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투놀이
손진숙
내가 즐거워하는 놀이 중에 화투놀이가 있다. 처음 접한 지는 이십여 년이 지났나 보다. 당시 시골집 따뜻한 아랫목에서 할 수 있는 놀이에 화투놀이 만한 것이 없었다.
실내에서 할 수 있는 놀이란 극히 제한돼 있는 편이다. 바둑이나 장기는 묘수를 익히는데 까다로우며 두 사람일 때 가능하다. 세 사람만 있어도 한 명은 제외되어 관전하거나 훈수를 두는 수밖에 없다. 많은 인원을 흡수하는 윷이 있지만 단조로워 흠이다. 흥을 돋우는데 소리를 동원해야 하는 제약이 따르기도 한다. 화투놀이는 수가 미묘할 뿐만 아니라 여섯 명까지 소화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실제는 세 명을 필요로 하지만 나머지는 광을 필 수 있어 또 다른 흥미를 유발시키기도 한다.
머리 쓸 일이 그다지 없는 세대에게 궁리하고 예견하며 계산하는 능력을 키우게 한다. 다양하게 전개되는 방식에 갖가지 재미를 체험하게 하여 마음이 자연 끌리게 된다. 두뇌를 자극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치매를 예방하는 효과까지 있다고 하니 건망증 심한 나로서도 환영할 만하지 않은가.
화투는 한국 고유의 오락이 아니라 19세기 일본에서 들어온 도박의 도구로 쓰이는 데에서 거부감을 일으키고 배척당하기도 한다. 화투의 폐해가 널리 알려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예로부터 소와 땅을 판 돈을 비롯하여 오늘날 곗돈이나 집을 날리고 건강과 가정마저 잃은 사례를 흔히 볼 수 있다.
어느 마을에 오른 손목이 잘린 사람이 있었다. 화투로 전재산을 잃은 끝에 자신에게 내린 형벌이었다. 처참한 절규이며 비장한 각오가 아니던가. 더욱 기막힐 노릇은 그 후에도 왼손과 발을 이용해 노름을 계속하였다는데 있다. 도박 중독의 무서움이 과연 어떠한가를 헤아려 볼 수 있게 하는 이야기다. 정작 필요한 것은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따위가 아닐 것이다. 끝까지 이겨내려는 의지와 열망을 가지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 여겨진다.
도박을 학문으로 계승 발전시킨 예도 있다. 천재 수학자 파스칼은 도박을 즐기고 통계학의 근본 원리를 찾아내었다 한다. 금세기 최대 경제학자 케인즈도 도박을 즐기면서 ‘확률론’이라는 불멸의 책을 썼다 한다. 생활 속에 즐거움을 누리면서 학문으로까지 끌어올린 경우인 것이다. 절대 악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절대 선 또한 없다는 생각이다. 쓰기에 따라 약藥도 되고 독毒도 되는 것이다. 삶의 중요한 고비나 선택에 있어서 화투의 도박성과 일맥상통할지도 모른다.
1점에 100원짜리 화투놀이를 한 사람들이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직업과 재산, 화투놀이를 벌이게 된 경위와 판돈 3만 원을 감안할 때 도박이 아니라 오락에 불과하다.”는 선고가 내려졌다. “돈을 딴 사람이 막걸리를 내기로 하고 심심풀이로 화투를 쳤을 뿐이다.”는데 손을 들어준 결과이다.
그물처럼 촘촘히 짜인 생활에서 모처럼 탈출한 날. 화투짝을 던지고, 뒤집고, 맞추는 순간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차원이라면 죄로서 존립할 근거는 아니지 않은가. 화투놀이 뒤에 맑고 정화된 기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삶의 무게는 한결 가벼워지리라.
언제 떠올려도 다정스런 언니가 있다. 가끔씩 언니 친구끼리 모임에 나를 부른 적이 있다. 얼굴도 보고, 맛깔스런 음식도 먹고, 여흥으로 즐기게 되는 게 화투놀이다. 시종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분위기가 연출된다. 이기고 지는데 연연하지 않고 익살과 재치를 동반하는 것이다. 판돈이란 고작 기천원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는 딴 돈의 대부분을 내놓게 마련이다.
특히 언니는 ‘잃고 가면 안 된다’면서 돌려주기를 서슴지 않는 것이다. 봄 햇살처럼 환하고 따뜻한 언니의 모습은 화투의 목단화로 활짝 피어나게 된다. 화투놀이를 통하여도 온정과 나눔의 미학을 실천하는 언니의 자애로움을 나도 배워서 갖추고 싶다.
변화무쌍하게 펼쳐지는 화투놀이의 진행과 같이 우리 삶에 정해진 틀이란 없어 보인다. 경험과 예측과 확률을 통하여 성공을 기대하는 것은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일정하게 주어진 화투패를 효과적으로 이용했을 때 승산의 미소를 띠듯이 내게 부여된 삶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