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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사랑방 스크랩 인천시 동구 지명의 유래
홍성재 추천 0 조회 137 11.08.12 18: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인천시 동구 동의 명칭유래

(금창동, 만석동, 송림동, 송현동, 화수동, 화평동)

- 林明美 -

제1절 금창동(金昌洞)

1. 연혁

금창동은 본래 인천부 부내면 금곡리와 우각동(牛角洞) 지역인데 해방후 금곡리 지역은 금곡동이 되고 우각동 지역은 창영동(昌榮洞)이 되었으며 1985년 11월 15일 시 조례 제 1895호에 의거, 금곡동과 창영동을 통합하여 그 머리글자를 따서 금창동이 되었다. 1989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 12557호로 금곡동의 일부가 중구 인현동에 편입, 오늘에 이르고 있다.

1) 금곡동(金谷洞)

금곡동은 본래 인천부 부내면의 지역으로서 쇠골 또는 금곡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금곡리라 해서 인천부에 편입되고 해방후 동명 개정에 따라 1946년 1월 1일 금곡동이 되었다.

그후 1949년 8월 15일 인천부를 인천시로 고치는 동시에 금곡동을 갈라서 금곡1동과 금곡2동으로 분동하고 다시 두 동을 합쳐 금곡1,2동으로 하던 것을 1977년 5월 10일 다시 금곡동으로 개칭하고 1981년 인천직할시 동구 금곡동으로 되었으며, 1985년 11월 15일 창영동과 합쳐 금창동이 되었다.

1989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 12557호로 금곡동의 일부가 중구 인현동으로 편입되었으며 1995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인천광역시 동구 금창동이 되었다.

2) 창영동(昌榮洞)

창영동은 본래 인천부 부내면 우각동 지역으로 그 지형이 소의 뿔처럼 생겼다하여 쇠뿔고개, 쇠뿔, 솔뿌리고개 또는 우각동(牛角洞), 우각현(牛角峴), 송근현(松根峴)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우각리라 해서 인천부(시)에 편입되었으며 1946년 1월 1일 왜식으로 창영정(昌榮町)이라 하였다.

1946년 1월 1일,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다시 창영동이 되었으며 1985년 금곡동과 창영동이 통합되어 금창동이 되었으며 1995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인천광역시 동구 금창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금창동사무소는 인천광역시 동구 금창동 56번지이다.

2. 지명유래

금창동은 본래 부내면 금곡리와 우각동 지역인데 금곡리는 옛날 쇠가 난다고 하여 쇠골 또는 금곡(金谷)이라 한데서 비롯된 마을이름이다. 일제때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금곡리(金谷里)라 하였다가 1936년 일본식으로 금곡정(金谷町)이 된 것을 해방후 왜식 동명 개정에 따라 1946년 금곡동이 되었다.

 

 

▲1917년 발간된 우각리 부근도

창영동은 본래 인천부 부내면 우각동 지역으로 그 지형이 소의 뿔처럼 생겼다고 하여 쇠뿔고개, 쇠뿔, 솔뿌리고개 또는 한자로 우각동(牛角洞), 우각현(牛角峴), 송근현(松根峴)이라 부른데서 비롯된 마을이름이다.

이 우각동이 ‘창영(昌榮)’으로 바뀐 것은 1936년 제1차 부역확장 때 왜식으로 창영정(昌榮町)이라 바뀐데서 비롯되었는데 이 ‘창영’이란 ‘새롭게 번창하기를 기원한다’는 뜻에서 생긴 마을이름이다.

1917년 발간된 우각리부근도에서 보는바와 같이 우각리 남쪽에는 도산(桃山)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이곳이 오늘날 도원동이다. 우각리와 도산 사이에 있는 고개를 쇠뿔고개 일명 도원고개로 현재 도원전철역 부근이 된다. 이 고개는 1897년(광무원년) 3월 27일 경인철도 기공식이 거행되었던 역사적인 곳이다.

그후 1899년(광무3년) 4월 23일에 인천역에서 새로 제2차 경인철도 기공식을 거행하고 본격적으로 공사를 진행시켜 9월 18일에는 인천역에서 개통식을 거행하고 인천과 서울 노량진 사이에 가영업을 개시하기에 이르렀다.

3. 소지명

① 쇠골(金谷)[마을] : 금곡동의 중심 마을로 금곡이라 부른데서 금곡리, 금곡동이 되었다. 금창동이 되기 전 창영동의 서쪽, 송현1동의 동쪽지역이다.

② 우각동(쇠뿔, 쇠뿔고개, 牛角峴)[마을] : 창영동의 중심되는 마을로 쇠뿔, 쇠뿔고개, 우각션이라고도 부른다. 우리 전래의 고유한 토박이 땅이름 쇠뿔마을이 한자로 의역되어 우각동이 되고 일제시(1936) ‘새롭게 번창하기를 기원한다’는 뜻으로 창영동으로 개명 되었다가 금곡동과 합하여(1985) 금창동이 되었다.

③ 배다리[선창] : 옛날 조수가 이곳까지 통하여 배가 드나들고 선창이 있었던 곳으로 다리(橋)가 아니고 배가 닿았던 나루터이다.

 

▲금창동 행정구역도

4. 특기사항

1) 쇠뿔고개에서 거행된 경인철도 기공식

1897년(광무원년) 3월 27일 미국인 모오스(James R. Morse)는 쇠뿔고개(牛角峴:현재의 도원고개)에서 경인철도 기공식을 거행하고 공사를 착수하였다.

경인철도 부설권은 1894년(고종 31) 8월 20일에 조인된 조일서정(誓定)조관에 의거 일본에게 강압적으로 탈취 당한데다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4개국 공사가 이권을 한 나라에만 부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이의를 제기, 마침내 조선 정부는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인 모오스에게 부여한 것이다.

철도 부설공사은 인천역의 위치 문제로 지연되었다.

처음에는 신포동(탄포)을 매립하여 이곳에 인천역을 설치할 계획으로 공사를 진행시켰으나 일본인 지주와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환전국과 응봉산(자유공원) 뒤를 우회하여 현재의 인천역으로 선로를 변경하게 되었다.

그후 모오스는 공사자금조달에 실패, 1899년(광무 3) 철도부설권은 일본의 경인철도인수조합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인수조합은 명칭을 경인철도합자회사로 바꾸고 1899년 4월 23일 인천역에서 새로 제2차 경인철도 기공식을 거행하고 본격적으로 공사를 진행시켜 같은 해 9월 18일에 인철역에서 개통식을 거행하고 인천과 노량진 사이(21?)에 가영업을 개시하기에 이르렀다.

노량진에서 한강까지의 공사는 9월 30일에 끝이 났으나 한강철교공사는 1900년(광무 4) 7월 5일에야 끝이 났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12일 종착역인 서대문역에서 개통식을 거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경인철도 부설당시에 설치된 우각동역은 1906년(광무 10) 4월에 폐지되고 당초 축현역이 현재의 청과물 시장부근에 있었으나 개량공사에 따른 선로 변경으로 1908년(융희 2) 12월에 현재의 동인천역으로 신축, 이전되었는데 1926년 4월 25일에 이르러 상인천역으로 개칭되었다.

1901년(광무 5) 8월 21일에 경부철도가 기공되자 경인철도는 1903년(광무 7) 10월 30일에 경부철도주식회사로 합병되어 경부철도주식회사 경인선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1906년(광무 10) 2월에 통감부가 설치되자 이 해 7월 1일을 기하여 경인ㆍ경부 양 철도는 경부철도매수법에 따라 통감부 철도관리국으로 넘어갔고 1910년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자 경인철도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으로 이관되었다.

2) 배다리

경동 큰길에서 철도길을 빠져 나오게 되면 중앙시장, 금곡동 입구가 된다. 19세기 말까ㅓ지 이곳에 큰 갯골이 통해 있어 만조 때가 되면 중앙시장 입구와 송현초등학교 일대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배를 댈 수 있는 다리가 만들어지면서 ‘배다리’라는 이름이 생겼다.

개항이후 불어난 일본인들에 의해 채미전거리 끝쪽으로 밀려난 한국 상인들은 배다리쪽으로 몰렸으며 개항이전 부터도 이곳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고 한다.

채미전 거리가 끝나는 부분인 배다리 인근에는 죽재상과 공구상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경동, 유동, 도원동으로 이어졌다. 주변을 통과하는 공설운동장과 동인천을 연결하는 도로는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차 두 대가 겨우 통과할 정도였으나 1985년 도로확장계획에 따라 도로 확장 부지로 결정되면서 지난 90년대까지 이곳을 지켜온 상인들이 뿔뿔이 흩어져 지금은 10여개 남짓한 상가만이 배다리의 명성을 지키고 있다.

 

 

제2절 만석동

1. 연혁

만석동은 본래 인천부 부내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괭이부리(猫島)와 다소면의 수유리 일부를 병합하여 왜식으로 만석정(萬石町)이라 하여 인천부(시)에 편입되었는데 해방후 1946년 1월 1일 왜식 동명변경에 의하여 만석동이 되었고 1963년 1월 1일 인천시 구제 실시에 따라 인천시 동구 만석동으로 개칭되었다.

1981년 7월 1일 법률 제 3424호에 의거 인천직할시 동구 만석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엇고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89호에 의거, 인천광역시 동구 만석동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지명유래

 

▲1917년 발간된 만석동 부근도

만석동은 두가지의 서로 다른 지명유래가 있다. 그 첫째는 만석군이 난다 하여 만석굴 또는 만석동이라 부른다는 주장과 옛날 삼남지방의 세곡을 쌓아두는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쌀이 많이 모이는 곳’이란 뜻에서 만석동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흔히 넓은 들판 부근에 위치한 마을에는 만석(萬石)을 거두어 들이는 부자가 났다거나 날 곳이라는 뜻에서 만석동 또는 만석골이라는 마을이름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인천 만석동의 경우, 척박한 바닷가의 마을에서 만석군의 부자가 날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충청, 전라, 경상도 등 삼남지방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을 세곡선에 싣고 오다가 강화수로가 험난하여 이곳에 세곡을 쌓아두었다가 육로로 서울로 운반했으리라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서구 원창동에는 강화수로의 험난처 손돌목을 거치지 않고 이곳에 큰 창고를 만들어 세곡을 쌓아 두었다가 육로로 한양으로 운송하였다는 사실이 각종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만석동이 최초로 등장된 때는 1903년(광무 7) 1월 부내면이 신설되면서 고잔리를 만석동, 화촌동을 평리로 구분하였다. 부내면 신설 당시의 관할 동명은 만석동을 비롯 답동, 외동, 내동, 용동, 신창동, 화개동, 각국 거류지 등이다.

한편, 1963년 만석동으로 편입된 작약도(芍藥島)는 본래 물치(勿淄)라는 섬이었다. 일제때 섬의 형태가 마치 ‘작약꽃 봉우리’같아고 하여 붙인 작약도의 이름은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 함선의 이름을 따서 보아제(Borsie)라고 하였는가 하면 신미양요 때는 나무가 울창하여 ‘우디 아일랜드’(木島:Wood Island)라고도 불리었다.

이 섬의 본이름은 물치(勿淄) 또는 무치(茂致ㆍ舞雉)라고 불렀는데 물치는 별뜻이 없고 무치는 ‘꿩이 춤추는 섬’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땅이름의 함정이다. 여기에서 ‘勿’자나 ‘茂ㆍ舞’자는 한자의 의미가 아니고 단지 소리(音)만 의미가 있는 것으로 ‘물ㆍ무’는 물(水)이라는 순수한 우리 토박이 말이다. 예를 들면 어린이들은 ‘물’을 완전히 발음하지 못하고 ‘무 또는 므ㆍ미’라고도 소리낸다.

그리고 ‘치’란 ‘치다, 받치다’의 의미일 수도 있다. 따라서 강화해협의 거센 조류를 치받는 섬이 ‘물치’라는 섬이다. 즉 ‘물에 받치는 섬’이라고도 풀이할 수 있다.

3. 소지명

① 괭이부리(猫島)[마을] : 만석동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서쪽에 있는 산부리가 괭이(고양이)처럼 생긴 섬이었는데 바다를 메워 육지가 되었다.

② 수유리(水踰里, 무네미)[마을] : 화수동, 만석동에 걸쳐 있는 마을로 수유, 무네미라고도 부른다. 옛날 바닷물이 넘어 들어왔다고 하여 ‘물넘이->무너미->무네미’가 되었고 다시 한자로 수유, 수유리라고 의역된 것이다.

③ 작약도(勿淄, 舞雉)[섬] : 괭이부리 북서쪽에 있는 섬으로 본디 이름은 물치, 무치였다. 작약도는 일제때 붙인 이름이며 외국인들은 보아제섬 또는 우디 아일랜드라고도 불렀다.

④ 작약도 등대[등대] : 작약도 동쪽에 있는 등대

⑤ 묘도포대터[고적] : 괭이부리에 있는 조선 말기의 포대터

⑥ 만석고가도로[도로] : 길이 333m, 폭 9m의 고가도로

 

▲만석동 행정구역도

4. 특기사항

1) 물치 - 작약도

월미도 나루에서 북서쪽으로 2.50km, 영종도 나루에서 북동쪽으로 500m 거리에 위치한 작약도는 옛날에는 부천군에 속한 섬이었으나 1963년 만석동에 편입된 아름다운 섬이다.

일제때 스스끼라는 일본인 소유였으나 해방후 화수동에 살던 이종문(李鐘文)이란 사람이 여기에 고아원을 설치, 운영하다가 6.25와 더불어 폐쇄되고 말았다. 그후 자유당시절에는 성창희(成昌熙)란 사람이 불법으로 불하받았다고 해서 한 때 문제가 된 적도 있다.

작약도란 이름은 일제때 붙인 이름으로 원명은 물치 또는 무치였다.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 함선의 이름을 따서 ‘보아제’라고 하였는가 하면 신미양요 때는 섬에 나무가 울창하여 ‘우디 아일랜드(Wood Island)’라고도 불렀다.

인천의 기항시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작약도는 구한말 외세가 침입할 때 여러 외국 선박들이 이 l섬 부근에 주력을 정비시키고 행동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를테면 1886년(고종23) 독일인 오페르트가 서양 선박과 병인양요의 프랑스 함대들의 주력이 되는 선박이나 함대들을 이 섬 부근에 정박시켜 놓고 한강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이러한 외세의 침입으로 작약도의 이름도 다양했으며 천혜의 아름다운 지형과 수목으로 덮혀 있는 피서지로 유명하여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해변에는 모래밭이 없어 수영하기에는 곤란하나 조약돌이 깔려 있어 썰물에도 경관이 그리 삭막하지는 않다. 섬에는 크게 자란 소나무 사이로 휴식시설이 있고 어린이 놀이시설을 비롯한 소규모의 오락장과 대중식당, 매점, 간이 숙박업소 등이 고루 갖추어져 있어 유원지로서는 별불편이 없으나 무엇인가 특색있는 것이 없다는 아쉬움을 금할 수가 없다.

교통편은 연안부두에서 출항하는 한보관광의 쾌속선과 월미도 부두에서 출항하는 코스모스유람선이 수시로 운항하고 있다.

2) 괭이부리의 호랑이굴

만석동의 북서쪽 묘도(猫島) 또는 괭이부리라는 곳이 있다.

옛날 이곳 해변에는 산림이 울창하고 한적한 곳이었다. 어느 화창한 봄날에 마을 부녀자 대여섯명이 나물을 캐러 괭이부리산으로 가서 나물을 캐며 산을 돌아다니다가 굴을 하나 발견하였다.

굴안에는 호랑이 새끼 3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들은 귀여운 호랑이 새끼의 모습을 지켜 보고 있는데 갑자기 어미 호랑이가 나타나 ‘어흥’하고 으르렁거렸다.

혼비백산한 부녀자들은 나물바구니와 수건등을 버리고 집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에 그들이 노히고온 바구니와 수건 등이 마을 입구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아마도 그 호랑이가 제 새끼들을 해하지 않아 고맙다고 가져다 놓은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당시 만석동은 포구였는데 그 근방에 범의 굴이 있었다고 하니 흥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다.

3) 고양이와 개에 얽힌 전설

옛날 인천 어느 바닷가에 영감과 노파가 오막집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영감은 매일 바닷가에 나가서 고기를 낚아 그것으로 겨우 끼니를 이어갔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영감은 일찍부터 고기를 낚았으나 웬일인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다.

벌써 해는 수평선으로 기울고 있건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으니 초조하기 이를데 없었다.

영감은 마지막으로 낚시를 던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엇인가 무거운 것이 낚시에 걸렸다. 그것을 끌어 올려보니 아주 큰 잉어였다.

“할아버지, 제발 살려 주세요.”

잉어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비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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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절 송림동(松林洞)

 

1. 연혁

송림동은 본래 인천부 다소면(多所面)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새말, 매하지, 장승거리, 샛골, 활터고개를 병합하여 송림이라 하였는데 1936년 제1차 인천부역 확장때 일본식으로 송림정(松林町)이 되었다가 해방후 1946년 1월 1일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송림동이 되었다.

1949년 8월 15일, 법률 제32호로 지방자치법 시행에 따라 인천부를 인천시로 개칭할 때 송림동은 송림1,2,3,4동으로 분동되고 1957년 송림1동과 송림2동을 합하여 송림1,2동으로 되엇으며 1968년 1월 1일, 시 조례 제515호에 의거 송림3동을 송림3동 동부동과 송림3동 서부동으로 분동되고 1970년 7월 1일 시조례 제628호에 따라 송림4동을 송림4동과 궁현동(弓峴洞)으로, 송림1,2동을 송림1동과 송림2동으로 다시 분동되었다.

1977년 5월 10일 시조례 제1057호에 의거 송림3동 동부동을 송림5동으로, 송림3동 서부동을 송림3동으로 그리고 궁현동은 송림6동으로 개정되고 1981년 7월 1일 직할시 승격으로 인천직할시 동구 송림1~6동으로 되고 1995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인천광역시 동구 송림1~6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지명유래

송림동은 본래 인천부 다소면의 지역으로서 일명 수도국산이라 불리우는 만수산 일대에 소나무가 많았으므로 송림(松林) 또는 송림동(松林洞)이라 하였다.

1896년(건양 1) 8월 4일 칙령 제35호 ‘지방제도 개정’ 및 제36호 ‘지방제도 관제, 봉급, 경비 개정의 건’을 반포하여 23도제를 폐지하고 13도제를 취하게 되었는데 이때 전국행정구역 수는 13도, 8부(府), 1목(牧), 331군이었는데 경기도에만 인천부를 비롯 강화부, 광주부, 개성부 등 무려 4개의부가 있었다.

당시 인천부에서 관할하던 면(面)은 10개였으며 다소면(多所面)관할 동리는 송림리(현 松林洞)를 비롯 송현동(松峴洞), 화도동(花島洞:현 도화동 일부), 독각동(獨脚洞:현 도원동 일부) 등이었다. 송림동의 명칭은 이때 비로소 행정동명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현재 송림6동인 옛날 궁현동(弓峴洞)은 일본 절이 있었던 부처산에 조선조말 활터가 있어서 붙여진 마을이름으로 일명 활터고개라고도 부른다.

 

▲1917년 발간된 지형도상의 송림동 부근도

 

3. 소지명

 

▲송림1~6동의 행정구역도

① 새말(바깥 송림)[마을] : 송림 바깥쪽에 새로 된 마을로 바깥 송림이라고도 부른다.

② 샛골(間谷, 鳥谷)[마을] : 송현3동에 있는 마을로 간곡(間谷), 조곡(鳥谷)이라고도 불리는데 간곡은 ‘사이골->샛골->間谷(간곡)’으로 바뀐 것으로 사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또 조곡이라 이름한 것은 ‘사이=새’를 조류인 새(鳥)로 표기한 것이다.

송현3동의 샛골은 해방전 부유층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아직도 한옥기와집이 남아있다.

③ 장승거리(장승배기)[마을] : 송림동에 있는 마을로 마을입구에 장승이 서 있었으며 장승배기라고도 부른다.

④ 매하지[마을] : 송림동에 있는 마을

⑤ 활터고개(弓峴)[마을] : 송림동 활터고개에 있는 마을로 궁현(弓峴)이라고도 불렀다. 송림4동은 본래 일본절(大憲학원 자리)이 있었던 부처산에서부터 조선조 말에 활터가 있었던 활터고개로 까지로 심한 구릉지대였다. 현재 옛 궁현동은 송현6동으로 분동되었다.

⑥ 활터고개(헐떡고개, 弓峴)[고개] : 송림동에 있는 고개로 옛날 활터가 있어 궁현(弓峴)또는 헐떡고개라고도 부른다.

⑦ 안 송림[마을] : 송림 안쪽에 있는 마을

⑧ 음나무고개(楡峴)[고개] : 활터고개 동쪽에 있는 고개로 커다란 느릅나무가 있었으며 유현이라고도 부른다.

⑨ 부처산[산] : 송림5동에 있는 산으로 옛날 이 산에 일본절이 있었다. 그 산비탈에 부처골이 있다.

⑩ 송림시장[장] : 송림3동에 있는 시장

⑪ 송림 중앙도매시장[장] : 송림동 중앙에 있는 도매시장

 

 

제4절 송현동(松峴洞)

 

1. 연혁

송현동은 본래 인천부 다소면의 지역으로서 일제때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절굴을 병합하여 송현리라 해서 인천부에 편입되었는데 1936년 제1차 인천부역확장 때 왜식으로 송현정(松峴町)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송현동이 되었다. 1962년 5월 21일 시조례 제327호에 의가 송현1,2,3,4동으로 분동되었는데 1968년 1월 1일 인천시의 구제 실시에 따라 동구에 속하게 되었고 1977년 5월 10일 시 조례 제1075호에 의거 송현4동은 화수2동에 넘겨 주고 현재 송현1,2,3동만 남게 되었다.

1981년 직할시 승격으로 인천직할시 동구 송현1,2,3동이 되고 19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인천광역시 동구 송현1,2,3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 송현1동

동인천역 배후로부터 수도국산 배수지 부근에 걸쳐있는 송현1동은 1962년 시 조례 제327호에 의거 송현동으로 분동되었다. 1968년 인천시의 구제 실시에 따라 동구에 속하게 되었고 1981년 직할시 승격으로 인천직할시 동구 송현1동이 되었으며 19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인천광역시 중구 송현1동이 되었다.

2) 송현2동

원래 큰 갯골이 내륙으로 깊숙이 이어진 수문통지역으로 1930년대 말에 이 lrht을 매립하여 공장 부지와 주택가를 조성한 송현2동은 1962년 5월 시 조례 제327호에 의거 송현동을 분동하여 생긴 동이다. 이 지역은 제물포와 더불어 자연적인 항구가 형성, 당시 주민들이 모여 살았으나 8.15해방과 함께 해외거주 국민들이 들어오면서부터 타주민이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6.25동란으로 피난민들이 입주, 판자집에 거주하면서 피난민 마을로 변모하였다. 그후 1956년 수문통 하천을 통하여 물자수급이 빈번해지자 수문통 하천변에 공작창이 건립돼 근로자들이 집단 거주하게 되었으나 6~70년대 부로크로 건축된 낡은 건물 등 낙후된 환경으로 수문통 시장을 불량지구로 지정, 도로 개설공사로 인한 보상과 철거가 함께 이루어졌다.

1968년 인천시의 구제 실시에 따라 동구에 속하게 되었고 1981년 직할시 승격으로 인천직할시 동구 송현2동이 되었으며 19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인천광역시 동구 송현2동이 되었다.

3) 송현3동

본래 수도국산 북쪽 기슭으로 해면을 넓게 매립하여 인천제철 제1공장과 수출6단지가 조성되어 있는 송현3동은 1962년 5월 시 조례 제 327호에 의거 송현동을 분동하여 생긴 동이다. 1968년 1월 법률 제1919호에 의거 동구에 속하게 되었고 같은 해 11월 당시 전두환대통령 초도순시중 재개발 지시에 따라 불량주택 531동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5층 아파트 22개동, 9백세대분을 지어 지역주민들을 입주시켰다. 1981년 직할시 승격으로 인천직할시 동구 송현3동이 되었으며 19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인천광역시 동구 송현3동이 되었다.

 

▲1917년 발간된 송현리 부근도

 

2. 지명유래

송현동은 본래 인천부 다소면(多所面)의 지역으로서 소나무가 많은 고개였으므로 솔고개

 

▲송현1~3동 행정구역도

 

또는 한자로 송현(松峴)이라 하였다. 솔고개는 다른 말로 솔재, 송치(松峙)라고도 부르는데 송치의 ‘치(峙)’자는 ‘산우뚝할 치’자이므로 대체로 높은 고개에 붙은 고개이름이다. 이 송치는 변음되어 송티, 솔티라고도 부르는데 동구의 송현동은 낮은 고개이므로 ‘치(峙)’자는 사용하지 않고 솔고개 또는 송현이라 호칭하고 있다.

1789년(정조13년)에 발간된 「호구총수」, 1871년 발간「인천부읍지」에는 ‘송현동’의 명칭은 보이지 않으며 조선조말 인천부 다소면에 송현리(松峴里)가 최초로 등장하게 된다. 「호구총수」나 「인천부읍지」에는 다소면에 ‘사미리, 비랑리, 충훈부리, 송림리, 독정리, 선창리(船槍里), 장천리, 화동리, 도마교리, 고잔리’가 있었는데 송현동 지역은 선창리 지역으로 추정된다.

 

3. 소지명

① 솔고개[마을] : 송현(松峴)동의 으뜸된 마을

② 수문통(水門桶)거리[마을] : 수문통에 있는 마을로 현재 송현3동지역이다.

③ 절굴[마을] : 송현동에 있는 마을로 옛날 절이 있어 생겨난 마을이다.

④ 만수산(수도국산)[산, 배수장] : 송현동에 있는 산으로 인천시의 식수를 대주는 못이 있어 흔히 수도국산(水道局山)이라고 부른다. 배수장은 1910년 12월 1일 개설하였으며 인천상수도개발기념비가 세워져 있다.(송현3동)

⑤ 똥고개[고개] : 송현동에 있는 고개

⑥ 송현교(松峴橋) : 송현동에 있는 다리

⑦ 성제동약물터[약우물터] : 송현동에 있는 약물터로 성제동(誠齊洞) 또는 약우물터라고 부른다.

⑧ 수문통(水門桶)[물길] : 송현동에 있는 배수로

⑨ 송현시장(松峴市場)[장] : 송현1동에 있는 시장

⑩ 수문통 자유시장[장] : 수문통에 있는 사설 시장으로 송현2동에 있다.

⑪ 중앙시장[장] : 송현1동에 있는 시장으로 양키시장이라고도 부른다.

 

 

제5절 화수동(花水洞)

1. 연혁

화수동은 본래 인천부 다소면(多所面)지역인데 1879년 화도진이 설치될 때만 하여도 화수동 일대에는 초가 몇 채밖에 없는 작은 포구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촌리, 화도동, 수유리를 병합하여 신화수리(新花水里)라 하여 인천부(시)에 편입되었는데 1936년 왜식으로 화수정(花水町)이라 하다가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정을 동으로 고쳐 화수동(花水洞)이 되었다.

1962년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화수동을 갈라서 화수1,2,3동으로 나누었다가 1968년 1월 1일 시 조례 제515호(1967년 12월 공포)에 의거 화수1,2,3동과 송현4동을 화수1,3동과 화수2동, 송현4동 등 2개동으로 재편, 인천시 동구에 속하게 되었고 1977년 5월 10일 시 조례 제1075호에 의거 화수1,3동을 화수1동으로, 화수2동과 송현4동을 합하여 화수2동으로 고친 것이다.

1981년 직할시 승격으로 인천직할시 동구 화수1,2동이 되고 19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인천광역시 동구 화수1,2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 화수1동

1882년(고종19) 5월 22일, 화수동 128번지에서 한국의 신헌대사와 미국의 슈벨트제독간에 한국과 미국이 최초로 맺은 조약인 한ㆍ미수교통상죠약을 조인한 화수1동은 1914년 신화수리가 되었다가 1936년 왜식으로 화수정이 되었다. 1947년 왜식동명 변경에 의하여 화수동이 되었고 1962년 화수동을 갈라서 화수1,2,3동으로 나누었다가 1968년 시 조례 제515호에 의거 화수1,3동이 되어 인천시 동구에 속하게 되었고 1977년 시 조례 제1075호에 의거 화수1,3동을 화수1동으로 고쳤다.

1981년 직할시 승격으로 인천직할시 동구 화수1동이 되고 19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인천광역시 동구 화수1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화수2동

인천부 화도동 지역인 화수2동은 1914년 신화수리가 되었다가 1936년 왜식으로 화수정이 된 것을 1947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화수동이 되었다. 1962년 화수동을 갈라서 화수1,2,3동으로 나누었다가 1968년 시 조례 제515호에 의거 화수2동과 송현4동을 합쳐서 화수2, 송현4동이라 한 것을 1977년 시 조례 제1075호에 의거 화수2, 송현4동을 화수2동으로 고친 것이다.

화수2동을 일찍이 화수 부두가 있어서 해방전에는 화목항(火木港)으로, 해방후에는 어항으로 한 때 활기를 띤적이 있으며 최근에는 미륭아파트가 조성되었다.

 

2. 지명유래

화수동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촌리(新村里), 화도동(花島洞-화도진), 수유리(水踰里)를 병합하여 세 마을이름의 첫 자를 따서 신화수(新花水)라 개칭한 합성지명이다. 세 마을 중 신촌리는 새로 생긴 마을로 새말, 새마을, 신기 등으로 불리우며 수유리는 옛날 바닷물이 넘어 들어 왔다고 하여 붙여진 마을 이름으로 무네미, 물넘이말이라고도 불리운다. 화도(花島)마을은 마을 지형이 꽃과 같다거나 꽃이 많아 붙여진 땅이름이라고 해설하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신중히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즉 화수동은 화평동, 만석동과 함께 인천부 다소면 고잔리(古棧里)소속 마을이었다. 고잔은 ‘곶(串)의 안쪽 마을’을 뜻하는데 1902년 제물포지역이 개항되고 호수가 늘어 나면서 마을이 발전되어 곶(串)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곶마을’이 되고 곶마을은 부르기 쉽게 꽃마을 또는 화촌(花村), 화촌동이 되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또 이 마을이 섬처럼 보여 ‘곶섬’이 ‘꽃섬’이 되고 다시 한자로 ‘화도(花島)’로 변천되었으리라 추정된다. 따라서 화수동의 지명유래는 화촌동(花村洞)과 수유리(水踰里)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합성지명으로 곶(串)과 관련있는 마을이름이라 할 수 있다.

인천에는 옛날 4곳의 고잔동이 있었는데 인천지구의 고잔동은 한자로 ‘古棧’이고 부평지구의 고잔은 한자로 ‘高棧’이었다. 인천부 다소면의 고잔리는 오늘날 화수동을 비롯 화평동, 송학동, 만석동, 신생동, 항동, 해안동, 선린동, 관동, 주앙ㅇ동까지의 지역이었고 1883년 인천이 개항된 후, 외국인의 거주지로 되어 그 이름이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현재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인천부 조동면 고잔리(古棧里)였던 남동구 고잔리와 서구 경서동지역과 석남동의 고잔리는 ‘高棧里’라고 한자로 표기하였으나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마을이름이 되었다.

3. 소지명

① 무네미(水踰里)[마을] : 화수동에 있는 마을로 옛날 바닷물이 이 마을까지 넘어 들어왔다고 한다.

② 새말(新村洞)[마을] : 화수동에 새로된 마을로 신촌동이라고도 부르며 화수동과 만석동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③ 화도(花島)[마을] : 화수동에서 으뜸된 마을로 화수동 128-163번지에 화도진이 복원되어 있다.

④ 화도고개[고개] : 화도에서 화평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⑤ 북인천항(北仁川港, 화수부두, 나무부두)[항구] : 화수동 북쪽에 있는 항구로 나무부두, 화두부두라고도 부름

⑥ 조기부두(朝機埠頭ㆍ船渠)[항구] : 나무선창 동쪽에 있는 항구로 조선기계제작소가 위치하고 있다.

⑦ 쌍우물[우물] : 무네미 어귀에 쌍으로 있던 우물

⑧ 화도진(花島鎭)[터] : 화수동 화도마을일대에 있는 화도진(터)로 1879년(고종 16)에 설치하였고 1988년에 복원하였다.

 

▲화수1,2동의 행정구역도

 

4. 특기사항

1) 화도진공원(인천광역시 동구 화수동 128~162번지)

화도진(지)은 외국배가 들어오는 것을 대비하기 위하여 조선조말 1879년(고종16) 7월에 설치하였던 각 수영 병영 밑에 두었던 직소를 말한다.

당시 서울로 들어가는 모든 배는 반드시 이곳 인천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인천부는 1875년(고종12)에 이미 방어영으로 격을 높였으며 이때는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직후로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이곳에 진을 설치할 필요성이 생겼다.

1879년(고종16) 7월 1일, 어영대장 신정희(申正熙)를 보내어 포대와 진사(鎭舍)를 만들어 화도진이라 이름 불였고 부평에 만든 진은 연희진(連喜鎭)이라 하였다.

화도진과 연희진은 연안 각지의 포대를 관할하기 위하여 만든 진영으로 읍과 진사이에 관할을 달리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같은 해 11월 15일 두 진 부근에 1개 면씩을 딸려 각각 독립된 진으로 만들었다.

당시 화도진은 남북으로 향하는 구릉 중턱에 자리잡고 있어 동쪽은 바다를 바라볼 수 있고 삼면이 능선인 까닭에 육지를 깊숙이 올라야만 발견할 수 있는 최적의 진지였다고 한다.

특히 화도진은 1882년(고종19) 5월 22일 조선의 전권대사 신헌과 미국의 전권대신 로버트 웰슨 슈펠트제독 사이에 구미제국과는 최초로 체결된 한미수호통상조약이 조인된 장소로 유명하다. 이어 같은해 6월 한영, 한독간의 수호통상조약도 바로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한미수교 100주년이 되는 1982년, 인천시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 일대를 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을 세우고 1차년도인 1982년, 3억원을 들여 5백평을 개발하고 기념표지석을 세웠다.

이어 연차적으로 공사를 실시, 1988년 12월말 화도진을 완전히 복원하고 각종 편의, 부대시설을 갖추어 일반에 공개했다.

총면적 6,252평에 33억1천5백만원의 공사비를 투입하여 화도진 옛모습을 되찾게 되었으며 이로써 화도진은 도심의 휴식공간은 물론, 조선조말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서 많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인천의 새 명소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현재 화도진공원은 동헌(東軒), 내사(內舍), 사랑채, 전시관 등의 건물로 조성되어 있는데 동헌은 관리들이 집무를 행하던 장소로 당시 한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모습이 밀랍인형으로 제작되어 있으며 내사는 안주인의 거처로 안채라고도 부르며 안방에는 보료, 반짇고리, 버선장, 3층장, 반닫이 등 고전미가 풍기는 각종 유물들이 진열돼 있고 대청마루에는 찬장과 쌀뒤주, 장탁자들이 당시의 생활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사랑채는 일반적으로 바깥 주인이 거처하며 학덕이 높고 사회적 지위나 가세가 넉넉할수록 그 규모가 크고 당대 사회 문화의 척도로서 주인의 정신적 성향, 경제적 능력을 말해주는가 하면 수군기지였던 화도진에서의 사랑채는 병사들이 기거하던 병영건물의 하나로 사용되었다.

 

 

제6절 화평동(花平洞)

1. 연혁

화평동은 본래 인천부 부내면(府內面)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화촌동(花村洞)과 평동(平洞)을 병합하여 화평리라 해서 인천부(시)에 편입되었는데 1936년 왜식으로 화평정(花平町)이라 하다가 1946년 해방후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화평동이 되었다. 1981년 7월 직할시 승격과 함께 인천직할시 동구 화평동으로 개칭되었고 1995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인천광역시 동구 화평동이 되어0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지명유래

화평동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화촌동과 평동을 병합하여 그 마을이름의 첫 자를 따서 지은 합성지명이다.

따라서 화평동의 지명유래는 화촌동과 평동의 지명유래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화촌동은 지형이 꽃처럼 생기거나 마을에 꽃이 많아서 비롯된 마을이름이 아니고 곶(串)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곶마을’이 되고 곶마을은 부르기 쉽게 ‘꽃마을=花村=花村洞’이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이것은 이 마을주변이 옛날 고잔리(古棧里)로 그 지명유래는 ‘곶(串)의 안쪽마을’에서 유래되었음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리고 화평동에서 으뜸된 마을이었던 평동(平洞)은 벌판에 마을이 형성되어 ‘벌말’이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화한 것이다.

3. 소지명

① 벌말(平洞)[마을] : 화평동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벌판에 마을이 형성되어 벌말이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화하여 평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화평동의 행정구역도

 

② 화촌동(花村洞, 花村)[마을] : 곶(串)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곶마을’이라 부르던 것이 부르기 쉽게 ‘꽃마을’이 되고 다시 한자화되어 화촌, 화촌동이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③ 구름다리[다리] : 화평동에 있는 다리

④ 만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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