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3월 19일
준연동형비례제, 밀실 거래가 만든 ‘귀태(鬼胎)’… 양당체제만 강화
범여권이 밀어붙인 선거법, 위성정당·미끼정당 출현하는 ‘자기 파괴’불러… 정당정치·民意 왜곡
권력구조·선거제 조화 깨지고 유권자 투표권 침해도… 소수정당 국회진입 막는 역설 가져와
한 사회의 제도는 규칙과 절차의 집합으로 구성원들의 상호 작용이 전개되는 틀을 제공한다. 제도는 행위를 제약하기도 하고 유인하기도 한다. 제도가 어떻게 짜여 있느냐에 따라 사회는 발전할 수도 있고 퇴보할 수도 있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 환경을 제도가 반영하지 못하면 혼돈과 혼란을 가져온다. 정당이나 후보가 얻은 득표를 의석으로 전환하는 장치인 선거제도는 정치 게임의 주요 기본 규칙으로, 민주정치의 핵심인 대의 과정의 본질을 규정해준다. 한마디로 선거 제도가 어떻게 짜여 있느냐에 따라 대의 민주정치가 활성화할 수도 있고 반대로 퇴보할 수도 있다. 지난해 말 범여권이 밀어붙인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골자로 한 선거법 개정안은 소수정당의 국회 진입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처리됐지만, 현실은 선거제도가 갖는 모순과 ‘자기 파괴’를 통해 거대 양당체제를 강화하는 선거제도 개혁의 역설을 보여준다.
◇ ‘자기 파괴’를 부르는 귀태 선거제도
자세하게 따져 보자. 지난해 12월 범여권의 ‘4+1 협의체’(바른미래당 당권파·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더불어민주당)를 통해 제1야당을 배제한 채 밀어붙인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골자로 한 선거법 개정안은 그동안 한국 선거 제도에 내재한 왜곡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지난해 범여권에 의해 패스트트랙에 태워져 처리됐던 선거법 개정안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귀태(鬼胎)’ 선거 제도였다. 그 제도로는 한국 선거의 왜곡을 바로잡는 것이 불가능하다.
핵심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자기 파괴’ 위험이 크고, 둘째 정치 개혁을 명분으로 했지만 철저하게 정치 공학적으로 접근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선거제도 하에서는 위성정당(satellite party) 혹은 미끼정당(decoy party)이 만들어져 정당 분할로 정당정치가 파괴되고 선거 민의를 왜곡시키면서 오히려 거대 양당체제를 강화하게 한다. 즉 선거제도 개혁의 역설이다. 민주당은 애당초 선거제도 개혁엔 관심이 없었다. 오직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신설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군소 친여 야당들을 들러리로 세웠고, 군소정당에 유리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거래의 고리로 삼아 보수 야당의 동의 없이 게임의 룰인 선거법을 밀어붙였다.
통상 선거제도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평가된다. 첫째는 표의 ‘비례성’과 ‘대표성’. 민의가 의석수에 제대로 반영되도록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채택했다면 그 취지에 맞게 비례 의석을 대폭 늘려야 한다. 가령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는 독일의 경우, 지역구(299명)와 비례구(299명)의 비율이 같다. 그런데 이번 개정안은 현재의 비례대표 47석 중 30석에 한해 연동형 비례대표제도(연동률 50%)를 도입했다. 이런 기형적인 괴물 선거제도로 비례성을 강화한다는 것은 난센스였다.
◇ 권력구조와 선거제도의 부조화
둘째로 선거제도가 적합성을 가지려면 제도의 ‘조화성’이 중요하다. 무엇보다 권력구조와 선거제도 간의 조화성은 국정운영의 안정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선진 의회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대통령제 국가에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채택한 나라는 단 한 곳도 없다. 반면 독일, 일본, 뉴질랜드 등 대부분의 내각제 국가에서는 연동형 또는 병립형 비례대표제를 채택한다. 비례대표제 선거제도에서는 다당제가 만들어지기 쉽고 이를 토대로 연정과 연립내각이 보편화해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제를 채택하는 나라에서 다당제를 도입해 여소야대를 고착화하면 오히려 국정 운영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지난 20대 국회 패스트트랙 정국과 조국 사태에서 집권당과 군소 정당들의 정의롭지 못한 결탁으로 오히려 정치 양극화가 심화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뒤베르제의 법칙’(Duverger’s law)이란 게 있다. 선거제도의 핵심 요소인 ‘선거구 크기’(electoral magnitude)는 ‘선거구당 의원 정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한 선거구에서 몇 명의 의원을 선출하는가를 의미한다. 또 다른 요소로 ‘당선자 결정 방식’(electoral formula)이 있는데 한 표라도 더 많이 얻으면 당선되는 다수대표제와 정당이 얻은 득표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는 비례대표제로 구분된다. 뒤베르제는 소선거구제-다수제는 양당제를, 비례대표제는 다당제를 산출한다고 보고, 이것을 ‘진정한 사회학적 법칙’이라고 했다. 이 법칙에 따르면 대통령제는 양당제, 내각제는 다당제를 택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이 함축되어 있다.
셋째는 국민의 ‘투표권’ 보장이다. 유권자들은 내가 던진 표가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기준으로 투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처럼 지역구 후보에게 1표, 정당에 1표를 던지는 ‘1인 2표제’를 채택할 경우 유권자들은 종종 ‘전략적 분리 투표’를 한다. 가령 지역구에선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에게, 정당 투표 때는 자신이 선호하는 정당에 투표한다. 그런데 개정된 선거법에서 비례대표를 배정하는 계산 방식이 너무 복잡해서 자신의 표가 어느 정당, 어느 후보를 직접 찍는지 알 수 없게 되어 국민의 투표권이 침해될 수 있다.
◇ 반칙과 꼼수를 부른 정치 거래
결론적으로 기형적인 한국형 준연동형 비례제는 표의 비례성을 보장하지 못하고 제도의 조화성도 무시되며 국민의 투표 선택권이 침해되는 치명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이런 한계를 더욱 부추기는 요소는 비례 전담 위성정당 창당이다. 미래통합당이 선거법 개정안의 허점을 파고들어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을 창당하자 민주당은 이에 맞서 비례대표 연합정당 창당을 주도하고 나섰다. 당초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비례대표 정당은 정치를 장난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비판했다가 별안간 “의석을 도둑맞게 생겼다”면서 찬성 입장을 취했다. 친문(친문재인)계 인사들은 “문재인 대통령 탄핵을 막기 위해서라도 비례민주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떤 논리를 들이대도 준연동형 비례제를 함께 추진한 정의당을 토사구팽하는 민주당의 ‘반칙과 꼼수’는(심상정 정의당 대표의 표현) 정당화할 수 없다. 특히 민주당이 자당의 비례대표 후보를 비례대표 연합정당의 후순위에 배치하겠다고 공언한 건 일종의 ‘정당 매수 행위’다. 공직선거법 47조 2항은 선거인단의 민주적 투표 절차에 따라 비례대표 후보를 결정하도록 했다. 그런데 민주당이 사전에 법적으로 엄연히 다른 정당인 연합정당 비례대표 후보 순위에 관여하겠다는 것은 선거법 위반 요소가 크다.
연합정당에 ‘파견’된 각 당 비례대표 후보들이 선거 후 각자의 소속 정당으로 복귀하는 것 역시 유권자를 기만함과 동시에 명백한 정당정치 파괴 행위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최근 법원은 민생당 전신인 바른미래당에서 이른바 ‘셀프 제명’을 의결한 비례대표 의원 8명에 대한 제명 취소를 요구하는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이번 결정으로 비례대표 위성 정당의 당선자들은 합당이나 해산이 아니고서는 원래의 정당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미래한국당과는 달리 비례연합 참여 정당들의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단언컨대 선거 제도의 기본 원칙들이 무시된 채 지난해 음습한 정치 거래로 도입된 한국형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보완이 아니라 폐기가 정답이다.
김형준 / 명지대 교수·전 한국선거학회 회장
문화일보
■ 세줄 요약
‘자기 파괴’를 부르는 선거제도 : 범여권이 밀어붙인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귀태(鬼胎)’ 선거제도. 그 제도로 선거 왜곡을 바로잡는 건 불가능함. 제도가 안고 있는 ‘자기 파괴’의 위험이 크고, 철저하게 정치 공학적으로 접근했기 때문.
권력구조와 선거제도의 부조화 : 이 둘의 조화성은 국정운영의 안정과 밀접하게 연계됨. ‘뒤베르제의 법칙’에 따르면 소선거구제는 양당제를, 비례대표제는 다당제를 산출하는 경향이 있음. 이는 대통령제는 양당제, 내각제는 다당제가 효율적이라는 것을 함축.
반칙과 꼼수를 부른 정치 거래 : 개정 선거법은 비례대표를 배정하는 계산 방식이 너무 복잡해 유권자의 투표권을 침해.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소수정당의 국회 진입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처리됐지만, 현실은 거대 양당체제를 강화하는 개혁의 역설을 보여줌.
■ 용어 설명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지난해 범여권이 처리한 선거법 개정안 핵심. 국회 의석에서 비례대표를 47석으로 고정하되 이 중 30석에만 ‘연동형 캡(cap)’을 적용해 연동률 50%의 비례대표제를 적용하는 것.
‘위성정당’은 다당제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 존재하는 명목상의 정당. ‘미끼정당’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아래에서 거대정당이 비례대표 의석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급조한 일종의 ‘가짜정당’을 말함.