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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쓰기를 원한다면
1. 당신이 만약 시를 쓰기를 원하신다면
시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자기만의 노래이며
자기만의 독백 이어야합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글은 그 자체가 순수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동기를 가지고 살든지 그 동기가 글 속에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내스스로 만들어낸 동기 속엔 항상 불순한 저의가 숨어있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시란 자기 동기가 철저하게 깨어지고 새 동기를 부여받은 자가 시를 써야 그 시가 거부감 없이 전달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시는 단순히 언어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라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과 삶속에서 배어 나오는 이야기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시를 쓰기 전에 먼저 일기를 쓰기 시작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일기가 주는 장점은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해줍니다.
일기를 쓰다보면 필력도 좋아지고 일기의 내용을 좀 더 압축해 보면 시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3. 우선 시와 산문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똑같은 풍경을 사진에 담았을 때와 화폭에 담았을 때의
느낌이 전혀 다르게 나옵니다.
시를 감상 할 때 마치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처럼
느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림은 붓으로 그리고 시는 언어로 그린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림은 시각적인 부분만 담을 수 있지만
시는 내면의 세계도 담을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러하기에 시의 장르는 무궁무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4. 시란 감춤의 미학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 표현하면 산문이 되는 것이고
감춤이 있으면 시가 되는 것입니다.
시란 사실적인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에서
사실적인 입장에서 말한다면 국화꽃 피는 것하고
소쩍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시인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데
언어학적으론 틀렸지만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 전달은 잘되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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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어디서 오는가? ― 시적 발상
가. 시각을 통한 대상 파악
광명에도 초박의 암흑이 발려있는 것 같다.
전깃불 환한 실내에서 다시
탁상용 전등을 켜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분명 한 꺼풀 얇게 날아가는 휘발성분 같은 것
책이나 손등, 백지 위에서 일어나는
광속의 투명한 박피현상을 볼 수 있다.
사랑한다,는 말이 때로 한순간 살짝 벗겨내는
그대 이마의 그늘 같은 것
그런 아픔이 있다, 오래 함께 한 행복이여.
- 문인수,<그늘이 있다>
나. 청각을 통한 대상 파악
말이 되지 않는다.
손아귀에 꽉 꽉 꽉 구겨 쥔
에이 포 용지를 냅다 방구석으로 던졌다.
어, 처박힌 종이 뭉치에서 웬 관절 펴는 소리가 난다.
뿌드드드 드드 부풀어오르다, 부풀어오르다, 이내 잠잠해진다.
종이도 죽는구나
그러나 입 콱 틀어 막힌 그 마음의 밑바닥에
얼마나 오래 눌어붙어 붙어먹었으면,
그리고 그 무거운 암흑의 産道를 얼마나
힘껏 빠져 나왔으면 그토록 환하게
뼈 부러지게 기뻤을까
누가, 날 구겨 한 번 멀리 던져다오
- 문인수,<꽃>
다. 후각을 통한 대상 파악
사연인즉 이렇다 외출에서 돌아와 책상 앞에 앉는 순간,
오물을 뒤집어쓴 돼지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이다
잠시 한눈을 파는 동안 돼지들이 등비급수로 늘어나더니만
작은 사무실을 차지해 버렸고 아예 두개골 속으로 들어와
골치를 들쑤시는 것이다 견디다 못해
마침내 소굴을 찾아 나서니 이런!
물 대접에 담아 놓은 감자가 바로 범인이었던 것
싹이 난 감자 몇 알, 물 대접에 담아
볕 좋은 창가에 놓아두고 나갔다 온 참이다
움켜쥔 주먹처럼 단단하던 감자는 흐물흐물 허물어지고
바야흐로 흰 거품이 버글버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 부신 빛깔이라니― 무지개가 선 것처럼
공기 알갱이들이 뽀얗게 커튼을 치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티 한 점 없이 완벽한 악취,
쓰레기통에도 넣을 수 없어 수돗간에 내다두었다
돼지들이 사라지고 난 뒤 무심코 나가본 하수구
어이쿠! 그리마, 노린재, 괄태충, 쇠파리
온 동네 날것 물것들이 죄 모여 꼬물꼬물, 꿈틀꿈틀, 붕붕붕……
한바탕 잔치판을 벌이고 있었던 것
그예 감자는 쭈글쭈글 갈색 피부만 남았고,
지독한 향기 흰 젖이 되어 여린 목숨들 거두고 있었다
쭈그러든 자궁― 거무죽죽 검버섯의 할머니가
그 자리에 누워 계셨던 것이다
- 장옥관,<냄새에 대한 보고서>
라. 근육감각을 통한 대상 파악
모시 반바지를 걸쳐 입은 금은방 김씨가 도로 위로 호스질을 하고 있다.
아지랑이가 김씨의 장딴지를 거웃처럼 감아 오르며 일렁인다.
호스의 괄약근을 밀어내며 투둑 투둑 흩뿌려지는 幻의 알약들
아 아 숨이 막혀, 미칠 것만 같아
뻐끔뻐끔 아스팔트가 더운 입김을 토하며 몸을 뒤튼다.
장딴지를 감아 올린 거웃이 빳빳하게 일어서며 일제히 용두질을 시작한다.
한바탕 대로와 아지랑이의 질펀한 정사가 치러진다.
금은방 김씨가 잠시 호스질을 멈추고 이마에 손을 가져가 짚는다.
아 아 정말 살인적이군, 살인적이야
금은방 안, 정오를 가리키는 뻐꾸기시계의 추가 축 늘어져 있다.
- 김지혜, <이층에서 본 거리> 부분
라. 공감각을 통한 대상 파악
1
흥덕왕릉*의 숲에는 비밀이 있다. 섭씨 19도, 서풍과 함께 듣는 솔방울 소리, 부재를 위해 텅 빈 공간이 부푸는 한낮, 밤이 아니라도 등불이 하나 둘 차례차례 켜지는 느낌, 일만 그루 소나무가 손 뻗어 나를 만지도록 정지하는 것, 일만 그루의 소나무에 매달리는 섬모 운동, 내게 필요한 것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우는 울음이다
2
비밀이 탄로난 이유가 갑자기 휘몰아닥친 장대비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왕국을 베고 눕고자했다 왕이 누리던 고요 외에 십삼층 석탑 같은 왕의 비애를 열어 보고자 했다 어떤 기미도 없이 절규의 힘으로 빗방울이 관 뚜껑 닫는 소리를 듣는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은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비를 오게 하는 왕국의 슬픔이다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인근의 신라 흥덕왕릉. 흥덕왕은 죽은 장화부인을 못 잊어 내내 독신으로 살았다.
- 송재학,<비밀>
기타 미각, 촉각, 기관을 통한 대상 파악은 생략.
2. 관찰하는 방법
일상의 범상한 눈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예리한 관찰이 필요하다. 순간순간 변하는 햇빛에 의해 몸을 바꾸는 사물, 계절의 변화에 반응하는 나무의 섬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는 정확하고 날카로운 눈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새로운 발견이 가능하다.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마음의 눈을 열어야 한다. 사물들이 항복을 할 때까지, 즉 작은 세계 속에 들어있는 의미를 찾아야 한다.
(예 : 달개비 떼 앞에 쭈그리고 앉아
꽃 하나하나를 들여다 본다
이 세상 어느 코끼리 이보다도 하얗고
이쁘게 끝이 살짝 말린 수술
둘이 상아처럼 뻗쳐 있다.
- 황동규, <풍장?58 일부) 평소 우리가 어떤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지 한 번 살펴보자.
□ 사물을 보는 시각의 차이(이토 게이치)
(1) 나무를 그냥 나무로 본다.
(2) 나무의 종류와 모양을 본다.
(3)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를 본다.
(4) 나무의 잎사귀들이 움직이는 모양을 세밀하게 살펴본다.
(5) 나무 속에 승화되어 있는 생명력을 본다.
(6) 나무의 모양과 생명력의 상관관계를 본다.
(7) 나무의 생명력이 뜻하는 그 의미와 사상을 읽어본다.
(8) 나무를 통해 나무 그늘에 쉬고 간 사람들을 본다.
(9) 나무를 매개로 하여 나무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본다.
* 의인화된 나무가 어떤 이미지로 나타나 있는가.
그 잎에 흘러내리는 햇빛과 입 맞추며
나무는 그의 힘을 꿈꾸고
그 위에 내리는 비와 뺨 부비며
나무는 소리내어 그의 피를 꿈꾸고
가지에 부는 바람의 푸른 힘으로
나무는 자기의 生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 정현종, <사물의 꿈 1- 나무의 꿈>
* 나무
꽃의 어떤 모습이 의미화 되고 있는가.
저 꽃의 영혼은 추워서 방으로 들어갔단다
추운 집 밖을 나서다 보니 시든 꽃 한송이
영혼이 저만 따뜻한 곳 찾아 들어가버린
아니면 시들어가면서 꽃이 영혼 먼저 들여보냈나?
영혼이 놓아두고 간 시든 꽃잎들은
이제 아무데로나 떨어져내릴 것이다
추위를 견딜 마지막 힘조차 잃었는가
방 안에서 잠시 쉬었다 봄이 되면
다른 꽃을 찾아들리 꽃들은 끝내 시들고
시들지 않는 영혼만이 천년만년 새로운 꽃으로 옮겨 다닌다
- 이선영, <시든 꽃>
가. 관찰하는 눈은 정확하고 선명해야 한다.
텔레비전을 끄자
풀벌레 소리 어둠과 함께 방 안 가득 들어온다
어둠 속에 들으니 벌레 소리들 환하다 별빛이 묻어 더낭랑하다
귀뚜라미나 여치 같은 큰 울음 사이에는 너무 작아 들리지 않는 소리도 있다
그 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한다
내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 드나드는 그 까맣고 좁은 통로들을 생각한다
그 통로의 끝에 두근거리며 매달린 여린 마음들을 생각한다
발뒤꿈치처럼 두꺼운 내 귀에 부딪쳤다가 되돌아간 소리들을 생각한다
브라운관이 뿜어 낸 현란한 빛이 내 눈과 귀를 두껍게 채우는 동안
그 울음소리들은 수없이 나에게 왔다가
너무 단단한 벽에 놀라 되돌아갔을 것이다
하루살이들처럼 전등에 부딪쳤다가 바닥에 새카맣게 떨어졌을 것이다
크게 밤공기 들이쉬니 허파 속으로 그 소리들이 들어온다
허파도 별빛이 묻어 조금은 환해진다
- 김기택,<풀벌레들의 작은 귀를 생각함>
나. 사물만 보지 말고 그 빈자리를 보자.
사과를 손에 들고 꽃이 있던 자리, 향을 맡는다
꽃이 피던 자리에는 벌이 와서 울던 소리가 남아 있다
아내에게 미안한 일이다 꽃이 얼마간 피어있던
꽃받침을 아내는 기억 못 한 것 같다 벼껍질로 남은
몇 개 꽃받침은 사과의 배꼽, 오목한 상흔, 낙화보다
슬픈 시간이 갔다 꽃은 자신을 얼마나 애지중지했는가
한 입에 쪽이 지는 홍옥 소년의 향긋함, 해숙씨
사과엄마는 그 연분홍 어린 꽃이 아니었겠니 그리고
어린 그 꽃은 과수의 아이가 아니었겠니
- 고형렬, <꽃자리>
언덕에서 한 빈집을 내려다보았다
빈집에는 무언가 엷디엷은 것이 사는 듯했다
무늬들이다 사람들이 제 것인 줄 모르고 버리고 간
심심한 날들의 벗은 마음아무 쓸모없는 줄 알고 떼어놓고 간
심심한 날들의 수없이 그린 생각
무늬들은 제 스스로 엷디엷은 몸뚱이를 얻어
빈집의 문을 열고 닫는다
너무 엷디엷은 제 몸뚱이를 겹쳐 빈집을 꾸민다
때로 서로 부딪치며 빈집을 이겨낸다
언덕 아래 빈집 늦은 햇살이 단정히 모여든 그 집에는
무늬들이 매만지는 세상 이미 오랬다
- 이진명, <무늬들은 빈집에서>
다. 비유적으로 연상하기
진달래는 고혈압이다
굶주린 눈멀어 우글우글 쏟아져 나오는 빨치산처럼
산기슭 여기저기서 정맥 터질 듯 총질하는 꽃
진달래는 난장질에 온 산은 주리가 틀려
서둘러 푸르러지고 겨우내 식은 세상의 이마가
불쑥 뜨거워진다 도화선 같은 물줄기 따라
마구 터지는 폭약, 진달래 진달래가 다 지고 말면
풍병(風病)든 봄은 비틀비틀 여름으로 가리라
- 강윤후, <진달래>
3. 상상력 키우는 방법
우선 어떤 현상, 어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어린아이의 눈처럼 사물과 현상을 난생처음 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즉 사물을 되도록 새롭게 보려고 노력을 해야 된다는 것.
둘째, 다르게 쓰기의 방법이다.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것인가’라고 고민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남들과 다르게 쓸 것인가’하는 생각으로 바꿔야 한다. 다르게 쓰기 위해서는 다르게 보는 방법을 가져야 한다. 다르게 보는 방법을 가지기 위해서는 남과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뒤집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뒤집기는 상식을 뒤엎는 질문을 통해 시작한다. 꽃이 아름답다는 고정관념, 똥이 더럽다는 고정관념, 섹스는 추하다라는 고정관념, 밤이 어둡다는 고정관념, 모성애가 숭고하다라는 고정관념, 윤리적인 삶이 바람직하다라는 고정관념. 미추과 선악, 몸과 정신을 뒤바꿔 생각해봐야 한다. 거기에서 인생의 진실이 숨어 있다.
가. 동화적 발상
흰 목련꽃을 엄마, 여기 조개꽃이 피었어!
밥물이 끓어 넘친 자국을 엄마, 여기 눈이 내렸어!
벚꽃이 지는 걸 엄마, 바람이 꽃을 아프게 하는 거야?
좋은 냄새를 엄마, 이게 꽃이 피는 냄새야?
겁도 없이 5년 10년 일생이 걸려도 내가 못 가는 거리를단숨에!
- 양선희, <어린 것들>
나. 뒤집기
사각의 공간에 구더기들은 활자처럼 꼬물거린다
화장실은 작고 촘촘한 글씨로 가득 찬 불경같다
살아 꿈틀대는 말씀들을 나는 본다.
- 이대흠, 「이동식 화장실에서」
다. 관점 바꾸기
뱀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뱀, 바위, 나무, 하늘
지상 모든 생명들 뭇 생명들 소스라치다
- 함민복, <소스라치다>
사과 과수원을 하는 착한 친구가 있다.
사과꽃 속에서 사과가 나오고
사과 속에서 더운밥이 나온다며,
나무야 고맙다 사과나무야 고맙다.
사과나무 그루 그루마다 꼬박꼬박 절하며
과수원을 돌던 그 친구를 본 적이 있다.
사과꽃이 새치름하게 눈뜨는 저녁이었다.
그날 나는 천 년에 한 번씩만 사람에게 핀다는
하늘의 사과꽃 향기를 맡았다.
눈 내리는 밤에 친구는 사과를 깎는다.
툭, 칼등을 쳐서 사과를 혼절시킨 뒤
그 뒤에 친구는 사과를 깎는다.
붉은 사과에 차가운 칼날이 닿기 전에
영혼을 울리는 저 따뜻한 생명의 만트라.
사과야 미안하다 사과야 미안하다.
친구가 제 살과 같은 사과를
조심조심 깎는 정갈한 밤,
하늘에 사과꽃 같은 눈꽃이 피고
온 세상에 사과 향기 가득하다.
- 정일근, <사과야 미안하다>
의인법 혹은 활유법은 시적 인식의 기본. 비정하고 차가운 마음은 사물과 교감할 수 없다. 따뜻한 시선을 던져야 사물이 자기 자신의 내밀한 세계까지 우리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나락을 벨 때 벼들이 아프다고 울부짖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너 보고 싶은 마음 눌러 죽여야 겠다고
가을 산 중턱에서 찬비를 맞네
오도 가도 못하고 주저앉지도 못하고
너하고 나 사이에 속수무책 내리는
빗소리 몸으로 받고 서 있는 동안
이것 봐, 이것 봐 몸이 벌겋게 달아오르네
단풍나무 혼자서 온몸 벌겋게 달아오르네
- 안도현, <단풍나무 한 그루>
저 빗물 따라 흘러 가봤으면,
빗방울에 젖은 작은 벚꽃 잎이 그렇게 속삭이다가,
시멘트 보도 블록에 엉겨 붙고 말았다
시멘트 보도블록에 연한 생채기가 났다
그렇게 작은 벚꽃 잎 때문에
시멘트 보도블록이 아플 줄 알게 되었다
저 빗물 따라 흘러가봤으면,
비 그치고 햇빛 날 때까지
작은 벚꽃 잎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운 상처를 알게 된 보도블록에서
낮은 신음 소리 새어 나올 때까지
- 이성복, <그렇게 속삭이다가>
라. 부끄러움에서 시작하기
비 오시는데 종일 헤어진 여자 허리 생각에 몸 뒤척인다
저기 타는 천리 불꽃 빗발로는 끝내 진화할 수 없는 것인가!
온몸 달아 간절했으니 신체의 한 末端이 타버리는 모양이다
오매 사람 잡네, 이 灼熱感!
점점 골똘해지는 씹 생각에 몸이 다 탄다
날 저물고 비 그쳐 淨口業眞言 합장하고
千手經 일절 뒤 나무관세음보살……
천 번 입속으로 읊조렸더니 시끄러운 몸이 겨우 잠든다
입으로 지은 업을 맑게 하는 진언
- 장석주, <천리 불꽃>
내 영혼 흠잡을 데 없네.
감기몸살 안 하고 술 안 먹고
노래방 안 가고, 높새바람에나 깃을 칠까,
착한 내 영혼 누군들 기뻐하지 않으리.
사람들 바로 살게 가르치고,
명절 선물 불편하면 거절할 줄 알고,
수재 의연금 잘 내고, 냈다는 건 마지못해
떨어놓는 내 영혼 참으로 겸손하다.
한때 내 영혼 나쁜 줄만 알았네,
샘 많고 별나고 잘 삐치던 내 영혼,
하지만 이젠 추어탕 집 아줌마도
내 인상 좋다 하니, 자손 대대로 복 받겠네.
착한 내 영혼, 더 늙기 전에
러시아식 스포츠 마사지 한번 받아봤으면 좋겠네.
- 이성복, <내 영혼 흠잡을 데 없네>
한 번은 옆 침대에 입원한 환자의 오줌을 받아 주어야 했다
환자는 소변기를 갖다 대기도 전에 얼굴이 뻘개졌다
덮은 이불 속에서 바지를 내리자 빳빳하게 솟구쳐 있는 그것,
나도 얼굴이 빨개 졌다 이불 속에서 소변기를 걸쳐놓고
그것을 잡고 오줌을 눌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무안한 눈은 창밖 벚나무 가지 위로 오르는데
벚나무도 뜨겁게 솟구치는 제 속을 받아내는지
펑펑 눈부신 소리로 꽃을 뿜어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조용하게 벌어진
꽃나무의 상처를 핥아주고 있던 햇빛이
후딱 일어나 수천 개의 혀를 내밀더니
내 눈을 휘감아 가버렸다
놀란 나는 캄캄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벚나무 아래에서 와와, 숨 멎는 소리만
내 눈에 고였다가 넘쳐흘렀다
그날 옆 침대에 입원한 환자는 내내 돌아누워 밥도 먹지 않았다
- 강미정, <벚나무>
마. 하찮은 것에서 소중한 것을 길어내기
작은누나가 엄마보고 엄마 런닝구 다 떨어졌다.
한 개 사라 한다. 엄마는 옷 입으마 안 보인다고
떨어 졌는 걸 그대로 입는다.
런닝구 구멍이 콩만하게 뚫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대지비만하게 뚫어져 있다.
아버지는 그걸 보고 런닝구를 쭉 쭉 쨌다.
엄마는 와 이카노. 너무 째마 걸레도 못한다 한다.
엄마는 새 걸로 갈아입고 째진 런닝구를 보시더니
두 번 더 입을 수 있을 낀데 한다.
- 배한권, <엄마의 런닝구>
어떤 순결한 영혼은 먹지처럼 묻어난다. 가령 오늘 점심에는
사천 원짜리 추어탕을 먹고 천 원짜리 거슬러 오다가, 횡단
보도 앞에서 까박까박 조는 남루의 할머니에게 '이것 가지고
점심 사 드세요' 억지로 받게 했더니, 횡단보도 다 건너가는
데 '미안시루와서 이거 안 받을랩니다' 기어코 돌려주셨다.
아, 그걸 점심 값이라고 내놓은 내가 그제서야 부끄러운 줄
알았지만, 할머니는 섭섭다거나 언짢은 기색이 아니었다. 어
릴 때 먹지를 가지고 놀 때처럼, 내 손이 참 더러워 보였다.
- 이성복, <아, 그걸 점심 값이라고>
조오현의 시
「내가 나를 바라보니」
무금선원에 앉아 내가 나를 바라보니
기는 벌레 한 마리 몸을 폈다 오그렸다가
온갖 것 다 갉아먹으며 배설하고 알을 슬기도 한다.
「이 내 몸」
남산 위에 올라가 지는 해 바라보았더니
서울은 검붉은 물거품이 부걱부걱거리는 늪
이 내 몸 그 늪의 개구리밥 한 잎에 붙은 좀 거머리더라.
「아득한 성자」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신발」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에도 왜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갈까
영혼더러 그 신발을 신고 따라오란 것일까
아니면 너와의 인연이 다했으니 이제 그 신발을 신고
다른 거처를 찾아가란 말일까
오늘도 한강 대교 난간엔 구두코가 반지르르한
새 구두 한 켤레가 하늘을 향해 아주 반듯이 놓여 있다
「밤」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는 고원의 겨울밤, 배부른 양이 새끼를 낳았는데 양 대신 사람이 다가와 별빛 하늘에 고하고 고이 받았다. 양수와 함께 머리부터 빠져나온 새끼가 첫 세상의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사람의 품에서 오돌오돌 떨었는데 어미 닮은 눈이 유난히 까맸다. 그리고 그것을 안은 사람의 눈도 별빛 아래 유달리 빛났다.
「사원 근처」
봄이 되자 히말라야 산록의 야생 영양 네 마리가 치리겐타 사원(寺院) 근처까지 내려와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겨울 동안의 수염을 자세히 밀고 마당에 나와 비질을 하는 어린 스님들의 이마에도 작고 새파란 뿔들이 돋아 있는 것이 아닌가. 설산을 녹이고 흘러온 거울 같은 계곡의 물결 위로 이따금식 팔뚝만한 송어가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