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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보고 나서
김영문(명예교수, 정치행정대학 정치외교학과)
1. 들어가기
지금부터 25년 전인 1997년 한국에 상영된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를 오늘에야 볼 수 있었다. 마이클 온다체가 쓴 소설을 바탕으로 앤서니 밍겔라 감독이 각본을 쓰고 영화를 만들었다.
태양이 작열하는 사하라 사막을 배경으로 영혼을 태울 듯 격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사랑을 담아낸 영화였다. 이토록 아름다운 영화를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니 나의 천박함에 그저 놀랄 따름이다. 나는 이 영원한 사랑의 대서사시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이고 격한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인간에게 사랑이란 그저 육체적인 쾌락의 한 도구로 생각하는 추하고 지저분한 사람이 넘쳐나는 요즘 세상이지만, 이 영화는 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알마시(Ralph Fiennes)는 캐서린(Christin Scott Thomas)이 없는 세상이 얼마나 무의미하고 덧없기에 더 이상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진통제를 거부하고 한꺼번에 다량의 모르핀을 간호사 해나(Juliette Binoche)에게 간청하고, 캐서린이 “헤엄치는 사람들의 동굴”에서 죽을 때 알마시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를 듣는 가운데 자신의 불꽃 같은 삶을 조용히 마감한다. 아파트 안에서 혼자서 본 영화지만 끝나자 나도 모르게 이처럼 아름다운 영화를 만드는 데 기여한 원작자, 감독, 배우들에게 “부라보”를 외치면서 아낌없이 박수를 보낸 멋진 영화였다.
2. 줄거리
영화의 시작은 2차 대전이 거의 끝날 무렵인 1944년 10월 어느 날 끝없이 펼쳐진 장엄한 사하라 사막 위를 창백한 모습으로 자는 듯한 여자를 앞에 태운 한 복엽 비행기가 날고 있었다. 그러나 이 비행기는 얼마 가지 못해 독일군이 쏜 대공포에 피격당해 화염에 휩싸인 채로 추락한다. 이 비행기를 몰던 조종사는 중화상을 입고 사하라 사막 시와 오아시스(Siwa Oasis)에서 유목 생활을 하는 베두인에게 구조되어 응급조치를 받은 후 낙타에 실려 연합군 야전병원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이 환자는 화상으로 얼굴도 알아볼 수 없고, 이름과 국적과 신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영어를 할 줄 알아 ‘잉글리시 페이션트’라 불렀다.
한편 캐나다 왕립 육군 의료봉사단의 프랑스계 캐나다인이지만 영어를 할 줄 아는 간호사 해나는 이 전쟁으로 사랑하는, 캐나다 사격 3중대 중대장 맥간 대위마저 잃고, 야전병원을 이탈리아 북부 피렌체 옆 항구도시 리보르노로 이동하던 중 독일군이 매설한 지뢰로 가장 친한 동료 간호사 제니(Jenny)마저 잃자 스스로 저주를 받았다고 자학하지만, 그녀는 이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이 죽어가는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헌신적으로 돌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상태가 악화하여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이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해나는 환자가 죽으면 뒤따라가겠다고 약속하고 근처 파괴된 수도원에 머물면서 혼자서 이 환자를 돌보기 시작한다.
해나의 친구 간호사 제니가 지뢰 폭발로 폭사한 직후 지뢰 해체를 담당하고 있는 영국 공병장교 킵(Naveen Andrews)이 등장한다, 그는 인도인 시크교도이다. 킵은 이 지역 도로에 매설되어있을지 모르는 지뢰나 불발탄을 해체하기 위해서 병장 하디와 함께 수도원 부속 건물에 머물게 되면서 해나와 서로의 아픈 감정을 위로해주면서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한다. 한번은 해나가 무너진 수도원에 있던 오래된 피아노로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나오는 아리아를 치고 있을 때 킵은 이 피아노에 지뢰가 매설되어있을지 모르는데 피아노를 치는 소리에 놀라 해나의 피아노 치는 것을 멈추도록 권총을 쏘면서 달려온다. 킵은 피아노를 점검하고 폭발물을 발견한다. 이때 해나는 어머니가 ‘네가 피아노를 칠 때 만난 남자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며 의미 있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이후 킵과 해나는 급속히 가까워지고 마침내 킵은 미니 촛불로 수도원 옆에 있는 자신의 숙소로 해나를 안내하여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그 다음 날 두 사람은 오토바이를 타고 시골 성당을 찾아가 해나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고는 외줄로 그녀의 몸을 묶고, 군용 불꽃을 밝혀 성당 상단 벽에 있는 프레스코 벽화를 보여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데이트 장면을 연출한다. 이를 통해 해나는 전쟁으로 잊힌 사랑의 감정을 다시 찾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킵은 전쟁이 끝났다고 축하하는 장소의 분수대 조각에서 독일군이 설치한 폭발물이 터지면서 자신의 부하 병장 하디를 잃은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결국 전출 명령으로 킵과 해나는 다시 이 성당에서 만나기로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는 헤어진다.
얼마 후 이 수도원에 데이비드 카라바조(Willem Dafoe)라는 사람이 찾아온다. 해나에게 자신도 같은 고향 몬트리올에서 온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지금은 이탈리아 내 레지스탕스들의 무장해제를 도와주기 위해서 왔다고 하지만, 그의 존재는 조용하던 수도원의 삶에 긴장과 궁금증을 불러온다. 그는 원래 도둑이었지만 2차 대전 중 캐나다 정보기관 스파이 무스로 활약하다 카이로를 침공한 독일군에 체포되어 심문 과정에서 양손의 엄지손가락이 잘려 두 손을 항상 검은 목장갑을 끼고 있었으며, 알마시와 인사를 나누는 과정에서도 그를 보는 표정은 무척 어두웠다. 카라바조는 그 후 자기 엄지손가락을 자른 독일 정보원 뮬러(Mueller)를 찾아 죽인 후,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알마시로 생각하고, 그마저 죽이고자 수소문한 끝에 이곳에 잠입한 것이다. 그는 1942년 6월 리비아 투브루크를 함락한 롬멜 장군의 독일군에게 사하라 사막을 건너 카이로까지 갈 수 있는 탐사 지도를 알마시가 넘긴 연유로, 쿠프라(Kufra) 오아시스에 탐사 지도와 비행기를 남긴 알마시의 친구 영국인 매독스가 자살하고, 북아프리카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서 카이로에 온 영국 정보원 제프리 클리프턴과 그의 아내 캐서린까지 알마시가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카라바조는 ‘잉글리시 페이션트’에게 유일한 소지품인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토스가 기원전 440년경에 페르시아 전쟁에 관해 쓴 ‘역사’라는 두툼한 책과 그 속에 끼어있는 편지, 폭죽 금박지. 캐서린이 남긴 그림, 책의 여백에 남아있는 메모와 알마시가 그린 지도를 보고 ‘잉글리시 페이션트’가 알마시 백작임을 알게 된다. 한편 알마시는 해나의 정성스러운 돌봄으로 조금씩 잊힌 기억을 되찾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지만, 카라바조에 의하면 알마시의 기억은 온전하며, 단지 그가 과거를 잊어버리고 싶어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더 많은 모르핀을 투여하여 그의 속 이야기를 끌어내고 싶어 한다. 그는 알마시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왜 클리프턴 부부를 죽였는지?’ 이에 알마시는 자신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머리를 젓는다. 그러면서도 ‘아마 내가 죽였을지도 모른다…’라는 의미 있는 답을 한다. 마침내 알마시는 지금까지 간직해온 자신의 비밀스러운 이야기에 대해서 서서히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
자신은 헝가리 탐험가이자 지도제작자(cartographer)인 라슬로 데 알마시(랄프 파인즈) 백작으로 1930년부터 이집트-리비아 국경 근처의 사하라 사막 지역을 탐험하면서 고고학적 연구와 지도 제작을 하고 있었다고 밝힌다. 영국 왕립 지리학회와 국제사막클럽의 회원이기도 한 알마시는 사하라 사막을 지도화하고 있는 영국인 친구 피터 매독스와 함께 탐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때 또 다른 복엽 비행기를 가지고 항공 측량을 지원하고자 영국인 부부 제프리(콜린 퍼스)와 캐서린 클리프턴이 이 탐험에 참여한다. 제프리 클리프턴은 공군 장교 출신으로 이 복엽 비행기(Boing Stearman Model 75)를 장인으로부터 결혼 선물로 받았다고 자랑했지만, 실제로 그는 영국 정보원이며 복엽 비행기 또한 영국 정부의 소유로서 이곳에서 비행기로 북아프리카 지도를 제작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한편 알마시는 사하라 사막의 작열하는 태양보다 더 뜨겁게 사랑한 캐서린 클리프턴(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의 시신을 이 사막에 묻을 수밖에 없었던 가슴 아픈 추억을 안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알마시는 화상보다 더 깊은 상처를 남긴 이 아름답고 슬픈 자신의 이야기를 카라바조에게 조용히 들려준다. 해나는 위층에서 이 사연을 우연히 듣게 된다.
알마시는 지난 사하라 사막 탐사 중, 한 베두인 노인으로부터 여자의 등 자락과 같이 생긴 길프 캐비어(Gilf Kebir) 고원에 ‘헤엄치는 사람들의 동굴’이 있으며, 이 동굴 속 바위 위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알마시, 매독스, 캐서린 클리프턴과 다른 3명의 국제사막클럽 회원들이 동굴탐사에 나서 마침내 ‘헤엄치는 사람들의 동굴’을 발견한다. 탐험대는 발견한 동굴 그림의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캐서린은 메모지 위에다 붓으로 헤엄치는 사람들의 그림을 그렸다. 탐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3대의 트럭 가운데 2대가 사막 모래 언덕에서 구르는 사고가 나자, 매독스와 탐사대원 일부는 남은 한 대의 트럭으로 이들을 구조하기 위해 카이로로 돌아갔다. 당시 제프리 클리프턴은 별도의 지도 제작으로 동굴탐사에서 빠졌으며, 캐서린은 남은 한 대의 차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그녀의 남편인 제프리가 남은 탐사대원들을 빨리 구조하도록 다그치기 위해서 알마시와 포터 서너명과 함께 남아 기다리게 된다. 그때 캐서린은 자신이 그린 엽서용 그림을 책갈피로 사용하라고 알마시에게 선물로 주지만, 그는 수줍은 듯이 거절한다. 캐서린은 모욕당했다는 기분이 들어 돌아섰지만, 사실 알마시는 캐서린을 가까이하기에는 두려움이 앞섰기에 거절하였다. 그날 밤 그 유명한 사하라 사막의 모래폭풍이 왔으며, 이를 피하기 위한 차 속에서 둘만의 밤을 보내게 되면서 운명처럼 찾아온 사랑의 싹이 발아하기 시작한다. 모래폭풍이 끝난 후 알마시는 무엇인가 불가항력에 끌린 사람처럼 그 선물을 자신의 책갈피 속에 넣어두고 싶다는 뜻을 캐서린에게 다시 전한다. 그녀는 자신의 그림을 그가 소지한 책 속에 넣다가 책 여백에 K로 시작된 한 여인을 사랑하는 메모 내용을 보고는 본능적으로 이 K가 누구를 암시하고 있는지를 느끼고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한다.
알마시와 캐서린 두 사람은 안전하게 카이로로 돌아온 직후 캐서린의 남편 제프리 클리프턴은 북아프리카 지도를 만들기 위해 일주일의 출장을 가게 되고, 캐서린이 알마시의 아파트를 찾아옴으로써 그들의 뜨거운 사랑은 시작된다. 알마시는 캐서린에게 은 골무를 선물로 사주는 등 캐서린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방을 나가면 모든 것을 잊자'라고 다짐하지만, 더욱 캐서린에게 빠져들고, 캐서린 또한 사랑의 감정으로 혼란스러워한다. 마침내 캐서린은 이 사실을 남편 클리프턴이 알면 엄청난 충격을 받으리라는 생각에 알마시에게 결별을 선언한다. 그러나 캐서린은 알마시를 잊지 못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2차대전이 발발하자 사하라 사막의 고고학 프로젝트와 지도 제작은 중단되고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알마시의 친구 매독스는 쿠프라 오아시스에 타이거 모스 비행기를 남겨두고 영국으로 돌아갔으며, 알마시도 하던 일을 중단하고 ‘헤엄치는 사람들의 동굴’에서 철수하기 위해 제프리의 비행기를 기다린다.
한편 출장을 간 제프리는 결혼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갑자기 돌아오면서 알마시와 캐서린의 관계를 확인한다. 제프리는 질투와 비탄에 잠긴 나머지 철수하는 복엽 비행기에 캐서린을 태우고 사막을 비행하여 지상에서 기다리고 있는 알마시를 들이받아 죽이고 자신은 캐서린과 함께 동반자살을 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알마시는 순간적으로 몸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제프리는 즉사하고 캐서린은 중상을 입는다. 알마시는 캐서린을 비행기에서 꺼내 ‘헤엄치는 사람들의 동굴’로 옮기던 중 캐서린이 자기가 선물한 은 골무를 목에 걸고 있음을 보게 된다. 비록 캐서린은 표면적으로 알마시와 관계를 끝냈지만, 항상 마음속으로 알마시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순간 알마시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알마시는 ‘헤엄치는 사람들의 동굴’에 발목, 손목, 갈비뼈 등 어디 하나 성한 곳 없이 망가진 캐서린에게 전등, 먹을 것과 책을 남기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동굴을 나선다.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해줘요."라는 캐서린의 애원에 "약속해. 당신을 절대 혼자 두지 않겠어."라고 답하면서. 알마시는 사흘 동안 굶주리며 사막을 걸어 엘 태그(El Tag)에 주둔하고 있는 영국군을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영국 장교는 그의 생소한 긴 이름 László Ede Almásy de Zsadány et Törökszentmiklós로 인해 독일 스파이로 의심하여 도움을 거절하고 체포하여 기차로 이송한다. 당시 영국 정보당국 또한 사하라 사막 탐험대에 침투하여 그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정보원 제프리 클리프턴과 그의 아내가 갑자기 사망하자 알마시가 이들 부부를 살해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알마시는 천신만고 끝에 그 호송 열차에서 탈출해서 독일 군부대와 접촉하여 도움을 요청한다. 알마시는 매독스가 영국으로 떠나면서 쿠프라 오아시스에 남겨둔 복엽 비행기속에 보관해 두었던, 자신과 매독스, 그리고 제프리 클리프턴이 제작한 사하라 사막 탐사용 지도를 독일군에게 넘기고 연료를 구해 그 비행기를 타고 캐서린이 있는 동굴에 돌아왔지만, 캐서린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알마시는 동굴에서 캐서린의 시신을 거두어 타이거 모스 비행기 앞좌석에 앉히고 이륙한다. 이어서 영화의 시작 지점인 독일의 대공포가 이 비행기를 격추하는 장면이 나오고, 비행기는 화염에 휩싸여 알마시는 극심한 화상을 입고 이름도 모르는 ‘잉글리시 페이션트’로 남게 된다.
마침내 캐서린과 있었던 숨이 멎을 듯한 애절한 이야기를 끝낸 알마시는 해나에게 수도원에 유령이 많다면서 이제 자신도 그 유령이 되어야겠다면서 자기 죽음을 암시하자, 해나는 눈물을 삼키면서 통증 완화 주사인 모르핀을 한꺼번에 놓아 그의 소원을 들어준다. 그러고 나서 캐서린이 동굴에 혼자 있을 때 알마시에게 쓴 편지를 해나가 잃어주는 사이에 알마시는 자신의 한 많은 삶을 조용히 내려놓고 눈을 감는다.
영화에 나타난 캐서린의 처절하고 아름다운 마지막 편지는 다음과 같다: “내 사랑,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어둠 속에 얼마나 있었지? 하루? 일주일? 이제 불도 꺼지고 너무나 추워요. 밖에 나갈 수만 있다면 해가 있을 텐데. 바위 위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이 글을 쓰느라 전등을 너무 허비했나 봐요. 우린 죽어요. (동굴 바위 그림에 있는) 많은 연인과 부족과 함께 우리는 넉넉한 죽음을 맞을 거예요. 우리가 맛본 아름다운 쾌락, 강물처럼 뛰어들어 헤엄치듯 한 우리의 육체, 이 어두운 동굴처럼 우리가 들킬까 봐 숨었던 두려움, 이 모든 흔적이 내 몸에 그대로 남아있기를 원해요. 우리가 진정한 나라입니다. 강한 자들의 이름과 지도 위에 그려진 국경선이 없는 나라입니다. 나는 알고 있어요. 당신이 나를 바람의 궁전으로 데리고 가리라는 것을. 그게 내가 바라는 모두예요. 나는 당신과 (이 그림 속의) 친구들과 함께 그곳을 걸을 것입니다. 지도가 없는 땅을. 전등도 꺼지고 어둠 속에서 이 글을 쓰고 있어요.”
알마시가 죽은 다음 날 해나는 알마시가 남긴 헤로도토스의 책과 편지와 메모와 사진을 챙겨 가방에 넣고서 카라바조가 마련한 피렌체로 가는 트럭을 타고 수도원을 떠난다. 카라바조도 죽음을 앞둔 알마시가 자신에게 들려준 애절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알마시에 대한 자신의 오해에서 비롯된 복수심을 내려놓고 한 이탈리아 여인을 만나 이 수도원을 떠난다. 하늘에서는 밝은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리고 알마시의 비행기가 트럭의 모습과 교차하더니 사막 너머로 사라진다. 영화는 긴 여운을 남기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3 원작자, 감독, 음악, 배우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원작자는 마이클 온다체(Michael Ondaatje)이다. 그는 1943년 12월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태어나 캐나다로 이주한 소설가 겸 시인이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 시를 좋아하고 연극학교를 운영하던 어머니로부터 문학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부모가 이혼한 후 그는 어머니와 함께 영국을 거쳐 캐나다로 이주했다. 이후 캐나다의 비숍 대학에서 문학과 시를 공부했으며, 토론토 대학에서 학사, 퀸스 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 학부 때부터 시 부문에서 앱스타인상을 받을 정도로 문학적 능력이 뛰어났다. 이후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 글렌든 대학에서 캐나다와 미국 문학을 강의했다.
소설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영화 줄거리와는 달리 제2차세계대전 막바지에 폭격으로 파괴된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서 함께 지내게 된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진 네 인물이 1930년과 1945년 사이에 겪었던 일들을 소재로 쓴 소설로서, 이야기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전개되어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서야 이야기 전체를 파악할 수 있다. 온다체는 이 소설에서 전쟁과 사랑, 젊음과 죽음, 유럽과 식민지, 과거와 현재, 사실과 허구를 집약하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인공 가운데 이름과 국적과 기억을 잃은 알마시는 헝가리인이며, 전쟁으로 아버지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해나는 캐나다 출신이지만 유럽에 파견돼 있고,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손가락 일부를 잃은 카라바조는 캐나다에서 온 연합군의 스파이이자 도둑이며, 나라를 잃은 킵은 영국 군대에 속한 인도 시크교도이다. 그들은 파괴된 수도원에 함께 머물고 있지만 각각의 정체성을 갖고 다른 세계를 지향한다.
소설은 영국인 환자에게 보이는 해나의 헌신적인 사랑, 킵과 해나의 순수한 사랑, 그리고 알마시와 캐서린의 불같은 사랑 속에서 변화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 모두는 씻을 수 없는 지난날의 상처가 있었지만, 인간성을 되찾고 황폐해진 세계를 다시 일구고자 애쓰며, 과거를 딛고 새로운 현실을 살아가고자 몸부림친다. 한마디로 전쟁의 황폐함 속에서 변화된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남으려는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한편 그의 소설은 시간의 순서대로 배열해 놓지 않았다. 현재 속에 과거가 들어 있고, 과거 속에 또 다른 과거가 숨어 있으며, 숨바꼭질하듯 주인공들의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엉킨다. 이와 같은 이야기의 구조는 사막을 닮았다. 모래폭풍이 불고 나면 사막의 지형이 바뀌듯이 이야기의 시작과 이야기의 주체가 변화한다. 전쟁 속에서 인물들의 사연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펼쳐진다. 모래폭풍은 사막 전체를 뒤흔들어놓지만, 수많은 사연을 품은 사막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다.
짧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전쟁의 참혹함과 사랑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소설 ‘잉글리시 페이션트’(1991)는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현대 고전 가운데 하나이다. 온다체는 이 작품으로 세계 3대 문학상 가운데 하나인 맨부커상(1992)을 받았다. 나아가서 부커상 재단이 창립 50주년을 기념하여 2018년에 골든 맨부커상 (Golden Man Booker Prize)을 새로 제정하였고, 재단이 위촉한 심사위원들이 지금껏 맨부커상을 수상한 53편(1971, 1974, 1992는 2편의 작품)의 작품 중에서 5편을 수상작 후보로 선정하여 일반 독자들의 투표를 거쳐 수상작을 결정하였는데, ‘잉글리시 페이션트’가 골든 맨부커상까지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한마디로 지난 50년에 걸쳐 맨부커상을 수상한 작품 중에서 최고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후 이 소설은 전 세계 30여 개국에 소개되었으며, 이 소설을 각본으로 만든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영화는 1997년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한 아카데미 9개 부문을 수상했다.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감독은 앤서니 밍겔라이다. 그는 1954년 1월 6일 영국의 남동부 작은 섬 아일 오브 와이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탈리아계 영국인으로서 감독, 각본, 제작, 기획, 연기자 그리고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영화예술인이다. 밍겔라는 샌 다운 글래머 학교와 성 요한 포츠머스를 거쳐 헐 대학(University of Hull)을 졸업했으며 그의 첫 직업은 대학 강사였다. 영화계에 입문하기 전 라디오와 TV 극작가 겸 스크립트 편집자로 일하면서 틈틈이 라디오 드라마와 연극 대본을 썼다. 1990년 직접 쓴 각본으로 ‘유령과의 사랑’을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하여 영국 아카데미(BAFTA) 각본상을 받았다. 미국으로 건너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있는 리플리’를 영화 각본으로 만들어 1999년 오스카 각본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미국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니콜 키드먼과 주드 로가 주연한 ‘콜드 마운틴’(2003) 역시 장엄한 서사극에 일가견을 가진 그의 실력을 유감없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오페라 연출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가장 성공한 공연은 2005년 영국 국립 오페라극장에서 초연한 푸치니의 ‘나비 부인’이다. 2001년 그는 영화예술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영국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린 영화는 캐나다 작가 마이클 온다체의 소설을 영화화한 ‘잉글리시 페이션트’(1996)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온다체의 소설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네 명의 주인공에다 현실과 기억 속을 넘나드는 복잡하고 광대한 플롯으로 되어 있어 영화로 만든다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소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영화와 소설이 주는 느낌이 서로 다르며 소설은 알마시뿐만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들의 과거 이야기도 상세하게 밝히고 있어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요약하기 어렵다. 그러나 밍겔로 감독은 이 복잡한 줄거리를 이름도 기억도 지워진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격정적인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각본을 만들었다. 그는 이 작업에 무려 3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고 밝혔을 만큼 어려웠다고 전한다. 이렇게 공을 들여 각본을 만들고 촬영한 원본은 4시간이 넘었다. 결국 밍겔라는 이 대서사시를 스크린으로 옮기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 영화를 통해 그는 97년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았다. 그러나 밍겔라는 2008년 3월 18일 54세의 나이로 편도선 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뒤 입원하던 중 치명적인 출혈이 발생하여 사망했다.
이 영화에서 기억해야 할 또 한 명의 예술가를 지적한다면 음악을 담당하고 있는 가브리엘 야레이다. 그는 레바논 출신의 프랑스 작곡가이다. 영화의 시작 자막과 함께 캐서린이 동굴 바위 위에 그려진 헤엄치는 사람들의 그림을 붓으로 그리고, 이어서 알마시가 캐서린의 시신을 복엽 비행기에 태워 광대한 사하라 사막을 가로질러 날아가면서 중동지역 여성들에 대한 사회·종교적인 구속과 억압, 인습과 애환이 담겨 있는 듯한 무반주로 시작되는 구슬픈 주제곡이 등장하여 처음부터 관객의 귀를 사로잡는다. 기막히게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이 주제곡으로 야레는 1997년도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게 된다.
알마시가 축음기를 틀며 침대에서 캐서린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야레는 알마시의 고향인 헝가리에서 전해 내려오는, 사랑을 노래하는 애절한 민요 ‘Szerelem Szerelem’를 통해 관객들에게 감동적인 정서를 자극한다. 해나가 폭격으로 파괴된 수도원에 뒹굴고 있는 피아노를 발견하여 바흐의 음악을 치는 장면, 킵이 해나와 데이트할 때 해나를 외줄에 태워 이탈리아 시골 성당의 그림을 보게 하는 장면, 영화 끝부분에 해나가 캐서린의 유서를 읽어주는 사이에 알마시가 눈을 감는 장면까지 영화의 무거운 분위기와 바흐(Bach)의 음악은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나아가서 야레는 영화 배경의 시대상을 반영하듯 1930, 40년대 유행한 올드 팝송들을 영화 속에 삽입하며 줄거리 전개에 도움을 주고 있다. 영화에서 알마시는 사막 현지어를 비롯하여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고, 어지간한 유행가 제목을 거의 다 맞힐 줄 아는 천재로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카라바조가 수도원에서 틀어주는 축음기의 레코드판 음악을 거의 다 알아맞힌다. 그 중에서 지금도 알 수 있는 ‘Cheek To Cheek’, ‘’Blue Moon‘, ’Wang, Wang Blues’이라는 곡이 등장한다. ‘Cheek To Cheek’은 이 영화에서 종전 소식을 듣고 다리 위에서 서로 축하하는 장면에 다시 나온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해나는 알마시가 죽은 후 수도원 침대 위에 남아있는 그의 책을 챙겨 트럭을 타고 피렌체로 떠난다. 떠난 그 하늘에 캐서린의 시신을 앞 칸에 태우고 알마시가 사하라 사막의 장엄한 모래톱 물결 위로 비행하는 장면이 겹치면서 이국적이면서 환상적이고, 장중하고도 슬픈 느낌을 주는 북아프리카인지 중동인지 알 수 없으나 애절한 민속 음악과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어울려져 마치 피아노 협주곡이나 교향곡을 듣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알마시 역으로 나온 랄프 파인즈는 1962년에 영국 Ipswich에서 6 형제자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부이자 사진사이며, 어머니는 작가였다. 6 형제자매 모두가 배우, 감독, 작곡가, 영화제작자, 환경보호론자, 고고학자로 출세했다. 랄프는 1973년에 아일랜드로 이사하여 퀘이커 교도들이 세운 뉴타운 학교에 다니다 다시 영국 솔즈베리로 이사 와서 Bishop Wordsworth's School을 졸업했다. 그는 연기에 열정을 쏟기 전 Chelsea College of Arts에서 그림을 공부하다, 1983∼85년 the Royal Academy of Dramatic Art에서 연기 수업을 받았다.
그 뒤로 랄프 파인즈는 셰익스피어 전문 연극배우로 이름을 날렸으며, 영화는 1992년에 줄리엣 비노슈와 함께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에 남자주인공 히스클리프로 데뷔하였다. 그는 ‘신들러 리스트’(1994)에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로, ‘잉글리시 페이션트’(1997)에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버나드와 도리스’(2008)에서 에미상 가운데 남우주연상 후보로 올랐고, 연극 “햄릿’(1995)으로 토니상 가운데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Faith Healer’(2006)에서 남우주연상 후보로 오를 만큼 정상급 배우이다.
파인즈는 ‘잉글랜드 페이션트’의 남자주인공인 헝가리의 알마시 백작 역할에서 멋진 연기력을 선보였다. 사막 현지어를 비롯하여 다국적 언어를 구사하고, 카라바조가 수도원에서 트는 축음기의 노래 제목을 거의 맞힐 줄 아는 천재이지만, 보기에도 섬뜩한 얼굴의 화상 분장을 하고 누운 채로 명연기를 펼쳤다. 동굴에서 캐서린의 시신을 안고 나오면서 오열하는 파인즈의 연기는 결코 잊을 수 없다.
캐서린으로 분장한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는 1960년 5월 영국해군 비행 장교의 딸로 태어났다. 5살 때 아버지를 비행 사고로 잃고, 어머니는 다른 비행 장교와 재혼했으나 새아버지 역시 11살 때 비행 사고로 죽었다. 그 후 그녀는 영국에서 연기 학교에 다니다 중도에 포기하고, 19살에 프랑스로 건너가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연기 학교에 다녔다. 첫 남편은 프랑스인으로 같은 연기 학교에서 만났다. 물론 프랑스어가 유창하다.
크리스틴은 프린스의 ‘Under the Cherry Moon’(1986)에서 주역으로 데뷔하고, ‘A Handful of Dust’(1988)에서 이브닝 스탠더드 필름상 가운데 신인상을 받아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1994)에서 영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과 이브닝 스탠더드 필름상 가운데 Best Actress 수상하고, ‘천사와 벌레’(1995)에서 이브닝 스탠더드 필름상 가운데 여우주연상을 받았으며, ‘당신을 오랫동안 사랑했어요’(2008)에서 29회 런던 비평가 협회상과 여우주연상을 받아 로맨스 퀸으로 올라섰다. 그녀는 영국 여성의 우아하고 도도한 이미지를 지닌 배우로 평가받고 있다. 크리스틴은 ‘잉글리시 페이션트’(1996)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연기로 열연하는 등 우아하고 매혹적인 캐서린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냄으로써 격찬을 받았으며,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에는 실패했다.
해나 역의 줄리엣 비노슈는 1964년 3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무대감독인 아버지와 영화배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예술학교를 졸업한 뒤, 연극 무대와 영화 스크린을 오가며 출연했다. 1985년 안드레 테시네 감독이 드라마 영화 ‘랑데부’에 주연을 맡겨 프랑스의 스타로 만들었다. 이후 6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고, 다수의 국제 영화 시상식에서 수상했다. 비노슈의 영어 연기 데뷔작은 필립 코프먼이 연출한 ‘프라하의 봄’(1988)이다.
특히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 줄리엣 비노슈는 프랑스계 캐나다 간호사이지만 영어를 할 수 있기에 연합군 야전병원에 근무하다 극심한 화상을 입고 국적도, 신분도, 이름도 알지 못하지만, 영어를 구사하고 있어 잉글리시 페이션트로 불리는 환자를 이탈리아 북쪽 리보르노로 이송하다 더 이상 이 환자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이송이 어려워지자 폭격으로 폐허가 된 수도원에 이 환자를 옮겨 헌신적으로 돌보는 간호사 해나의 역할을 한다. 이 영화에서 해나는 전쟁 중에 사랑하는 맥간 대위를 잃고, 동료 간호사이자 친구 제니마저 지뢰 폭발로 사망한 것에 심적 충격을 받아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지만, 폭발물 해체 작업을 하는 인도인 영국 중위 킵을 만나 과거의 마음 아픈 일을 잊고 서서히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하지만, 둘은 아무런 장래 계획도, 기약도 없이 헤어진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비노슈는 섬세한 감정을 담은 수수하고 참신한 모습의 간호사 해나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연기하여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게 된다.
킵으로 등장한 나빈 앤드루(Naveen Andrews)는 1969년 런던에서 태어난 영국 배우로서, 그의 부모는 인도에서 온 이민자이다. 고등학교 재학 중 16살에 런던의 Guildhall 음악·드라마 학교에 오디션을 봐 입학하였다. 나빈은 Hanif Kureshi의 영화 ‘London Kills Me’(1991)에서 첫 역은 맡았으며, 영화 ‘Wild West’(1992)에서 이브닝 스탠더드 드라마상 가운데 신인상 후보로 뽑혔고, 영국 BBC가 만든 ‘The Buddha of Suburbia’(1993)로 San Remo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 후보로 선정되었으며, 인기 텔레비전 연속극인 ‘Lost’(2004)에서 Sayid Jarrah 역을 맡아 에미상과 골든글로브상 후보로 지명을 받았다.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는 시크교도이자 폭발물을 해체하는 영국군 장교 킵의 역을 맡고 있다. 킵과 해나의 첫 만남은 해나의 동료 간호사 제니가 야전병원을 이동할 때 선도 지프로 앞장서 가다 독일군이 매설한 지뢰가 터져 폭사하고 만다. 즉시 킵과 그의 영국인 병장이 투입되어 도로에 묻혀있을지도 모르는 지뢰를 탐지하여 제거하는 작업을 하던 중 해나가 동료 친구의 죽음을 보자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이 도로에 뛰어든다. 킵의 부하인 하디 병장이 순간 판단이 흐려진 해나에게 다가가 지뢰밭인 이 도로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다. 이후에도 킵은 파괴된 수도원에 지뢰가 매설된 피아노를 치는 해나를 또 한 번 구출한다. 이후 킵은 수도원 앞에 있는 부속 건물에 병장 하디와 함께 머물면서 해나를 사랑하게 된다.
실제 원작 소설에서는 킵에 관한 이야기가 상당 분량을 차지하지만, 밍겔라 감독이 알마시와 캐서린을 중심으로 각본을 만들다 보니 그에 관한 부분은 거의 전부 생략되었다. 이로 인해 다소 뜬금없는 인물의 등장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킵과 해나는 둘 다 아버지를 전쟁으로 잃었으며, 유럽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인도인과 캐나다인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서로를 위로하다 좋아하는 관계로 발전한다. 여기에서 킵은 해나와 데이트하면서 영화사상 가장 아름다운 명장면을 연출한다.
이 영화에서 카라바조로 등장하는 윌럼 더포는 1955년생으로 미국 배우이다. 본명은 윌리엄 J. 더포(William J. Dafoe)이다. 그의 아버지는 외과 의사이고 어머니는 간호사로 일했기 때문에 부모의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 무려 형제자매가 자신을 포함해서 8명이나 있었으며 다섯 명의 여자 자매들이 그를 키웠다. 윌럼은 그의 닉네임이다. 위스콘신 Appleton East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밀워키에 있는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드라마를 전공하였다. 그러나 1년 반 정도 공부하고는 밀워키에 있는 실험극단 단원으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더포는 출연한 영화 가운데 ‘플래툰’(1986), ‘뱀파이어의 그림자’(2000),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에서 세 번이나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로 지명되었다.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2018)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로 올랐으나 수상에 실패했다. 그러나 제75회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2018)에서 같은 영화로 볼피컵 남자 연기자상을 받았다.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와 달리 온다체의 소설에서는 카라바조가 해나 아버지의 친구이며 몬트리올에서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고, 해나의 소식을 다른 간호사한테서 듣고 찾아와 그녀와 같은 수도원에서 기숙한다. 전직이 도둑인 그는 전쟁 중에 캐나다 정보부대 요원으로 연합군의 스파이로 일하고 있었는데, 파티에서 실수로 독일군 장성의 여자 친구에게 자신의 사진이 찍혔다. 그는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의 숙소에 잠입하여 그 사진 필름을 훔치려다 붙잡혀 엄지손가락을 모두 절단당하는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그러나 영화와 소설 모두 카라바조가 이 수도원을 찾아온 진실은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정체가 알마시인지를 알아내 복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이 환자가 가지고 있는 소지품을 보고는 바로 독일군에게 지도를 넘긴 헝가리 출신의 알마시 백작임을 밝혀내고, 단도직입적으로 알마시에게 질문한다. ‘왜 클리프턴 부부를 죽였냐?’, ‘왜 지도를 독일군에게 넘겼냐?’라고 추궁하면서 ‘바로 그 지도 때문에 자기 손가락이 잘렸으며, 이에 대한 보복으로 당신을 죽이고자 이곳에 왔음’을 털어놓는다. 여기에서 알마시는 캐서린을 살리기 위해서 저간에 일어난 숱한 사건들을 이야기하고 해나도 2층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진실을 알게 된다. 카라바조는 모든 것이 오해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서 알마시를 죽이려 한 자기 생각을 내려놓는다.
4. 감동적인 장면과 대사와 흥미로운 사실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개봉된 지 2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많은 관객에게 아름다운 영화로 남아있다. 그러기에 기억을 새롭게 하는 차원에서 영화 속의 아름답고 멋진 장면과 가슴에 와 닿는 감동적인 대사와 흥미로운 사실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영화 마지막 부분에 사하라 사막의 지평선 노을을 배경으로 ‘헤엄치는 사람들의 동굴’에서 알마시를 기다리다 죽은 캐서린의 시신을 알마시가 사막 바람에 나부끼는 흰 천에 감싸 안고 걸어 나오면서 오열하는 모습은 정말 처절할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아울러 죽은 캐서린의 시신을 태운 복엽 비행기가 광활한 사막을 날면서 보여준 사하라 사막의 물결치는 듯한 모래톱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억할 것이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도 같은 장면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영상미를 밍겔라 감독이 만들어냈다.
2) 인도인 시크교도이자 폭발물을 해체하는 영국군 중위 킵이 밤중에 해나를 불러내기 위해서 수도원 옆에 있는 자신의 숙소로 안내하는 좁은 길을 수많은 미니 촛불로 아름답게 밝히고, 다음날 자신의 오토바이에 해나를 태우고 데이트 장소인 이탈리아 시골 성당으로 가서, 아무것도 보지 말고 기다리라며, 해나를 외줄 밧줄에 달아 올려 그네를 타듯 조정하며, 그녀 손에 들린 군용 신호 불꽃으로 성당 윗벽에 그려진 아름다운 프레스코 성화를 구경시켜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바흐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정말 상상을 초월하고 숨이 막힐 듯한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은 영화를 보는 이의 기억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두 사람은 이 시골 성당을 다시 오자고 굳은 약속을 하지만, 이 약속은 기약 없는 약속이 되고 만다.
그뿐만 아니라 해나가 수도원의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자 어린 시절로 돌아가 길바닥에 선을 긋고 숫자를 넣어 그 위에서 뛰어노는 장면과 비 오는 날 해나, 카라바조, 킵, 하디가 얼굴에 비를 맞아 보고 싶다는 알마시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들것에 싣고 어린아이들처럼 빗속을 뛰어다니는 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3) 영화 속의 기억에 남을 한 가지 대사를 소개한다. 크리스마스 파티장에서 알마시와 캐서린이 남의 눈을 피해 열애한다. 이처럼 캐서린은 알마시와 함께 욕망의 불꽃을 태우지만 결혼한 지 일 년도 안 된 그녀는 불안해하였으며, 마침내 알마시와 헤어져 영국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그 후 환자가 된 알마시는 해나에게 그 장면에 관련된 다음의 글을 보여준다: “전시의 배신은 평화 시의 배신보다 더 치졸하다. 새로운 연인들은 불안해하고 민감하지만, 모든 것을 망가뜨린다. 왜냐하면 이들의 심장은 불의 기관이기 때문이다.”
4) 영화와 소설에서 내용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예를 들고자 한다. 먼저, 영화에서 킵은 이탈리아 북부 피렌체로 전출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해나를 떠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소설에서 킵은 미국이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하였다는 뉴스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인도인으로서 그는 마음속에 영국을 비롯한 서양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그는 미국이 무서운 파괴력을 가진 핵폭탄을 백인 국가에는 절대로 투하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킵은 서양인의 동양인에 대한 차별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더 이상 영국군 장교로 복무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그 직후 킵은 수도원에 있는 해나, 알마시, 카라바조와 헤어져 오토바이를 타고 이틀간 정신없이 광란의 질주를 하다 비가 오는 다리에서 미끄러져 오토바이와 함께 강물 속으로 추락하지만, 목숨은 건진다. 이후 14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킵은 인도에서 의사가 되어 단란한 가정을 꾸리게 되지만, 34세가 되어 있을 해나에 대한 깊은 상념에 잠긴다.
다음으로, 감독은 영화에서 해나와 카라바조의 수도원 만남이 너무 우연인 것으로 비칠 것 같아 두 사람은 서로 모르는 관계로, 카라바조가 이 지역에 온 것은 레지스탕스의 무장해제를 위해서 온 것으로 설정하였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러나 소설에서 카라바조는 해나 아버지의 친구로 해나를 어린 시절부터 잘 알아 온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5) 영화에서 해나가 알마시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사랑의 관계나 간호사라는 직업윤리 차원으로 일부 관객들이 해석한다. 그러나 다른 이유가 있었다. 온다체의 소설 속에 해나는 지난날 아버지를 전쟁에서 잃은 슬픈 경험이 나온다. 따라서 그녀는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자신의 아버지로 전이(transference)하여 생각하다 보니 주변의 모든 간호사는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두고 떠났지만, 해나는 그를 떠날 수 없었다.
6)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자막으로 이 영화에 나오는 상당수의 주인공은 당시 실존했던 인물이지만, 이야기 내용은 전부 가공된 픽션이라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영화의 줄거리는 실제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아닌 허구적인 이야기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먼저, 영화에서 알마시는 카라바조에게 자신은 결코 독일 스파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에 의하면, 영국 국립 문서보관소가 가지고 있는 영국 국내 방첩 활동과 보안 기관을 맡은 정보기관인 MI5(Military Intelligence, Section 5)가 작성한 문서에, 라슬로 알마시 백작은 실존 인물로 1895에 태어난 헝가리 귀족이며, 1930년대 실제로 북아프리카 리비아와 이집트에 걸쳐있는 사하라 사막을 여러 번 항공기로 답사하여 지도를 만들면서 고고학 연구를 함께 진행해 온 지리학자이자 탐험가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나치에게 맹종한 독일 스파이였고, 커다란 코가 늘어진 추남이며, 동성연애자였고, 패션 감각도 부족해 항상 지저분한 옷만 걸치고 다녀, 전혀 남의 눈에 띄지 않았다고 기재하고 있다. 그러나 알마시 백작은 돈을 물 쓰듯 하여 이를 수상하게 여긴 영국 정보당국이 그를 체포하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헝가리로 돌아왔지만, 전쟁 말엽인 1944년 소련군에게 다시 체포되어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증거 부족으로 풀려났다. 영화에서 화상으로 인한 고통과 캐서린을 잃은 아픔을 잊기 위해서 다량의 모르핀을 요청하여 죽음을 맞이하는 알마시와는 달리 실존 알마시는 1951년에 병으로 사망했다. 지금도 오스트리아에 알마시 가문의 저택이 있다.
특히 알마시 백작은, 스파이 활동으로, 독일이 헝가리를 점령하자 독일의 군사 정보, 방첩 기관인 아프베어(Abwehr)에 포섭되어 독일군 북아프리카 지휘관인 롬멜 장군의 눈과 귀의 역할을 하였으며, 독일 스파이를 이집트에 몰래 침투시키는 '살람(Salam) 작전'에 참가하여 독일 스파이 2명과 함께 리비아에서 이집트까지 독일군의 진격로를 사전에 답사하고, 영국군의 부대 위치 등을 정탐하면서 이집트 도시 아시우트(Asyūt)까지 갔다. 거기서 알마시는 다시 독일의 동맹국 이탈리아의 식민지 리비아로 돌아왔다. 알마시는 그 공로로 철십자 훈장까지 받았다.
다음으로, 영화 속에는 알마시와 캐서린 클리프턴이 사랑에 빠진 이야기가 전부이지만, 이것은 모두 픽션임을 지적할 수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클리프턴 부부는 실존 인물인 로버트 클레이턴 경(Sir Robert Clayton)과 그의 아내 도로시 클레이턴(Dorothy Clayton)으로, 이들 부부는 사막 탐험가인 알마시와 함께 사하라 사막을 탐사했으며, 영화에서처럼 ‘헤엄치는 사람들의 동굴’을 1933년에 10월에 발견하였다.
7) 영화의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는 '헤엄치는 사람들의 동굴'은 이집트의 서남쪽 국경 지역인 알와디알자디드에 위치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캐서린은 거친 질감의 종이 위에 붓으로 이 동굴의 바위 위에 남아있는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나오고, 이 그림을 알마시가 갖고 다니는 헤로도토스 ‘역사’ 책에 끼워 넣을 수 있도록 선물로 준다. 결국 이 동굴 속의 수수께끼 같은 그림은 두 사람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사랑의 서막이 되었으며, 마지막엔 캐서린이 이 그림 옆에서 외롭게 죽어간 동굴이 되었다.
아주 오래전에 이곳이 바다였는지 호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사막 한가운데 수영하는 사람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 영화가 개봉된 후 이 동굴의 그림을 보기 위해서 방문한 관광객들로 인해 그림이 많이 훼손되었다고 하며, 이집트 정부는 더 이상 손상이 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지만 이미 동굴의 구조가 약해져 보존이 쉽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물론 영화 속에 나오는 동굴은 실제 장소가 아닌 촬영 세트이다.
8) 이 영화에 대한 예비지식이 없는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종잡을 수 없음에 당황한다. 그 이유는 밍겔라 감독이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을 무시한 채 현재에서 과거로 시제를 자주 거슬러 올라가는 플래시백(flashback)이라는 기법을 이용하여 시간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사건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다.
실제로 원작자인 온다체는 다수의 주인공을 통해 의도적으로 사건의 초점을 흐리게 만들었기 때문에 독자를 힘들게 하고 있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영국인 환자 알마시도 아니고, 줄리엣 비노슈가 열연한 해나도 아니며, 인도인 킵과 카라바조도 아니고, 알마시의 연인 캐서린 클리프턴도, 남편인 제프리 클리프턴(콜린 퍼스)도 아니다. 알마시, 해나, 카라바조, 킵, 네 캐릭터의 이야기를 비슷한 비중으로 골고루 보여줌으로써, 전쟁으로 황폐해진 인물들이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을 다각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며, 이 소설의 표현대로 이들이 사막의 모래 속에 파묻혀 허우적거리면서도 인간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잔잔한 감동을 자아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의 매력적인 요소이다.
그러므로 소설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위대한 문학작품의 반열에 들어갈 만큼 내용과 형식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소설은 주제를 형상화하기 위해, 사실과 허구의 혼재, 과거의 사건과 기억을 서서히 밝혀나가는 추리 방식에서 오는 과거와 현재의 공존, 다중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설정 방법을 통하여, 영상으로는 담아내기 힘든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을 끌어낸다. 특히 이 소설은 영화로 표현하기 힘든 아름다운 문장, 섬세한 인물 묘사, 많은 시와 노래 등을 인용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또 다른 매력과 즐거움을 준다. 따라서 이미 영화를 본 관객이라도 이 영화의 원작인 소설을 읽어볼 것을 강력히 권하고 싶다.
이처럼 원작 소설을 다 읽은 후에야 어렴풋이 기억나는 줄거리를 영상화하는 일은 쉽지 않았기에 밍겔라 감독은 오로지 기억 속에 뚜렷이 남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선택하여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훗날 앤서니 밍겔라 감독도 인터뷰에서 이 영화의 각본을 만드는 작업이 아주 힘들었으며 도전적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밍겔라 감독이 각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알마시와 캐서린의 러브스토리로 초점을 맞추다 보니 원작자가 주인공을 여러 명으로 만든 다중적 의미를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9) 독립제작자인 사울 자엔츠는 오스카 작품상을 받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5)와 ‘아마데우스’(1984)를 제작한 인물로서, ‘잉글리시 페이션트’가 오스카 작품상을 받는 시상식에서 그간의 업적을 인정받아 특별상인 어빙 탈버그 상까지 받았다. 그는 원래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제작할 때 20세기 폭스의 지원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캐서린 역을 미국 여배우 데미 무어가 아닌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에게 맡기자, 캐스팅에서 의견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20세기 폭스’가 빠졌다. 이로 인해 ‘미라맥스’가 나설 때까지 영화 제작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지난 이야기지만, 당시 밍겔라 감독도 데미 무어 대신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를 원했으며, 크리스틴도 강하게 이 역을 맡길 원했었다고 전한다.
5. 마무리
현대인이 아무리 바쁘고 냉소적이라 해도 누구나 가슴 한구석에 감추어두고 싶은 사랑이나 아니면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동경은 남아있다. 분명히 사랑은 인생의 의미를 더 풍요롭게 하는 윤활유와 같은 개념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애절한 사랑의 감성을 자극하는 불후의 명작임이 틀림없다. 그러기에 개봉 당시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69회 아카데미상 24개 부문 중에 12개 부문에 올라, 작품상, 감독상, 여우조연상, 미술상, 음악상, 의상 디자인상, 촬영상, 음향상, 편집상 등 9개 부문을 수상하였다. 이는 1987년의 영화 ‘마지막 황제’ 이후로 가장 많은 부문의 수상이다. 당시 이 영화는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 각본상 후보에도 이름을 올렸다. 1997년 골든 글로브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작품상과 작곡상을 받았으며,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줄리엣 비노슈는 은곰상, 앤서니 밍겔라 감독은 황금종려상 후보에 올랐고, 영국의 아카데미상에서도 여러 개의 상을 획득한 이 시대 최고의 명화 가운데 하나이다. 물론 타임스, 뉴욕 타임스, 뉴스위크, LA타임스 등 저명 언론도 앞 다투어 이 영화를 최고의 걸작이라며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현대의 고전 문학작품을 이에 걸맞게 정말 아름다운 명화로 만들었다는 데 동의한다. 무려 방영 시간이 2시간 42분이라는 긴 시간이지만, 소수 정치인의 탐욕으로 무고한 7∼8천만 명의 사상자를 낸 2차 세계대전 중에 피어난 이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은 태양이 작열하는 사하라 사막보다 더 뜨겁고, 물결치는 장엄한 모래톱보다 더 아름다운 영화 중의 영화였다. 워낙 아름답고 애절하게 그리다 보니 이런 일탈이라면 신도 감동할만한 위대한 사랑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보기에도 소설 표지의 ’사막보다 깊은 서정, 전쟁보다 장엄한 로맨스’라는 표현은 이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만큼, 밍겔라 감독은 이 모든 것을 멋지게 소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시인과 소설가는 시공을 초월하여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사랑을 노래하거나, 인간 내면에 숨겨진 은밀한 사랑의 세계를 탐구하지만, 사랑은 여전히 불가해한 개념으로 남아있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를 죽이는 전쟁 상황 속에서도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이 가능함을 보여줌으로써 사랑이라는 난해한 개념을 더욱 깊이 있게 접근할 수 있게 한 이 시대 고전 명화이다.
새로운 땅을 차지하여 지도 위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자 전쟁과 살육을 일삼는 정복자나, 바람에 지워지는 모래의 사랑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현대인과는 달리, 캐서린과 알마시는 일찍이 나일강 하류 삼각주의 바닷물을 태양과 바람으로 불순물을 제거하여 썩지 않는 흰 소금을 만들어 온 고대 이집트인처럼, 모든 불순물을 제거하고 남겨진 썩지 않는 소금과 같은 사랑을 하였기에, 이들은 오늘도 사막 어디엔가 그러나 지도에 없는 바람의 궁전에서 동굴 속 그림에 나오는 헤엄치는 친구들과 함께 거닐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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