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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교황 요한22세가 고려 충선왕[심양왕/차가타이 한국상왕]에게 1333년에 보낸 편지.
로마 교황 요한22세가 코룸왕에게 보낸 편지.
원나라 마지막 황제 혜종이자,
북원 제1대 황제 순제. 토곤 테무르[1333~1368]
토곤 테무르의 아들인 아유르 시리다르 빌레그트 칸[아율실달 비려한]이
기황후의 아들이자 북원 제2대 황제 소종[1368~1388]이다..
내몽고 자치구 브이르 노르전투에서 명군에 대패하여 후비 바야후트의 아들인
평종[토구스 테무르]에게 살해당함.
평종은 카슈미르 카라코룸 산맥 지방의 도우라강 전투에서 명 원정군에 대패하여 패전 책임을 물어
바야후트의 외가 가문인 아릭부케 가문의 엥흐 조리그 투 칸에게 살해당함.
편지제목.
"Magnifico viro Socho de Chigiota Regi Corum"
충선왕[왕원/왕장]: 고려왕 재위 1298~1308년
요녕성 고려왕겸 심양(선양)왕 재위 1308~1313년.
요녕성 심양왕 단독재위 1313~1320년.
심양왕 왕원(왕장) 유배: 1320~1323년.
서장성 티벳 자치구 샤카(샤키아)지방 차가타이 한국으로 3년간 유배.[차가타이 한국 상왕]
1325년 대도[북경]에서 왕원[충선왕/심양왕/차가타이 한국 상왕]사망.
심양왕 왕고 등극 1320년.
충숙왕[왕도/왕만]:재위 1313~1330. 1332~1339년.
충혜왕[왕정]: 재위1330~1332년. 1339~1344년.
편지제목
"Magnifico viro Socho de Chigiota Regi Corum" 중에서
"Magnifico 는 베네치아 귀족상인을 통해서
viro =send 보내다.
Socho = 소초[宗長]는
감숙성 돈황지구,란주시 란주지구에서 동서양을 연결하는 실크로드 교통로를 차지하고
중간세금을 받아내며 중계무역으로 부를 축적하며 활동하던 세력으로 석호족의 후예를 말하며
소호씨,소호금천씨의 후예로 복속된 속호[屬昊-호르족]를 뜻한다.[홀,졸,솔,=호르족=호족/昊族]
호족[昊族]은
순우족>순누족으로 이어지고, 몽골 훈노족과 감숙성, 내몽고 흉노로 분화하는데,
솔라족>순나족>순우족>순누족으로 분화한다.
순우족은 삼한 종족[한위조]과 몽골 훈노족, 북흉노로도 분화하고,
순우족에서 시라족[신라족]과 선우 알씨 가야족도 나온다.
북방에 남아있다가 신강성, 감숙성 서쪽 키르키즈, 카자흐, 우즈베키스탄, 북인도 카슈미르 지방으로
진출한 사람들이 호족[昊族]계열의 호리족으로 분화한다.
호족이 몽고에 점령되어 속호[屬昊]로 들어간 것이다.
실크로드 무역에서 금을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종족이 금나라/여진인들이었다.
몽고가 동만주와 일본으로 건주여진과 란주여진의 금나라를 밀어내고 일부 석호족과함께
타타르족[달달족]을 중심으로 아프간, 이란에서 터키, 흑해 크림반도, 헝가리까지 진출하여
일한국을 건설하였다. [킵챠크 한국으로는 마자르족(조상이 말갈 계열)중심]
몽고 점령 이전
신강성, 감숙성 일대에서 활동하던 건주여진과 란주시에서 내몽고를 차지한 금나라를 말한다.
이들은 몽고 징기즈칸, 뭉케, 쿠빌라이의 토벌로 동만주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으로 밀려났다가
일본 동경으로 달아나 정착한다.
이들은 일본 동경으로 들어가 도자기터를 가지고 있었던 가야계를 등에 업고
일본 무로마치 시대 [室町時代:1338~1573/소초(宗長)]로 다시 태어난다.
de = from ~(으)로부터
Chigiota =치기오타
차가타이 한국을 말한다.
정확히는 오고타이 한국과 차가타이 한국을 말하는데, 교황 요한22세가 충선왕/심양왕이 어디 있었는지
몰랐기 때문에, 차가-오고타이한국[치기-오타]을 다스리는 통치자로 표현한 것이며,
충선왕은 차가타이 한국으로 유배성 좌천을 당하여 초원의 길이 지나가는 길목인 차가타이 한국의
샤카지방에 자리잡고 있었다.
몽고 5한국:
차가타이 한국(察合台汗國/찰합태 한국/징기즈칸의 둘째아들 차가타이 1227년)
-신강성~중앙아시아. 수도: 알말리크. 카르시.
14세기 1300년대 초에 오고타이 한국과 합병.
1396년 티무르제국에 멸망.
킵차크 한국[欽察汗國/흠(금)찰한국{금찰(중국)/금차(몽고, 여진)/금장(고려)한국}/징기즈칸의 아들 주치].
-수도: 남러시아의 킵차크 초원.
-서시베리아, 동유럽 평원, 남러시아의 킵차크 초원, 키르키즈 초원, 신강성(신장성) 일부.
오고타이 한국(窩闊台汗國/와할태 한국/오고타이 건국)-수도: 이리강 북서지방의 에밀.
-신강성일부, 감숙성 이리강의 이리하, 서장성 샤카지방 일부, 몽골, 러시아 바이칼호수 지방.
일한국[伊兒汗國/이아한국/이리한국(伊利汗國)/징기즈칸의 손자 홀라구]
-수도: 타브리즈,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소아시아 아프간 북근동 서장성(시장성) 티벳.
Regi =왕, 통치자, 제왕, 다스리다.
Corum" = 코룸, 코람.
카라코룸 산맥지방[카라 코람 산맥지방].
카라코룸 산맥지방을 다스리는 제왕인 차가타이 한국왕을 말한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신강성 유오이[위구르]자치구 서남부와 서장성 티벳 자치구까지를
말하며, 네팔 서북부 카슈미르 [무굴 제국]에서 키르키즈스탄에 이르는 카라코룸[카라코람]산맥지방을
중심으로 다스리는 차가타이 한국의 왕을 말한다. [14세기 초에 오고타이 한국과 합병]
즉 원나라 감숙성, 청해성, 사천성, 운남성 서부 경계부터 우즈베키스탄까지를 말하고
카라코룸 산맥지방의 샤카[부처탄생지]를 중심으로 다스리는 지역을 뜻한다.
충선왕이 심양왕이 되었다가 서장성 서남부 티벳 샤카지방으로 3년간 유배를 당한다.
충선왕 [어릴적이름 왕원]은 원나라 3대 무종[카이산/해산 1307~1311]과
4대 인종[아유르 바르와다1311~1320]을 지지하여 황제로 올리는데 주역이 된다.
이로부터 심양왕에 올라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고려를 심양에서 원격 통치한다.
1320년 인종이 죽자 환관 임백암이 원나라 황위 계승 다툼에서 심양왕[성장후 이름 왕장]을
밀어내기 위하여 서장성 티벳 샤카지방 차가타이 한국으로 유배를 보낸다.
유배를 보낸 것인지 차가타이 한국왕으로 보낸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몽고 5한국은 북경을 중심으로하는 원나라가 황제 중의 황제국으로 최고 위치였기 때문에
차가타이 한국왕으로 보낸 것을 유배를 보냈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변방의 차가타이 한국왕으로 보낸 것이었기 때문에 유배를 보낸 것으로 볼 여지가 충분히 높다.
원나라 역사에서는 샤카지방으로 유배를 보낸 것으로 확인되지만,
심양왕보다도 형편없는 자리가 바로 차가타이 한국왕 자리였다.^^
환관 임백암이 옹립한 5대 영종[시디발라]이 3년만에 죽고,
6대 태영제[예순 테무르.1323~1328]가 즉위하자 이제현의 상소로 유배가 풀려 연경[북경]으로 돌아온다.
1325년 북경에서 소일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황위 다툼으로 원나라가 어지러웠으므로
황위로 누구를 올리느냐 문제로 충선왕이자 심양왕 왕원은 북경에서 머물다시피 하며 생활하였다.
몽고 5한국은
원나라가 중심 황제국으로 그밑으로
오고타이 한국.
차가타이 한국
일 한국
킵챠크 한국[금장한국]이 있었다.
"Magnifico viro Socho de Chigiota Regi Corum" 은
카라코룸을 지배하는 통치자이신 차가타이 한국왕에게 베네치아 상인을 통하여
석호족[속호/屬昊-호르족/호족/昊族]에게 다리를 놓아 편지를 보낸다. 라는 뜻이다.
중원 원나라 실세 중의 한명이었던 충선왕은
충렬왕의 아들이자 쿠빌라이의 손녀[딸]인 제국대장 공주의 아들이다.
충선왕의 부인은 쿠빌라이[홀필열한]의 증손녀[손녀]인 계국대장 공주였고
고려 최초의 한몽 혼혈 왕이었으며 몽고 황제 승계 순위 10위안에 드는 서열이었고,
3대 무종과 4대 인종을 황제로 올리는데 주역이었으며
그다음 황제로 유력하였으나 환관 임백암이 충선왕을 밀어내고 영종을 옹립한다.
편지 내용은 한반도 고려 충숙왕에게 보낸 편지가 절대로 아니다.
편지 내용에서 말하는 코룸왕의 위치는 로마 교황청에서 원나라 사이에 있는 카라코룸 산맥지방의
왕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당시 북경지방에서는 카톨릭 교회가 존재하고 있었다.
교황 요한22세는 캄발리크(중국 북경/베이징)의 대주교가 사망하자
니콜라우스 신부를 후임자로 임명하고 그에게 이 서신을 부임지로 보낸다.
니콜라우스 신부는 베네치아 상인을따라 출발하여 차가타이 한국을 거쳐 연경[북경]까지 들어왔다가
충선왕/심양왕이 카라코룸 산맥지방 근처인 샤카지방으로 유배성 좌천을 당한 사실을 알고
길라잡이 속호족을 내세워 편지를 다시 전한것으로 판단된다.
충선왕/심양왕은 그 편지를 읽었고 3년만에 유배가 풀리고 북경으로 돌아온 충선왕은
심양왕을 충선왕의 조카 왕고가 차지하고 있었다.
심양왕은 왕고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정치 공작을 벌여 심양왕이 된 것이고,
환관 임백암은 충선왕을 황제 승계에서 밀어내기 위해 유배를 보낸 것이기 때문에
둘간의 이해 관계가 잘 맞아 떨어졌을 것이다.
차가타이 한국에서 북경으로 돌아온 심양왕 왕원은 1325년 북경에서 소일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충선왕은 학문을 숭상하여 책벌레로 여겨질 만큼 학문의 조예가 깊었다.
그녀의 어머니 쿠빌라이의 손녀인 제국대장 공주가 갑자기 죽자, 고려로 돌아와 진상을 규명하였다.
충렬왕의 총애를 받던 후비인 무비(無比)일당의 소행인 것을 찾아낸 후,
무비와 관련자들을 처형시키거나 유배를 보냈다.
그러자 아버지 충렬왕은 정치에 뜻을 잃고 양위하자, 고려 왕위에 올랐으나, 5년간만 고려왕으로 있다가,
심양으로 돌아가 고려를 원격 통치한 최초의 고려국왕이자 심양왕이었으며,
쿠빌라이 자손으로 몽골 황실 황위 계승 실세 서열 8위안에 들었던 인물이었다.
충선왕이자 심양왕 왕원은 심양에서 충숙왕[강릉대군]을 움직이며 원격 통치한다.
충숙왕은 한반도 고려만 통치하였기 때문에 카톨릭 교회가 반도에 존재했을 이유가 없어
전혀 관련이 없다.
심양왕 왕고는 정통성이 부실했기 때문에 로마교황이 북경의 카톨릭 신부 니콜라우스를 통해
편지를 보냈을 리가 없다.
그동안 카톨릭 대주교를 잘 보살펴 준 인물은 충선왕대 시대였으므로,
로마교황 요한22세는 충선왕/심양왕에게 보낸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로마에서 북경까지는 실크로드 무역품을 운반하며 이동해야하므로
1년씩이나 걸리는 대장정이었기 때문에 로마에서 북경 사정을 아는 데는
최소한 수년에서 10년은 걸려야 돌아가는 국제 정치 사정을 알게 된다.
상업무역과 관련한 경제무역은 1년이면 알게 되지만,
정치 부문은 관심을 가졌을 때나 알게되는 일이 흔했고,
황제가 바뀌고 나서도 10년은 지나야 알게 되는 경우도 많았으므로 충선왕에게 보낸 편지가
틀림이 없는 것이다.
1333년은 중원의 중심국인
원나라 마지막 황제 혜종이 등극하는 북경시대로 토곤 테무르였다.
기황후의 아들이 아유르 시리다르 빌레그트 칸이다.
혜종에게 차가타이 한국의 코룸을 지배하는 왕으로 말했리는 만무하기 때문에
혜종에게 보낸 편지는 더더욱 절대 아니다.
서양인을 처음으로 보는 시대가 충선왕 시대이기 때문에 충선왕이 심양왕으로 있으면서
북경에 머물며 카톨릭 신부들에게 호기심과 신비감을 가지고 특별히 잘 대해주었을 가능성이 틀림없었다.
충선왕은 고려말 유일하게 학문적 조예가 깊고 인품이 넓은
고려 유학자이자 고려 선비로 알려진 인물로 한몽 혼혈왕으로서 원나라 황위 계승까지 노려
고려 공녀문제를 차단시키 보려 노력하였던 훌륭한 왕이었다.
심양왕 시절 고려 재상을 제외한 공녀를 차출하던 것을 현격하게 줄이는데 성공을 하여
단계적으로 차단시킨 왕이 충선왕이었다.
공녀차출을 완전 차단시킨 것은
홍건적의 난[1351]발발을 틈타 공민왕[1351~1374]이 완전 차단시키고
쌍성 총관부[화주=영흥]를 탈환하여 대몽 항쟁을 시작한다.
최종 결론.
북경의 대주교가 사망하고 그 유해를 가지고 로마로 돌아가는 일행이 교황 요한22세에게
편지를 코룸왕[충선왕/심양왕/카라코룸 차가타이한국왕]에게 전했다는 결과를 보고 하는 시점이
1333년이었고 로마 교황청은 그 사실을 확인하고 그때 가서야 기록에 올려놓게 된다.
충선왕이자 심양왕만이 로마 카톨릭 신부를 잘대 해주는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충선왕이 심양왕이 되어 반석 위에 올려놓자 북경의 원나라는 심양으로 황도를 옮길 생각까지 하였다.
당연히 왕고가 탐을낼 만 하고도 남았다.
고구려도 순도가 서경에 불교 전래한 것을 소수림왕 때 가서야 기록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왕이 태학을 설립하고 율령을 반포하여 불교를 정부 공식적으로 수입한 것을 시작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로마 교황이 편지를 보낸 시점이 아니라 결과를 보고받은 시점을 기준으로 기록한 것이고,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는 외교문서에 대해서는 반드시 확인하고 나서
대주교의 유해나 유품이 로마로 돌아오는 1333년에 기록하게 된 것이다.^^
원나라 제2의 도시 심양왕보다도 형편없고 가진 것도 없는 신강성의 타클라마칸 사막과
서장성의 티베트 사막을지배하는 차가타이 한국의 왕으로 유배아닌 유배를 떠났지만,
사마르칸트에서 중원으로 들어가는 돈황지구, 청해지구는 차가타이 한국을 유지하는
유일한 수입원이었다.
원나라 지배시기였기 때문에 예전의 영광은 누릴 수가 없었다.
몽고시대에는 비단길[서역/아라비아 초승달 무역]이 쇠퇴하고 동유럽에서 들어오는 반달무역[초원의 길]이
성하였으므로, 초원의 길 루트가 서장성 아리지구를 거쳐 샤카지방으로 들어와 창도지구를 통하여
사천성 성도, 보주로 들어가서 황하강을 타고 북경으로 들어간다.
차가타이 한국 신강성 유오이[위구르]자치구 부터는 천산북로[비단길]와 천산남로[초원의 길]로 갈라지므로,
이곳에서 상인들과 헤어진 사신단은 돈황지구로 들어가 내몽고 루트를 이용하여
산서성 대동시 대동지구를 지나 하북성 북경으로 들어가야 맞다.
로마 교황은 충선왕이 차가타이 한국으로 좌천 또는 유배당한 사실을 알았다면 신강성으로 들어오자
니콜라우스 신부 일행이 베네치아 상인들과 헤어지고 베네치아 상인은 서장성 아리지구로 동남하 하며
속호를 내세워 샤카로 심양왕/차가타이 한국왕 왕원에게 편지를 바로 전했을 가능성도 있다.
충선왕은 심양왕에 이어
차가타이 한국왕으로 유배아닌 유배 시기를 보낸 3관왕 타이틀을 가진 왕이라고 볼 수가 있다.
원래 충선왕이 가기 전까지 차가타이 한국왕은 따로 있었는데 그는 문맹왕이었고,
심양왕이자 충선왕이 샤카지방으로 유배를 가니
차가타이 한국왕보다 높은 서열이 심양왕이었기 때문에 차가타이 한국왕으로 이해하고
편지를 보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황제 아래 쿠빌라이(징기즈칸의 아들 툴루이의 차남) 직계 혈통인 충선왕/심양왕은 왕중의 왕인 상왕 격이고
징기즈칸의 다른 아들들에게 나눠준 5한국과 차가타이 한국왕이나 고려왕 등은 제후왕 격이었다.
원나라에서 심양왕 이상 다음 황제로 유력시되는 인물이 황제가 교체되는 시기에 4한국으로
좌천되거나 유배를 당하게 되면 현지의 4한국 왕들은 서로 자기 구역으로 오는 것을 아주 껄끄러워하였다.
자기보다도 더 높은 서열이 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상왕으로 받들어 모셔야만 하였다.
그래서 상왕이었던 심양왕 왕원에게 현지 차가타이 한국왕이 중요 문제를 보고하다가
나중에는 보고하지 않는 일도 발생하게 된다.
연경(북경)에서 다음 황위 계승을 잇는지 잇지 못하는 지에 따라 희비가 교차되었다.
외몽골 울란바토르는 징기즈칸의 동생 카사르(호르친부)에게 나눠주어 천대를 받자,
훗날 울란바토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군대를 이끌고 외몽골 초원에서 대치하며 북원과 대립한다.]
p/s
몽고황제
-몽고 실위족을 통일하고 부족장 회의(쿠릴타이/kuriltai)를 거쳐 황제로 등극.
1대 테무친 징기즈칸(태조 1206~1227)
2대 우구데이 칸(오고타이 칸/태종 1229~1241)- 징기즈칸의 3남.
3대 구육 칸(정종 1246~1248)-우구데이칸의 장남.
4대 뭉케 칸(헌종 1251~1259)-징기즈칸의 4남인 툴루이의 장남).
5대 쿠빌라이 칸(세조 1260~1294)-몽고 제5대 황제이자 원나라 초대 황제/툴루이의 차남 )
원나라 북원 황제 계보.
원나라
1대 세조 쿠빌라이(1215~1294)-홀필열한(고필열한)
2대 성종 테무르(1294~1307)
3대 무종 해산(1307~1311)
4대 인종 아유르바르와다/(1311~1320)
5대 영종 시디발라(1320~1323)
6대 태영제 예순테무르(1323~1328)
7대 천순제 라기바흐(1328)
8대 문종 투그테무르(1328~1329/1332)
9대 명종 쿠살라(1329)
10대 영종 린친발(1332)
11대 혜종 토곤테무르/북원1대왕 순제(1333~1368)
북원.
1대 순제 토곤테무르(원나라 마지막 황제 혜종 1333~1368)
2대 소종 아유르 시리다르 빌레그트 칸(기황후 아들)
3대 평종 토구스 테무르(후비 바야후트의 아들/우스칼 칸(Uskhaal Khan/익왕(益王)
도우라강 전투에 패한 후 엥흐 조리그 투 칸에 살해당함.
쿠빌라이 황제, 황후 가문 몰락.
4대 엥흐 조리그 투 칸-아릭부케 가문 출신[후비 바야후트 외가 가문]
5대 엘베크 니굴세그츠 칸.
6대 군 트므르 칸
7대 을지 트므르 칸
8대 델베그 칸
9대 아자이 칸
10대 타이손 칸
11대 에센 칸
12대 메르코스 우헤그트 칸
13대 멀런 칸
14대 만둘 칸
15대 바트문크 다얀 칸
16대 바르스볼트 저넌 칸
17대 보디 알라크 칸
18대 다라이손 쿠덴 칸
19대 투멘 자사그트 칸
20대 보얀 체첸 칸
21대 리그 호타그트 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