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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해설 - 15
지난 시간에 이어서 강설하겠습니다.
선시禪時들 가운데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 잔다’고 하는 시구가 많은데
바로 이런 경지를 읊은 것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것,
이보다 더 신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항상 움츠리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게 되면,
즉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생활하게 되면
마음에 조금도 걸림이 없고, 또 걸림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을 수 없게 됩니다.
불안이니 공포니 하는 두려움은 어디서 옵니까?
첫째,
무지無知에서 옵니다.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원인은
자신에 대한 집착입니다.
앞서의 무지로 인한 불안과 공포도
자신에 대한 집착의 소산입니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상相입니다.
‘나’에 대한 집착,
여기서 모든 불안과 공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야바라밀은
무지와 온갖 집착에서 벗어난 지혜스러운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에 의지하는 까닭에
모든 공포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식들이 걸리고,
재산이 마음에 걸리고,
체면이 마음에 걸려서 고민하게 되고
올바른 처신을 못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또 두려움 때문에 고민하는 일이 많지 않습니까?
사실 생로병사라든지 우비고뇌라는 것,
괴로움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마음에 걸리고 두려운 것들이 모여서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모여서
우리의 생각을 뒤바꿔 놓습니다.
즉 뒤바뀐 가치관을 형성하고
허황한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이처럼 뒤바뀐 생각, 헛된 생각이 ‘전도몽상’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걸릴 것이 없고,
두려움이 사라지고 나면
생각이 모두 바르게 되어 올바른 가치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견正見이요,
본문에서 ‘원리전도몽상’이란 이를 이른 말입니다.
올바른 가치관을 갖게 된다는 뜻입니다.
‘원리’는 멀리 여읜다,
즉 뒤바뀌고 허황된 생각과는 영원히 이별해 버렸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마음에 걸림이 없고,
두려움이 없어져서 뒤바뀐 생각과 허황한 생각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마음이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될까요?
바로 열반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구경열반’은 ‘마침내 열반에 이르다’는 뜻입니다.
‘열반’은
범어 니르바나nirvana의 음역으로
매우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한자로는
멸滅, 적멸寂滅, 멸도滅度, 도度라고도 하는데,
불교수행의 최고 이상향인 아무 괴로움이 없으면서,
나고 죽는 일이 없는 경지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열반’의 본래의 뜻은 소멸消滅입니다.
범어 ‘니르바나’는 ‘불어서 끄는 것,
불어서 꺼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불어서 끄는 것은
물론 실제의 불이 아니라 마음의 불,
번뇌의 불꽃입니다.
이 번뇌의 불꽃이 소멸함으로써
생사의 불꽃마저 소멸된 상태가 열반입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이 열반의 의미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진여眞如와 같은 의미로도 파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열반의 사덕四德이라고 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을 갖춘 열반이라야
진실한 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열반의 특성 가운데
생멸변천함이 없는 덕을 항상하다는 뜻으로
상常이라고 하고,
생사의 고통을 여의어
스스로 안락한 덕을 즐겁다는 뜻의 락樂,
헛된 집착과 무명에서 비롯된
‘내’가 아닌 진실한 나를 아[眞我],
번뇌의 더러움을 여의고
청정본연의 깨끗한 상태에 이른 것을
깨끗하다는 뜻의 정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반이란 것도 어떤 실체,
즉 실제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승불교에서는 열반이란 실체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열반은
공의 실상으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경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진공묘유’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진짜 공 가운데 오묘한 그 무엇이 들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를 잘못 이해하면 안 됩니다.
만일 무엇인가가 들어 있다고 하면
이는 진공眞空이 아니기 때문에
‘진공묘유’를 ‘공 가운데 무엇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진공 자체가 곧 묘유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참된 공은 그대로 오묘한 작용을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오묘한 작용을 하는 것일까요?
바로 반야라고 하는
선천적인 지혜가 신통묘용을 부리는 것입니다.
〈채근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산림에 숨어 즐겁다 하지 마라.
그 마음이 아직도 산림의 참맛을 못 깨달은 표적이니라.
명리의 이야기를 싫다하지 마라.
그 마음이 아직 명리의 미련을 못 다 잊은 까닭이니라.”
앞서 말한 열반의 사덕 외에도
열반의 삼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열반의 삼덕三德은 법신, 반야, 해탈입니다.
즉 열반은 법신과 반야와 해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법신法身은 영원히 변치 않는 법의 몸,
곧 우리네 마음의 본체를 의미합니다.
이는 불보살님이나 중생이나
본래부터 전혀 다름없는 진리자체, 진여를 뜻합니다.
다음에 반야는
앞서 이미 설명한 것처럼 중생이나 부처님이나
똑같이 간직한 근본지혜,
앞서의 법신은 체體요,
반야는 그 쓰임새,
즉 용用입니다.
해탈은 열반이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에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열반의 모습, 즉 상相입니다.
그러므로 열반이란
우리 불교도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수행함으로써
얻고자 하는 가장 이상적인 구경지,
마침내 도달하고자 하는 피안입니다.
그러나 이 열반도 실체實體로 존재한다면
앞서서 지금까지 해설한 공의 성질과 다르게 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의 마음이 온갖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해탈한 경지,
마음의 본체, 근
본 지혜가 바로 열반이지 열반이란 것이
실체로써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열반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익범천소문경思益梵天所問經》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올려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따끈따끈한 글은 계속 이어집니다.
다음 시간에 다시 이어보겠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드리는 따끈따끈한 글입니다.
오늘은 오늘 글을 만나신 인연으로
글 보신 이후로는 행복한 시간들로 가득 차시기 바랍니다.
2022년 12월 14일 오전 06:25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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