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박물관 옆길로 영명학교 쪽을 오르다보면, 전혀 공원(公園) 같지 않은 공원을 하나 만날 수 있습니다. 요즘 중앙공원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일제시기에는 앵산(櫻山)공원이라 불리웠는데,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사쿠라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일제시기에는 밤벗꽃놀이가 열리는 등 풍치가 제법 그럴듯했다고 합니다.
중앙공원에 올라가보면 미군정 시기 충남도지사를 역임한 황인식(영명학교 출신)과 박정희정부 시절 감사원장을 역임한 신두영(공주고보 출신)의 기념비와 더불어 공주노인회 명의로 건립된 <4.19 의거 기념탑>이 하나 뻘쭘하게 서 있습니다. 노인들에게 물어보니 본래는 공산성내 임류각터에 있었던 것인데, 임류각을 새롭게 만들면서 기념탑을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더군요. 4.19 전후 시기 공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시죠.
1961년 판 <<경찰연혁사 -공주경찰서>>(단기4292년 7월 15일 작성 문서)에는 4.19전후 시기 공주지역 상황에 대한 서술이 소상합니다. 위 자료를 보면, 아래와 같은 언급들이 주목됩니다.
* "단기 4293년 419민주혁명이 수도 서울에서 민주혁명이 봉기되자 되자 교육도시인 당지에서도 공주사범대학 및 읍내 중고등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4월 26일 舊政權이 붕괴될 時까지 계속하여 공주 시내를 데모하며 중앙의 혁명기세에 呼應 敢行함"
* "단기 4293년 7월 29일 제5대 민의원 및 초대 참의원 선거가 실시되였더바 무소속 입후보자 朴忠植이가 당선 발표되자 일부 학생 및 시민 수백명이 집단하여 당선자 및 사무장의 가옥을 파괴하는 등 난동 행위로 반민주혁명 세력 규탄데모를 감행 일부 구속중인 학생을 즉시 석방하라는 요구 조건으로 當署 前에서 연좌 데모를 하는 중 同 데모에 편승한 일부 몰지각한 불량배들은 當署 유리창을 투석 파괴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자 당서 경비병력이 부족하여 인접 署에서 330명의 응원온 병력과 합세하여 실력행사로서 이들을 해산 진압하여 약 1주일 후에 사태를 수습하였음"
바로 아래 사진은 공주사대 졸업앨범에서 발췌한 것인데, 아래 사진이 바로 산성시장 근처에서 행해진 시위장면을 담은 사진이랍니다. 사진 속 길 끝 쪽에 공산성이 보이지요. 헌데 긴장감과 박진감이 안 느껴집니다. 게다가 양복이나 와이셔츠 차림의 남자들, 결코 사범대생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사진 중간에 뭔가를 크게 웨치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 모습이 눈에 띠기는 합니다.
그 아래 사진들은 1960년 7월 29일 그러니까 4.19가 난지 3달쯤 뒤에 치루어진 참의원 선거 관련 사진입니다. <연미사진관>과 <평화하숙옥> 간판이 보이고 오른편 쪽으로 제법 큰 건물이 보이는데, 어디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공주고등학교 계몽대원들이 419직후에 치루어진 민의원 선거 켐페인에 동원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트럭 앞에 내걸린 "혁명정신 받들어 바로 보고, 바로 찍자"라는 프랭카드의 구호가 재미있지요. 아래 사진에 보이는 성락서, 윤상구, 김정우 후보, 모두 낙선했습니다. 당시 당선자는 민주당 출신의 심종석과 민주사회당 후보인 이훈구였습니다. 이훈구는 서천 출신으로 영명학교 교사를 역임한바 있는 저명한 농업경제학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