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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31世 천묵재(天默齋) 상형(尙馨) (齋 재계할 재)
昱公의 제2자로서 서기1585(선조18)을유(乙酉)년 4월 12일 출생하였고 서기1645(인조23)을유(乙酉)년 4월4일 61세로 졸함
墓 : 임실군 운암면 운종리 종산(鍾山) 묘좌(卯坐)
配位 : 정부인 선산임씨(善山林氏) 서기1586(선조19)병술(丙戌)년 5월1일 출생 신미(辛未)년 7월4일 졸(수46세) 생5남
墓 : 공묘(公墓)와 합봉
配位 : 정부인 남원윤씨(南原尹氏) 임술(壬戌)3월 6일 졸 생1남
墓 : 임실군 삼계면 산수리 (산34-1)
호창산(呼昌山) 발인동(發仁洞) 병좌(丙坐)
膝下에
第一子 : 문헌(文獻)통사랑(通仕郞)
第二子 : 문원(文源)장악정(掌樂正)
第三子 : 문재(文載) 석동(石洞)
第四子 : 문영(文英) 참의(參議)
第五子 : 문계(文啓) 진사(進士)
第六子 : 문중(文中)통덕랑(通德郞)
상형(尙馨)공의 묘 정면 卯坐
남원윤씨(南原尹氏)의 묘 호창산 병좌
원문 국역문
황조 배신 홍문교리 전주 이공 상형 묘 표
선생의 휘는 상형이시고 자는 덕선(德先), 호는 천묵재(天默齋)
효령대군 휘 보의 7대손으로 만력 을유(선조18년 1585년)년에 태어나시어 여덟살때 임진왜란을 피하여 안동으로 피난했는데 여기서 중국사람이 공을 보고 기이하다 동방에 큰 인물이 나왔다고 하였다.
임자(광해4년,1612)년에 사마시에 급제하고 같이 급제한 동료와 함께 상소를 올려 인목대비의 유폐를 항의하였으나 대답이 없으니 드디어 과업을 폐하고 여러사람과 더불어 호산을 방랑하니 스스로 칠광이라 불렀다.후에 사람들이 그 자취를 좇아 행하려 하였다.
인조 갑자(2년 1624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사계 김장생선생의 문하에서 빨리 배워서 깨우치는것이 반드시 선생이 제일이라 하였다, 계곡 장유 우복 정경세와 같이 경학에 밝다고 천거하였고 임금께서는 경연의 강론에 참석하라하여 물으셨다.
정묘(인조5년,1627년)년 호란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켰고 병자년 겨울에 홍문관 부수찬으로써 임금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독전어사에 임명되어 주야로 성을 순찰하는데 화살이 앞에 떨어지니 누가 조금 피하라고 하니 선생께서 꾸짖어 말하되 위험에 당하여 구차하게 면하려하는것은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하였다.
난리가 끝나자 먼저 강화도의 세 장수를 다스리기를 청하고 또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알릴것을 상소하였으나 말씀이 없었고 일찍이 묘당에서 만나 최정승(최명길)이 당시 급한일이 무엇이냐 물으니 선생은 즉시 척화신은 이미 청나라에 묶여 보내졌으니 강화신도 당연히 명나라에 박송해야할것이 급선무라하였다.최정승은 바로 해직되었고 공은 고향에 돌아왔다. 여러번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임종의 자손들을 경계하는 말씀이 없으셨다. 병자년 이후에 관직을 쓰지 말라고 하셨다. 동춘 송준길 선생께서 비문의 제목을 쓰시고 신독재 김집 선생께서 그 음기를 지었고 도암 이재선생께서 지석을 기록하시고 한수재 권상하 선생께서 문집의 서문을 지으셨다. 영조 병자(32년 1576년)년에 병자호란 척화신을 특별히 포상을 시행하니 특별한 은전으로 홍문관 부제학에 증직되셨고 또한 관원을 보내 묘전에 제사를 드렸고 철종 을묘(6년 1855년)년에 시호를 내리셨다.
오호라! 선생의 실적은 여러 선정께서 찬양하여 갖추어 실려져있으니 감히 더하여 기술할 수 없고 조정에서 전후하여 높히 보훈하였슴을 약기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하고자 함이다.
승정기원후 5경(고종7년 1870)삼월
칠대손 통정대부 돈영부 도정 회풍 삼가 짓고
구대손 윤이 삼가 쓰다.
우측에서 본 공의 묘
좌측에서 본 공의 묘
司 諫 李 公 墓 碣 銘
有明朝鮮通訓大夫行司諫院司諫知製敎兼 春秋館 編修官
世子侍講院輔德李公墓喝銘 幷序
今 上初載懋學時敏侍講臣 皆人英也 問有一後進早備 顧問最得學士之職 公其人也 惜手未盡其用 而夭嗇 其年粤 以乙酉四月寢疾不起 甲子僅一周 任實鐘山之麓 是其藏也 旣公之胤文載踵 佘文請銘 曰謹具鹿性石以須固辭不獲 按狀公諱尙馨字德先 氏分璿繼 我 恭定大王 第二子 孝寧大君補 卽公七代祖也 高祖諱璿孫漆山正後贈君 曾祖諱渾 贈承政院左承旨 祖諱慶胤 考諱昱 皆隱德不仕 妣長興任氏 士人大英之女 高麗太師 貞敬公懿之後 公少聰敏 從李公大甹 學專心經傳 大爲李公所歎 嘗旣長淹貫諸書 以及陰陽理氣尤情於易學 戊申丁外憂服闋中 壬子司馬天啓乙丑捷大科入成均館 戊辰冬陞學錄尋 以假注書入待筵 臣鄭經世 張維等一辭盛秤 公有經學上卽命參講問 以尙書朞三百璿耭玉衡註 及潮汐之理因錯擧也 經疑義公墮問響答剖析無難 上色悅之 旣退遣中使追問 公世閥與父業如何 皆無前異數一侍榮之翌年五月拜 侍講院說書 五月陞司書 我移禮曹佐郞 自是華聞彌大 庚午拜 司諫院正言遞爲典籍 歷兵曹佐郞正郞轉司憲府持平 遷文學兼春秋館記注官 旣由直講再爲正言知製敎 辛未梗養陳乞出監玉果縣尋遞 甲戌母夫人卒 旣色喪卽 拜弘文館副修撰疎辭 仍傑陣君德時弊習傳以經義 上優納之未幾値虜兵猝迫扈 駕入南漢山城上剳論諸將逗留兼獻城守之策 丁丑病遞旋陞修撰 又剳江都失守三翌因斥 兩司咐勢緩論狀不省移病 下鄕復拜 修撰不赴 疏陣急務移授持平 又上密疏皆救時之藥石也 戊寅再拜 校理掌令病不就 冬際輔德 當赴潘陽不敢言病卽帠就職朝廷愍而遞之 己卯授司諫校理 因早災進言累轉 兩司玉堂春坊病還鄕 庚辰又以執義赴召五月 復還鄕病深婁承召未赴 辛巳猝痿痺況痼移歲再除執義終不得進 每有命兄朝服加紳鳴咽涕泣 而己公天性仁厚 不爲崖岸斬截之行 惟以眞實不欺爲本謙恭自特恥言人過人無大小咸得歡心早耽經術見之於上 卄載帷幄 恩遇異常司見稽古力也 公配淑人林氏 善山名族 禮寶寺副正 克立之女 先公十五年 卒與公同原異塋男曰文獻 曰文源 曰文載 生員卽請銘者曰文英 曰文啓 女適幼學尹砥 次幼學楊雲擧 次幼學吳添喜 文獻及次兩女 皆早歿 文獻四男一女 文源二女 文載二男 文英一女 文啓一女 尹砥一男 吳添喜二女 皆幼銘曰
浴蘭兮沐芳俄依佩兮旣潔 固同氣其必合兮極晉接於書曰 豈若是
章句者兮泰肯棨兮刀響砉 不通經果何用兮尙推行其所學 胡然天
奪之速兮旴嗟乎今也則亡 俄撮迹兮鑱之貞石千秋萬世兮 其永圖
崇楨紀元二十二年己丑 正月 日
通政大夫 承政院右承旨 兼經筵參贊官 金集 撰
朝奉大夫 前行司憲府持平 宋浚吉 書
국역문
사 간 이 공 묘 갈 명
유명조선 통훈대부 행사간원 사간지제교 겸 충추관 편수관
세자시강원 보덕 이공 묘갈명 병서
금상(인조)의 초년에 학문에 힘써 시의에 민첩한 경연의 신하들이 모두 영특하였는데 그 중 하나 늦게 나아가 일찍 학덕을 갖추어 자문에 응하는 학사의 직에 가장 크게 얻은 분이 있었으니 공이 그분이시다. 아깝도다, 그 배우고 익힌 바를 다 하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뜨시니 그 해가 을유년(인조 23, 1645) 사월 병으로 누우시니 일어나지 못하시고 겨우 한 해 만에 임실 종산의 언덕에 장사 지내니 이곳이 공의 묘소이다. 이미 공의 아들 문재가 친히 나의 집을 찾아와 묘갈명을 청하는데 삼가 빗돌과 상석을 갖추어 새기고자 하니 사양하지 마시고 꼭 지어달라 하였다. 행장을 살펴보니 공은 이상형(李尙馨)이요, 자는 덕선(德先)이시다, 성씨는 왕족으로서 공정대왕(太宗)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 이보(李補)께서 공의 7대조이시다. 고조 이선손(李璿孫)은 칠산정이신데 뒤에 군(君)으로 증직되셨고, 증조 이혼(李渾)은 승정원의 좌승지에 증직되셨고, 할아버지는 이경윤(李慶胤)이시고 아버지는 이욱(李昱)이신데 모두 세상에 숨어 덕을 베풀며 벼슬하지 않았다. 어머니 장흥임씨는 선비 임대영의 따님으로 고려 때 태사인 정경공(貞敬公)의 후손이다. 공은 젊어서부터 총명하고 민첩하여 이대유(李大유, 活溪)에게 배웠는데 경전에 전심하니 이공께서 크게 될 것이라고 탄복하여 칭찬하였다. 장성해서는 널리 제서를 꿰뚫어 음양과 이기에 주력하여 주역에 더욱 정밀하였다. 무신년(선조 41, 1608)에 아버지께서 돌아 가시고 탈상 후 임자년(광해 4, 1612)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천계 을축년(인조 3, 1625)에 대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무진년(인조 6, 1628) 겨울에 학록으로 승진하고 바로 가주서가 되어 입시하였는데 경연의 신료 정경세, 장유 등이 한결같은 말로 공은 경학이 있다고 크게 칭찬하였다. 임금께서 즉시 서경을 갖고 와 침강하라 명하고, 1년 360일과 천체를 관측하던 기계의 주해와 밀물과 썰물의 이치에 대하여 다른 책에 잘못 거론되어 어긋나 의심이 나는 것을 물으니 공은 물음에 따라 어려움 없이 상세히 분석하여 대답하니 임금께서 매우 기쁜 얼굴로 물러간 뒤에 내시를 보내어 공의 문벌과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물어보았다. 모두 전에 아는 바와 다른 것은 없었고 일시에 얻은 영예였다. 다음해 정월에 시강원(세자) 설서에 배수되었고 오월에(세자 시강원) 사서로 승진되었고, 얼마 안되어 예조좌랑으로 옮겼고 이로부터 좋은 평판이 더욱 커졌다. 경오년(인조 8, 1630)에 사간원 정원에 배수되고 성균관 전적에 옮겨졌다가 병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사헌부 지평으로 전직되고 (세자시강원) 문학 겸 춘추관 기주관으로 옮겼다. 또한 이미 성균관 직강을 거쳐 다시 (사간원) 정언과 지제교가 되었다.
신미년(인조 9, 1631)에 어머니 봉양을 위해 외직으로 보내기를 아뢰니 옥과현감으로 나갔다. 얼마 안되어 갑술년 (인조 11, 1634)에 어머니께서 별세하시고 상기를 마치고 바로 홍문관 부수찬에 배수되시니 사직하는 상소와 함께 임금께 덕을 갖추어 경으로서 악습으로 전해오는 시폐를 조목조목 자세히 아뢰니 임금께서 좋게 가납하셨다. 얼마 안 되어 오랑캐 군대가 졸지에 쳐들어오니 임금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소(차자)를 올려 여려 장수들의 두류의 책임을 묻고 겸하여 성을 지킬 계책을 말씀드렸다. 정축년(인조 15, 1637)에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도리어 수찬으로 승진되니 소를 올려 강화도를 지키지 못한 세 장수를 탄핵하고 다음날 이러한 일을 세력에 붙어 느슨하게 대처한 양사(兩司 : 사간원 사헌부)를 물리치는 소를 올렸다. 병이 들어 정신을 치릴 수 없어 고향으로 내려왔고 다시 수찬을 주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상소를 올려 급한 정무를 아뢰었다. 사헌부 지평으로 옮겨졌고 또 은밀하게 상소를 올리니 모두 그 때의 상황을 구하는 약석(藥石)이었다. 무인년(인조 16, 1638)에 다시 교리, 장령을 주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겨울에 보덕을 제수하고 심양(沈陽)에 사신으로 명을 받았으나 병으로 가지 못한다고 감히 말할수 없어 가마에 실려 직에 나가니 조정에서 가엽게 여겨 교체하였다.
기묘년(인조 17,1639)에 사간과 교리에 제수되니 가뭄의 재앙을 말씀드렸고, 여러 번 양사와 홍문관, 세자시강원 등에 전직되었으나 병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경진년(인조 18, 1640)에 사헌부 집의로 부르니 부임했다가 오월에 병이 깊어 다시 환향했다. 여러 차례 이어 불렀으나 부임하지 못하고 신사년(인조 19, 1641)에 갑자기 수족이 저린 병이 깊어졌다. 다음해 다시 집의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못했다.
매양 왕명이 있을 때마다 조복에 띠를 두르고 흐느끼며 눈물을 흘릴 따름이었다. 공의 천성은 인후하고 오만하여 남과 어울리지 않는 행위는 하지 않으며, 오직 진실로서 속이지 않음을 근본으로 하여 겸양과 공손으로 스스로 지키고 남의 크거나 작거나한 허물을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니 다 마음이 기쁘고 즐거웠다. 경서의 학문을 즐겨 배워서 임금이 알게 되었으니 20년 동안 왕을 모신 참모로서 왕으로부터 은혜로운 대우를 받았으니 옛일을 배우고 고찰하여 지닌 힘이 보통이 아님을 알겠다.
부인 숙인 임씨는 선산의 명족으로 예빈시 부정 임극림의 따님이시다. 공보다 15년 먼저 졸하여 공의 묘소 같은 언덕에 따로 모셨다. 아들은 문헌과 문원, 문재, 문영, 문계이고 딸은 유학윤지, 유학 양윤거, 유학 오첨희에게 각각 출가하고 문헌과 다음 두 딸은 일찍 죽었다. 문원은 4남 1녀를 두었고 문원은 딸 둘, 문재는 아들 둘, 문영과 문계는 각각 딸 하나가 있다. 사위 윤지는 아들 하나, 오첨희는 딸 둘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명(銘)을 엮는다.
선비가 몸을 닦는 덕으로 목욕하니 난초의 향기 몸에 한결 깨끗하구나,
꼭 동기간에 그 마음 합쳐 날마다 나아가 자주 만나도다.
글로써 드리는 장과 귀가, 요소와 급소가 정확하니 명확하게 구분되도다.
경서에 통하지 않은 것은 무엇에 쓰리오,
그 배운 바를 미루어 행할 따름이다.
어찌하여 하늘은 이런 분을 빨리 뺏어간단 말이요. 슬프다. 지금은 안계시는구나
공의 행적을 찾아 모아 굳은 돌에 새겨 천추만세에 길이 전하고자 한다.
승정 기원 22년 을축(인조 27, 1649) 정월 일
통정대부 승정원 우승지 겸경연참찬관 김집 지음
조봉대부 전행 사헌부 지평 송준길 씀
(디지털한국학에서 퍼온 자료입니다.)
이상형(李尙馨)
시대 조선
생몰년 1585-1645(선조18-인조23)
본관 전주(全州)
자 덕선(德善)
호 천묵재(天默齋)
시호 충경(忠景)
활동분야 문신
1585(선조 18)∼1645(인조 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덕선(德善), 호는 천묵재(天默齋). 효령대군(孝寧大君)의 7대손으로, 욱(昱)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임대영(任大英)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12년(광해군 4)사마시를 거쳐, 1625년(인조 3)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에 들어가 1628년 학록(學錄)에 오르고, 곧 가주서(假注書)로 경연관이 되고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사서를 역임하고 예조좌랑이 되었다.
1630년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다가 전적으로 전직하고 이어 병조좌랑·정랑을 거쳐, 사헌부지평으로 전직되고, 문학(文學)으로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하고 또 직강을 역임한 뒤, 다시 정언으로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다음해 옥과현감으로 나갔다가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척화를 주장, 화의를 건의하는 최명길(崔鳴吉) 등을 탄핵하였다.
1638년 교리·장령 등을 제수받았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경서에 정통하였고 음양·지리에도 밝았으며, 특히 역학에 뛰어났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남원의 요계서원(蓼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천묵재유고》가 있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사초하기전 남원윤씨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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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 전면
신도비
강건너에서 본 충경공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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