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시학》 화제의 시조집 리뷰
김덕남 『거울 속 남자』 (책만드는집)
복사꽃 피는 집
김덕남
겨울이든 여름이든 밤낮으로 꽃피우죠
흑백이 싫증나면 꽃분홍을 피울까요?
버튼을 살짝 눌러요, 무지개도 피니까
눈 질끈 감으면 짝퉁도 명품처럼
물오른 웃음까지 반반씩 섞을까요?
서점은 흘러간 노래 복사본이 대세죠
잃어버린 시간쯤은 카페서 찾으시길
비포든 에이포든 말씀만 내리세요
대학로 유리문마다 복사꽃이 필 무렵
시작노트
복사꽃 만발한 대학로에 복사기가 돌아간다. 눈을 씻어봐도 책방은 보이지 않고 복사집만 즐비하다. 가짜가 진짜를 비웃듯 버튼을 눌러대면 흑백이든 칼라든 사시사철 주술처럼 쏟아진다. 유명 연예인처럼 성형해 달라고 주문을 할까, 걸음걸이나 말투를 따라해 볼 까. 꽃잎으로 치장하고 텅 빈 속 채우려 거리의 간판을 쳐다본다. '원조 칼국수'가 유혹을 한다. 옆집의 '30년 전통 칼국수'도 맞불을 놓는다. 어느 게 진 짜일까? 진짜는 말이 없고 가짜는 속으로 웃는다. 꿈의 집은 멀고 계단은 가팔라도 지금은 단지 꽃샘바람일 뿐이야. 그래, 주문을 걸자. 바람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자고 나면 세상은 달라져 있을 거야. 송이송이 피우다 다발로 묶여 나가는 복사물이 통유리 안에서 쌕쌕거린다. 희망을 찾아 향기를 피울 때까지 복사기는 돌아가고, 무심한 듯 복사꽃은 흩날리고,
김덕남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조집 『젖꽃판』 『변산바람꽃』 『거울 속 남자』, 현대시조 100 인선 『봄 탓이로다』 이호우·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 등.
- 《정형시학》 2021.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