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정재(眞靜齋) 김공 휘(諱) 덕운(德運)의 덕행을 기록한 글을 지은 적이 있는데 고결한 수련과 독실한 실천의 아름다움에 탄복하였다. 지금 그의 증손 재성(在誠)이 할아버지 묘표를 부탁하러 왔다. 대대로 맺은 정의(情誼)를 생각하니 끝끝내 사양할 수 없었다. 공은 휘(諱)가 이상(履相), 자가 도수(道綏)이다.
경주 김씨는 신라 왕에서 나왔다. 조선조에 휘 균(稛)이 찬성(贊成)을 지냈으며 시호는 제숙(齊肅)이다( 慶州之金,出自羅王。國朝有諱稛,官贊成,諡齊肅). 6대를 내려와 참의 위(偉)가 청렴하다는 명망과 곧은 도의로써 저명하였는데 공의 6대조이다. 고조 경여(慶餘)는 부제학이며 시호가 문정(文貞)인데 우암과 동춘 두 분 선생과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병정(丙丁 병자호란) 이후에는 출처(出處)에 큰 절개가 있었으며 세상에서 송애(松崖) 선생이라 칭하였다. 증조 진수(震粹)는 현감으로 증(贈) 이조 참의이며, 조부는 중석(重錫)이다. 증조와 조부는 모두 우암과 동춘 두 분 선생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공은 통덕랑 병운(炳運)의 아들인데 진정재의 양자로 들어갔다. 통덕랑 병운과 진정재는 사촌 형제이다. 양모는 숙부인(淑夫人) 박씨로 통덕랑 상문(尙文)의 따님이다. 생모는 박씨로 부사(府使) 수의(守義)의 따님이다. 공은 영조 갑진년(1724, 영조 즉위년) 4월 30일에 태어났다. 천생적으로 영민하였으며 정신이 맑고 안색이 청수하고 체구는 단아하며 모습은 근엄하였다. 3세 때에 소후가(所後家 양자로 간 집)에서 양육되었다. 사랑과 공경을 극진히 해서 친부모보다 더하니 사람들이 “하늘이 정한 인륜이며 인력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6세에 놀러 나갔다가 5대조 할머니 송부인(宋夫人)의 정려문을 보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양모 박부인에게 물었다. 박부인은 송부인이 손가락을 베어서 어버이에게 효도한 사실을 말해주자, 공이 “참으로 부모에게 이롭다면 어떻게 손가락 하나를 아끼겠습니까.”라고 대답하니, 부인이 등을 쓰다듬으면서 칭찬하였다. 어릴 때 병이 많아 심하게 가르치거나 감독하지 않았지만 10여 세에 이미 《효경》과 사서(四書)를 모두 달통하였다. 《효경》, 《대학》, 《소학》, 《격몽요결》을 직접 필사하였으며, 학문하는 방법과 관련된 여러 서적은 항상 눈길을 떼지 않았다. 성현의 격언을 보면 벽에 써서 붙여 두고 분발해서 자신을 격려하기를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나아가고 물러나며, 먹고 마시는 예절은 한결같이 어른들의 명을 따랐다. 평상시 부모를 모실 때는 밝고 부드러운 모습을 지극히 하였으며, 부모의 뜻을 미리 헤아려서 부모의 뜻을 더욱 잘 따르자, 두 집안의 부모가 모두 듬뿍 사랑을 쏟았다.
생부 통덕부군이 평소 고질병을 앓아 심화(心火)가 빈번이 일어났다. 시중드는 사람 어느 누구도 비위를 맞추지 못하였는데 유독 공만은 매우 편안히 여겼다. 공은 이리저리 간호하면서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십수 년을 마치 하루와 같이 모셨다. 생모의 병이 위독하자 하늘에 기도하고 대변을 맛보기도 하였다.
소후가의 가세(家勢)가 기울자 농사에 힘을 쏟아 힘든 살림에 보탬이 되게 하였으며 세월지제(歲月之制)에 더욱 신중을 기하여 끝내 유감이 없게 하였다. 양부와 양모는 모두 대질(大耋 나이 80)을 누렸다. 박부인이 임종시에 여러 손자들을 둘러보고서 “너희 아버지가 효자다. 너희들 모두가 너의 아버지처럼 효도하고 공경하면 집안은 잘 될 것이다.”고 하였다. 전후에 걸쳐 초상을 치를 때는 슬픔으로 몸을 해칠 정도로 예제에 지나치게 했으며 노년이면서도 여전히 철저하게 하였다. 부모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친구를 위해서 수판(壽板)을 준비해서 보내고 혹은 맛있는 음식을 보내어서 좋은 반찬 올리는데 일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효를 확대한 공의 올곧은 마음에 탄복하였다. 젊은 시절에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불우하게도 중년에 괴상한 병에 걸려 마침내 벼슬길에 나가려는 뜻을 접었다. 사람들이 혹 벼슬하기를 권하였으나, 공은 “운명이 있다.”고 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는 자신을 챙기는 일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으며 일체의 세상 재미에 담박하였다.
친모가 회갑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시자 평생 동안 남의 집 회갑연에 가지 않았다. 자신의 회갑 때는 집안 식구들이 잔치를 여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오열하면서 눈물을 흘렸으니 이는 곧 죽을 때까지 부모를 사모했던 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을사년(1785, 정조9) 2월 26일에 작고하였으니 나이 62세였다. 병이 심해졌을 때도 집안일을 매우 상세하게 처리하였으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다. 또 속광(屬纊)할 때는 부녀자를 물리치고 자리를 바르게 하고 침상에 드러누워 영면하였으니 또한 평소의 교양을 알 수 있다. 연기현(燕歧縣) 동쪽 모 장소 갑좌(甲坐) 언덕에 안장되었다. 배위은진 송씨(恩津宋氏)는 감역(監役) 후상(後相)의 따님이며 우암의 5세손이다. 대단히 부덕(婦德)이 있었다. 임인년(1722, 경종2)에 태어나 을미년(1775, 영조51)에 작고하였으며 공의 묘 우측에 부장(祔葬)되었다. 2남을 두었는데, 장남 경렬(敬烈)은 현감이고, 차남 성렬(成烈)은 진사이다. 정렬(正烈)과 박근재(朴謹載)에게 시집간 딸은 서출이다. 손자 재성(在誠), 재형(在亨), 승지 이지수(李趾秀)와 진사 이극성(李克聲)에게 시집간 딸은 장방(長房 장남 경렬) 소생이다. 재문(在文), 재인(在仁), 재신(在愼)은 차방(次房 차남 성렬) 소생이다. 정렬은 1남 1녀를 두었고, 사위 박서방은 2남 2녀를 두었다.
아, 공은 학문과 예절이 있는 가문에서 자라 효도하고 순종하는 품성을 얻었다. 양가(兩家 생가와 양자 간 집)의 네 명 부모를 모시면서 사랑과 공경심을 모두 지극히 하고, 그 외에 여가에는 학문을 하였다. 재주는 세상에 쓰일 만하였지만 끝내 능력이 묻힌 채 죽었으니 사람들 모두 애석히 여긴다. 하지만 공은 집안에서의 행실이 독실하였으니 또 구태여 세상의 영화를 가지려고 하였겠는가. 나는 노년기의 공을 뵌 적이 있다. 모습이 단정하고 행동거지가 단아하여 공이 후덕한 장로(長老)임을 알았다. 다만 지금의 나는 늙고 병들었으며 공을 본지 30 년이 되었다.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삼가 묘표를 지으니 위의 글과 같다.
余嘗述眞靜齋金公諱德運狀德之文,而欽服其淸修篤行之懿矣。今其曾孫在誠,又以其王考阡表來托,言念世誼,有不可終辭。公諱履相,字道綏。慶州之金,出自羅王。國朝有諱稛,官贊成,諡齊肅。六傳至參議偉,以淸名直道著,寔公之六代祖也。高祖慶餘,副提學,諡文貞,與尤、春兩先生爲道義交。丙丁以後,有出處大節,世稱松崖先生。曾祖震粹,縣監贈吏議,祖重錫,兩世俱受業於兩先生之門。公以通德郞炳運之胤,爲眞靜齋之所子,通德於眞靜,爲從父兄弟矣。妣淑夫人朴氏,通德郞尙文女。生妣朴氏,府使守義女。公以英宗甲辰四月三十日生。生而穎秀,神淸而色粹,形端而貌莊。三歲育于所後家,致其愛敬,有加於所生,人以謂“天定之倫,非人所及”也。六歲,出遊,見五代祖妣宋夫人㫌門,歸問于所後妣朴夫人。朴夫人爲道宋夫人斮指孝親事,公對曰:“苟利於父母,何愛手一指哉。” 夫人撫背而稱賞。幼多病,不甚敎督,而十餘歲,已盡通《孝經》、四子。手寫《孝經》、《大小學》、《擊蒙要訣》,爲學之方諸書,常目不離。遇聖賢格言,書揭于壁,奮然自勵曰:“不如此,無以爲人。” 進退飮食之節,一遵長者之命。平居侍奉,極其愉婉,尤善於先意順志,兩家父母,俱鍾愛焉。生考通德府君,素抱貞疾,心火頻發。侍者莫有適其意者,獨於公,甚安之也。公左右調護,夙夜不懈,十數年如一日侍。生妣篤疾,至於祈天嘗糞。所後家家事旁落,而致力於稼穡,以資菽水,尤致謹於歲月之制,竟無遺憾焉。所後考妣,俱享大耋。朴夫人臨終,顧語諸孫曰:“爾父孝子也。爾輩皆能如爾父孝敬,則爾家其庶幾乎。” 前後居憂,哀毁逾禮,雖老而猶篤焉。嘗爲貧交之奉親者,備給壽板,或送美味,以助甘旨,人服其推孝之義。少工博士業,不遇,中嬰奇疾,遂絶意進取。人或勸其祿仕,公曰:“有命也。” 永感以後,亦不以調度爲慮,於一切世味,泊如也。以所生妣壽未回甲,平生未嘗造人家壽席,値其回甲,不許家人之飾慶,因嗚咽泣下,此可謂終身而慕者矣。以乙巳二月二十六日卒,壽六十二。病革時,處寘家事甚悉,而無怛化之意。且屬纊,屛婦女,正席就枕而逝,亦可見平日之素養矣。葬于燕歧縣東○○○甲坐之原。配恩津宋氏,監役後相女,尤菴五世孫也。甚有婦德,生于壬寅,卒于乙未,祔葬公墓之右。有二男,長敬烈縣監、次成烈進士。正烈及朴謹載妻,庶出也。孫在誠、在亨,承旨李趾秀、進士李克聲妻,長房出。在文、在仁、在愼,次房出。正烈一子一女,朴婿二子二女。嗚呼,公生長詩禮之門,稟得孝順之性,奉養兩家四親,愛敬兼至,餘事問學,才堪需世,而竟沈淪以沒,人皆惜之。然公旣篤於內行矣,又何有於外慕哉。余獲拜於公之暮境,儀容端潔,擧止閒雅,知其爲厚德長老矣。顧今衰病,已見公三世矣。俯仰愴涕,遂謹書之如此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