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발견된 예식진 묘지명에 따르면
예식은 장군으로서 목숨을 걸고 최후의 5분까지 싸워야 했음에도 오히려 의자왕을 체포해 당군에 항복하는 반역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禰씨
백제 반역자 출신의 당 사람 예군, 예식(진), 예소사, 예인수 등이 있다. 원음은 ‘녜’이다.
예식진(禰寔進, 615년 ~ 672년)은 백제와 나당연합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을 때 의자왕을 끌고 백제를 멸망하게 한 후 당나라로 건너가 '좌위위대장군(左威衞大將軍)'의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이다.
2006년에 그의 묘지석이 낙양의 시장에 나타나, 2007년 길림성의 격월간 역사잡지인 <동북사지(東北史地)>에 기존의 다른 백제 유민들의 묘지명과 함께 처음 소개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 <조선상고사>
예식(진)의 반역은 백제멸망(660년) 8년후 고구려 멸망(668년)까지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백제 반역자 예식진(禰寔進)
백제의 반역 장군.
백제의 지방구분인 5방 중 하나를 담당한 북방령(北方領)이자 웅진성주였으나, 의자왕을 잡아 나당연합군에게 항복시킨 배신자이자 매국노.
백제가 멸망한 후에는 웅진도독부의 동명주자사(東明州刺史)를 지냈다
2006년, 중국 뤄양시의 골동품상에 나타난 묘지명에서 처음으로 확인됐다. 출토지는 시안시라고 한다. 출토지는 시안인데 뤄양의 골동품상에서 판매한 건 출처를 숨기기 위한 일종의 '세탁' 과정 때문일 것이라 한다.
만약 의자왕이 웅진성에서 버티고 백제 지방군들이 나당연합군을 공격하는 가운데 고구려군이 백제를 돕기 위해 남하한다면 나당연합군을 심리적으로 더욱 압박(특히 소정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백제는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었다. 신라 입장에서 보면 백제를 멸망시키지 못한다 해도 큰 타격을 준 이상 일단 숨통은 확보했고, 당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게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이다. 또한 고구려가 지지부진한 것도 뭘 어쩌려 하기전에 백제가 멸망해서 국내 방어에 집중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상황이 길어지면 땅을 신라에게 할양하고, 당나라에게 조공을 바치며 추후 고구려 공격시 도와준다는 약속을 하는 선에서 물러갈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웅진성에 들어간 지 5일만에 의자왕은 돌연 항복했다. 나당연합군이 웅진성에 들이닥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 모든 의문을 해결하게 한 것이 바로 2006년에 발견된 백제 웅진의 장군 예식진의 묘지명이었다.
하지만 상기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있다.
우선 묘지명 어디에서도 의자왕에 대한 예식진의 반란 및 배신을 직접적으로 시사한 글은 찾기 어려우며, 단순히 '데리고 갔다'는 그 기록을 무조건 '생포해서 바쳤다'고 봐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적인 분석이 있다.
또한 '將'에는 '데리고 가다' 말고도 무려 21개의 뜻이 더 담겨 있는데, 이 기록에서는 '데리고 가다'보다는 '행하다(行)', '곁붙다(扶持)', '잇다(承)', '함께 하다(伴也)' 등의 해석이 적합하며, 이 경우 "그 대장 예식이 또 의자와 함께 와서(將) 항복했다"가 되어, 《신당서》에서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와 더불어(與) 항복했다"는 기록과 부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2010년 예씨 집안의 가족묘가 발굴되면서 예식진의 선대뿐만 아니라 후대의 기록이 기록된 묘지명이 발굴 되었으며 이 중에는 아들인 예소사(禰素士)와 손자인 예인수(禰仁秀)의 묘지명이 있어서 함께 세상에 드러났다.
그 중 손자인 예인수 묘지명에서 조부가 의자왕을 잡아다 바친 걸 대놓고 적고 있어서 그가 매국노임이 명확해졌다
애초에 당나라가 봤을 때 유명하지도 않던 적장 한 명이었던 예식을 (요새로 피신한) 적의 왕보다 앞에 기록한다는 것부터가 의미심장한 것이다.
또한 반론에서 말하듯 의자왕과 단순히 더불어(與) 항복했더라면, 예식진이 당나라 대장군이라는 높은 지위를 획득한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공적이 있어야 벼슬을 받을 것 아닌가?
당나라 대장군이 단순히 항복했다고 주는 지위가 아니다. 예식진이 벼슬을 받을 만큼의 공로를 세웠다면 가능할 것이다.
반역자 예식은 의자왕을 잡아 바친 공로로 당나라 대장군의 지위에 올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