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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죄와 의롭다 하심
셋째로 중요한 문제를 보겠습니다. 다시 “형제들아,” 하고 부르시는 데서부터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행 13:38)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이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사죄함을 받는다.’ 해서, 첫째로 사죄를 강조하셨습니다. 둘째는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 설교에서도 분명히 사죄를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힘입어 사죄함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바울 선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후에 나타날 신학상 가장 중요한 문제 하나를 딱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바울 선생은 자신이 쓴 편지, 즉 나중에 성경이 된 편지 가운데 그 사상을 아주 자세하고도 좀 더 웅혼하게 발전하게 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설교를 하는 시간에도 그것에 관해 어떤 이야기를 하셨을지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누가는 간략하게 제목만 탁탁 내놓았습니다.
여기에서 말한 것이 첫째는 사죄이고, 둘째는 무엇입니까? “이 사람을 힘입어” 첫째는 사죄를 받고, 둘째는 의롭다 하심을 입는다는 이야기가 새로운 사상으로 여기에 처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적어도 이렇게 분명하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 붙어서 처음으로 기록돼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의롭다 하심, 곧 디카이오쉬네(…헬라어 생략…)가 이 사람을 힘입어 된다.’ 하는 말을 가르치셨습니다. 의롭다 하신다는 것은 단순한 사죄(remission)가 아닙니다. 죄를 용서하신다든지 속贖하신다든지 하는 거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은 나중에 로마서에 훨씬 명료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어떻게 그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 하는 방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이 사람을 힘입어” 얻는다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하는 이 새롭고 중요한 사상이 여기에서 설교로 턱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 교회에서 아직 의롭다 하심을 자세하게 배운 일은 일은 없지요? 간간히 배우기는 했지만, 그것을 제목 삼아서 강설을 계속해 나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가 과거에 중생重生이라는 것을 배웠고 또 지금 배우기도 하고 그다음에 변개變改 혹은 에피스트로페(…헬라어 생략…)를 배워 나갔습니다. 그다음에 또 길게는 하지 않았을지라도 성화聖化 혹은 거룩하다는 문제를 대강 배웠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입는다는 말은 칭의稱義라고 하는데, 일본 사람은 옳을 의義와 인정한다는 인認을 써서 의인義認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이랬다저랬다 자꾸 변경하기도 하고, 또 ‘의인’이라고 하면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같이 들려서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칭의라고 하겠습니다.
칭의(justification)는 앞에서 말씀드린 중생이라든지 변개라든지 성화와는 아주 다릅니다. 중생이나 변개나 성화는 항상 그 사람, 곧 죄인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이야기를 말합니다. 하지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은 그의 내부에 발생한 문제라기보다는 그의 외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혈통 문제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의 법적인 지위를 규정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엄위로우신 재판장이셔서 죄를 추호秋毫만치라도 그냥 지나쳐 버리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죄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하게 도무지 남김이 없이 털끝만치라도 가릴 것이 없이 전체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다 담당하시고 당하신 까닭에 그에게 내리신 그 정죄 때문에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덮여 있는 그 사랑하시는 자,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재판정에서 “내가 너를 의롭다고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의롭다고 하실 때는 죄를 용서한다는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첫째는 죄의 용서에 중점이 있습니다. 칭의의 중요한 요점은 죄의 용서라는 점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는 사죄라는 요소에 대해서 잘 알아야 의롭다고 하신다는 말의 뜻을 잘 아는 것입니다. 의롭다고 하신다는 칭의의 두 가지 중요한 요소 하나는 사죄입니다.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어떠한 터 위에서 용서하시는가 할 때 예수님 속죄의 터 위에서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중략)…
그전에 늘 말씀드린 대로, 문제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되 속죄라는 터 위에서 하시는 까닭에 속죄의 공효가 미치는 범위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속죄의 공효가 미치는 범위란 무엇인가 할 때 죄를 철저히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용서하신 것을 다시 물으시는 법도 없는 것이고, 용서해 주셨다가 나중에 다시 잘못하면 그전에 용서한 것까지 다시 들춰서 “이번에는 내가 너를 배倍로 두들기고 매로 때리련다.” 하시는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그럴 수 있습니다. “음, 이번만은 내가 용서해 준다. 그렇지만 네가 또 한 번 잘못하면 그때는 용서한 것도 소용이 없이 그냥 다 토죄討罪하련다.” 하는 식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철저한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용서는 철저할 뿐만 아니라 영구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구하다는 말은 시간 제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과거의 죄와 오늘의 죄뿐 아니라 내 모든 결핍에 따른 미래의 죄까지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의 터 위에서만 칭의라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너, 오늘날까지 지은 죄만은 용서해 주마. 앞으로 짓는 죄는 네가 주의해라. 주의하지 않으면, 너는 탈락한다.” 하는 것은 아르미니안(Arminian)들이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주의할 것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나는 기왕 죄를 다 용서받은 것이니 이제는 무슨 죄를 지어도 괜찮다.’ 하는 식으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선생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2) 말씀하십니다. 네가 참으로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과 통하는가 할 때 칭의의 실효實效가 어떻게 미치는가 하는 것과 통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자신의 법정에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셨을지라도 그것이 내게 인식되지 않았을 때 나로서는 그것을 직접 인식한 사람과 같은 실효를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실효를 가지지 못한다는 말은 마음에 그만한 평안과 기쁨을 가지지 못한다는 말일뿐더러 죄에 대해서 그만큼 강한 반발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셨는데, 내가 다시 이렇게 죄를 지을 수 있겠는가?’ 하는 강한 반발력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참으로 일생 입고 싶은 깨끗하고 아름답고 좋은 옷을 입었다면, 그 옷을 입은 것 때문에라도 다시 더러운 데 가서 더러운 것을 묻히고 아무렇게나 주저앉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런 좋은 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동안에는 여전히 자기가 더러운 남루襤褸를 입은 줄 알고 아무 데라도 주저앉고 아무 흙탕에라도 들어가도 그러는 것입니다. 깨끗한 옷으로 깨끗하고 아름답게 입혀 주고 “봐라, 좋지 않으냐?” 하면 ‘아이고, 내가 이렇게 좋은 옷을 입었으니, 이제는 주의해야겠다.’ 하고 어디에 앉으려 해도 거시에 먼지가 있는지 없는지 보고 먼지가 있으면 털고 참 주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이와 같이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용서의 철저함을 깨달아서 칭의라는 사실이 내 내부에 현실적으로 실효 있게 유지됐을 때는 절대로 죄에 더 거하지 않으려는 강한 반발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를 의롭다고 세워 주셨는데, 다시 죄를 짓는다 말인가, 그럴 수 없다. 그 더러운 죄의 구덩이에 한 번 건져 주셨는데 어떻게 거기에 또 들어간단 말인가? 그럴 수 없다.’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추악하고 악한 생활 가운데 빠졌던 사람을 건져서 갱생更生케 해 그가 바랄 수 없는 행복한 위치에 딱 놓아 줬다든지 탕자와 같은 사람을 아버지가 다시 안아 들여서 좋은 옷을 입혀 줬다면, 또 다시 재산을 가지고 나가서 허랑방탕하고 돼지우리에 들어가서 돼지처럼 먹고 살려고는 안 할 것입니다. 어떤 창녀가 ‘이제 나는 죽었다.’ 하고 자포자기해서 점점 타락의 길로 들어갈 때 어떤 참으로 갸륵한 이가 그를 건져줘서 그가 생각지도 못하게 자신이 사랑하고 사모하던 사람과 혼인해서 좋은 가정을 이뤄서 깨끗하고 아름답고 아주 고도적인 생활을 한다고 할 때, 그가 다시 예전 창녀 생활로 돌아가려고 한다면 그것은 그런 고귀한 생활의 가치를 도무지 인식하지 못한 사람이나 하는 짓입니다. 자기 생활의 고귀성과 남이 존경하는 것의 가치를 알았을 때는 다시 그런 데로 빠져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칭의의 실질 효과입니다
이렇게 해서 칭의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라는 문제로 들어가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법정에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다는 데에만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또한 그 뒤에 심히 중요한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법적으로 자식이라고 선언했다.” 하시는 것은 혈통으로 “너는 내 자식이다.” 하는 말과는 조금 구별되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난 자들이니라.” 하고 말씀했습니다. 거기에 보면 그 두 가지가 다 있습니다. 영적 자권子權과 법적 자권이 둘 다 나오는 것입니다. 자녀는 자녀인데 혈통으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즉, 실제로 그분께 생명으로 연결돼서 그분 자식인가 하는 문제가 영적 자권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피가 서로 연결됐는가 하는 말입니다. 그것과 함께 법으로도 자식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한 대답이 다 그 두 구절에 나타납니다.
첫째로, 법적으로 자식이라는 것을 선언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했는데, “권세”에 해당하는 엑쑤시아(…헬라어 생략…)라는 것은 법정 용어입니다. 그런 권위의 위치, 즉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권위의 위치에 놓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본질은 어떻게 됐든지 좌우간 그런 위치에 놓으셨다는 것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니라 이 사람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할 때는 ‘나기는 세상에서 났는데, 하나님께서 양자養子로 삼으셨다.’ 하는 데서만 그친 것이 아니고, ‘사람이 스스로 난 것도 아니고 혈통으로 난 것도 아니고 육정으로 난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내신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혈맥으로 새로 지음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즉, 직접 하나님과 관계된, 실질상으로나 혈통상으로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다 있습니다. 이래서 양자가 된다는 것, 즉 휘호쎄시아(…헬라어 생략…)라는, 신약에 있는 이 중요한 사상이 무엇을 가르치는가 할 때, 먼저 그 근거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 속죄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속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서 그를 새로운 피조물로 지으셨다는 사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그 생명으로 그를 다시 낳으신 까닭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생명으로 태어난 그에게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무슨 법적인 지위를 주셨는가 하면, “내 자녀다.” 하시는 것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後嗣, 곧 하나님의 후사”(롬 8:17)가 돼 하나님께 모든 좋은 것을 받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뇨?”(롬 8:32) 하는 말씀과 같이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높은 위치에 두신 것입니다.
이렇게 받을 수 있고 상속할 수 있는 위치라는 것은 법적인 자권에서 받는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그분 혈맥으로 낳으셨으니까 받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성경이 기록됐을 당시 로마 사람들 법대로는 자식이 태어났더라도 법적으로 자식이라는 신임이 있을 때까지는 자기 집에 있는 종들 수하에 둡니다. 종들 가운데 훌륭한 선생도 있고 지식이 있는 사람도 있으니까 그에게 맡겨서 교육하도록 두는 것입니다.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갈 4:1)었다는 신약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러나 일정한 나이가 된 후에는 성인식을 행한다고 토가(toga)를 입히고 가락지를 끼웠는데, 이 가락지라는 것이 ‘이제 너는 내 자식으로서 네가 이 집 둘째 주인이다.’ 하는 확실한 징표요 도장입니다. 가락지를 딱 끼면 그 다음부터는 권위를 가집니다. 무엇을 할 때 증서를 쓰거나 명령서를 쓰고 거기에 도장을 찍으면 지금까지 자기를 가르치던 선생도 “예, 주인님.” 하고 복종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런 식을 거행할 때는 자기 친지를 다 모으고 증참證參할 사람을 많이 모아서 잔치를 베푼 다음에 “이 사람이 내 자식이다.” 하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이 법적 자권의 승인인데, 칭의라는 것은 법적 자권을 승인하는 하나의 예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천군 천사와 천지 만물과 모든 것 앞에서 “저 사람은 내 자식이다. 그런 줄 알아라.” 하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내 자식에게 아무도 함부로 할 수 없고, 만일에 내 자식 권위에 저항할 때는 나에게 저항한 것인 줄 알아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대한 권위를 주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자식이 하나님 자식으로 정당한 권위를 행사하는 데에 반항하는 자가 있기는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마귀와 그 휘하에 있는 자들입니다. 또한 하나님 자식이 하나님 자식답게 진리를 사모하며 살고 하나님 자식다운 거룩한 영광을 나타내고 살려고 할 때 세상 사람은 그것을 칭창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저해하고 무시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 자식으로서 권위를 행사하고 나갈 때 그들이 그것을 저항하고 무시할 때는 곧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께 저항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권에 따른 특권입니다.
기도
…(생략)…
1966년 4월 6일 수요일
* ‘김홍전 {사도행전 강해 제5권 (사도행전 13장~14장 강해):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서울: 성약출판사, 2008)’ 186쪽~195쪽.

첫댓글 좋은 글 올려 주셔서 잘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