, 처 이조이(李召史) 역시 1875년 유배지 창녕에서 물고(物故)로 표현된 형벌(장살형)로 순교했다.
남종삼과 함께 러시아의 남침을 물리치는 방법은 프랑스, 영국과 조약을 맺는 길 뿐임을 흥선 대원군에게 건의했던 홍봉주 토마스의 아들도 남명희와 함께 초록 바위에서 순교한 것이다. 그러나 남종삼의 차남 남규희(南揆熙) 및 그의 여동생 데레사와 막달레나 등은 경남 창녕에서 함께 귀양살이를 하였고 그 후 몇 차례 이주를 하다가 1894년 갑오개혁으로 부친이 홍봉주 등과 함께 신원(伸寃)되면서 종의 신분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되었다.▒ 곤지산(坤止山) 초록 바위 곤지산은 싸전다리 건너 오른쪽에 위치한 봉우리다.
곤지산보다는 초록 바위로 더 알려진 곳이고 전주천 좌안 도로가 뚫리면서 심하게 잘려나간 곳이다. 북쪽의 건 지산에 대응하는 남쪽의 봉우리라는 의미의 곤지산으로 전주부성의 북문과 풍남문을 잇는 선상에 위치하고 있어 곤지산에 올라보면 전주부의 중심축을 조망할 수 있었다. 곤지산 및 초록 바위를 물로 공격한다 해서 붙여진 “공수내”라 했다 하기도 하고, 그 때문에 바위에 늘 이끼가 껴 있어서 “초록 바위”라 하기도 했다 한다.
초록 바위 앞 전주천변은 전주 역사에 회한의 설움을 담고 있는 곳이다. 초록 바위는 전라 감영의 형장으로 유명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초록 바위 벼랑에는 북풍에 시달리며 굽어 자란 소나무가 몇 그루 서 있었고, 그 소나무의 북쪽 가지들은 다른 가지에 비해 눈에 띄게 길이가 짧았으며, 참형당한 죄인들의 머리를 소나무가지에 효수하여 천변에 모인 수많은 구경꾼들에게 전시했다고 한다
.▒ 남종삼 순교자 가문의 신원(伸寃)
남종삼 성인이 순교한 후 아버지 남상교 아우구스티노도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 수감되었으며 그해 2월 3일 관직을 사적(仕籍)에서 삭간(削刊) 당하고 옥중에서 거듭 배교의 유혹을 받았으나 단호히 이를 물리치고 그해 음력 3월 3일 옥중에서 순교하니 그의 나이 83세의 고령이었다. 남종삼의 아들 명희(明熙)는 14세 어린 나이에 전주성 밖 초록 바위에서 순교하였다. 아내 이조이도 창녕 현에 관노비로 유배되어 9년간 온갖 고초를 겪고 순교하여 남종삼 아우구스티노 순교자 집안에서 3대에 걸쳐 4명이 순교의 영광을 입었다. 1875년 남은 세 자녀가 노비에서 풀려났으며 1894년 갑오경장으로 남종삼 순교자의 가문은 신원설치(伸寃雪恥,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리고 창피스러운 일을 씻어 버림) 복권되었다.
네 번째 간 곳
● 서 천 교
아버지와 서로 격려하며 신앙을 지킨 18세의 조윤호 요셉 성인의 순교 터
서천교는 성 조윤호(1848~1866, 요셉)가 1866년 12월 23일 치명한 곳이다. 전주 다가 교와 매곡교 중간에 있는 서천교는 옛날 정읍 방면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아버지와 서로 격려하며 신앙을 지킨 18세의 조윤호 요셉 성인은 부친 조화서 성인이 참수된 지 열흘 후에 전주 서문 밖 서천교 형장에서 죽도록 매를 맞고 끝내는 노끈으로 목이 졸려 순교하였다.조윤호는 성인 조화서 베드로의 아들이며, 1839년에 치명한 조 안드레아의 손자이다. 1848년 충청도 신창에서 막내아들로 태중 교우로 태어났다. 8세 때에 모친을 여의었으며 1865년 아버지를 따라 전주 지방의 교우촌인 성지 동으로 이사하여 교우 처녀인 이 루치아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1년 후 병인박해가 확대되면서 조화서와 조윤호 부자는 1866년 12월 4일 성지 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정원지(일명 원조, 1846~1866, 베드로), 이명서(일명 재덕, 1821~1866, 베드로)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전주 감영에서 부친과 여러 차례에 걸친 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부친이 형장으로 갈 때에는 서로 천국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였다. 그 갇힌 곳은 좌옥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부자를 한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칼로 처형할 수 없다는 국법에 따라 부친이 참수된 지 10일 후인 12월 23일(혹은 12월 18일, 12월 28일)에 조윤호는 전주 서문 밖 서천교 형장에서 죽도록 매를 맞고 끝내는 노끈으로 목이 졸려 순교하였다. 당시 나이 18세였다.전하는 바에 의하면 죽임을 당한 조윤호 성인은 당시 거지들이 순교자의 시체를 질질 끌고 다니며 거렁뱅이 짓을 하곤 했는데 시체가 하도 참혹해서 거지가 끌고 가면 누구든지 겁에 질려 밥을 주었다고 한다.이로써 조윤호 집안은 3대에 걸쳐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그의 시신은 서천교 너머 용머리 고개에 묻혔다가, 그 후 교우들이 시체를 소양면 유상리 막고개에 있는 아버지 묘 옆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다른 증언록에는 시신을 용머리에 갖다버렸고 시신을 찾지 못했다고 한 점으로 볼 때 유상리 막고개로 조윤호 시신이 이장되지 못하고 아예 처음부터 시신을 찾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현재는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 순교자
◆ 성 조윤호 요셉(1848∼1866)아버지 조화서와 함께 순교한 조윤호는 충청도 신창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났다. 1864년 아버지를 따라 전주 지역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사하여 교우 처녀인 이 루치아와 혼인하였다. 1866년 12월 5일 아버지 조화서, 정원지, 이명서 등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감영에서 심문과 형벌을 예닐곱 차례 받았지만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아버지가 순교한 지 열흘 지난 12월 23일 전주 숲정이에서 곤장 16대를 맞은 뒤 19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여, 할아버지 조 안드레아와 아버지 조화서 베드로에 이어 가문의 3대가 함께 순교하는 영광을 얻었다.
|
첫댓글 두번째 전주 상반기 순례 체험기 -1
순교자님들의 이력을 일목요연하게 조사하고 카페에 게시하여 주시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