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IFl4YrEz2IY?si=K-OtMrSt3MSlJZM6
1589년 피사 대학의 수학 교수가 되었으며, 〈운동에 대하여〉를 저술하였다. 또한 높은 곳에서 무게가 다른 물체를 떨어뜨리는 실험으로 낙체의 속도가 무게에 비례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피사의 사탑에서 낙하 실험'이다. 그러나 이 실험은 실제로 한 게 아니다. 이 이야기는 갈릴레이의 전기 작가이자 신봉자인 비비아니가 갈릴레오를 돋보이게 하고자 지어낸 것이라고 한다. 사실 갈릴레오는 논리적인 추론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반박했다.
1609년 망원경을 개량하여 이것을 천체 관측에 응용하여 '목성의 위성', '달의 반점', '태양의 흑점' 등을 발견하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정당함을 입증하였다.
이듬해 피렌체의 대공인 메디치 가의 코지모 2세의 초청을 받아 피렌체에 부임하여 연구를 계속하였다.
1610년, 갈릴레오는 1월 내내 밤중에 하늘을 관측한 끝에 ‘금성이나 화성이 태양 주위를 도는 것처럼 목성 주위를 배회하는’ 세별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나중에 갈릴레이는 이 별의 수가 넷이라고 정정했다.) 이 별들은 목성 주위를 도는 목성의 위성이다.[6] 목성의 위성들에 대한 그의 천체 관측 사항들을 이용해 태양중심설, 즉 당시 지배적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인 지구중심설에 대항하는 우주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지지하기 위해 책을 펴냈다.
1612년에, 갈릴레오가 지지했던, 우주의 태양 중심 이론에 대한 반대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1614년, 산타 마리아 노벨라(Santa Maria Novella)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 토마소 카치티(Tommaso Caccini, 1574년-1648년)는 지구의 운동에 대한 갈릴레오의 의견을 비난하며, 갈릴레오의 이론들은 위험하며 이단(종교에 거역하는 나쁜 주장) 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갈릴레오는 이러한 고소들에 대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로마로 향했다.
하지만 1616년에 추기경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o Bellarmino)는 갈릴레오에게 개인적인 서신을 보내면서 그가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을 옹호하지도, 가르치지도 말 것을 분부하였다.
1621년과 1622년 사이에 갈릴레오는 1623년에 승인되고 간행된 그의 첫 번째 책 《분석》(Il Saggiatore)을 집필했다.
1630년에 갈릴레오는 1632년에 피렌체에서 인쇄된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Dialogo sopra i due massimi sistemi del mondo")를 출판하기 위한 인가를 받기 위해 로마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해 10월에, 그는 로마의 종교재판소에 설 것을 명령받았다. 갈릴레오는 이 책으로 다시 종교재판소에 회부되자 과거 자신의 주장을 "맹세코 포기하며, 저주하고 혐오한다"고 선언하고 겨우 풀려났다
1633년에 가톨릭 교회의 단죄에 따라,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종신 징역형을 받았으나 감형되어 가택 연금에 처해졌으며, 행동도 제한되었다. 또 그의 모든 저서는 금서 목록에 올랐다.
1634년부터 쭉, 그는 피렌체 근교의 아르체트리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 머물렀다. 갈릴레이는 집필에 몰두하여 《두 가지 새로운 과학에 관한 논술》(1638)을 완성했다.
그는 1638년에 완전히 실명했으며, 고통스러운 탈장과 불면증으로 고통받았다.
때문에 그는 의료적인 차원에서 피렌체로 여행하는 것을 허가 받았다.
그는 1642년 발열과 심계 항진을 겪고 죽을 때까지 계속 손님을 접대했다.[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