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정리:2007.1.25(목)
반선(07:30)-와운마을 천년송(08:25)-영원령(10:27)-무명봉(10:45)-영원사 갈림길(11:25)-상무주암 갈림길(11:50)-삼정산 헬기장(12:00)-중식-출발(13:00)-무명봉(14:05)-문수암 갈림길(14:30)-삼화리 갈림길(15:10)-실상사 갈림길(15:40)-삼화리(16:00)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자정에 전주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새벽 3시에 전주의 친우 L 선생과 합류하기 위해서이다. 신년 산행이기도 하고 그동안 남원산O도 만나본 지 오래되어 서로의 간절한 바람 끝에 지리산행이 계획되었다. 최근 나와 지리산 산행 때마다 주로 힘겨운 반야봉 언저리의 심원, 달궁으로 어렵게 산행한 터라 이번에는 부담 없는 삼정산으로 계획을 세웠다. 세월은 많이 흘러 삼정산도 다녀온 지 6년이 넘었다. 전주에 도착하니 새벽 3시가 채 못 되었는데 고속버스에서 내려 길가로 나오니 L 선생의 무쏘 차가 도착한다. L 선생의 말을 들으니 지금까지 술을 마시다 대리운전 기사를 콜하여 왔다고 한다. 작년 봄에도 술에 떡이 되어 L 선생은 바래봉 산행을 하지 못했었다.
오랜만의 만남에 무척이나 반갑다. 운전자를 바꾼 수동 무쏘 차는 묵직한 엔진 소리를 내며 차량 통행이 뜸한 전주와 남원 간 도로를 질주한다. 남원시청에서 남원산O을 만난 시간이 새벽 4시 반. 시청 앞 콩나물국밥집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반선에 도착하여 하늘을 바라보니 촘촘한 별들이 지리산 밤하늘을 수놓는다. 바람은 차갑지 않아 한낮에도 따뜻한 겨울 날씨가 예상된다. L 선생이 뒷좌석에서 코를 골며 단잠에 빠진 터라 차마 깨우지 못하고 남원산O과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차 안에서 잠시 눈을 붙인 후 날이 완전히 밝아서 산행을 시작한다.
오늘은 일단 와운마을로 들어가 영원령을 거쳐 지리산속의 지리산 전망대 삼정산을 오르기로 한다. 3명의 산꾼은 익숙한 뱀사골 진입로 길을 산책하는 마음으로 석실을 지나 와운마을로 진입하는 갈림길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잠시 휴식을 한다. 평일이고 계절이 겨울이라 탐방객이나 산님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와운마을로 진입하면서 산등성이마다 군데군데 눈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오르면서 잔설만 드문드문 보았을 뿐이나 지리산 북면의 중북부 능선에는 이렇게 겨울철에 눈이 많은 편이다.
가파른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니 곧 와운마을.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산비탈에 십여 가구의 농가에 산나물, 토종꿀, 고로쇠 수액을 채취하며 살아가던 전형적인 지리산 자락의 산골이던 와운마을은 곳곳에 현대화된 민박집이 들어섰고 가구 수도 눈에 띄게 늘었다. 와운마을에서는 명선 북릉을 따라 연하천에 이르는 루트가 있고, 실상사부터 삼각고지까지 뻗은 중북부 능선으로 오르는 샛길이 곳곳에 열려있다. 우리는 모처럼 천년송을 구경하고 그곳의 샛길을 이용하여 영원령으로 오르기로 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천년송으로 오르는 길은 나무 계단으로 반질반질 잘 닦여져 있다. 지리산 와운마을의 천년송은 수령이 500여 년으로 임진왜란 전부터 자생했다고 전하며 아직도 건장하고 우람하며 우산을 펼쳐 놓은 듯한 멋진 형상을 하고 있다. 와운마을 사람들은 천년송을 수호신으로 믿고 정월 초사흘 날이면 제를 지낸다고 하니 가히 명물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니 서쪽 심마니 능선 너머로 백두대간의 정령치와 큰 고리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천년송을 배경으로 친구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천년송 위로는 샛길로 출입을 하지 말라는 관리공단의 경고판이 있으나 별다른 방법이 없기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넘어선다. 이 샛길은 음정 마을 사람들과 반선 와운마을 사람들이 자주 넘나들던 길로써 간혹 지리 산꾼들이 이용하는 루트이다. 길은 잘 열려있다. 고도를 조금 높이니 명선 북릉 위로 반야봉이 봉긋이 보이기 시작한다. 화개재로 추정되는 안부와 토끼봉으로 오르는 능선도 아스라이 보인다. 오늘 새벽까지 술을 마셨던 L 선생은 체력이 달리는지 얼굴이 창백해졌으며 매우 힘들어하는 모습이다. 홀로 산행이면 단숨에 치고 올라갈 수 있으나 현재 특별한 방법이 없기에 안단테로 진행한다. 전방으로는 중북부 능선이 가까워졌으나 샛길이 우측으로 사면을 따라 영원령 방향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시간은 다소 지연된다.
지리산 북쪽 사면으로 종일 햇볕이 잘 들지 않는 음지이기에 적설량이 많다. 빠삭빠삭 과자가 바스러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고도를 높여 나간다. 천년송을 출발한 지 2시간이 되어서 비로소 영원령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암봉 위에 섰다. 6년 전 봄에 이곳에서 남원산O과 점심을 먹으며 지리산 풍광에 취해 넋이 나간 적이 있다. 오늘도 주변 경치가 근사하다. 서쪽으로는 묘봉치-만복대-정령치-고리봉-세걸산-바래봉-덕두산으로 이어지는 서북 능선이 장쾌하다. 달궁마을, 덕동마을, 부운마을, 팔랑마을도 보인다. 북쪽으로는 하얀 눈으로 치장한 반야봉도 지척이다. 고개를 돌려 동쪽을 바라보니 두류 능선-중봉-천왕봉-촛대봉-벽소령으로 이어지는 주능이 멋지다. 바로 아래로는 와운마을이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 같다. 한동안 머물며 지리산 곳곳을 시야로 더듬는다. 이제 삼정산이 있는 북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은 무명봉을 넘어 삼정산까지는 시간 반이면 족하다.
아이젠을 할 정도는 아니나 눈이 의외로 많다. 스패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혹 발목이 빠져 눈에 양말이 젖으나 무시한다. 삼정산과 고도가 거의 비슷한 무명봉에 올라 휴식을 취한다. 고도가 높은 남쪽을 바라보니 예쁜 엉덩이 모습의 반야봉이 거대하다. 북쪽으로는 삼정산이 가까운 시야에 잡혔다. 시장기가 돌아 삶은 달걀을 까서 2개씩 먹는다. 삼정산에 가서 맛난 부대찌개를 끓여 소주를 마시자며 힘을 내자고 꼬드기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7년 전 겨울. 삶이 무척 고단하여 훌쩍 중북부 능선을 홀로 올랐었다. 실상사에서 아침 일찍 출발한 산행은 어둑해질 무렵에서야 연하천 산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나긴 능선을 오르고 내리고, 미끄러지며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지리 주능을 바라보며 조바심을 내며 아연실색했었다. 실상사에서 삼각고지까지 오르며 나는 무척이나 외롭고 추웠으나 극기하여 실의에 빠진 나날 속에서 자신을 구출할 수 있었다.
삼정산은 시야에 가까워졌으나 쉽사리 정상을 내주지 않는다. 뻑적지근한 다리를 위로하며 남원산O을 뒤를 따라 영원사 갈림 내리막길을 막 시작하려던 터였다. " 어디에서 오십니까? " 헐! 복장을 보니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이다. 우리가 걷는 중북부 능선은 통제구역이다. 답변하기가 옹색해 사실대로 말했다. "와운마을에서 오는데요." " 샛길 산행을 하셨군요. 앞으론 정식 등산로 외에 다니시면 안 됩니다." " 네 " 깊은 산중에서 예상치 못한 곳에서 운명적인 만남이다. 지리 산꾼들이 가끔 겪는 일이다. 그는 혼자요. 우리는 셋이다. 사법권이 있는 그도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하얀 수염을 임꺽정처럼 덥수룩하게 기른 남원산O의 위엄에 기가 꺾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국립공원관리법을 위반한 우리가 잘못을 시인하였기에 그는 부드러운 태도를 보였다.
조심해서 잘 내려가시라는 그의 간곡한 말을 들으며 우리는 잠시 쉬던 발걸음을 다시 뗀다. 남원산O과 L 선생은 상무주암에 잠시 들른다고 하기에 먼저 삼정산 헬기장에 올랐다. 서둘러 배낭을 열고 산상의 성찬을 준비한다. 조리 준비를 마치고 버너 펌프질을 하니 화력이 시원찮다. 혹시 연료 체크를 하지 않았던가. 버너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찌개가 끓기도 전에 사망 신고를 한다. 할 수 없이 겨울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고체연료를 꺼내 돌 사이에서 화력을 만들었고 찌개가 구수하고 얼큰하게 끓을 무렵 남원산O과 L 선생이 도착한다. 겨울답지 않은 따뜻한 햇볕 아래 술잔을 돌리며 만남의 미학을 즐긴다. 사랑하고 좋아하는 친구들과 뜻이 통하고 지리산 품속에서 묻혔으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세월은 어느새 흘러 흘러 지리산을 같이 초등했던 우리를 30년 지기로 만들었다. 우리에게도 청춘은 있었다. 예쁜 소녀도 늙어서 할머니가 되듯이 자연의 순리는 거스를 수 없는 것. 가는 세월을 어찌 막을 수 있으랴. 누구나 자신이 늙어가는 모습을 볼 때 인생은 서글픈 것이다.
삼정산 헬기장을 출발하여 잔설을 밟으며 무명봉 위에 섰다. 임천강 건너 이곳에서 바라보는 준봉의 투구봉과 삼봉산에서 법화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압권이다. 겨울을 이기고 봄을 준비하는 풍요로운 산내면의 들판이 평화롭다. 시선을 돌려 동쪽을 바라보니 창암능선 너머로 백설의 천왕봉이 우뚝하다. 지리 산꾼들은 지리산 속에서 지리산이 그립다는 말들을 한다. 보고 또 보고. 오르고 또 올라도 다시 찾고 싶은 어머니의 품 지리산. 有智異山 登智異山이다. 이후의 하산은 능선을 치다가 희미한 길을 따라 삼화리로 내려서다 반가운 소식을 접한다. K 변호사 사무실 P 실장의 전화였다. 소송이 진행되던 사건이 원만하게 해결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남원에 나가 친구들의 위로와 축하를 받으며 시청앞 맛집 대성식당 동태찌개에 소주를 마신다. 오늘따라 정갈한 밑반찬과 동태찌개가 더욱 맛나 술이 계속 당긴 날이었다.
* 게으름에 산행기를 4개월이 지나서 쓰게 되었습니다. 사진을 보며 다시 그때를 회고합니다. 지리산은 늘 이렇게 그리움으로 남아있습니다. 2007.5.27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2.02 20: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